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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무색탑의 수학자: Chapter 61 - Chapter 70

88 Chapters

61화. 미는 자

목수 조합장은 나무 자 두 개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 보았다.자 두 개는 길이가 같았다. 둘 다 한 뼘 반. 결 고운 배나무였다. 한쪽 면에 눈금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눈금 사이가 고르지 않았다. 왼쪽 끝에선 넓고, 오른쪽으로 갈수록 좁아졌다. 끝에 가서는 거의 붙어 있었다.“자가 삐뚤게 새겨졌소.” 조합장이 말했다.“일부러 그렇게 새겼습니다.” 루엔이 말했다.조합 회관 탁자 둘레에 목수 여남은 명이 모여 있었다. 지난해 봄에 교구 모래 물통을 짠 사람들이었다. 루엔이 그린 층 그림대로 통 삼백 개를 짰다. 그 뒤로 조합 사람들은 이 깐깐한 학생이 하는 말을 한 번은 들어 주었다.한 번은.“곱셈을 해 보겠습니다.” 루엔이 자 두 개를 나란히 붙였다. “열일곱에 스물셋.”아래 자의 첫 눈금에 위 자의 열일곱을 맞췄다. 아래 자에서 스물셋을 찾았다. 그 위에 있는 위 자의 눈금을 읽었다.“삼백아흔하나.”조합장이 셈판을 끌어당겼다. 조약돌을 놓았다. 한참 걸렸다.“… 삼백아흔하나.”탁자 둘레가 웅성거렸다.*로그표는 곱셈을 덧셈으로 바꾼다. 두 수의 칸을 찾아 더하고, 그 합의 칸을 거꾸로 찾으면 곱이 나온다.더하기는 길이로도 할 수 있었다. 막대 두 개를 이어 붙이면 길이가 더해진다.그래서 루엔은 로그표의 값을 길이로 바꿨다. 자에 눈금을 새기되, 수 자체가 아니라 로그표의 값만큼 떨어진 자리에. 그러면 자 두 개를 밀어서 길이를 더하는 것만으로 곱셈이 되었다. 거꾸로 밀면 나눗셈이 되었다.셈판도 표도 필요 없었다. 자 두 개와 눈.“글을 몰라도 됩니까.” 늙은 목수 하나가 물었다.“숫자만 읽으시면 됩니다. 조합에서 쓰는 숫자 표시 그대로 새겼습니다.”“끝자리는.”“끝자리는 안 나옵니다.” 루엔은 그 말을 할 때 조금 괴로웠다. “셋째 자리까지만 믿을 수 있습니다. 삼백아흔하나는 맞았지만, 자로 읽으면 삼백구십 조금 넘게까지만 보입니다. 끝자리가 필요한 셈은 표로 하십시오.”“목수한테 끝자리는 필요 없소.” 조합장이 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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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일곱에서 여덟 할

루프레히트 페르난은 학교 정문으로 걸어 들어왔다. 말을 타지 않았다. 호위도 둘뿐이었다.그래도 복도가 비었다. 학생들이 벽에 붙어 섰다. 적색탑 장로, 옛 전쟁 마법사단장. 국경 싸움 이야기에 빠지지 않는 이름이었다.쉰 중반의 곧은 사내였다. 오른쪽 뺨에서 목까지 오래된 화상 자국이 번져 있었다. 걸음이 고르고 소리가 없었다. 디트마르와 같은 턱이었다. 다만 디트마르처럼 들지 않았다. 들 필요가 없는 턱이었다.디트마르는 정문 앞에서 아버지를 맞았다. 허리를 깊이 숙였다. 루프레히트는 아들의 어깨에 손을 한 번 얹었다가 뗐다. 그게 인사의 전부였다.“시범은 오후다.” 교장이 루엔에게 말했다. “성 밖 옛 사격장. 넷째 고리 이상은 성벽에서 본다.”“무슨 시범입니까.”“체인 라이트닝.”*옛 사격장은 성벽에서 천 걸음쯤 떨어진 빈 들이었다.들 한가운데 허수아비 일곱이 한 줄로 서 있었다. 짚으로 만들고 낡은 쇠사슬 갑옷을 입혔다. 허수아비 사이는 고르지 않았다. 어떤 사이는 좁고 어떤 사이는 넓었다. 줄 끝에 하나, 갑옷을 입히지 않은 허수아비가 더 서 있었다.루엔은 성벽 위에서 원시를 세웠다. 들이 가까워졌다.루프레히트가 허수아비 줄 앞 서른 걸음에 섰다. 영창이 들리지 않았다. 너무 멀었다. 대신 그의 두 손 사이에서 빛이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번쩍.하얀 선이 첫 허수아비에 꽂혔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둘째로 튀었다. 셋째. 넷째. 눈이 따라가지 못했다. 한순간에 일곱이 전부 빛났다.루엔은 번쩍하는 순간 셌다. 하나, 둘, 셋.천둥이 성벽을 때렸다. 발밑 돌이 울렸다. 학생들이 움찔했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셋. 천 걸음. 맞았다.루엔의 눈은 셈하는 동안에도 원시 너머에 있었다. 허수아비 일곱이 연기를 뿜었다. 쇠사슬 갑옷이 벌겋게 달아 있었다.줄 끝, 갑옷 없는 허수아비는 멀쩡했다.*루프레히트는 세 번 더 쐈다. 허수아비를 바꿔 세워 가며.루엔은 매번 셌고, 매번 적었다. 번쩍과 천둥 사이 박자. 튄 순서. 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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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삼십 년 만의 글씨

루엔의 수첩에는 네 해 가까이 지우지 않은 줄이 하나 있었다.「사서님: 가까운 글씨 흐림. 멀면 읽음.」열한 살 초겨울, 지하 서고에 처음 빛을 끌어온 날 적은 줄이었다. 사서 오드리크는 햇빛 아래서도 작은 글씨를 팔 길이만큼 떼어 보았다. 팔이 모자라면 책을 탁자에 세우고 두 걸음 물러나 읽었다. 그래도 안 되는 글씨는 서기 학생에게 읽어 달라고 했다.그때 루엔은 까닭을 알았다. 눈 속의 유리가 늙어서 가까운 것에 초점을 못 맞추는 것. 볼록한 유리를 눈앞에 대면 된다는 것도 알았다.다만 그때는 볼록한 유리를 눈앞에 대는 법을 몰랐다. 이 세계가.이제는 루엔이 알았다. 공기로 원시와 근시를 수백 번 굳혀 본 뒤였다. 렌즈가 얼마나 휘면 어디서 빛이 모이는지 손끝이 기억했다.*유리 공방 「세 가마」는 강가 골목 끝에 있었다. 지난해 봄에 스무 알 모래시계를 구운 곳이었다.주인 비브케 크람은 쉰 줄의 여자였다. 두 팔에 오래된 데인 자국이 얼룩처럼 흩어져 있었다. 목소리가 걸걸했다. 루엔이 들어서자 가마 앞에서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스무 알 학생이군. 이번엔 몇 알?”“알이 아닙니다. 볼록한 유리 두 알입니다.”루엔은 종이를 내밀었다. 그림이었다. 손톱보다 조금 큰 동그란 유리. 한쪽 면이 볼록하고 한쪽 면은 평평했다. 옆에 휘는 정도를 적은 숫자.비브케가 그림을 보고, 처음으로 가마에서 몸을 돌렸다.“읽는 돌이네.”“읽는 돌이 무엇입니까.”“수도원에서 가끔 주문하오. 반쪽 공처럼 볼록한 유리 덩이. 책 위에 올려놓고 굴리면 글씨가 커 보이지. 늙은 수사들이 쓰오.” 비브케가 그림을 톡톡 쳤다. “이건 그것보다 훨씬 얇고 작소. 이걸로 뭘 하오?”“눈앞에 겁니다. 두 알. 양쪽 눈에 하나씩. 책 위가 아니라.”비브케가 루엔을 한참 보았다.“눈앞에.”“예.”“유리를.”“예. 틀에 끼워서 코 위에 얹습니다.”비브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마 불이 탁탁 튀었다. 그러다 걸걸하게 웃었다.“읽는 돌을 이십 년 구웠소. 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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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칠 할

여름에는 파리가 먼저 왔다.푸줏간 뒷문, 생선 가게 좌판, 골목 도랑. 해가 길어지자 파리가 구름처럼 일었다. 그리고 파리열이 돌았다. 열은 잿빛열보다 낮았다. 대신 배가 쏟아졌다. 하루에 열 번, 스무 번. 어른은 사흘이면 일어났다. 어린아이는 몸의 물이 먼저 빠져나갔다.루엔은 세 칸짜리 계량 숟가락을 이백 개 주문했다.만든 건 봄에 쇠 원본 자를 벼린 조합 대장장이였다. 숟가락 자루마다 칸이 셋. 큰 칸은 설탕, 작은 칸은 소금, 가장 작은 칸은 쓸 일이 없으면 비워 두는 칸. 오렐이 교구 이름으로 골목마다 나눠 주었다. 모래 물통 그림처럼, 글자 대신 손가락 그림을 붙였다.「끓여 식힌 물 한 되. 큰 칸 여섯. 작은 칸 반.」나눠 준 지 이틀째에 루엔은 교구 부엌에 갔다. 부엌 아낙들이 병실에 낼 물을 타고 있었다.아낙 하나가 되에 물을 받았다. 루엔은 그 되를 보았다. 한 번 더 보았다.“그 되는 어디 되입니까.”“어디 되라니. 되지.”“장터 되입니까, 상인 조합 되입니까.”아낙이 되를 뒤집어 바닥을 보았다.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장터에서 쓰는 되였다. 상인 조합 되보다 한 할쯤 작았다.“숟가락 칸은 조합 되에 맞춰 두었습니다. 장터 되로 타면 한 할 짭니다.”“한 할쯤이야.”“아이 몸에 들어가면 한 할이 아닙니다. 목이 더 마릅니다.”아낙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부엌 선반 맨 위에서 먼지 앉은 되를 내렸다. 바닥에 상인 조합 검인이 찍혀 있었다. 봄에 교구가 사 두고 한 번도 안 쓴 되였다.루엔은 그날 숟가락 그림에 한 줄을 더했다. 되 그림 옆에 조합 검인 모양을 그렸다. 「이 표시가 있는 되로.」*오렐의 병실은 교구 성당 뒤 창고였다.봄에 오렐이 비웠다. 침상이 열둘. 바닥은 날마다 물로 닦았다. 창은 낮에 열고 밤에 닫았다. 헌금 그릇은 두지 않았다. 병자 기도 헌금 은화 반 닢을 못 내는 사람도 여기선 누웠다.손이 문제였다.오렐은 침상 사이를 오갈 때마다 손을 씻었다. 스무 알. 그런데 침상이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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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백스물여덟 해에 하루

처음 이상하다고 한 사람은 오드리크였다.안경을 쓴 지 한 달. 오드리크는 도서관 지하 서고에서 거의 올라오지 않았다. 삼십 년 동안 못 읽은 책이 많았다. 끼니는 서기 학생들이 날라 갔다. 그릇은 반쯤 비어서 돌아왔다.어느 날 오드리크가 계단을 올라와 루엔을 불렀다. 손에 누렇게 바랜 책 한 권.“자네, 날짜 좋아하지.”“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틀리면 못 견딜 뿐입니다.”“그게 좋아하는 걸세.” 오드리크가 책을 펼쳤다. “성 힐데 성당 기록이야. 도시 동쪽 언덕에 있던 옛 성당. 이백 해 전에 무너졌지. 이건 그 성당 사제들이 대대로 적은 거고.”쪽마다 짧은 줄이 적혀 있었다. 해마다 한 줄. 날짜와 짧은 말.「봄. 해가 제단에 닿음. 교단 달력 춘분날.」「봄. 해가 제단에 닿음. 춘분날 이틀 전.」「봄. 해가 제단에 닿음. 춘분날 사흘 전. 하늘이 흔들리는 징조.」루엔은 줄을 따라 손가락을 내렸다.*오드리크가 설명했다.성 힐데 성당은 동쪽 벽에 좁은 창이 하나 있었다. 일 년에 두 번, 해가 정동쪽에서 뜨는 날에만 첫 햇빛이 그 창을 지나 제단 한가운데 닿게 지었다.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낮과 밤이 같은 날.“지은 사람들은 그날을 교단 달력의 춘분날에 맞췄지. 처음 몇십 해는 맞았다네. 그런데 해가 갈수록 햇빛이 춘분날보다 먼저 제단에 닿았어. 하루. 이틀. 사흘.”“사제들은 뭐라고 했습니까.”오드리크가 마지막 줄을 짚었다. 그 옆 여백에 다른 글씨로 두 줄이 더 있었다.「하늘은 돌고 땅은 멈춰 있다. 하늘이 흔들리면 징조다.」“교단은 그렇게 가르치지. 땅은 가운데 멈춰 있고, 해와 달과 별이 그 둘레를 돈다고. 도는 하늘이 조금씩 어긋나면 그건 하늘의 뜻이 흔들리는 거라고.” 오드리크가 안경 너머로 루엔을 보았다.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루엔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누가 도느냐. 그 물음은 청색탑 항해사들 앞 칠판에서도 한 번 고개를 들었다. 텔레포트 언덕에서도. 그때마다 루엔은 그 물음을 적지 않았다. 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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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부서진 상자

클라리사가 기숙사 문을 두드린 건 저녁 종이 울리기 전이었다.두드렸다기보다 때렸다. 루엔이 문을 열자 클라리사가 서 있었다. 머리가 반쯤 풀려 있었다. 늘 단단히 땋던 머리였다.“같이 가 줘.”“어디로 갑니까.”“황색탑 도착 마당. 우리 상단 짐이 떨어졌어.” 클라리사가 숨을 삼켰다. “쿠르트 아저씨 다리가 부러졌어.”루엔은 수첩과 쇠잔만 챙겼다.*황색탑 도착 마당은 도시 남동쪽 성벽 안에 있었다.돌을 깐 둥근 마당. 바닥 한가운데 지름 스무 걸음쯤 되는 원진이 파여 있었다. 마당 둘레는 사람 키 두 배 되는 돌담이었다. 담 안쪽에 짚단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먼 데서 온 짐이 튕겨 담에 부딪히는 일이 잦아서였다.오늘은 짚단으로 모자랐다.마당 북동쪽 구석에 나무 상자가 부서져 있었다. 쇠띠를 두른 두꺼운 상자였다. 쇠띠가 휘었다. 판자가 쪼개졌다. 안에 든 것이 돌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비단 두루마리, 은으로 된 작은 잔들. 보움 상단 일꾼들이 무릎을 꿇고 주워 담고 있었다.그 옆에 사람이 누워 있었다.마흔 가까운 사내였다. 왼쪽 다리가 무릎 아래서 이상한 쪽으로 꺾여 있었다. 황색탑 의원이 부목을 대고 있었다. 사내는 이를 악물고 소리를 내지 않았다.클라리사가 그 곁에 무릎을 꿇었다.“아저씨.”“아가씨가 왜 여기를.” 쿠르트가 웃으려 했다. 잘 안 됐다. “짐은 괜찮소? 은잔이 몇 개 굴렀는데.”“짐 얘기 하지 마.”클라리사는 쿠르트의 손을 잡았다. 루엔은 조금 떨어져 섰다. 클라리사가 어릴 때부터 보움 상단 수레 곁에 늘 있던 사람이라고 했다. 첫 산가지 놓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도 쿠르트였다고.*마당 한가운데 원진 곁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마흔 중반의 사내. 키가 작고 배가 조금 나왔다. 이마가 넓었다. 황색탑 누런 옷 소매에 먹물 얼룩이 있었다. 허리에 가죽 끈으로 묶은 공책을 차고 있었다. 한쪽 무릎을 조금 절었다. 오늘 다친 걸음이 아니었다. 오래된 걸음이었다.그 사람은 공책을 펴고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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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튕긴 쪽을 세다

파비오 슈틸은 이레 뒤에 기숙사로 왔다.혼자였다. 허리에 공책을 차고, 오른손에 열쇠 하나를 쥐고. 사감 이르마 뮐이 황색탑 여섯째 고리 마법사를 복도에 세워 두고 한참 어쩔 줄 몰랐다.“그 기록 말입니다.” 파비오가 루엔에게 말했다. 인사도 없이. “한 사람이 적은 것.”“예.”“제가 적었습니다.”루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이레 전 들것이 나간 뒤 원진 곁에서 공책을 쥐고 있던 손을 보았다.“보여 주시겠습니까.”파비오는 열쇠를 내밀었다.“황색탑 사무소 뒤 창고입니다. 열 해 치. 탑 어른들은 난류가 제멋대로가 아니면 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대답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입을 닫았습니다.” 파비오가 잠깐 말을 멈췄다. “적는 건 안 닫았습니다.”*황색탑 사무소 뒤 창고는 먼지 냄새가 났다.벽 쪽에 나무 상자가 셋 쌓여 있었다. 황색탑 서기 둘이 상자를 끌어냈다. 뚜껑에 먼지가 손가락 한 마디 두께로 앉아 있었다. 서기 하나가 입으로 불었다. 먼지가 구름처럼 일었다. 둘이 한참 기침을 했다.상자 안에 공책이 가득했다. 파비오가 허리에 찬 것과 같은 공책. 가죽 끈으로 묶은. 권마다 등에 해가 적혀 있었다.루엔은 첫 권을 폈다.한 줄에 한 번. 날짜. 떠난 곳, 닿은 곳. 탑 측량 기록으로 본 거리. 옮긴 것. 그리고 끝에 두 칸.「튕긴 쪽.」 「몇 걸음.」가끔 한 칸이 더 있었다. 「다친 사람.」글씨가 작고 곧았다. 첫 권부터 마지막 권까지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루엔은 권을 넘기다 손을 멈췄다. 어떤 줄은 여백에 짧은 말이 있었다.「몸이 뜨듯 가벼웠다.」「발이 땅에 박혔다.」“이것도 적으셨습니까.”“몸이 그렇게 느꼈습니다.” 파비오가 말했다. “숫자로 적을 수 없어서 말로 적었습니다.”“숫자로 적을 수 없는 것도 적는 게 맞습니다.”파비오가 루엔을 보았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눈이었다.*루엔은 클라리사를 불렀다. 셈이 많았다.셋이서 창고 바닥에 앉았다. 파비오의 공책은 모두 이백마흔세 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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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다섯 번째 고리

루엔의 「원래 그렇다」 수첩 앞쪽에 네 해 묵은 줄이 하나 있었다.「종은 원래 늦다. — 학교 사람 모두. 열한 살 가을.」입학하고 한 달쯤 됐을 때 적은 줄이었다. 한낮 종이 울릴 때마다 루엔은 마당 해시계를 보았다. 그림자는 늘 한낮을 조금 지나 있었다. 어떤 날은 조금, 어떤 날은 많이. 식당에서 그 말을 하자 다들 웃었다. 종은 원래 늦어. 그 말을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어서, 루엔은 이름 대신 「학교 사람 모두」라고 적었다.네 해 동안 고침 칸은 비어 있었다.가을이 끝나 갈 무렵, 루엔은 그 칸을 채워 보기로 했다.*종지기 게릭은 종탑 아래 작은 방에 살았다.예순이 넘은 노인이었다. 등이 굽었는데 팔뚝은 굵었다. 마흔 해 동안 종 줄을 당긴 팔이었다. 말이 없었다. 식당에서도, 복도에서도. 종이 대신 말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방문 앞에서 인사를 하고 말했다.“종이 날마다 조금씩 늦습니다.”게릭이 루엔을 보았다. 위에서 아래로.“한낮 종은 해가 가장 높을 때 울려야 합니다. 마당 해시계로 보면 한낮 종이 한 달 동안 한 번도 제때 울리지 않았습니다. 가장 적게 늦은 날이 맥박 쉰, 가장 많이 늦은 날이 모래시계 반 번의 반. 여기 적었습니다.”루엔이 종이를 내밀었다. 날짜마다 두 칸. 그림자가 한낮에 닿은 때, 종이 울린 때.게릭은 종이를 받지 않았다.“마흔 해.”목소리가 컸다. 귀가 조금 어두운 사람의 목소리였다. 종을 너무 오래 곁에서 들은 귀.“마흔 해 동안 이 종을 쳤다. 학생이 태어나기 전부터. 비 오는 날도, 눈 오는 날도. 한 번도 안 빼고.” 게릭이 방문을 붙잡았다. “그걸 한 달 보고 늦는다고.”“한 달 동안 적은 것입니다. 마흔 해를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문이 닫혔다. 크게.복도 끝에서 보고 있던 테오가 다가왔다.“내가 뭐랬냐. 저 영감한테 종 얘기 하면 안 된다니까.”“종 얘기를 해야 종이 맞습니다.”“그러니까 넌 진짜.”*한 달 뒤, 첫눈이 온 날이었다.한낮, 수업 시간. 루엔은 헤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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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한 줄의 빛

보이지 않는 빛을 찾으려면 먼저 보이게 해야 했다.루엔은 햇빛을 공기 세모 기둥에 통과시켰다. 둘째 고리 때부터 해 온 분광이었다. 창고 흰 벽에 색 띠가 펼쳐졌다. 빨강, 주황, 노랑, 풀빛, 파랑, 보라.보라 너머는 벽이었다. 그냥 흰 벽.루엔은 그 흰 벽을 오래 보았다. 전생에서는 알았다. 보라 너머에도 빛이 있다. 너무 빨리 떨어서 눈이 따라가지 못할 뿐. 알고 있는 것과 보이는 것은 달랐다. 보이지 않는 걸 골라낼 수는 없었다.*답은 세 가마 공방에 있었다.비브케가 가마 옆 자루에서 돌을 한 줌 꺼내 보였다. 보랏빛, 풀빛, 투명한 것이 섞인 반들반들한 돌. 모서리가 네모반듯하게 쪼개져 있었다.“녹임돌이오. 유리 녹일 때 한 줌 넣으면 불이 덜 들고 잘 녹지. 광산에서 사 오는 거요.”“이 돌을 해에 대 보신 적 있습니까.”“해에?” 비브케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해에 대면 뭐가 되오.”“어떤 돌은 해 아래서 제 빛이 아닌 빛을 냅니다. 받은 빛을 다른 빛으로 바꿔서.”비브케는 대답 대신 돌 하나를 공방 문간 햇빛 속에 놓았다. 둘이 쪼그려 앉아 들여다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 햇빛 아래서는 햇빛이 너무 밝았다.“어두운 데서 해야 합니다.”그날 오후 루엔은 창고 문을 거의 닫고 틈으로 가는 햇빛 한 줄기만 들였다. 세모 기둥으로 펼쳤다. 흰 벽에 색 띠. 그리고 보라 너머, 아무것도 없는 흰 벽에 녹임돌 가루를 밀랍으로 발라 두었다.보라 너머가 빛났다.희미하게. 푸르스름하게. 아무 빛도 닿지 않는 자리에서 돌가루가 스스로 빛나는 것 같았다. 그곳에 빛이 닿고 있었다. 눈에 안 보이는 빛이. 돌이 그걸 받아 눈에 보이는 빛으로 바꿔 내고 있었다.문간에 선 비브케가 숨을 들이켰다.“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는데.”“있습니다. 눈이 못 볼 뿐입니다. 이 돌은 봅니다.”비브케는 한참 벽을 보다가 제 자루를 내려다보았다. 스무 해 동안 녹임돌을 한 줌씩 가마에 던져 넣었다.“돌한테 눈이 있을 줄은 몰랐소.”루엔은 녹임돌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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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넓은 빛

알림은 대성당 문에 붙었다.「한낮, 대성당 광장. 신성광으로 병을 태운다. 앓는 이는 누구든 오라. 헌금 없음. — 백색탑 율리안 모어.」오렐이 그걸 베껴 와 루엔에게 내밀었다. 손이 조금 떨렸다.“헌금 없음.” 루엔이 그 줄을 읽었다.“백색탑이 헌금을 받지 않는 건 처음입니다.” 오렐이 말했다. “병실 소문 때문입니다. 빛으로 상처를 씻는다는.”“율리안 모어는 누구입니까.”“젊은 마법사입니다. 셋째 고리 사제로 들어와서 올해 다섯째 고리를 쌓았다고 들었습니다. 착실한 사람입니다. 대성당에서 가장 늦게까지 남아 기도하는.” 오렐이 잠깐 말을 멈췄다.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루엔은 알림을 다시 보았다. 병을 태운다.“빛으로 병을 태우려면 박자를 골라야 합니다.”“그분도 아시겠지요.”“모르시면 어떻게 됩니까.”오렐은 대답하지 못했다.*한낮은 수업 시간이었다.헤일로크의 영창학. 루엔은 창밖 해를 보고 있었다. 해가 가장 높이 올랐다. 게릭의 한낮 종이 울렸다. 이제는 그림자가 금에 닿고 맥박 열 안쪽에서 울렸다.종소리가 채 끝나기 전에 강의실 문이 열렸다. 테오였다. 숨이 차 있었다.“광장. 사람 엄청 많아.”루엔은 헤일로크를 보았다. 헤일로크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대성당 쪽 하늘이 이상하게 밝았다.“가게.”*대성당 광장에 이백 명이 넘게 모여 있었다.앓는 사람, 앓는 아이를 안은 어머니, 구경 온 사람. 광장 한가운데 나무 단 위에 흰 옷의 젊은 사내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말랐다. 앳된 얼굴이었다. 소매가 손등까지 덮었다.율리안 모어가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빛이 쏟아졌다.신성광이었다. 그런데 루엔이 본 어떤 신성광과도 달랐다. 금빛이 아니었다. 너무 희었다. 흰빛 끝에 푸른 기가 돌았다. 눈이 시렸다. 한낮 해 아래서도 광장 돌바닥에 그림자가 하나 더 생길 만큼 밝았다.“눈을 드십시오!” 율리안의 목소리가 높고 떨렸다. “빛을 받으십시오! 얼굴에, 눈에, 살갗에! 병이 타서 사라집니다!”사람들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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