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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무색탑의 수학자: Chapter 71 - Chapter 80

88 Chapters

71화. 설교대 아래

교구 심사는 대성당 설교대 아래에서 열렸다.긴 탁자 하나. 한쪽에 교구장과 사제회의 늙은 사제 여섯.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사제가 교구장 왼쪽에 앉았다. 맞은편 끝에 의자 하나가 비어 있었다. 가장 높은 등받이.루엔은 탁자 앞에 섰다. 옆에 오렐. 뒤쪽 신도석 첫 줄에 교장 마그누스가 앉아 있었다. 학교장이 학생 심사에 오는 일은 없다고 했다. 그래도 왔다. 흰 눈썹 아래 눈을 반쯤 감고.그 옆에 테오와 클라리사. 둘 다 교장에게서 두 자리 떨어져 앉았다. 교장 곁은 편하지 않았다.종이 한 번 울렸다.카시미르 알바가 설교대 옆 문으로 들어왔다.*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멀리서 볼 때보다 키가 더 컸다. 은빛 흰 머리가 어깨에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얼굴의 주름이 깊었지만 눈은 맑았다. 쉰 해 넘게 마법을 한 사람의 눈. 흰 옷 가장자리의 금실이 촛불에 가늘게 빛났다.카시미르는 빈 의자에 앉지 않았다. 탁자 앞에 선 채로 두 손을 모았다가 펼쳤다.신성광이 대성당을 채웠다.심사를 여는 축복이었다. 금빛. 고르고 부드러웠다. 광장에서 본 율리안의 빛과 달랐다. 희지 않았고, 푸르지 않았다. 루엔은 허리 주머니의 녹임돌을 만지지 않았다. 만질 필요가 없었다. 이 빛은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 빛이었다. 오래 그렇게 다듬어 온 빛이었다.카시미르는 빛을 거두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았다.그리고 심사 내내 거두지 않았다.*교구장이 첫 물음을 읽었다.「왕립 마법학교 학생 루엔 하르트. 영창 없이 행하는 마법이 신앙에 어긋나는지 여부.」루엔은 준비해 온 대로 답했다. 영창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지 않을 뿐이라고. 속으로 한다고. 탑의 고리 영창 위에 셈을 얹는다고. 입학 첫 가을 실습 때부터 선생님들 앞에서 소리 내어 읊어도 보았고, 속으로 읊어도 보았으며, 둘의 결과가 같았다고.늙은 사제 하나가 물었다. “기도도 속으로 하면 기도인가.”“그건 사제님들이 정하실 일입니다. 저는 마법이 같다는 것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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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보이지 않는 일식

동서를 재려면 두 곳에 같은 순간이 있어야 했다.한쪽이 한낮일 때 다른 쪽은 몇 시인가. 그걸 알면 동서가 나왔다. 한 시간에 열다섯 도. 두 해 전 청색탑 항해사들 앞 칠판에 적은 셈이었다. 그때 모자란 건 시계였다. 지금도 시계는 없었다.시계 대신 하늘을 쓰기로 했다.해를 달이 가리는 순간은, 어디서 보든 하나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두 곳에서 각자 제 해시계로 적으면 된다. 청색탑이 백 년 동안 월식으로 해 보려던 일이었다. 월식은 흐릿해서 실패했다. 일식은 흐릿하지 않았다. 달의 가장자리가 해의 가장자리에 닿는 순간은 칼로 자른 듯했다.문제는 일식이 언제, 어디서 보이느냐였다.*도서관 서고에 옛 일식 기록이 있었다. 오드리크가 이번에도 하룻밤에 찾아 주었다. 수도원 연대기, 탑 관측, 뱃사람 기록. 「해가 먹혔다」는 줄만 골라 서른한 줄.루엔은 날짜를 나란히 놓고 사이를 셈했다.같은 사이가 되풀이되었다. 열여덟 해 하고 열하루, 그리고 하루의 삼분의 일쯤. 그 사이마다 비슷한 일식이 돌아왔다.그런데 이상한 게 있었다. 같은 사이로 돌아온 일식이, 늘 같은 곳에서 보이지는 않았다. 어떤 해는 아스테른 연대기에 적혔고, 다음번엔 살렌 뱃사람 기록에만 있었고, 그다음엔 먼 동쪽 나라 수도원에만.루엔은 그 삼분의 일을 오래 보았다.하루의 삼분의 일. 그 사이에 땅 쪽에서 보면 해와 달은 하늘을 삼분의 일 바퀴 더 돈다. 누가 도느냐는 이 셈과 상관없었다. 한 바퀴의 삼분의 일만큼 어긋난 채 돌아온다는 것만 맞으면 됐다. 그래서 일식은 같은 모양으로 돌아와도, 보이는 곳이 삼분의 일 바퀴 서쪽으로 옮겨 갔다. 세 번 돌아와야 제자리.지난번 이 줄의 일식은 열여덟 해 전 아스테른 동쪽 먼 나라에서 보였다. 그 전번은 서른여섯 해 전 아스테른 연대기에 있었다. 해가 반쯤 먹혔다고.이번은 올가을이었다. 그리고 삼분의 일 바퀴 서쪽.루엔은 셈을 끝내고 교장실에 갔다.*“이번 일식은 아스테른에서는 안 보입니다.”교장이 눈을 들었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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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봉한 숫자

재료가 셋 모였다.남북. 파비오가 케른바흐에서 사흘 밤 북극성을 쟀다. 루엔이 빌려준 눈금판으로. 한 바퀴 삼백예순 칸, 끈과 돌 추. 아스테른보다 두 도 하고 사분의 일 낮았다. 사흘 밤 다 같은 칸.동서. 가을 일식. 케른바흐가 동쪽으로 한 도 하고 삼분의 일.세상의 크기. 열세 살 때 영지에서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밤마다 북극성과 말 발굽을 세어 셈한 둘레. 거칠다고 적어 둔 값. 탑들이 믿는 크기보다 셋에 하나쯤 더 큰 값. 탑 책이 셋이라 하면 넷쯤 되는 값.루엔은 늦가을 한 달을 그 셋과 보냈다.*셈은 이렇게 시작했다.땅이 하루에 한 바퀴 돈다면.루엔은 그 문장을 수첩에 적지 않았다. 밀랍판에만 적었다. 밀랍판은 지울 수 있었다.땅이 돈다면 땅 위의 모든 곳이 같이 돈다. 같이 돌지만 빠르기가 다르다. 한가운데 굴대에서 멀수록 빨랐다. 적도는 가장 빠르고, 북극성 바로 밑은 제자리에서 맴돌 뿐이었다. 아스테른과 케른바흐는 굴대에서 떨어진 거리가 달랐다. 도는 방향도 조금 달랐다. 둥근 땅 위의 두 곳이니까.그러면 아스테른에 서 있던 몸은 아스테른 땅의 빠르기를 들고 있다. 텔레포트로 케른바흐에 닿는 순간, 그 몸은 케른바흐 땅의 빠르기와 어긋난다.어긋남을 셈하는 데는 화살표가 필요했다. 열한 살 가을 실습장에서 분필로 그은 화살표. 바람과 화살을 이어 붙이던 그것. 그리고 원 위를 도는 수. 올가을 열일곱 개의 점을 찾게 해 준 그 셈.루엔은 두 곳의 빠르기를 화살표 둘로 그렸다. 하나에서 하나를 뺐다. 남은 화살표가 어긋남이었다.그 화살표의 방향. 해 지는 쪽, 조금 남쪽. 그리고 조금 위로.길이. 루엔은 그 길이를 말이 달리는 빠르기로 바꾸었다. 영지 기사들이 전령마를 한껏 몰 때의 빠르기. 그보다 조금 더.그 빠르기로 떠오른 자루가 어디에 처음 떨어지는지. 조금 위로 뜨니 조금 날았다가 떨어질 것이었다. 루엔은 그것도 셈했다. 원진 한가운데서 해 지는 쪽 조금 남으로, 스물다섯 걸음.루엔은 파비오의 공책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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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모래 자루 두 개

케른바흐까지 수레로 엿새가 걸렸다.한겨울 길이었다. 오틸리에가 황색탑 수레를 내주었다. 루엔과 테오, 이졸드, 그리고 백색탑 참관인이 탔다. 참관인은 마흔 남짓의 사제였다. 흰 장갑을 벗지 않았다. 엿새 동안 거의 말하지 않았다. 밤마다 여관에서 무언가를 적었다.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마부는 천천히 몰았다. 루엔이 부탁했다. 언 길이었다.케른바흐는 돌의 도시였다. 성벽이 두 겹이었고, 사 층 넘는 건물이 줄지어 서 있었다. 황색탑 마법 없이는 못 짓는다고들 하는 높이였다. 도시 한가운데 누런 돌탑이 솟아 있었다. 황색탑이었다.도착 마당은 탑 바로 아래에 있었다. 아스테른 것보다 컸다. 원진 지름 스물다섯 걸음. 둘레 돌담, 안쪽 짚단.그리고 원진 둘레 해 지는 쪽 절반에, 모래가 깔려 있었다.한 뼘 두께. 판판하게 골라져 있었다. 원진 가장자리에서부터 금이 그어져 있었다. 반 걸음마다. 금 끝마다 작은 나무 말뚝에 숫자.파비오가 모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허리에 공책을 차고.“반 걸음마다 그었습니다.” 파비오가 말했다. 인사 대신.“보았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고맙습니다.”*한겨울 첫 보름.하늘은 맑았다. 바람이 찼다. 도착 마당 돌담 위에 황색탑 사람들이 줄지어 섰다. 서기, 견습생, 늙은 마법사들. 오틸리에가 원진 곁에 섰다. 치마 끝에 오늘은 돌가루가 없었다. 이졸드는 돌담 계단 중간에 섰다. 백색탑 참관인은 맨 앞, 흰 장갑을 낀 두 손을 모으고.루엔은 원진에서 서른 걸음 떨어진 자리에 섰다. 해 지는 쪽이 아니라 해 뜨는 쪽으로. 테오가 옆에 섰다.“자루가 언제 와.” 테오가 물었다.“교장님은 아스테른 한낮 종에 보내십니다. 케른바흐 한낮은 그보다 먼저 옵니다. 동쪽이니까.” 루엔이 마당 해시계를 보았다. “여기 한낮에서 맥박 삼백칠십쯤 뒤에 옵니다.”“그것도 맞아야 해?”“그것도 맞아야 합니다.”해시계 그림자가 북쪽 금에 닿았다. 케른바흐 한낮. 탑의 종이 울렸다.루엔은 맥박을 짚었다.백. 이백. 돌담 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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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땅이 돈다

소식은 루엔보다 먼저 아스테른에 닿았다.교장이 그날 오후 케른바흐에서 아스테른으로 돌아갔다. 텔레포트로. 이번엔 식 끝의 칸 세 개에 거꾸로 된 값을 넣었다. 아스테른 도착 마당에 선 채로 닿았다. 기다리던 오렐이 그걸 보았다. 황색탑 일꾼들도.그날 저녁 아스테른 장터에 말이 돌았다.루엔은 엿새 뒤에 수레로 돌아왔다. 성문을 들어서자 문지기가 창을 세운 채 루엔을 불렀다. 왼뺨에 낫 모양 흉터가 있는 문지기였다.“이봐. 땅이 돈다며.”“예.”문지기는 발밑 돌바닥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한 발을 들었다가 내렸다. 조심스럽게.“하나도 안 돌잖아.”“다 같이 돌아서 그렇습니다.”“다 같이.” 문지기가 제 뺨의 흉터를 문질렀다. “그럼 술집에서 어지러운 것도.”“그건 술 때문입니다.”문지기가 웃었다. 앞니 빠진 자리가 보였다.*장터는 그 얘기뿐이었다.빵장수 구스타프는 반죽을 치대다 말고 루엔을 붙잡았다. 땅이 돌면 왜 빵이 굴러떨어지지 않느냐고. 대장간 앞에선 견습들이 누가 오래 한 발로 서는지 내기를 했다. 땅이 돌면 넘어진다고. 아무도 넘어지지 않았다. 내기는 흐지부지되었다.아이들이 골목에서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다 주저앉았다. 「땅 놀이」라고 했다. 어머니들이 혼냈다.보움 상단 전령마들이 북쪽과 동쪽과 남쪽 길로 달렸다. 북쪽 길 끝, 하르트 성에서는 세 해 전 루엔이 세운 거울 길이 소식을 방앗간 망루와 새 마을 종탑까지 이어 받았다. 청색탑 배가 포르미아로 떠났다. 이졸드의 편지를 싣고.사흘 만에 왕국 밖까지 갔다.살렌 항구 뱃사람들이 선술집에서 떠들었다. 그라우벤 모피 상단이 장부 여백에 적었다. 마르케스 국경 성채의 병사들이 망루에서 해 뜨는 쪽을 쳐다보았다. 땅이 돈다더라. 베스트리아 학교의 열여섯 먹은 학생이. 모래 자루로.루엔은 그 소문 가운데 틀린 곳을 셋 셌다. 열여섯이 아니라 열여섯 끝이었다. 모래 자루가 아니라 모래 자루 둘이었다. 그리고 텔레포트를 쓴 건 교장이었다.고치러 다닐 수는 없었다. 루엔은 그 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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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졸업장의 끝자리

졸업식은 해가 가장 높이 뜰 때 시작한다고 적혀 있었다.학교가 선 지 백 해가 넘었지만, 그 시각에 식이 시작된 적은 없었다. 종이 늦었기 때문이다. 조금씩, 날마다 다르게.올해는 달랐다.루엔은 강당 창가에 서서 마당의 해시계를 보았다. 막대 그림자가 돌판의 가운데 금에 닿았다. 그림자 끝이 금을 덮는 바로 그때, 종탑에서 첫 종이 울렸다.둘째, 셋째. 열두 번.강당 안이 조용해졌다. 늙은 교수 몇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교장 마그누스 할베르크가 단상에서 모래시계를 뒤집으려다 손을 멈췄다. 뒤집을 필요가 없었다.루엔은 종탑을 올려다보았다.종지기 게릭이 난간 너머로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시계를 한 번, 강당 창을 한 번. 창가의 루엔과 눈이 마주쳤다.게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종탑 안으로 들어갔다.“종이 맞았어.” 옆에서 테오 마일스가 속삭였다. “졸업식 날에.”“한 해 반 걸렸습니다.”“게릭 영감이 한 해 반 동안 몰래 연습한 거야?”“몰래는 아닙니다. 해시계 앞에 날마다 서 계셨습니다. 다들 보았습니다.”“그걸 연습으로 본 건 너 하나야.”*졸업장은 이름 순서로 받았다.양피지 한 장. 맨 위에 학교 문장, 가운데 이름, 아래에 여섯 해 동안 받은 점수의 합과 교장의 서명.루엔은 자리로 돌아와 졸업장을 무릎에 폈다. 점수 합을 보았다. 과목마다 받은 점수를 속으로 더했다.끝자리가 하나 달랐다.“또 뭐야.” 테오가 옆에서 물었다. 루엔 얼굴을 여섯 해 본 사람이었다.“합이 하나 많습니다.”“많으면 좋은 거잖아.”“틀린 겁니다.”식이 끝나자 루엔은 졸업장을 들고 단상으로 갔다. 교장은 서기를 불렀다. 서기가 점수 장부를 가져와 셈판에 다시 놓았다. 하나 많았다. 넷째 해 영창학 점수를 옮겨 적다 생긴 실수였다.마그누스가 펜을 들어 끝자리를 긁고 고쳐 썼다. 그리고 옆에 작게 서명을 한 번 더 했다.“이 학교에서 졸업장 점수를 깎아 달라고 온 학생은 네가 처음이다.”“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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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톱니 테두리

왕 레지날드 2세는 생각보다 젊었다.마흔을 조금 넘었을까. 수염을 짧게 다듬었고, 왕관 대신 가는 금테 하나만 이마에 둘렀다. 알현실이 아니라 작은 서재에서 루엔을 맞았다. 탁자 위에 텔레포트 사고 기록이 펼쳐져 있었다. 황색탑 파비오 슈틸이 십 년 동안 적은 그 기록이었다.“열 번에 하나.” 왕이 기록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롱 텔레포트는 열 번에 한 번꼴로 사람이 다치거나 짐이 부서진다. 그래서 짐 한 상자 옮기는 삯이 말 스무 필 값이다. 네 식이면 그게 없어진다고.”“식대로 하면 없어집니다.”“반드시?”“식이 맞고, 쓰는 사람이 식대로 쓰면 반드시입니다. 쓰는 사람이 틀리면 저도 모릅니다.”왕이 웃었다. 옆에 선 시종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왕 앞에서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롱 텔레포트는 여섯째 고리가 있어야 하지.”“예. 저는 아직 다섯입니다. 지금은 교장 선생님과 황색탑 파비오 님이 제 보정표로 쓰십니다. 보정표는 제가 날마다 새로 셈해 드립니다. 여섯째 고리에 오르면 제가 직접 합니다.”“삯은.”“옮기는 삯의 열에 하나를 하르트 상단이 받습니다. 보정표 값입니다.”왕은 그 숫자를 곱씹는 듯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엔이 예상한 것보다 빨랐다. 왕도 셈을 한 거였다. 사고로 날아가는 짐 값이 열에 하나보다 컸다.“다른 청은.”루엔은 오틸리에의 말을 떠올렸다.“조폐소를 빌려 주십시오.”*왕실 조폐소는 왕궁 서쪽 담 밑에 있었다.낮은 돌집이었다. 안은 덥고 시끄러웠다. 화덕에서 금을 녹이는 사람, 녹인 금을 얇게 펴는 사람, 편 판을 둥글게 잘라 내는 사람. 맨 안쪽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동전 조각을 두 틀 사이에 끼우고, 다른 사람이 위에서 내리쳤다. 쾅. 무늬가 찍혔다.한 번 칠 때마다 틀 사이 조각의 자리가 조금씩 달랐다. 무늬가 한쪽으로 쏠린 동전이 절반쯤이었다.“이게 왕도 금화입니다.” 조폐소 서기가 말했다. “백 년째 이렇게 찍었지요.”루엔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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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사라지는 은화

“스물하나 가운데 하나.”클라리사가 장부를 탁자에 내려놓았다.“하르트 상단 창구로 한 달 동안 들어온 은화가 이천백 닢이야. 그 가운데 새 은화가 백 닢. 조폐소에서 한 달에 내보낸 새 은화는 만 이천 닢이고.”루엔은 숫자를 받아 적었다. 만 이천 닢이 나갔는데, 돌아오는 건 스물하나에 하나.“장터는 어떻습니까.”“테오가 세고 있어.”테오는 저녁이 다 되어서 돌아왔다. 얼굴이 햇볕에 벌겋게 익어 있었다. 손에 밀랍판을 들고 있었다. 장터 빵집, 푸줏간, 포목점 앞에 반나절씩 서서 손님이 내는 은화를 셌다고 했다.“이백서른 닢.” 테오가 밀랍판을 내밀었다. “새 은화는 세 닢. 그것도 둘은 외지 사람이 냈어. 왕도 사람은 한 닢.”“새 은화는 어디 있습니까.”“어디 있긴.” 테오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푸줏간 아저씨한테 물어봤어. 새 은화 받으면 어떻게 하냐고. 항아리에 넣는대. 마누라가 그러래. 톱니 있는 건 아끼라고.”“아낀다는 건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그렇지.”“쓰지 않는 돈은 돈이 아니라 은입니다.”테오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 말, 푸줏간 아주머니한테 해 봐. 칼 들고 나오실걸.”*루엔은 한참 말이 없었다.클라리사가 루엔 얼굴을 보았다. 테오도 보았다. 두 사람 다 루엔이 어떤 얼굴일 때 무엇을 셈하는지 알았다. 지금 얼굴은 남의 셈이 아니라 자기 셈을 되짚는 얼굴이었다.“제가 빠뜨렸습니다.”“뭘.”“새 은화와 옛 은화를 같은 값으로 받게 두었습니다. 조폐소도, 세금 받는 곳도, 하르트 창구도. 새 은화 한 닢이나 가장자리가 반쯤 깎인 옛 은화 한 닢이나, 은화 한 닢입니다.”루엔은 탁자 위에 두 닢을 나란히 놓았다. 톱니가 반듯한 새 은화. 테두리가 들쭉날쭉한 옛 은화.“둘 다 은화 한 닢 값이면, 누구든 깎인 쪽을 내고 좋은 쪽을 남깁니다. 저라도 그렇게 합니다. 푸줏간 아주머니가 옳습니다.”전생에서 읽은 옛 나라 돈 이야기가 있었다. 나쁜 돈이 좋은 돈을 몰아낸다. 루엔은 그 한 줄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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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십이만 대군

전령은 새벽에 왔다.말이 성문 앞에서 쓰러졌다. 전령은 쓰러진 말을 두고 걸어서 왕궁으로 들어갔다. 해가 뜨기 전에 온 왕도가 알았다.동쪽 마르케스 왕국이 국경을 넘었다.루엔이 그 소식을 들은 건 공방 창구를 여는 때였다. 빵을 사러 나갔던 테오가 빵 없이 뛰어 들어왔다.“마르케스가 넘어왔대. 국경 성채 둘이 벌써 떨어졌대. 그리고—”테오가 숨을 골랐다.“십이만이래.”*마르케스의 포고문이 장터 돌기둥에 붙은 건 사흘 뒤였다. 누가 붙였는지 아무도 몰랐다. 경비대가 떼어 냈지만, 그 전에 수백 명이 읽었다.「마르케스 총사령 벨록 공작이 십이만 대군을 이끌고 베스트리아에 묻는다. 동쪽 세 고을을 내놓겠는가, 왕도를 내놓겠는가.」아래에 한 줄이 더 있었다.「적색탑의 불이 우리와 함께한다. — 장로 루프레히트 페르난의 이름으로.」루엔은 떼어 낸 포고문 사본을 받아 그 마지막 줄을 오래 보았다.디트마르가 졸업식 날 복도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동쪽 손님을 자주 만난다. 손님들 신발에 묻은 흙이 우리 쪽 흙이 아니다.두 번 온 편지를 두 번 거절했다. 세 번째는 편지가 아니라 불로 왔다.*귀족 회의는 왕궁 큰 방에서 열렸다.루엔은 벽 쪽 긴 의자 끝에 앉았다. 왕이 부른 자리였다. 귀족도 기사도 아닌 사람이 앉는 의자였다. 앞쪽 탁자에는 동쪽 영주들, 재무를 맡은 사람들, 기사단장들이 앉았다. 탁자 한가운데에는 동쪽 국경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회의는 처음부터 무거웠다.“십이만이오.” 동쪽 큰 영지의 영주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 왕국이 모을 수 있는 병사를 다 모아도 사만이 안 되오. 세 고을을 내주고 강화를 청해야 하오.”“세 고을을 내주면 다음엔 여섯 고을을 달라 할 거요.”“그럼 왕도를 내주자는 거요?”목소리가 커졌다. 누가 탁자를 쳤다. 왕 레지날드 2세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왕 옆에 선 늙은 장수 하나도 말이 없었다. 희끗한 머리를 짧게 깎았고, 왼쪽 귀가 반쯤 없었다. 장군 레오폴트라고 했다.한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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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창보다 뒷간

레오폴트의 본진은 메를 강 서쪽 둔덕 위에 섰다.링겐 고개에서 하루 반 걸음 떨어진 자리였다. 강이 둔덕 발치를 휘돌아 남쪽으로 흘렀다. 둔덕 뒤로는 참나무 숲, 앞으로는 가을걷이가 끝난 빈 밭. 마르케스 선봉이 고개를 넘어 강 동쪽에 진을 쳤다는 소식은 이틀 전에 왔다.본진에 닿은 첫날, 루엔은 병사들 눈길을 받았다.막료 천막 옆을 지날 때마다 병사들이 곁눈질을 했다. 소문이 먼저 와 있었다. 왕이 보낸 마법사. 땅이 돈다는 걸 셈으로 밝힌 사람. 그런데 붉은 망토도, 푸른 망토도 두르지 않았다. 지팡이도 없었다. 허리에 찬 건 밀랍판과 작은 쇠잔 하나였다.“저게 마법사야?” 모닥불 가에서 누가 말했다.“빛 안 나는 마법을 쓴대.”“빛이 안 나면 마법을 쓰는지 안 쓰는지 어떻게 알아.”“그러니까 말이야.”테오가 옆에서 걷다가 킥킥 웃었다. 루엔은 그 말을 셈해 보았다. 옳은 물음이었다. 빛이 안 나면, 보는 사람은 알 수 없다. 여섯 살 겨울, 오스윈의 오두막에서 코넬이 한 말과 같았다. 꺼졌어? 아니, 켜지지도 않았네.“답해 줄까?” 테오가 물었다.“보여 줄 일이 생기면 보일 겁니다.”“그게 답이야?”“지금은 그게 가장 정확한 답입니다.”첫 작전 회의는 그날 저녁, 장군 천막에서 열렸다.기사단장 여섯, 궁수대장 둘, 공병대장 하나, 병참관 하나. 그리고 루엔. 탁자 위에는 강과 둔덕과 밭이 그려진 지도가 있었다. 지도 가장자리를 네 귀퉁이에서 단검 네 자루가 누르고 있었다.“적 선봉 기병이 오천, 보병이 만 남짓.” 정찰대장이 보고했다. “적색탑 마법사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붉은 천막이 몇 채 보였습니다.”기사단장들이 창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구의 기사가 앞줄에 서느냐, 기병 돌격을 어느 밭으로 하느냐. 목소리가 높았다. 다들 싸움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루엔은 들으면서 밀랍판에 적었다. 그러다 손을 들었다.“화살이 몇 발 있습니까.”천막 안이 잠깐 멈췄다. 기사단장 하나가 눈썹을 올렸다. 첫 회의에서 무기 이야기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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