INICIAR SESIÓN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 건 퇴근 직전이었다.
이재는 화면을 잠시 내려다보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윤이재 씨.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번호가 뜰 때마다 떠올렸던 목소리였다.
막상 잊고 있으니 왔다.
“강태혁 씨?”
―네.
“제 번호도 알아냈네요.”
―네.
당연하다는 투였다.
입국 날짜까지 알아낸 사람이었다. 연락할 필요가 생겼다면 휴대폰 번호쯤은 진작 알아뒀을 것이다.
“무슨 일이세요?”
―지난번에 확인해보겠다고 했던 거.
이재의 손이 멈췄다.
―확인했습니다.
며칠 동안 제법 멀어진 줄 알았던 일이 그 한마디로 다시 가까워졌다.
“그래서요?”
―잠깐 봅시다.
“오늘요?”
―네.
이재는 시간을 확인했다.
“지난번 그 카페에서 봐요. 몇 시쯤 오실 수 있는데요?”
―바로요.
“……벌써요?”
―근처라서.
통화가 끊겼다.
이재는 까맣게 변한 화면을 잠시 내려다봤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근처에 있다고 하지.
여전히 설명은 필요한 만큼만 하는 사람이었다.
***
카페에 들어서자 강태혁이 보였다.
지난번과 같은 자리였다.
재킷은 옆에 벗어두었고, 셔츠 소매는 두어 번 걷혀 있었다.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서류철이 놓여 있었다.
이재는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
“일찍 왔네요.”
“근처에 볼일이 있었습니다.”
태혁이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제야 이재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이 두 개라는 걸 알아챘다.
태혁 앞에는 커피. 그리고 제 앞에는 처음 보는 잔 하나.
“이거 뭐예요?”
“캐모마일.”
“제 거예요?”
“아니면 제 앞에 뒀겠죠.”
이재가 그를 봤다.
“제가 이거 마신다고 했어요?”
“안 했죠.”
“그런데 왜 시켰어요?”
태혁은 서류철을 열었다.
“늦었잖아요.”
“그래서요?”
“카페인 먹고 잠 못 자면 피곤하니까.”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재는 제 앞에 놓인 잔을 내려다봤다.
제법 멋대로였다.
“저 잘 자는데요.”
“다행이네요.”
정작 시켜놓은 사람은 별 관심도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재는 캐모마일을 제 앞으로 끌어왔다.
“그래서 뭘 확인했는데요?”
태혁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첫 번째 피해자를 다시 만났습니다.”
“직접요?”
“네.”
이재가 종이를 받아들었다.
“지난번에 윤이재 씨가 판단하고 오라고 했잖아요.”
그 말에 시선이 올라갔다.
―그럼 판단하고 오셨어야죠.
화가 나서 한 말이었다.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요?”
“판단하고 왔습니다.”
태혁이 말했다.
“우연은 아닌 것 같아요.”
이재의 손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
첫 번째 피해자는 혼자 사는 육십 대 여성이었다.
검침원이라고 찾아온 남자를 별 의심 없이 집 안으로 들였고, 이상함을 느낀 건 그다음이었다.
“처음에는 단순 침입 시도로 봤습니다.”
“지난번에도 들었어요.”
“그때 빠진 게 있었습니다.”
태혁이 진술서 한 부분을 짚었다.
“집에 들어간 뒤 검침은 아예 안 했답니다.”
“그럼 뭘 했는데요?”
“집 안을 돌아봤어요.”
손가락이 다음 줄로 내려갔다.
“가족사진을 봤고.”
그다음.
“사진 속 남자가 아들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재의 눈이 진술서를 따라 움직였다.
“같이 사는지.”
또 한 줄.
“언제 들어오는지도.”
태혁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재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두 번째 피해자가 했다는 진술과 같았다.
“둘 다 물어봤어요?”
“네.”
“똑같이?”
“거의.”
“……도둑이면 물어볼 수도 있잖아요. 집에 언제 사람이 들어오는지.”
“그럴 수 있죠.”
태혁은 너무 쉽게 동의했다.
그래서 오히려 다음 말이 기다려졌다.
태혁은 서류철에서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앞의 것보다 글자가 흐렸다.
상단에 찍힌 날짜는 십 년 전이었다.
“이건요?”
“십 년 전 피해자 진술입니다.”
이재는 종이를 받아들었다.
몇 줄을 내려가던 눈이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거실에 비치된 가족사진을 확인.」
그 아래.
「사진 속 가족의 동거 여부 및 귀가 시간을 질문함.」
이재는 방금 읽은 진술서로 시선을 옮겼다.
가족사진.
같이 사는 사람.
귀가 시간.
순서까지 비슷했다.
“……십 년 전에도 이랬어요?”
“네.”
“다른 집에서도?”
“비슷한 진술이 더 있습니다.”
이재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반박할 거리를 찾았다.
“모방범일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고.”
“십 년 전 사건 유명했으니까. 기사 보고 따라 했을 수도 있는 거고.”
“가능합니다.”
“그런데 왜 우연이 아니라고 해요?”
“모방도 우연은 아니니까.”
이재가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기분 나쁘게도.
“다만 이 내용은 당시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이재가 다시 종이를 봤다.
“가족사진 보는 거랑 이런 질문들이요?”
“네.”
그럼 얘기가 조금 달랐다.
기사 몇 개 읽고 흉내 낸 사람이 우연히 맞혔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
“그럼 어떻게 알았는데요?”
“그걸 알아내야죠.”
역시 아직 답은 없었다.
태혁이 오래된 진술서를 거둬들였다.
“지금 확실한 건 하나예요. 누군가 십 년 전 사건을 알고 있고, 의도적으로 비슷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부 가능성뿐이었다.
우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래서 이재는 그 가능성을 자기 삶에 들여놓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하나가 사라졌다.
우연.
“그래서 또 신변보호 얘기하려고요?”
“아니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안 해요?”
“싫다면서요.”
“…….”
“두 번 말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태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커피를 들었다.
이재는 그 얼굴을 잠시 봤다.
듣기는 했구나.
그때는 자기 할 말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뭐가.”
“말이 통하는 사람이어서.”
“지난번엔 사람 취급도 안 하더니.”
이재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제가 언제요?”
“비슷했습니다.”
“피해의식 아니에요?”
“직업상 그런 건 별로 없습니다.”
이재는 캐모마일을 한 모금 마셨다.
말이 통한다는 평가는 조금 보류하기로 했다.
“그럼 저한테 이걸 알려주는 이유는요?”
“알고 싶다고 했잖아요.”
이재가 그를 봤다.
―그건 제가 결정할게요.
며칠 전 자신이 한 말이었다.
“알고 결정하겠다고 했으니까.”
이번에는 그 말을 지키러 온 모양이었다.
이상한 데서는 또 정확했다.
“그럼 제가 위험한 건 아니죠?”
“모릅니다.”
“그럼 됐네요.”
“모른다고 했지, 아니라고는 안 했는데요.”
이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꼭 그렇게 말해야 돼요?”
“아니라고 했다가 위험해지면 어떡하려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마음에는 안 들었다.
“그 사람은 죽었잖아요.”
이재가 말했다.
“네.”
“그건 확실하고요?”
“기록상으로는요.”
“기록상?”
“당시 신원 확인 절차에 문제는 없었습니다. 사망 처리도 정상적으로 됐고.”
이재는 캐모마일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이건 그 사람이 한 게 아니네요.”
“그렇게 보는 게 맞겠죠.”
“그런데 하는 짓은 비슷하고.”
“네.”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누군가가 죽은 사람의 방식을 따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더 나은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형사님은 원래 그렇게 의심이 많아요?”
“직업이 이래서.”
“피곤하겠네.”
“남 걱정할 때는 아닐 텐데.”
“저 안 위험하다면서요.”
“그런 말 안 했는데.”
이재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진짜 재수 없어.”
말이 나간 뒤에야 아차 싶었다.
태혁이 그녀를 봤다.
이재는 모른 척 캐모마일을 마셨다.
이미 늦었다.
“이제 좀 편해졌나 보네.”
“……뭐가요?”
“말 놨잖아요.”
“혼잣말이었어요.”
“다 들리던데.”
이재는 대꾸하지 않았다.
못 들은 걸로 해주면 어디가 덧나는 인간인가 싶었다.
태혁은 더 놀리지 않고 서류를 챙겼다.
“오늘은 여기까지예요.”
“다음에 또 확인되는 거 있으면요?”
태혁의 손이 잠시 멈췄다.
“연락할게요.”
“회사로 오지는 마요.”
“알아요.”
이재가 그를 봤다.
그 대답도 지나치게 빨랐다.
“그건 또 기억하네요.”
“기억력 좋습니다.”
“편하겠네요.”
“직업상.”
아까도 들은 대답이었다.
이재는 작게 혀를 찼다.
***
카페를 나왔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두 사람은 입구 앞에서 멈췄다.
태혁은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조심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전 자신이 거절한 걸 기억한다는 사람답게 이번에는 딱 필요한 말만 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무슨 일.”
“평소랑 다른 일.”
상당히 넓은 범위였다.
“그걸 제가 어떻게 구분해요?”
“애매하면 해요.”
“별일 아니면요?”
“그건 내가 판단할게요.”
이재가 그를 바라봤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문득 십 년 전이 떠오를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생각하지 않았다.
“알겠어요.”
태혁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돌아섰다.
이재도 반대편으로 걸었다.
며칠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서 정말 아무 일도 아닌 줄 알았다.
강태혁이 다시 찾아오기 전까지는.
이제는 아니었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건 확실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십 년 전 그 사람이 했던 일을 알고 있었다.
아무도 알려준 적 없는 것까지.
그리고 지금.
그걸 다시 하고 있었다.
직원이 두 사람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창가를 따라 낮은 조명이 길게 이어진 곳이었다. 이재가 먼저 걸었고, 태혁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몇 걸음인데 이상하게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검은 원피스는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노출이 많은 것도 아닌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느다란 몸의 선이 고스란히 따라 움직였다.태혁은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오늘따라 서울 야경이 볼 만했다.자리에 도착하자 직원이 이재의 의자를 빼주었다. 이재가 앉고 태혁도 맞은편에 자리했다.메뉴판이 놓였다.이재는 바로 펼쳤지만 태혁은 한 박자 늦었다.“여기 괜찮죠?”“네.”“메뉴는요?”대답은 하는데 정작 메뉴판은 보지 않았다.이재가 눈을 들었다.태혁의 시선이 자신에게 있었다.“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아뇨.”그제야 태혁이 메뉴판을 펼쳤다.“좋은데.”“근데 왜 안 봐요?”“보고 있었습니다.”“나를 보고 있었잖아요.”태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이재가 웃었다.“뭐 먹고 싶은데요?”“윤이재 씨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내가 사니까?”“그건 아니고.”“그럼?”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태혁은 물잔만 들었다.뭐야.아까부터.이재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리면서도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걸 느꼈다.그러고 보니 이쪽만 평소와 다른 것도 아니었다.오늘따라 반듯한 셔츠에, 평소보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가까이 섰을 때 느꼈던 향도 어제보다 조금 선명했다.괜히 옷장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은 게 자기뿐은 아닌 모양이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 전부터 붕 떠 있던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강태혁 씨.”“네.”“향수 뿌렸어요?”“네.”대답이 너무 순순했다.“왜요?”태혁이 눈을 들었다.“나는 향수 뿌리면 안 됩니까?”“아니, 그런 건 아닌데.”“그럼 됐네요.”“그게 아니라…….”이재는 말을 고르다 웃었다.“그런 거 성가셔할 것 같아서.”“평소에는 그렇죠.”평소에는.이재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에서
일요일 아침, 이재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잠에서 깼다.경찰이었다.전날 성림동에서 발생한 사건과 관련해 당분간 주거지 인근 순찰을 강화할 예정이며, 건물 보안팀과도 협조를 마쳤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상한 사람을 보거나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며 담당자 번호까지 남겼다.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온 이재는 커튼을 걷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도로 위로 차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산책하는 사람도 보였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런데 이제는 알고 있었다.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라는 걸.아버지가 보낸 사람들도 어젯밤부터 근처에 있었다. 이재가 불편하지 않도록 건물 안팎에서 거리를 두고 교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창가에 서 있던 이재의 시선이 길 건너편에 멈췄다.어제부터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검은색 세단이 한 대 있었다.설마 저건가.이재는 잠깐 바라보다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사람 확인했어요. 경찰에서도 연락 왔고.]조금 고민하다 한 줄을 덧붙였다.[나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답장은 금방 왔다.[알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아빠 말 좀 들어.]이재의 입술이 슬쩍 비뚤어졌다.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네네.]보내놓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이재의 손가락이 멈췄다.오늘 저녁 일곱 시.어제 잡은 약속이 떠올랐다.[그건 안 돼.]이번에는 답장이 없었다.이재는 잠깐 기다리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어차피 조금 있으면 전화가 올 것이다.잔소리 들을 준비나 해야겠다.***십 년 전 기록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태혁은 책상 위에 펼쳐놓은 수색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서진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새벽 두 시 십칠 분.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성림대교 인근에서 사고가 났고, 차량은 교량 진입부 난간을 들이받은 채 발견됐다.차량 내부에서는 상당량의 혈흔이 나
눈을 떴다.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이재는 한동안 소파에 누운 채 눈만 깜빡였다. 블라인드 사이로 오후의 햇빛이 길게 들어와 거실 바닥에 걸쳐 있었다.이렇게 낮에 저절로 잠든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십 년 전 사건 이후 잠은 이재에게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피곤하다고 자연스럽게 잠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약을 먹는 날이 많았고, 어쩌다 잠들어도 작은 소리에 쉽게 깼다.낮잠은 더더욱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할 만큼 깊게 잤다.이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맑았다. 몸에 오래 눌어붙어 있던 피로가 조금 걷힌 것처럼 개운했다.낮잠이 원래 이렇게 개운한 거였나.그 순간 무언가가 허벅지 아래로 미끄러졌다.검은 재킷.“…….”강태혁 거였다.아까 소파 등받이에 걸어놓았던.소파에 기대 휴대폰을 보다가 살짝 잠이 든 모양이었다. 태혁은 식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고, 자신은 정말 잠깐만 눈을 감으려고 했다.정말 잠깐이었는데.이재는 테이블 위 휴대폰을 집었다.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다.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거실을 둘러봤다.식탁이 비어 있었다.서류도 없었다.“……강태혁 씨?”대답이 없었다.조금 전까지 느긋하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갔나.이재는 소파에서 급하게 일어나 넓은 거실을 가로질렀다.현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바닥을 내려다봤다.강태혁의 신발이 그대로 있었다.다행이다.그 생각을 한 순간 잠이 덜 깬 발이 엉켰다.“어…….”몸이 옆으로 기울었다.넘어지기 거의 직전이었다. 이재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받쳤다. 거의 동시에 다른 손이 팔뚝을 잡아 세웠다.“조심해요.”귓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이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고개를 들자 태혁의 얼굴이 보였다.가까웠다.허리를 받친 손바닥의 온기가 얇은 옷 너머로 선명했다. 이재는 그것을 의식한 순간 오히려 움직이지 못했다.시선이 마주쳤다.잠이 덜 깬 탓인지 머리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였
태혁은 정말 남았다.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어두고,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던 사진부터 다시 봉투에 넣었다. 서진우의 이름이 가장 마지막으로 사라졌다.그 뒤로는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태혁은 식탁 한쪽에 가져온 서류를 펼쳐놓고 휴대폰으로 몇 통의 전화를 돌렸다.이재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둘 사이에는 식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태혁은 긴 다리를 의자 아래로 조금 접어 넣은 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혼자 쓰던 식탁에 덩치 큰 남자가 마주 앉아 있으니, 여섯 명은 넉넉히 앉는 테이블이 이상하게 좁아 보였다.“차량은?”태혁이 낮게 물었다.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거기서 끊겼으면 반경 넓혀. 도보로 들어왔다고 도보로 빠졌다고 생각하지 말고.”일할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이재는 턱을 괸 채 태혁을 바라봤다.생각보다 더 차가웠다.자신과 이야기할 때도 살가운 남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썹이 움직이거나,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거나, 아주 가끔은 웃기도 했다.지금은 달랐다. 표정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필요한 것만 물었고, 상대가 보고하는 동안에는 말을 끊지 않았다. 듣고 판단한 뒤 곧바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피해자 금융 기록은?”태혁의 손이 서류 한 장에서 멈췄다.“최근 것만 보지 말고 첫 사건 전까지 넓혀.”목소리에도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새벽부터 살인 현장에 있었고, 몇 시간 전에는 십 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연쇄살인범의 물건까지 발견했다.그런데도 흐트러지는 게 없었다.십 년 전에는 그저 어른처럼 보였다.열여덟 살의 자신에게 스물다섯은 충분히 그런 나이였으니까.지금 보니 꽤…….이재의 시선이 태혁의 손으로 내려갔다.서류를 넘기는 길고 반듯한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이 입술 아래를 한번 눌렀다.생각은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뭘 그렇게 봐요.”이재의 어깨가 움찔했다.태혁은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뭐, 뭐가요?”그제야 태혁이 눈을 들었다.시선이 정확하게
성림동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주말 아침의 주택가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높은 담장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 사이로 수입차 몇 대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골목 어귀에는 새벽 배송을 마친 냉장 탑차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었다. 운동복 차림으로 개를 산책시키던 남자가 폴리스라인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가 경찰의 시선을 받고 다시 움직였다.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의 아침이었다.그 지나치게 반듯한 풍경 한가운데 경찰차 세 대가 서 있었다.태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현장으로 걸었다.“팀장님.”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준호가 다가왔다.“신고는?”“아침 여섯 시 십칠 분. 피해자 동생이 발견했습니다. 오늘 같이 등산 가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왔다가.”“피해자 혼자 살고?”“네. 오십팔 세 남성. 이혼했고 자녀는 따로 삽니다.”태혁이 덧신을 받아 신었다.“출입문.”“파손 없습니다.”대문도, 현관문도 멀쩡했다. 잠금장치에 억지로 손댄 흔적도 없었다.태혁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벌써 익숙한 시작이었다.“CCTV는.”“수빈이가 보고 있습니다. 집 앞 하나, 골목 진입로 두 개 더 확보 중이고요.”태혁이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서 거실까지 이어진 바닥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신발장도 닫혀 있었고 넘어지거나 깨진 물건 하나 없었다. 이 집에서 밤사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만 떼어놓으면, 누군가 강제로 들어왔다는 흔적부터 찾기가 어려웠다.그리고 거실 끝.식탁 옆 바닥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하얀 장갑을 낀 감식반 직원들이 주변을 촬영하고 있었다.준호가 목소리를 낮췄다.“정확한 사인은 부검 들어가야 합니다. 현재는 경부 쪽 손상으로 보고 있고, 사망 추정 시각은 어젯밤 열한 시에서 오늘 새벽 두 시 사이입니다.”태혁은 시신보다 먼저 주변을 봤다.창문.현관.식탁.가구 배치.그리고 거실장 위 액자.시선이 멎었다.“준호야.”“네.”“저거 원래 위치 확인해.”준호도 곧 액자를 봤다.피해자와 성인
본사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횟집 안은 이미 제법 시끄러웠다.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이 칸막이 너머까지 뒤섞였고, 처음에는 정갈했던 테이블도 빈 술병과 접시로 제법 어수선해져 있었다.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 참석한 팀 회식이었다.회장 딸이랍시고 첫 회식부터 술까지 빼면 사람들이 더 어려워할 것 같아 오는 잔을 적당히 받아 마셨는데, 문제는 그 적당히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는 데 있었다.“윤 대리님.”옆자리 과장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진짜 미국에서 십 년을 있었어요?”“네.”“근데 한국말을 진짜 잘하시네.”이재가 잠시 과장을 바라봤다.“……한국인이니까요.”맞은편의 다은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과장님.”“어?”“진짜 장난 아니고, 똑같은 질문 세 번째 하신 거 알아요?”과장이 눈을 크게 떴다.“내가? 진짜?”“네.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또옥같았어요.”“야, 김다은. 너 취한 거 아냐?”이재가 웃음을 참으며 둘을 번갈아 봤다.“과장님이 다은 씨보다 조금 더 취한 것 같기는 해요.”“거봐요.”다은이 냉큼 이재 쪽으로 붙었다.과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둘이 벌써 한 편을 먹었네.”이재는 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입사 초기만 해도 이재가 출근하면 괜히 모니터부터 확인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농담에 웃고, 취한 얼굴까지 보여줄 정도는 됐으니까.“자자, 슬슬 2차 가실 분들은 가시죠.”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강요 아닙니다. 집에 갈 사람은 집에 가고. 신나게 놀 사람들은 더 놀고.”누군가 바로 받았다.“팀장님이 제일 신나게 놀고 싶으신 것처럼 들리는데요.”“내가 언제.”웃음이 터지는 틈에 이재는 가방을 챙겼다.다은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대리님 가세요?”“네. 저는 여기까지.”“저는 어떡하죠. 사회생활을 좀 하긴 해야 할 것 같고……. 따라가면 또 취할 것 같고.”“가서 안 취하면 되죠.”“그게…… 될까요?”“그걸 해내는 것도 사회생활 능력이에요.”다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