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졸업식은 해가 가장 높이 뜰 때 시작한다고 적혀 있었다.
학교가 선 지 백 해가 넘었지만, 그 시각에 식이 시작된 적은 없었다. 종이 늦었기 때문이다. 조금씩, 날마다 다르게.
올해는 달랐다.
루엔은 강당 창가에 서서 마당의 해시계를 보았다. 막대 그림자가 돌판의 가운데 금에 닿았다. 그림자 끝이 금을 덮는 바로 그때, 종탑에서 첫 종이 울렸다.
둘째, 셋째. 열두 번.
강당 안이 조용해졌다. 늙은 교수 몇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교장 마그누스 할베르크가 단상에서 모래시계를 뒤집으려다 손을 멈췄다. 뒤집을 필요가 없었다.
루엔은 종탑을 올려다보았다.
종지기 게릭이 난간 너머로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시계를 한 번, 강당 창을 한 번. 창가의 루엔과 눈이 마주쳤다.
게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종탑 안으로 들어갔다.
“종이 맞았어.” 옆에서 테오 마일스가 속삭였다. “졸업식 날에.”
“한 해 반 걸렸습니다.”
“게릭 영감이 한 해 반 동안 몰래 연습한 거야?”
“몰래는 아닙니다. 해시계 앞에 날마다 서 계셨습니다. 다들 보았습니다.”
“그걸 연습으로 본 건 너 하나야.”
*
졸업장은 이름 순서로 받았다.
양피지 한 장. 맨 위에 학교 문장, 가운데 이름, 아래에 여섯 해 동안 받은 점수의 합과 교장의 서명.
루엔은 자리로 돌아와 졸업장을 무릎에 폈다. 점수 합을 보았다. 과목마다 받은 점수를 속으로 더했다.
끝자리가 하나 달랐다.
“또 뭐야.” 테오가 옆에서 물었다. 루엔 얼굴을 여섯 해 본 사람이었다.
“합이 하나 많습니다.”
“많으면 좋은 거잖아.”
“틀린 겁니다.”
식이 끝나자 루엔은 졸업장을 들고 단상으로 갔다. 교장은 서기를 불렀다. 서기가 점수 장부를 가져와 셈판에 다시 놓았다. 하나 많았다. 넷째 해 영창학 점수를 옮겨 적다 생긴 실수였다.
마그누스가 펜을 들어 끝자리를 긁고 고쳐 썼다. 그리고 옆에 작게 서명을 한 번 더 했다.
“이 학교에서 졸업장 점수를 깎아 달라고 온 학생은 네가 처음이다.”
“깎아 달라고 온 게 아닙니다. 맞게 해 달라고 왔습니다.”
“그게 그거다.” 마그누스가 웃었다. “그런데 네 앞으로 온 편지가 다섯 통이다. 오늘 아침에만.”
*
편지는 교장실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봉인이 있는 것이 네 통. 봉인 색이 다 달랐다.
붉은 밀랍. 적색탑. 펴 보니 한 줄이었다. 「두 번째다. 문은 아직 열려 있다. — 루프레히트 페르난.」
푸른 밀랍. 청색탑. 이졸드의 글씨였다. 탑주의 이름으로 연구원 자리를 권했다. 끝에 한 줄이 덧붙어 있었다. 「오지 않을 줄 안다. 그래도 적어 보내라는 분이 계셨다.」
누런 밀랍. 황색탑. 건설원장 오틸리에 브라이트. 이미 맺은 후원 계약을 탑 안 자리로 바꾸자는 제안이었다. 「후원보다 식구가 편하지 않나.」
검은 밀랍. 검은탑. 서명이 없었다. 「언젠가 우리 쪽 셈도 봐 주게.」 그게 다였다.
그리고 한 통이 더 있었다. 흰 봉투에 금박. 봉인은 없었다. 백색탑이었다.
「왕립 마법학교 졸업생 루엔 하르트에게. 경전을 뒤집는 셈은 어느 탑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 삼가라.」
루엔은 다섯 통을 나란히 놓았다. 부른 곳이 넷, 막은 곳이 하나.
“어디로 가겠느냐.” 마그누스가 물었다.
“어디로도 안 갑니다.”
교장의 눈썹이 올라갔다.
“탑에 들어가면 그 탑 셈을 합니다. 적색탑에 가면 불 셈만, 청색탑에 가면 물 셈만. 그런데 제 셈은 불과 물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을 하겠느냐.”
“공방을 차립니다. 왕도에.”
*
교장실을 나오자 복도 끝에 디트마르 페르난이 기대 서 있었다.
붉은 졸업 망토를 한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입은 거였다. 여섯 해 동안 디트마르는 망토를 한 번도 똑바로 입은 적이 없었다.
“아버지 편지 받았지.”
“예.”
“뭐라고 답할 거야.”
“안 간다고 답합니다. 두 번째니까 두 번째로.”
디트마르가 코로 웃었다. 그러고는 한참 창밖을 보았다. 마당에서 졸업생 가족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간다. 적색탑으로.”
“압니다.”
“아버지가 요즘 동쪽 손님을 자주 만나.” 디트마르가 목소리를 낮췄다. “누군지는 안 알려 줘. 탑 장로들끼리만 아는 일이야. 그런데 손님들 신발에 묻은 흙이 우리 쪽 흙이 아니더라.”
루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흙 색으로 셀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다만 디트마르가 흙을 보았다는 건 셀 만한 일이었다.
“루엔.”
“예.”
“전쟁터에서 보지 말자.”
디트마르가 망토를 고쳐 걸었다. 이번엔 똑바로.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루엔이 잡았다. 디트마르의 손바닥에는 여섯 해 동안 불 마법을 연습한 굳은살이 있었다.
“그래도 멋은 내가 낫다.”
“그건 셈하지 않겠습니다.”
디트마르는 웃으며 복도를 걸어갔다. 붉은 망토가 모퉁이에서 사라졌다. 루엔은 그 걸음 수를 세다가, 모퉁이까지 스물여섯에서 그만두었다.
*
공방 자리는 왕궁 앞 큰 장터에서 두 골목 들어간 곳이었다.
옛 양모 창고. 아래층은 넓고 위층은 좁았다. 보움 상단이 빌려 쓰다 비운 자리였다. 클라리사 보움이 아버지 아달베르트에게 받아 낸 값은, 루엔이 셈해 보아도 왕도 창고 값의 삼분의 이였다.
“어떻게 깎았습니까.”
“아버지한테 네 장부를 보여 드렸어.” 클라리사가 말했다. “세 해 치. 틀린 데가 한 군데도 없는 걸 보시더니 창고 값을 깎아 주셨어. 그 대신 하르트 상단 장부는 내가 본다는 조건.”
“하르트 상단.”
“네 이름으로 돈이 드나들 곳이 있어야지. 공방은 연구하고 검정하는 곳이잖아. 돈은 따로 두는 게 맞아. 한데 섞이면 네가 못 견딜걸.”
루엔은 그 말을 셈해 보았다. 맞았다.
“클라리사는 보움 상단 딸입니다. 아버님 장부는 누가 봅니까.”
“아버지가 보시지. 삼십 년 보셨어.” 클라리사가 소매를 걷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네 장부가 더 재밌어. 우리 아버지 장부엔 틀린 데가 있거든. 찾는 재미가 없어.”
“틀린 데가 있는데 찾는 재미가 없습니까.”
“어디가 틀렸는지 아버지도 알아. 알고 두시는 거야. 상인은 그래.”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네 장부는 틀린 데가 없어서, 찾으면 내가 이기는 거고.”
창고 문 위에 나무 간판이 둘 걸렸다. 왼쪽 「루엔 공방」, 오른쪽 「하르트 상단」. 목수 조합의 오토 브래그가 깎았다. 두 간판의 글자 높이가 같았다. 루엔은 자를 대 보려다 그만두었다. 오토가 먼저 대 보고 걸었을 사람이었다.
테오가 짐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도 여기 있을게.”
“테오는 어느 탑에서도 부를 겁니다.”
“아무 데서도 안 불렀어.” 테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너 혼자 두면 밥을 달아서 먹잖아.”
*
그 주 끝에 오틸리에 브라이트가 공방에 왔다.
황색탑 건설원장. 일곱째 고리의 마법사. 치마 끝에 늘 돌가루가 묻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창고를 한 바퀴 둘러보고, 들보를 손바닥으로 두드려 보고, 앉았다.
“탑 자리는 싫다고.”
“예.”
“그럼 후원 계약을 공방 이름으로 다시 쓰세.”
그녀가 계약서를 탁자에 폈다. 지난겨울 텔레포트 증명 직후에 맺은 것이었다. 받는 사람 이름만 「루엔 하르트」에서 「루엔 공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루엔은 첫 줄부터 읽었다. 한 줄씩. 손가락으로 짚으며.
오틸리에는 기다렸다. 서두르지 않았다. 텔레포트 기록을 넘길 때도 루엔이 이렇게 읽는 걸 본 사람이었다.
일곱째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황색탑은 루엔 공방에 해마다 금화 마흔 닢을 준다.」
“이 줄을 고쳐 주십시오.”
“액수가 적은가.”
“액수는 좋습니다. 금화가 어느 금화입니까.”
오틸리에가 입을 다물었다.
“케른바흐 조폐소 금화는 왕도 금화보다 가볍습니다. 제가 달아 보았습니다. 열 닢에 보리알 여섯 알쯤. 마흔 닢이면 스물넷. 해마다 왕도 금화 반 닢 가까이가 저울 위에서 사라집니다.”
“달아 보았다고.”
“지난겨울 계약서를 받은 날 밤에.”
잠깐 조용했다. 테오가 뒤에서 기침을 참았다.
오틸리에가 웃었다. 크게.
“우리 탑 금화가 가볍다는 건 우리 탑 사람도 다 아는 일일세. 모른 척할 뿐이지.” 그녀가 펜을 집었다. “뭐라고 고치면 되나.”
“「금화 마흔 닢, 한 닢씩 왕도 조폐소 저울로 달아 모자라면 모자란 만큼 더 채운다.」”
오틸리에는 그대로 적었다. 그리고 펜을 내려놓지 않은 채 루엔을 보았다.
“하나 묻지. 자네가 금화를 찍는다면, 그 금화는 저울에 달 필요가 없겠나.”
“달아야 합니다.”
“자네 금화도?”
“제 금화일수록 더 달아야 합니다. 다는 사람이 많아야 믿습니다.”
오틸리에는 계약서 맨 아래에 서명했다. 그리고 한 줄을 더 적었다.
「단, 루엔 공방이 규격 금화를 찍는 날부터는 그 금화로 준다.」
“왕실에서 자네를 부른 건 텔레포트 때문이지만,” 그녀가 일어나며 말했다. “왕 앞에 가거든 조폐소 얘기도 꺼내 보게. 이 줄을 헛말로 만들지 말고.”
*
그날 밤 클라리사가 하르트 상단 첫 장부를 폈다.
첫 칸에 적었다. 황색탑 후원, 금화 마흔 닢, 해마다. 둘째 칸. 루엔 공방 몫, 안경 번호와 미는 자 검정. 지난해 금화 열 닢 하고 은화 몇 닢.
셋째 칸은 비워 두었다.
“이건 뭐야?” 테오가 물었다.
“왕실.” 클라리사가 말했다. “아직 얼마인지 몰라.”
루엔은 장부 셋째 칸을 보았다. 빈칸이었다. 비어 있다는 게 적혀 있었다.
그는 창밖을 보았다. 종탑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저녁 종이 울렸다. 루엔은 해가 성벽 끝에 걸리는 것과 종소리를 함께 셌다.
맞았다.
루엔은 수첩을 꺼내 한 줄을 적었다. 「종은 원래 늦다. — 학교 사람 모두. 열한 살 가을.」 그 줄 옆에, 오늘 날짜로 고침 표시를 했다.
테오가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고친 사람 이름은 안 적어?”
“적습니다.”
루엔은 고침 표시 옆에 작게 적었다. 「게릭.」
테오가 그걸 보고 한참 웃었다. 클라리사는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내일 게릭 영감한테 가서 그거 보여 드려. 그 양반, 그거 보면 울걸.”
“우실 까닭이 없습니다. 맞는 걸 맞다고 적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는 거야.”
봄 싸움은 봄에 나지 않았다.빌린 돈으로 삯군을 들이고 공성 기구를 짰다. 투석기 팔 하나에 쓸 참나무를 베어 말리는 데만 두 달이 걸렸다. 여름엔 성채 둘레에서 작은 싸움만 오갔다. 가을비가 오자 링겐 고개 아랫길이 무릎까지 진창이 되었다.레오폴트는 서두르지 않았다.“성벽은 기다려도 안 무너진다. 사람은 서두르면 무너진다.”그렇게 두 번째 겨울이 왔다. 루엔은 열여덟 살이었고, 이른 봄 생일까지는 석 달이 남아 있었다.*메를 강 아래쪽, 본진에서 이틀 걸음 떨어진 벌판에 「모이는 진지」가 있었다.새로 뽑은 병사들이 거기서 창 쥐는 법을 배우고 본진으로 올라왔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농부의 아들들. 팔천 명 남짓. 진지는 본진보다 넓었고 본진보다 어수선했다.진지 끝에 야전 병원 천막이 셋 있었다.루엔은 첫 천막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냄새가 먼저 나왔다. 거적이 두 줄로 깔려 있었고, 거적마다 사람이 누워 있었다. 몇은 열에 떨었고, 몇은 거적째 젖어 있었다. 칼에 다친 사람은 안쪽 구석에 넷뿐이었다.천막 가운데서 종군 사제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마흔 줄의 키 큰 사람이었다. 목에 굵은 나무 묵주를 걸었다.“물로 몸을 씻지 마라. 물은 살갗 구멍을 열고, 열린 구멍으로 악한 기운이 든다. 기도로 버텨라. 때는 참회의 표시다.”앓는 병사들이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루엔은 설교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사제에게 물었다.“이 천막 사람들, 어디 물을 마십니까.”“진지 옆 개울이오.”“뒷간은 어디 있습니까.”사제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걸 묻는 마법사는 처음이라는 얼굴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천막 뒤를
봉화는 한 가지밖에 말하지 못했다.왔다.불이 오르면 적이 왔다는 뜻이었다. 몇이 왔는지, 어디로 왔는지, 기병인지 보병인지는 싣지 못했다. 그걸 알려면 봉화대 옆에서 말 탄 전령이 따로 달려야 했다. 본진에서 왕도까지 전령은 말을 갈아타며 이틀. 봄 싸움이 시작되면 이틀은 너무 길었다.루엔은 하르트령 망루 둘 사이에서 거울 신호를 처음 해 본 게 열두 살 여름이었다. 형이 보낸 첫 신호가 「대충 잘 지냄」이었다. 그때는 망루 둘, 거리 이십 리, 주고받는 사람도 둘이었다.이번엔 본진에서 왕도까지였다.*루엔은 점과 선 그림을 다시 폈다.이번엔 길이 아니라 산등성이를 점으로 찍었다. 황색탑 측량 기록에서 높은 곳만 골랐다. 한 점에서 다음 점이 보이는지. 보이면 선을 그었다. 산이 가리면 긋지 않았다.그다음은 셈이었다.탑을 촘촘히 세우면 탑 사이가 가까워 흐린 날에도 잘 보인다. 대신 탑이 많아진다. 신호 하나가 탑마다 한 번씩 받아 적히고 다시 쏘아진다. 탑이 많을수록 그 받아 쏘는 시간이 쌓인다.탑을 드문드문 세우면 빠르다. 대신 흐린 날 안 보인다. 안 보이면 멈춘다.루엔은 날씨 기록을 모았다. 하르트 서기들이 본진에 온 날부터 날마다 적은 반년 치, 그리고 하르트령 망루 둘이 몇 해 동안 적어 둔 것. 맑은 날, 흐린 날, 안개 낀 아침. 흐린 날에 거울 빛이 몇 리까지 보였는지 망루 둘로 재어 둔 값이 있었다. 이십오 리까지는 흐린 날에도 대개 보였다. 삼십 리가 넘으면 열흘에 사흘은 안 보였다.“이십 리 안팎으로 세웁니다.” 루엔이 레오폴트에게 말했다. “본진에서 왕도까지 탑 열여섯. 한 탑에서 받아 적고 다시 쏘는 데 작은 모래시계 네 번. 열여섯이면 예순네 번. 한 시간이 조금 넘습니다.”“한 시간.&rdqu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