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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Autor: 홍피코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9-03 12:16:51

첫날은 조금 신경이 쓰였다.

업무 중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발신자를 확인했다.

강태혁이 자신의 번호를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입국 날짜까지 알아낸 사람이었다. 연락할 필요가 생긴다면 휴대폰 번호쯤은 진작 알아뒀을 것 같았다.

오전에는 카드사였고, 점심 무렵에는 택배 기사였다.

오후 네 시쯤 걸려온 모르는 번호는 보험 광고였다.

“괜히 받았네.”

이재는 번호를 차단하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날은 더 이상 전화가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는 확인해야 할 자료가 책상에 세 개나 쌓여 있었다.

휴대폰 따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윤 대리님, 잠깐만 봐주실 수 있어요?”

김다은이 노트북을 들고 다가왔다.

입사 3년 차 사원. 이재보다 세 살 어린 후배였다.

처음 인사를 나눴을 때는 회장 딸이라는 사실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인사 한번 하는 데 온몸을 다 쓰던 사람이기도 했다.

요 며칠은 조금 나아졌다.

조금.

“뭔데요?”

“부산 쪽에서 보내준 실적 자료요. 아무리 봐도 숫자가 안 맞아서.”

“봐봐요.”

다은이 옆으로 노트북을 밀었다.

호텔별 객실 가동률과 부대시설 매출을 합산한 자료였다. 이재는 화면을 내리다가 한곳에서 손을 멈췄다.

“여기 기준 월이 다르네요.”

“어디요?”

“객실은 7월인데 F&B가 6월이에요.”

다은이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잠시 뒤 작은 탄식이 나왔다.

“아…….”

“그래서 안 맞았나 봐요.”

“저 이거 십오 분 동안 봤는데.”

진심으로 허탈한 얼굴이었다.

이재가 웃었다.

“십오 분이면 그래도 양호하네요.”

“위로해주시는 거예요?”

“네. 나름.”

다은이 작게 웃었다.

이재는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

“객실이랑 F&B 둘 다 7월 기준으로 다시 요청해요. 카지노 매출도 같은 기준인지 확인하고.”

“알겠습니다.”

노트북을 챙기던 다은이 덧붙였다.

“감사합니다, 윤 대리님.”

“다은 씨.”

“네?”

“나한테 말할 때마다 그렇게 긴장 안 해도 돼요.”

“제가요?”

본인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이재가 다은을 잠시 봤다.

“지금도 내가 꼭 면접관 같아요.”

“아…….”

다은이 민망한 듯 웃었다.

“죄송, 아니. 그게…… 처음에는 좀 그랬어요.”

“뭐가요?”

잠깐 망설이다가 다은이 솔직하게 말했다.

“회장님 따님이시니까요.”

“아.”

그건 이해했다.

이재도 입장이 반대였으면 신경은 쓰였을 것이다.

“그럴 수 있죠.”

“지금은 처음보다는 괜찮아요.”

“다행이네.”

“진짜예요.”

“알았어요.”

이재가 웃으며 손짓했다.

“자료부터 받아와요. 이러다 우리 둘 다 야근하겠어.”

“아, 네.”

다은은 자리로 돌아갔고, 이재도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한국에서 일을 시작한 지 이제 열흘 남짓이었다.

사내 시스템도 아직 낯설었고 사람들의 이름과 직급도 외우는 중이었다. 그에 비하면 업무는 훨씬 익숙했다.

미국에서 일했던 호텔과 규모도, 운영 방식도 달랐지만 결국 확인해야 할 것은 비슷했다.

객실이 얼마나 찼고, 얼마를 벌었으며, 예상과 실제 사이에 생긴 차이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이재는 숫자를 들여다보는 일이 좋았다.

숫자는 적어도 이유 없이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다.

찾아내기만 하면 틀린 이유도 대부분 설명할 수 있었다.

사람이나 기억은 그렇지 않았다.

후자는 특히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재는 설명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는 법을 익혔다.

꽤 일찍.

***

점심시간이 되자 팀원 여섯 명이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오늘 뭐 먹죠?”

누군가 묻자 잠깐 정적이 생겼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선 몇 개가 이재에게 향했다.

이재가 뒤늦게 알아차렸다.

“왜 절 봐요?”

“윤 대리님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저요?”

“네.”

이재는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딱히 없는데.”

“그럼…….”

다시 조용해졌다.

사흘째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재는 이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저 때문에 메뉴 못 정하시는 거면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누군가 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고.”

“다들 아까부터 저만 보는데요.”

곁에 있던 다은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조금 그런 것 같아요.”

“김다은.”

선배 하나가 작게 타박했다.

“왜요. 윤 대리님도 다 아시는 것 같은데.”

이재는 다은 쪽을 보다가 웃었다.

“오늘 아침보다 많이 편해졌네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재가 먼저 내리며 말했다.

“저 진짜 아무거나 잘 먹어요. 메뉴는 그냥 먹고 싶은 사람이 먼저 말하는 걸로 해요.”

그러자 뒤에서 다은이 냉큼 말했다.

“저 칼국수요.”

이재가 돌아봤다.

“좋아요. 오늘은 다은 씨 승.”

“이런 시스템이었어요?”

“방금 만들었어요.”

결국 근처 칼국숫집으로 향했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주말 계획으로 넘어갔다.

결혼식이 있다는 사람도 있었고, 부모님 집에 간다는 사람도 있었다.

“윤 대리님은요?”

“저는 영화 보려고요.”

다은이 물었다.

“뭐 보세요?”

“아직 안 정했어요. 주말에 극장 가서 시간 맞는 걸로 보려고.”

“혼영 좋아하세요?”

“네. 자주 봐요.”

“의외세요.”

이번에는 다른 직원이었다.

이재가 그쪽을 봤다.

“뭐가요?”

“윤 대리님 같은 분은 주말에도 약속 많고 그럴 것 같아서요.”

말을 하고 나서 조금 늦게 눈치를 보는 기색이 보였다.

이재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저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요?”

“아니, 그게…….”

“저도 궁금한데.”

다은까지 끼어들었다.

직원이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그냥 사람들 사이에 항상 계실 것 같은 느낌?”

“아.”

이재는 그제야 이해했다.

“전 반대예요.”

“진짜요?”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는데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해요. 영화는 특히 혼자 보는 게 편하고.”

다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좀 알 것 같아요. 누구랑 가면 영화보다 약속이 되잖아요.”

“맞아요.”

“끝나고 밥 먹어야 하고.”

“카페도 가야 하고.”

“카페 가서는 영화 후기까지 말해야 하고.”

둘의 말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두 분 다 인간관계를 되게 피곤해하시네요.”

맞은 편 직원이 말했다.

이재가 웃었다.

“아니, 사람 좋아한다니까요.”

“설득력이 없는데요.”

음식이 나오면서 이야기는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

다은은 이번 달 카드값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고, 옆자리 직원은 그건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 아니냐고 했다.

“전략적 회피예요.”

다은이 당당하게 말했다.

“숫자는 안 본다고 없어지지 않아요.”

이재가 말하자 다은이 바로 받아쳤다.

“윤 대리님은 숫자 보는 게 일이니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거예요.”

“카드값도 제 업무 영역은 아닌데.”

“그러면 제 편 좀 들어주세요.”

처음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진 대화 속에서 점심시간이 지나갔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는 아무도 이재에게 어디로 갈지 먼저 묻지 않았다.

그 정도 변화면 만족스러웠다.

***

“이 수치, 근거가 뭐죠?”

오후 회의에서 팀장이 물었다.

회의실 화면에는 이재가 작성한 다음 분기 객실 수요 전망이 떠 있었다.

“작년 동기 실적만 적용한 수치는 아닙니다. 올해 예약 리드타임이 짧아졌고 해외 OTA 유입 비중이 올라가서 그 부분까지 반영했습니다.”

팀장이 화면을 한번 훑었다.

“그래도 상승 폭이 큰데.”

“저도 그래서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재가 다음 페이지를 띄웠다.

“지역 행사 일정 제외하고 다시 계산해봤는데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지금 수치도 그 결과에서 조금 낮춘 거고요.”

“근거 자료는?”

“뒤에 있습니다.”

페이지를 두 장 넘기자 표가 나왔다.

팀장이 잠시 화면을 바라봤다.

“있네.”

“네.”

“이걸 왜 뒤에 넣었어요?”

“본문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요.”

“내가 물어볼 거라는 생각은 했죠?”

이재는 잠시 생각했다.

“네.”

“그럼 앞으로 빼요.”

“알겠습니다.”

짧고 명확했다.

나머지는 큰 수정 없이 넘어갔다.

회의가 끝난 뒤 다은이 이재와 나란히 걸었다.

“대리님은 진짜 긴장 안 하시는 것 같아요.”

“했어요.”

다은이 바로 쳐다봤다.

“거짓말.”

“왜요?”

“저였으면 팀장님이 ‘근거 자료는?’ 하는 순간부터 제가 잘못 태어난 것까지 반성했을 것 같은데.”

이재가 웃었다.

“그 정도예요?”

“네. 머릿속으로 퇴사까지 했을 듯요.”

“자료가 있는데 뭐가 문제예요.”

“그러니까 그게 멋있는 거예요. 물어볼 거 예상하고 다 준비해두신 거.”

다은이 진지하게 말했다.

“저도 다음에는 그렇게 해야겠어요.”

이번에는 이재가 조금 의외라는 듯 다은을 봤다.

장난으로만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럼 다음 보고서는 다은 씨가 먼저 준비해봐요.”

“갑자기요?”

“배우고 싶다며.”

다은이 입을 다물었다.

“취소해도 돼요?”

“늦었어요.”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웃었다.

자리로 돌아오자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 하나가 떠 있었다.

아빠.

이재가 전화를 걸었다.

―회의였어?

“응. 방금 끝났어.”

―근데 왜 이렇게 피곤한 목소리야.

“오늘 회의가 좀 많았어.”

―저녁은 먹었고?

“아직 여섯 시인데.”

―같이 먹을까?

이재가 시계를 확인했다.

“오늘?”

―약속 있어?

“없어.”

―그럼 끝나고 와. 장소는 보내주마.

“기사님은 보내지 마.”

―차 가져갔어?

“응.”

잠깐 정적이 생겼다.

이재는 다음에 나올 말을 이미 알았다.

―늦게 운전하지 말라니까.

“아빠, 나 운전해서 퇴근해.”

―그거랑 같아?

“뭐가 다른데?”

―됐어. 끝나면 바로 와.

무슨 논리인지는 끝내 듣지 못했다.

“알았어.”

―운전 조심하고.

“응.”

통화를 끊고 휴대폰을 내려놓던 이재의 손이 잠깐 멈췄다.

―저 이제 열여덟 살 아니에요.

―알아요.

며칠 전 강태혁에게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한쪽은 밤에 운전하지 말라고 했고, 다른 한쪽은 혼자 다니지 않는 편이 좋다고 했다.

둘 다 자신이 스물여덟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실제로 믿느냐는 별개의 문제인 모양이었다.

이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업무 화면을 띄웠다.

아직 답해야 할 메일이 네 통이나 남아 있었다.

***

윤정호는 예순을 앞둔 호텔·레저 그룹의 회장이었다.

회사에서는 표정 하나 읽기 어렵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었지만, 이재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조금 달랐다.

딸 앞에서도 다정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대신 해두는 쪽이었다.

집을 알아봐두거나, 차를 보내거나, 밥을 먼저 주문해놓는 식으로.

이재가 식당에 도착했을 때도 그랬다.

정호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언제 왔어?”

“얼마 안 됐다.”

이재는 그의 앞에 놓인 물잔을 봤다.

반쯤 비어 있었다.

“많이 기다리셨겠네.”

“십 분쯤.”

“그게 얼마 안 된 거야?”

“이 정도면 그렇지.”

이재가 맞은편에 앉았다.

“아빠도 아직 안 먹었지?”

“응.”

“먼저 먹으라니까.”

“아빠가 딸 좀 기다린 게 뭐가 이상해.”

“배고프잖아.”

“그래서 이제 먹으려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음식이 들어왔다.

이재가 한국에 들어온 뒤 몇 번 함께 식사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매번 좋아하는 음식이 한두 가지씩 꼭 끼어 있었다.

말해준 기억도 없는데 여전히 알고 있었다.

“회사 생활은 어떠냐.”

정호가 물었다.

“괜찮아.”

“그 말밖에 할 게 없어?”

“사람들도 좋고, 일도 재밌어.”

정호가 이재를 한번 쳐다봤다.

“그럼 됐고.”

대답은 무심했다.

그런데 몇 초 지나지 않아 다시 물었다.

“불편한 건 없고?”

이재가 웃었다.

“결국 물어볼 거면서.”

“대답이나 해.”

“없어.”

“사람들이 너라고 특별하게 대하거나 하진 않아?”

“그건 좀 있어.”

정호의 시선이 바로 올라왔다.

반응이 너무 빨라 이재가 웃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이상한 일 아니야.”

“누가 뭐라고 하던?”

“아니. 그냥 다들 나 어려워해.”

“처음엔 그럴 수밖에 없지.”

“나도 알아.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래.”

너무 순순한 대답이라 오히려 이재가 정호를 한 번 쳐다봤다.

정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계속했다.

“왜.”

“아니. 그냥.”

“네 회사 생활인데 네가 알아서 해야지.”

그 말은 마음에 들었다.

이재도 더 보태지 않았다.

정호가 반찬을 이재 쪽으로 밀어놓았다.

“집은?”

“좋아.”

“지낼 만하고?”

“응.”

“관리실 번호는 저장해뒀지?”

이재가 젓가락을 멈췄다.

“아빠.”

“왜.”

“나 지금 회사 얘기하고 있었는데 왜 또 집 얘기로 넘어가?”

정호는 태연했다.

“생각난 김에 물은 거야.”

“저번에도 물었어.”

“그럼 저장해뒀다고 하면 끝날 일이지.”

“해뒀어.”

“문제 생기면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관리실부터 연락하고.”

“네.”

길게 답하면 하나가 더 붙을 것 같아서 이번에는 얌전히 끝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은 것과 잔소리가 없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한동안 식사를 하다가 정호가 다시 물었다.

“미국에 있던 짐은 다 왔고?”

“아직 몇 박스 남았어.”

“뭐가 그렇게 많아.”

“십 년 살았는데 많지.”

“버릴 건 좀 버리고 살아.”

“아빠 서재부터 보고 말해.”

정호가 입을 다물었다.

이재가 웃었다.

“왜. 할 말 없지?”

“밥이나 먹어.”

그걸로 승부는 끝났다.

이런 대화가 이재는 좋았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걱정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십 년이었다.

열여덟에서 스물여덟이 되는 동안 아버지를 실제로 본 시간보다 화면으로 본 시간이 더 길었다.

멀어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고, 달라지기에도 충분했다.

그런데 막상 마주 앉아보니 의외로 많은 것이 그대로였다.

아버지는 여전히 이재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했고, 이재는 여전히 그의 서재를 가지고 놀릴 수 있었다.

비어 있던 십 년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앞뒤가 완전히 끊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 정도면 됐다.

지금은.

***

저녁을 먹고 나온 건 아홉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정호는 헤어지기 전까지 두 번이나 운전 조심하라고 말했다.

이재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사이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도착하면 연락해라.]

“알았다고.”

혼잣말로 대답하고 차에 올랐다.

이재는 밤 운전을 좋아했다.

도로를 따라 이어진 가로등 불빛이 차창 위로 일정하게 흘러가는 풍경도 좋았고, 낮보다 한산해진 길을 오래 달리는 기분도 좋아했다.

음악 하나를 틀어놓고 앞차의 미등을 따라가다 보면 복잡했던 생각도 어느 순간 비슷한 속도로 정리됐다.

어디로 갈지만 알고 있으면 됐다.

나머지는 길이 알아서 이어졌다.

집에 도착한 뒤 정호에게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

[도착했어.]

답장은 금방 왔다.

[그래. 쉬어라.]

이재는 휴대폰을 가방 안에 넣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구두부터 벗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미뤄뒀던 우편물을 정리했다. 관리비 고지서는 챙기고 광고지는 그대로 버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열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침대에 앉아 머리를 말리다가 사내 메신저를 확인했다.

다은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김다은 : 윤 대리님 저 자료 다시 받았습니다!]

파일 하나가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이재가 열어보니 이번에는 기준 월이 제대로 맞아 있었다.

[윤이재 : 확인했어요. 고생했어요]

답장이 곧바로 왔다.

[김다은 : 이제 진짜 퇴근합니다]

이재가 시간을 확인했다.

[윤이재 : 아직 회사였어요?]

[김다은 : 수정본 기다렸어요 ㅠㅠ]

[윤이재 : 내일 봐도 됐는데]

잠시 답이 없었다.

[김다은 : 그걸 조금만 일찍 알려주셨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이재가 웃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말을 고르고 골라 건네던 사람이었다.

반나절 사이에 제법 편해진 모양이었다.

[윤이재 : 미안해요ㅋㅋ 내일 커피 살게요]

[김다은 :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이재도 짧게 인사를 보내고 메신저를 닫았다.

다음 날 오전에는 회의가 하나 있었고, 주말에는 영화를 볼 생각이었다. 아직 풀지 않은 이삿짐도 남아 있었다.

그렇게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조금씩 늘어갔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빠르게 모양을 갖추는 중이었다.

회사에 가면 이제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생겼고, 저녁이면 밥을 먹자고 연락하는 아버지가 있었다. 퇴근한 뒤에는 누가 정해주지 않은 시간을 온전히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그 사이에서 며칠 전의 일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났다.

첫날에는 모르는 번호가 뜰 때마다 강태혁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둘째 날에는 휴대폰을 신경 쓰는 것조차 잊었고, 사흘째에는 강태혁이 했던 이야기도 업무 중 문득 떠오르는 정도가 전부였다.

확인해보겠다고 했었다.

그 뒤 아무 말이 없다는 건, 굳이 자신에게 알릴 만한 일이 없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재에게는 그 해석이 가장 합리적이었다.

그날 밤에는 오랜만에 약을 찾지 않았다.

눈을 감은 뒤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아침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다.

그 뒤로도 며칠은 별다를 것 없이 흘렀다.

회사에서는 새로운 업무가 하나 더 생겼고, 점심을 같이 먹는 사람들과는 어느새 메뉴를 두고 의견을 주고받을 만큼 가까워졌다. 다은에게 약속한 커피도 사줬다. 주말에는 예정대로 혼자 영화를 한 편 봤고, 돌아오는 길에는 미뤄뒀던 생활용품까지 샀다.

집에 와서는 남은 이삿짐을 풀었다. 미국에서 가져온 옷 몇 벌을 버리고, 빈 박스를 접어 현관 옆에 쌓아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왔다.

그동안 모르는 사람이 집을 찾아오는 일도, 이상한 전화를 받는 일도 없었다.

무서운 일은 대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기억에 남았다.

반대로 평범한 날들은 애써 붙잡지 않으면 금방 지나갔다.

이재는 그런 날들을 오래 바라왔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을 굳이 의심하지 않았다.

며칠 전 강태혁이 가져왔던 이야기는 그렇게 조금씩 현실감을 잃어갔다.

그리고 이재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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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정한 지옥   14화

    직원이 두 사람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창가를 따라 낮은 조명이 길게 이어진 곳이었다. 이재가 먼저 걸었고, 태혁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몇 걸음인데 이상하게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검은 원피스는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노출이 많은 것도 아닌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느다란 몸의 선이 고스란히 따라 움직였다.태혁은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오늘따라 서울 야경이 볼 만했다.자리에 도착하자 직원이 이재의 의자를 빼주었다. 이재가 앉고 태혁도 맞은편에 자리했다.메뉴판이 놓였다.이재는 바로 펼쳤지만 태혁은 한 박자 늦었다.“여기 괜찮죠?”“네.”“메뉴는요?”대답은 하는데 정작 메뉴판은 보지 않았다.이재가 눈을 들었다.태혁의 시선이 자신에게 있었다.“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아뇨.”그제야 태혁이 메뉴판을 펼쳤다.“좋은데.”“근데 왜 안 봐요?”“보고 있었습니다.”“나를 보고 있었잖아요.”태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이재가 웃었다.“뭐 먹고 싶은데요?”“윤이재 씨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내가 사니까?”“그건 아니고.”“그럼?”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태혁은 물잔만 들었다.뭐야.아까부터.이재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리면서도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걸 느꼈다.그러고 보니 이쪽만 평소와 다른 것도 아니었다.오늘따라 반듯한 셔츠에, 평소보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가까이 섰을 때 느꼈던 향도 어제보다 조금 선명했다.괜히 옷장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은 게 자기뿐은 아닌 모양이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 전부터 붕 떠 있던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강태혁 씨.”“네.”“향수 뿌렸어요?”“네.”대답이 너무 순순했다.“왜요?”태혁이 눈을 들었다.“나는 향수 뿌리면 안 됩니까?”“아니, 그런 건 아닌데.”“그럼 됐네요.”“그게 아니라…….”이재는 말을 고르다 웃었다.“그런 거 성가셔할 것 같아서.”“평소에는 그렇죠.”평소에는.이재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에서

  • 다정한 지옥   13화

    일요일 아침, 이재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잠에서 깼다.경찰이었다.전날 성림동에서 발생한 사건과 관련해 당분간 주거지 인근 순찰을 강화할 예정이며, 건물 보안팀과도 협조를 마쳤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상한 사람을 보거나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며 담당자 번호까지 남겼다.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온 이재는 커튼을 걷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도로 위로 차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산책하는 사람도 보였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런데 이제는 알고 있었다.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라는 걸.아버지가 보낸 사람들도 어젯밤부터 근처에 있었다. 이재가 불편하지 않도록 건물 안팎에서 거리를 두고 교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창가에 서 있던 이재의 시선이 길 건너편에 멈췄다.어제부터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검은색 세단이 한 대 있었다.설마 저건가.이재는 잠깐 바라보다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사람 확인했어요. 경찰에서도 연락 왔고.]조금 고민하다 한 줄을 덧붙였다.[나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답장은 금방 왔다.[알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아빠 말 좀 들어.]이재의 입술이 슬쩍 비뚤어졌다.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네네.]보내놓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이재의 손가락이 멈췄다.오늘 저녁 일곱 시.어제 잡은 약속이 떠올랐다.[그건 안 돼.]이번에는 답장이 없었다.이재는 잠깐 기다리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어차피 조금 있으면 전화가 올 것이다.잔소리 들을 준비나 해야겠다.***십 년 전 기록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태혁은 책상 위에 펼쳐놓은 수색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서진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새벽 두 시 십칠 분.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성림대교 인근에서 사고가 났고, 차량은 교량 진입부 난간을 들이받은 채 발견됐다.차량 내부에서는 상당량의 혈흔이 나

  • 다정한 지옥   12화

    눈을 떴다.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이재는 한동안 소파에 누운 채 눈만 깜빡였다. 블라인드 사이로 오후의 햇빛이 길게 들어와 거실 바닥에 걸쳐 있었다.이렇게 낮에 저절로 잠든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십 년 전 사건 이후 잠은 이재에게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피곤하다고 자연스럽게 잠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약을 먹는 날이 많았고, 어쩌다 잠들어도 작은 소리에 쉽게 깼다.낮잠은 더더욱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할 만큼 깊게 잤다.이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맑았다. 몸에 오래 눌어붙어 있던 피로가 조금 걷힌 것처럼 개운했다.낮잠이 원래 이렇게 개운한 거였나.그 순간 무언가가 허벅지 아래로 미끄러졌다.검은 재킷.“…….”강태혁 거였다.아까 소파 등받이에 걸어놓았던.소파에 기대 휴대폰을 보다가 살짝 잠이 든 모양이었다. 태혁은 식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고, 자신은 정말 잠깐만 눈을 감으려고 했다.정말 잠깐이었는데.이재는 테이블 위 휴대폰을 집었다.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다.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거실을 둘러봤다.식탁이 비어 있었다.서류도 없었다.“……강태혁 씨?”대답이 없었다.조금 전까지 느긋하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갔나.이재는 소파에서 급하게 일어나 넓은 거실을 가로질렀다.현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바닥을 내려다봤다.강태혁의 신발이 그대로 있었다.다행이다.그 생각을 한 순간 잠이 덜 깬 발이 엉켰다.“어…….”몸이 옆으로 기울었다.넘어지기 거의 직전이었다. 이재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받쳤다. 거의 동시에 다른 손이 팔뚝을 잡아 세웠다.“조심해요.”귓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이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고개를 들자 태혁의 얼굴이 보였다.가까웠다.허리를 받친 손바닥의 온기가 얇은 옷 너머로 선명했다. 이재는 그것을 의식한 순간 오히려 움직이지 못했다.시선이 마주쳤다.잠이 덜 깬 탓인지 머리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였

  • 다정한 지옥   11화

    태혁은 정말 남았다.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어두고,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던 사진부터 다시 봉투에 넣었다. 서진우의 이름이 가장 마지막으로 사라졌다.그 뒤로는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태혁은 식탁 한쪽에 가져온 서류를 펼쳐놓고 휴대폰으로 몇 통의 전화를 돌렸다.이재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둘 사이에는 식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태혁은 긴 다리를 의자 아래로 조금 접어 넣은 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혼자 쓰던 식탁에 덩치 큰 남자가 마주 앉아 있으니, 여섯 명은 넉넉히 앉는 테이블이 이상하게 좁아 보였다.“차량은?”태혁이 낮게 물었다.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거기서 끊겼으면 반경 넓혀. 도보로 들어왔다고 도보로 빠졌다고 생각하지 말고.”일할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이재는 턱을 괸 채 태혁을 바라봤다.생각보다 더 차가웠다.자신과 이야기할 때도 살가운 남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썹이 움직이거나,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거나, 아주 가끔은 웃기도 했다.지금은 달랐다. 표정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필요한 것만 물었고, 상대가 보고하는 동안에는 말을 끊지 않았다. 듣고 판단한 뒤 곧바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피해자 금융 기록은?”태혁의 손이 서류 한 장에서 멈췄다.“최근 것만 보지 말고 첫 사건 전까지 넓혀.”목소리에도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새벽부터 살인 현장에 있었고, 몇 시간 전에는 십 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연쇄살인범의 물건까지 발견했다.그런데도 흐트러지는 게 없었다.십 년 전에는 그저 어른처럼 보였다.열여덟 살의 자신에게 스물다섯은 충분히 그런 나이였으니까.지금 보니 꽤…….이재의 시선이 태혁의 손으로 내려갔다.서류를 넘기는 길고 반듯한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이 입술 아래를 한번 눌렀다.생각은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뭘 그렇게 봐요.”이재의 어깨가 움찔했다.태혁은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뭐, 뭐가요?”그제야 태혁이 눈을 들었다.시선이 정확하게

  • 다정한 지옥   10화

    성림동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주말 아침의 주택가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높은 담장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 사이로 수입차 몇 대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골목 어귀에는 새벽 배송을 마친 냉장 탑차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었다. 운동복 차림으로 개를 산책시키던 남자가 폴리스라인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가 경찰의 시선을 받고 다시 움직였다.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의 아침이었다.그 지나치게 반듯한 풍경 한가운데 경찰차 세 대가 서 있었다.태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현장으로 걸었다.“팀장님.”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준호가 다가왔다.“신고는?”“아침 여섯 시 십칠 분. 피해자 동생이 발견했습니다. 오늘 같이 등산 가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왔다가.”“피해자 혼자 살고?”“네. 오십팔 세 남성. 이혼했고 자녀는 따로 삽니다.”태혁이 덧신을 받아 신었다.“출입문.”“파손 없습니다.”대문도, 현관문도 멀쩡했다. 잠금장치에 억지로 손댄 흔적도 없었다.태혁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벌써 익숙한 시작이었다.“CCTV는.”“수빈이가 보고 있습니다. 집 앞 하나, 골목 진입로 두 개 더 확보 중이고요.”태혁이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서 거실까지 이어진 바닥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신발장도 닫혀 있었고 넘어지거나 깨진 물건 하나 없었다. 이 집에서 밤사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만 떼어놓으면, 누군가 강제로 들어왔다는 흔적부터 찾기가 어려웠다.그리고 거실 끝.식탁 옆 바닥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하얀 장갑을 낀 감식반 직원들이 주변을 촬영하고 있었다.준호가 목소리를 낮췄다.“정확한 사인은 부검 들어가야 합니다. 현재는 경부 쪽 손상으로 보고 있고, 사망 추정 시각은 어젯밤 열한 시에서 오늘 새벽 두 시 사이입니다.”태혁은 시신보다 먼저 주변을 봤다.창문.현관.식탁.가구 배치.그리고 거실장 위 액자.시선이 멎었다.“준호야.”“네.”“저거 원래 위치 확인해.”준호도 곧 액자를 봤다.피해자와 성인

  • 다정한 지옥   9화

    본사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횟집 안은 이미 제법 시끄러웠다.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이 칸막이 너머까지 뒤섞였고, 처음에는 정갈했던 테이블도 빈 술병과 접시로 제법 어수선해져 있었다.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 참석한 팀 회식이었다.회장 딸이랍시고 첫 회식부터 술까지 빼면 사람들이 더 어려워할 것 같아 오는 잔을 적당히 받아 마셨는데, 문제는 그 적당히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는 데 있었다.“윤 대리님.”옆자리 과장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진짜 미국에서 십 년을 있었어요?”“네.”“근데 한국말을 진짜 잘하시네.”이재가 잠시 과장을 바라봤다.“……한국인이니까요.”맞은편의 다은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과장님.”“어?”“진짜 장난 아니고, 똑같은 질문 세 번째 하신 거 알아요?”과장이 눈을 크게 떴다.“내가? 진짜?”“네.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또옥같았어요.”“야, 김다은. 너 취한 거 아냐?”이재가 웃음을 참으며 둘을 번갈아 봤다.“과장님이 다은 씨보다 조금 더 취한 것 같기는 해요.”“거봐요.”다은이 냉큼 이재 쪽으로 붙었다.과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둘이 벌써 한 편을 먹었네.”이재는 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입사 초기만 해도 이재가 출근하면 괜히 모니터부터 확인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농담에 웃고, 취한 얼굴까지 보여줄 정도는 됐으니까.“자자, 슬슬 2차 가실 분들은 가시죠.”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강요 아닙니다. 집에 갈 사람은 집에 가고. 신나게 놀 사람들은 더 놀고.”누군가 바로 받았다.“팀장님이 제일 신나게 놀고 싶으신 것처럼 들리는데요.”“내가 언제.”웃음이 터지는 틈에 이재는 가방을 챙겼다.다은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대리님 가세요?”“네. 저는 여기까지.”“저는 어떡하죠. 사회생활을 좀 하긴 해야 할 것 같고……. 따라가면 또 취할 것 같고.”“가서 안 취하면 되죠.”“그게…… 될까요?”“그걸 해내는 것도 사회생활 능력이에요.”다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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