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카페 유리문 너머로 윤이재가 멀어졌다.
신호등 앞에 멈춰 서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태혁은 시선을 거뒀다.
테이블 위에는 거의 손대지 않은 커피 두 잔이 남아 있었다.
하나는 이재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것이었다.
태혁은 제 앞에 놓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밍밍했다.
얼음이 녹을 만큼 오래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저 잘 살고 있어요.
이재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보셨잖아요.
봤다.
십 년 만에 얼굴을 마주치자마자 돌아섰고, 한참 뒤에야 나타났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잘 살고 있다고 했다.
잘 사는 것과 괜찮은 것은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말했으면 분명 싫어했을 테니. 아니, 이미 제 등장을 충분히 싫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태혁은 잔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두 통.
같은 번호였다.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신호가 한 번 가기도 전에 받았다.
―팀장님, 어디세요?
“가는 중.”
―병원으로요?
“어.”
―피해자가 아까부터 자꾸 뭐가 생각난다고 해서요. 담당 형사를 찾습니다.
태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데.”
―그걸 팀장님한테 직접 말하겠답니다.
“십 분.”
전화를 끊고 카페를 나섰다.
윤이재 생각도 거기까지였다.
적어도 당장은.
***
병실 문 앞에는 같은 팀 형사 박준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태혁을 발견하자마자 벽에서 등을 뗐다.
“빨리 오셨네요.”
“상태는?”
“괜찮습니다. 오전보다 훨씬 나아요.”
태혁은 병실 안을 들여다봤다.
두 번째 사건의 피해자는 침대에 기대앉아 있었다.
목에는 옅은 멍이 남아 있었고, 오른쪽 손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태혁이 들어가자 피해자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 형사님.”
“그냥 계세요.”
태혁은 침대 옆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뭐가 생각나셨다고요?”
“별것 아닐 수도 있는데…….”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피해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 사람이 집에 들어왔을 때요.”
태혁이 수첩을 꺼냈다.
“네.”
“좀 이상했어요.”
“어떤 게요?”
“검침하러 왔다고 했잖아요.”
“네.”
“그런데 검침은커녕 자꾸 집 안만 둘러보는 거예요.”
태혁의 펜 끝이 종이 위에 닿았다.
“어디를 봤습니까?”
“그냥 여기저기요. 거실도 보고, 주방도 보고.”
“뭔가를 찾는 것 같았습니까?”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어요.”
피해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기억을 더듬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태혁은 기다렸다.
“사진을 봤어요.”
펜이 멈췄다.
“무슨 사진이요?”
“거실에 가족사진이 있거든요.”
“범인이 그걸 봤습니까?”
“네.”
“얼마나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몇 초 정도?”
피해자는 불안한 듯 이불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좀 이상해서요.”
“뭐가요?”
“사진에 있는 남자를 가리키면서 아들이냐고 물었어요.”
태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준호가 수첩을 넘기는 소리만 작게 들렸다.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아들이라고 했죠.”
“같이 사느냐고도 물었습니까?”
피해자의 눈이 조금 커졌다.
“네.”
이번에는 준호가 태혁을 쳐다봤다.
태혁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기억납니까?”
“그냥…… 아드님도 여기 사시냐고.”
“그래서요?”
“결혼해서 나가 산다고 했어요.”
“그다음에는요?”
피해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 오는지도 물었던 것 같아요.”
“집에 언제 오느냐고요?”
“네. 자주 오냐고.”
태혁은 수첩에 짧게 적었다.
가족사진.
아들.
거주 여부.
방문 시기.
네 줄이었다.
“그 외에는요?”
“……잘 모르겠어요.”
“천천히 생각하셔도 됩니다.”
“이게 중요한 건가요?”
태혁이 고개를 들었다.
피해자는 겁먹은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직은 모릅니다.”
“그 사람이 다시 올 수도 있어요?”
“그럴 가능성은 낮습니다.”
“확실해요?”
태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확실하다는 말은 쉽게 하는 게 아니었다.
특히 이런 일에서는.
“병원에 계시는 동안은 경찰이 주변을 확인할 겁니다.”
피해자는 썩 안심한 얼굴이 아니었다.
태혁도 더 나은 말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사소한 것이라도 연락 주세요.”
“네.”
태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실 밖으로 나오자 준호가 바로 물었다.
“팀장님.”
“왜.”
“아까 그건 뭡니까?”
“뭐가.”
“같이 사느냐고 물었냐고 먼저 물어보셨잖아요.”
태혁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랬지.”
“알고 계셨어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태혁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확인해봐야 해.”
준호가 뒤따라 들어왔다.
“뭘요?”
“가서.”
문이 닫혔다.
옆에서 작은 한숨이 들렸다.
태혁은 모르는 척했다.
***
사무실로 돌아온 건 오후 세 시가 넘어서였다.
태혁은 자리에 앉자마자 컴퓨터를 켰다. 메일이 쌓여 있었고, 결재할 것도 있었다. 하지만 전부 뒤로 미뤘다.
“준호야.”
“네.”
“십 년 전 성림동 사건 기록 어디 있지?”
모니터 너머로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요?”
“어디 있어.”
“전산화된 건 서버에 있고, 원본은 기록실에 있을 겁니다.”
“원본 가져와.”
“전부요?”
“어.”
준호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거 사건 하나가 아닌데요.”
태혁이 쳐다봤다.
“알아.”
“양 꽤 됩니다.”
“그것도 알고.”
준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을 아주 자연스럽게 부리시네.”
“들린다.”
“들으라고 한 말입니다.”
태혁은 대꾸하지 않고 모니터로 몸을 돌렸다.
2016년, 성림동.
검색창에 두 단어를 입력하자 오래된 사건들이 화면에 떠올랐다.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첫 번째 사건 기록을 열었다.
피해자 진술.
현장 사진.
수사 보고서.
빠르게 넘겼다.
두 번째.
세 번째.
기억하고 있는 것과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달랐다.
태혁은 기억을 믿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확인했다.
한 번 더.
몇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멈췄다.
짧은 문장이었다.
태혁은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그 아래에 적힌 내용까지.
날짜.
진술자.
담당자.
틀릴 리 없었다.
“팀장님.”
준호가 두꺼운 서류철 몇 개를 들고 돌아왔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기록들이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
“진짜 다 보시게요?”
태혁은 대답 대신 맨 위의 서류철을 끌어당겼다.
빛바랜 표지.
사건 번호.
날짜.
십 년 전 수도 없이 펼쳤던 파일이었다.
기억보다 낡아 있었다.
“오늘 피해자 진술 녹취 정리되면 바로 보내.”
“네.”
“첫 번째 사건 피해자도 다시 만나고.”
준호가 눈을 깜빡였다.
“첫 번째요? 피해 없었던 집이요?”
“어.”
“어떤 걸 물어보면 됩니까?”
태혁은 서류철을 펼쳤다.
“집 안에서 뭘 봤는지.”
한 장을 넘겼다.
“뭘 물어봤는지.”
“십 년 전 사건과 관련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태혁의 손이 멈췄다.
비슷한 것과 같은 것은 달랐다.
기억과 기록도 달랐다.
아직 확인할 게 남아 있었다.
“모르지.”
태혁은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그래서 보는 거야.”
준호는 더 묻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로 돌아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태혁은 혼자 남은 책상에서 기록을 계속 읽었다.
첫 번째 피해자.
두 번째 피해자.
세 번째 피해자.
십 년이라는 시간은 종이도 늙게 만들었다.
이름도, 날짜도, 사진도 그대로인데 파일만 낡아 있었다.
태혁은 어느 페이지에서 손을 멈췄다.
아까 전산으로 확인했던 기록이었다.
원본도 같았다.
거실에 비치된 가족사진을 확인.
그 아래.
사진 속 가족의 동거 여부 및 귀가 시간을 질문함.
태혁은 두 문장을 오래 내려다봤다.
오늘 병원에서 들은 말과 같았다.
우연이라고 넘기기에는 너무 많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연락처 하나를 열었다.
오늘 오전 저장한 번호였다.
윤이재.
―다음부터는 회사로 찾아오지 마세요.
―왜요?
―싫으니까요.
통화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몇 초쯤 그대로 있다가 화면을 껐다.
아직은 아니었다.
같은 질문을 했다는 것만으로 윤이재에게 다시 겁을 줄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오늘 그녀에게 한 말이 있었다.
―아직 판단할 단계는 아니에요.
그 판단부터 끝내야 했다.
태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기록을 펼쳤다.
십 년 전과 같은 질문.
그것만은 이제 확실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확인해야 할 건 하나였다.
첫 번째 사건에서도 같은 질문을 했는가.
태혁이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준호야.”
멀리서 대답이 돌아왔다.
“네.”
“첫 번째 피해자.”
“네.”
“내일 오전으로 일정 잡아.”
잠시 뒤 준호가 물었다.
“직접 가시게요?”
태혁은 낡은 기록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
이제 우연인지 아닌지 확인할 차례였다.
직원이 두 사람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창가를 따라 낮은 조명이 길게 이어진 곳이었다. 이재가 먼저 걸었고, 태혁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몇 걸음인데 이상하게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검은 원피스는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노출이 많은 것도 아닌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느다란 몸의 선이 고스란히 따라 움직였다.태혁은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오늘따라 서울 야경이 볼 만했다.자리에 도착하자 직원이 이재의 의자를 빼주었다. 이재가 앉고 태혁도 맞은편에 자리했다.메뉴판이 놓였다.이재는 바로 펼쳤지만 태혁은 한 박자 늦었다.“여기 괜찮죠?”“네.”“메뉴는요?”대답은 하는데 정작 메뉴판은 보지 않았다.이재가 눈을 들었다.태혁의 시선이 자신에게 있었다.“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아뇨.”그제야 태혁이 메뉴판을 펼쳤다.“좋은데.”“근데 왜 안 봐요?”“보고 있었습니다.”“나를 보고 있었잖아요.”태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이재가 웃었다.“뭐 먹고 싶은데요?”“윤이재 씨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내가 사니까?”“그건 아니고.”“그럼?”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태혁은 물잔만 들었다.뭐야.아까부터.이재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리면서도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걸 느꼈다.그러고 보니 이쪽만 평소와 다른 것도 아니었다.오늘따라 반듯한 셔츠에, 평소보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가까이 섰을 때 느꼈던 향도 어제보다 조금 선명했다.괜히 옷장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은 게 자기뿐은 아닌 모양이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 전부터 붕 떠 있던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강태혁 씨.”“네.”“향수 뿌렸어요?”“네.”대답이 너무 순순했다.“왜요?”태혁이 눈을 들었다.“나는 향수 뿌리면 안 됩니까?”“아니, 그런 건 아닌데.”“그럼 됐네요.”“그게 아니라…….”이재는 말을 고르다 웃었다.“그런 거 성가셔할 것 같아서.”“평소에는 그렇죠.”평소에는.이재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에서
일요일 아침, 이재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잠에서 깼다.경찰이었다.전날 성림동에서 발생한 사건과 관련해 당분간 주거지 인근 순찰을 강화할 예정이며, 건물 보안팀과도 협조를 마쳤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상한 사람을 보거나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며 담당자 번호까지 남겼다.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온 이재는 커튼을 걷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도로 위로 차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산책하는 사람도 보였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런데 이제는 알고 있었다.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라는 걸.아버지가 보낸 사람들도 어젯밤부터 근처에 있었다. 이재가 불편하지 않도록 건물 안팎에서 거리를 두고 교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창가에 서 있던 이재의 시선이 길 건너편에 멈췄다.어제부터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검은색 세단이 한 대 있었다.설마 저건가.이재는 잠깐 바라보다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사람 확인했어요. 경찰에서도 연락 왔고.]조금 고민하다 한 줄을 덧붙였다.[나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답장은 금방 왔다.[알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아빠 말 좀 들어.]이재의 입술이 슬쩍 비뚤어졌다.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네네.]보내놓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이재의 손가락이 멈췄다.오늘 저녁 일곱 시.어제 잡은 약속이 떠올랐다.[그건 안 돼.]이번에는 답장이 없었다.이재는 잠깐 기다리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어차피 조금 있으면 전화가 올 것이다.잔소리 들을 준비나 해야겠다.***십 년 전 기록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태혁은 책상 위에 펼쳐놓은 수색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서진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새벽 두 시 십칠 분.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성림대교 인근에서 사고가 났고, 차량은 교량 진입부 난간을 들이받은 채 발견됐다.차량 내부에서는 상당량의 혈흔이 나
눈을 떴다.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이재는 한동안 소파에 누운 채 눈만 깜빡였다. 블라인드 사이로 오후의 햇빛이 길게 들어와 거실 바닥에 걸쳐 있었다.이렇게 낮에 저절로 잠든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십 년 전 사건 이후 잠은 이재에게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피곤하다고 자연스럽게 잠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약을 먹는 날이 많았고, 어쩌다 잠들어도 작은 소리에 쉽게 깼다.낮잠은 더더욱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할 만큼 깊게 잤다.이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맑았다. 몸에 오래 눌어붙어 있던 피로가 조금 걷힌 것처럼 개운했다.낮잠이 원래 이렇게 개운한 거였나.그 순간 무언가가 허벅지 아래로 미끄러졌다.검은 재킷.“…….”강태혁 거였다.아까 소파 등받이에 걸어놓았던.소파에 기대 휴대폰을 보다가 살짝 잠이 든 모양이었다. 태혁은 식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고, 자신은 정말 잠깐만 눈을 감으려고 했다.정말 잠깐이었는데.이재는 테이블 위 휴대폰을 집었다.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다.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거실을 둘러봤다.식탁이 비어 있었다.서류도 없었다.“……강태혁 씨?”대답이 없었다.조금 전까지 느긋하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갔나.이재는 소파에서 급하게 일어나 넓은 거실을 가로질렀다.현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바닥을 내려다봤다.강태혁의 신발이 그대로 있었다.다행이다.그 생각을 한 순간 잠이 덜 깬 발이 엉켰다.“어…….”몸이 옆으로 기울었다.넘어지기 거의 직전이었다. 이재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받쳤다. 거의 동시에 다른 손이 팔뚝을 잡아 세웠다.“조심해요.”귓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이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고개를 들자 태혁의 얼굴이 보였다.가까웠다.허리를 받친 손바닥의 온기가 얇은 옷 너머로 선명했다. 이재는 그것을 의식한 순간 오히려 움직이지 못했다.시선이 마주쳤다.잠이 덜 깬 탓인지 머리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였
태혁은 정말 남았다.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어두고,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던 사진부터 다시 봉투에 넣었다. 서진우의 이름이 가장 마지막으로 사라졌다.그 뒤로는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태혁은 식탁 한쪽에 가져온 서류를 펼쳐놓고 휴대폰으로 몇 통의 전화를 돌렸다.이재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둘 사이에는 식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태혁은 긴 다리를 의자 아래로 조금 접어 넣은 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혼자 쓰던 식탁에 덩치 큰 남자가 마주 앉아 있으니, 여섯 명은 넉넉히 앉는 테이블이 이상하게 좁아 보였다.“차량은?”태혁이 낮게 물었다.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거기서 끊겼으면 반경 넓혀. 도보로 들어왔다고 도보로 빠졌다고 생각하지 말고.”일할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이재는 턱을 괸 채 태혁을 바라봤다.생각보다 더 차가웠다.자신과 이야기할 때도 살가운 남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썹이 움직이거나,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거나, 아주 가끔은 웃기도 했다.지금은 달랐다. 표정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필요한 것만 물었고, 상대가 보고하는 동안에는 말을 끊지 않았다. 듣고 판단한 뒤 곧바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피해자 금융 기록은?”태혁의 손이 서류 한 장에서 멈췄다.“최근 것만 보지 말고 첫 사건 전까지 넓혀.”목소리에도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새벽부터 살인 현장에 있었고, 몇 시간 전에는 십 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연쇄살인범의 물건까지 발견했다.그런데도 흐트러지는 게 없었다.십 년 전에는 그저 어른처럼 보였다.열여덟 살의 자신에게 스물다섯은 충분히 그런 나이였으니까.지금 보니 꽤…….이재의 시선이 태혁의 손으로 내려갔다.서류를 넘기는 길고 반듯한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이 입술 아래를 한번 눌렀다.생각은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뭘 그렇게 봐요.”이재의 어깨가 움찔했다.태혁은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뭐, 뭐가요?”그제야 태혁이 눈을 들었다.시선이 정확하게
성림동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주말 아침의 주택가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높은 담장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 사이로 수입차 몇 대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골목 어귀에는 새벽 배송을 마친 냉장 탑차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었다. 운동복 차림으로 개를 산책시키던 남자가 폴리스라인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가 경찰의 시선을 받고 다시 움직였다.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의 아침이었다.그 지나치게 반듯한 풍경 한가운데 경찰차 세 대가 서 있었다.태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현장으로 걸었다.“팀장님.”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준호가 다가왔다.“신고는?”“아침 여섯 시 십칠 분. 피해자 동생이 발견했습니다. 오늘 같이 등산 가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왔다가.”“피해자 혼자 살고?”“네. 오십팔 세 남성. 이혼했고 자녀는 따로 삽니다.”태혁이 덧신을 받아 신었다.“출입문.”“파손 없습니다.”대문도, 현관문도 멀쩡했다. 잠금장치에 억지로 손댄 흔적도 없었다.태혁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벌써 익숙한 시작이었다.“CCTV는.”“수빈이가 보고 있습니다. 집 앞 하나, 골목 진입로 두 개 더 확보 중이고요.”태혁이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서 거실까지 이어진 바닥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신발장도 닫혀 있었고 넘어지거나 깨진 물건 하나 없었다. 이 집에서 밤사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만 떼어놓으면, 누군가 강제로 들어왔다는 흔적부터 찾기가 어려웠다.그리고 거실 끝.식탁 옆 바닥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하얀 장갑을 낀 감식반 직원들이 주변을 촬영하고 있었다.준호가 목소리를 낮췄다.“정확한 사인은 부검 들어가야 합니다. 현재는 경부 쪽 손상으로 보고 있고, 사망 추정 시각은 어젯밤 열한 시에서 오늘 새벽 두 시 사이입니다.”태혁은 시신보다 먼저 주변을 봤다.창문.현관.식탁.가구 배치.그리고 거실장 위 액자.시선이 멎었다.“준호야.”“네.”“저거 원래 위치 확인해.”준호도 곧 액자를 봤다.피해자와 성인
본사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횟집 안은 이미 제법 시끄러웠다.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이 칸막이 너머까지 뒤섞였고, 처음에는 정갈했던 테이블도 빈 술병과 접시로 제법 어수선해져 있었다.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 참석한 팀 회식이었다.회장 딸이랍시고 첫 회식부터 술까지 빼면 사람들이 더 어려워할 것 같아 오는 잔을 적당히 받아 마셨는데, 문제는 그 적당히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는 데 있었다.“윤 대리님.”옆자리 과장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진짜 미국에서 십 년을 있었어요?”“네.”“근데 한국말을 진짜 잘하시네.”이재가 잠시 과장을 바라봤다.“……한국인이니까요.”맞은편의 다은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과장님.”“어?”“진짜 장난 아니고, 똑같은 질문 세 번째 하신 거 알아요?”과장이 눈을 크게 떴다.“내가? 진짜?”“네.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또옥같았어요.”“야, 김다은. 너 취한 거 아냐?”이재가 웃음을 참으며 둘을 번갈아 봤다.“과장님이 다은 씨보다 조금 더 취한 것 같기는 해요.”“거봐요.”다은이 냉큼 이재 쪽으로 붙었다.과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둘이 벌써 한 편을 먹었네.”이재는 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입사 초기만 해도 이재가 출근하면 괜히 모니터부터 확인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농담에 웃고, 취한 얼굴까지 보여줄 정도는 됐으니까.“자자, 슬슬 2차 가실 분들은 가시죠.”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강요 아닙니다. 집에 갈 사람은 집에 가고. 신나게 놀 사람들은 더 놀고.”누군가 바로 받았다.“팀장님이 제일 신나게 놀고 싶으신 것처럼 들리는데요.”“내가 언제.”웃음이 터지는 틈에 이재는 가방을 챙겼다.다은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대리님 가세요?”“네. 저는 여기까지.”“저는 어떡하죠. 사회생활을 좀 하긴 해야 할 것 같고……. 따라가면 또 취할 것 같고.”“가서 안 취하면 되죠.”“그게…… 될까요?”“그걸 해내는 것도 사회생활 능력이에요.”다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