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케른바흐까지 수레로 엿새가 걸렸다.
한겨울 길이었다. 오틸리에가 황색탑 수레를 내주었다. 루엔과 테오, 이졸드, 그리고 백색탑 참관인이 탔다. 참관인은 마흔 남짓의 사제였다. 흰 장갑을 벗지 않았다. 엿새 동안 거의 말하지 않았다. 밤마다 여관에서 무언가를 적었다.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마부는 천천히 몰았다. 루엔이 부탁했다. 언 길이었다.
케른바흐는 돌의 도시였다. 성벽이 두 겹이었고, 사 층 넘는 건물이 줄지어 서 있었다. 황색탑 마법 없이는 못 짓는다고들 하는 높이였다. 도시 한가운데 누런 돌탑이 솟아 있었다. 황색탑이었다.
도착 마당은 탑 바로 아래에 있었다. 아스테른 것보다 컸다. 원진 지름 스물다섯 걸음. 둘레 돌담, 안쪽 짚단.
그리고 원진 둘레 해 지는 쪽 절반에, 모래가 깔려 있었다.
한 뼘 두께. 판판하게 골라져 있었다. 원진 가장자리에서부터 금이 그어져 있었다. 반 걸음마다. 금 끝마다 작은 나무 말뚝에 숫자.
파비오가 모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허리에 공책을 차고.
“반 걸음마다 그었습니다.” 파비오가 말했다. 인사 대신.
“보았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
한겨울 첫 보름.
하늘은 맑았다. 바람이 찼다. 도착 마당 돌담 위에 황색탑 사람들이 줄지어 섰다. 서기, 견습생, 늙은 마법사들. 오틸리에가 원진 곁에 섰다. 치마 끝에 오늘은 돌가루가 없었다. 이졸드는 돌담 계단 중간에 섰다. 백색탑 참관인은 맨 앞, 흰 장갑을 낀 두 손을 모으고.
루엔은 원진에서 서른 걸음 떨어진 자리에 섰다. 해 지는 쪽이 아니라 해 뜨는 쪽으로. 테오가 옆에 섰다.
“자루가 언제 와.” 테오가 물었다.
“교장님은 아스테른 한낮 종에 보내십니다. 케른바흐 한낮은 그보다 먼저 옵니다. 동쪽이니까.” 루엔이 마당 해시계를 보았다. “여기 한낮에서 맥박 삼백칠십쯤 뒤에 옵니다.”
“그것도 맞아야 해?”
“그것도 맞아야 합니다.”
해시계 그림자가 북쪽 금에 닿았다. 케른바흐 한낮. 탑의 종이 울렸다.
루엔은 맥박을 짚었다.
백. 이백. 돌담 위가 조용했다. 삼백.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삼백오십.
삼백육십여덟.
원진 한가운데 자루가 나타났다.
가을에 셈한 삼백칠십에서 맥박 둘. 루엔은 그 둘을 셀 틈이 없었다. 셈은 나중에 했다. 동서가 맞았다는 셈이었다.
*
나타난 순간, 자루는 거기 없었다.
튀었다. 원진 바닥에 닿기도 전에. 해 지는 쪽으로, 조금 남쪽으로. 조금 떠올라서. 사람 키만큼 솟았다가 떨어지며 날아갔다. 빨랐다. 눈이 따라가지 못했다. 전령마가 달리는 소리 대신, 공기를 찢는 짧은 소리.
모래가 터졌다.
자루는 모래에 한 번 처박혔다가 튀어 올라 굴렀다. 구르고, 또 구르고, 짚단 벽에 부딪혔다. 퍽. 짚단 하나가 무너졌다.
돌담 위에서 비명이 났다.
그리고 한 사람이 넘어졌다.
해 지는 쪽 돌담 아래, 모래 가장자리에 서 있던 황색탑 견습생이었다. 열서넛. 자루가 굴러오자 두 팔을 벌려 받으려 했다. 받기 전에 자루가 짚단으로 빗나갔고, 견습생은 제 발에 걸려 모래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루엔이 모래 가장자리로 뛰어갔다. 견습생은 모래투성이 얼굴로 앉아 있었다. 다친 데는 없었다.
“받지 마시라고 적어 드렸는데요.”
견습생이 멍하니 루엔을 보았다. 그러다 제 품을 뒤졌다. 접힌 쪽지 하나. 파비오를 통해 견습생들에게 한 장씩 나눠 준 쪽지였다.
「자루가 오면 받지 마십시오. 해 지는 쪽에 서지 마십시오. — 루엔 하르트.」
견습생은 쪽지를 한참 보았다.
“… 받으면 칭찬받을 줄 알았어요.”
“받으시면 팔이 부러집니다. 쪽지를 적은 까닭이 그겁니다.”
돌담 위에서 웃음이 번졌다. 긴장이 풀린 웃음이었다. 오틸리에가 제일 크게 웃었다.
*
파비오는 웃지 않았다. 모래 위로 걸어 나갔다. 한쪽 무릎을 절며.
자루가 처음 떨어진 자리에 모래가 파여 있었다. 둥글게. 파비오가 그 옆에 쪼그려 앉아 가장 가까운 말뚝의 숫자를 읽었다. 금과 금 사이를 손가락으로 쟀다.
“스물한 걸음 반.” 파비오가 외쳤다. “해 지는 쪽에서 남으로 손바닥 하나만큼 틀어진 금.”
루엔은 셈해 둔 숫자를 떠올렸다. 스물다섯.
모자랐다.
방향은 맞았다. 해 지는 쪽, 조금 남쪽. 조금 떠올랐다. 한 번도 다른 쪽으로 가지 않았다.
떨어진 거리는 빠르기를 두 번 곱한 만큼 멀어진다. 스물다섯을 기다렸는데 스물한 걸음 반이면, 빠르기는 열에 하나 조금 못 되게 느렸다.
“둘째 자루.” 오틸리에가 말했다.
*
모래시계 한 번 뒤.
아스테른에서 교장이 둘째 자루를 보냈을 것이었다. 식 끝에 칸 세 개를 붙여서. 한 달 동안 새벽마다 연습한 칸.
원진 한가운데 자루가 나타났다.
섰다.
모래 자루가 원진 바닥에 털썩 앉았다. 튀지 않았다. 구르지 않았다. 기울지도 않았다. 짚단 벽에서 스물다섯 걸음 떨어진 원진 한가운데, 가만히.
돌담 위가 조용했다.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파비오가 원진으로 걸어갔다. 자루 앞에 섰다.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무릎을 꿇고, 자루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제 공책을 쓰다듬듯이.
“열 해.” 파비오가 말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다. “열 해 동안 한 번도 이렇게 선 걸 못 봤습니다.”
파비오는 허리의 공책을 풀었다. 자루 곁에 무릎을 꿇은 채로 새 줄을 적었다. 루엔은 그 어깨너머로 보았다.
「아스테른 → 케른바흐. 모래 자루, 보정함. 튕긴 쪽 — 없음. 몇 걸음 — 영.」
다친 사람 칸에서 펜이 멈췄다. 파비오는 그 칸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비워 두었다. 가을에 말했던 그대로.
그 빈칸을 한참 보다가, 파비오는 공책을 덮지 않은 채 가슴에 댔다.
*
그리고 자루가 하나 더 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모래시계를 한 번 더 뒤집었을 때, 원진 한가운데 사람이 나타났다.
키가 작았다. 어깨가 넓었다. 머리가 벗어졌고 흰 눈썹이 짙었다. 회색 옷에 은실 왕관 무늬 하나.
교장 마그누스 할베르크였다.
루엔은 숨이 멎었다. 그런 약속은 없었다. 셈은 자루 둘에 맞춰 했다. 사람은 셈에 없었다.
교장은 섰다.
반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늙은 무릎을 풀지도 않았다. 이백칠십 리를 건너와서, 아스테른 교장실 바닥에 서 있던 그대로 케른바흐 원진 위에 서 있었다.
교장은 두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루엔을 찾았다.
“둘째 자루가 서면 내가 가기로 했다. 나 혼자 한 약속이다.” 교장이 말했다. “네 셈에 없어서 미안하다.”
“셈에 없는 걸 하시면 안 됩니다.”
“셈을 믿었다.” 교장이 품에서 봉투 둘을 꺼냈다. 학교 인장, 그리고 이름이 걸쳐 적힌 교구 봉투. “오렐 바스가 제 것도 가져가라더구나.”
*
봉투는 원진 곁에서 열었다.
오틸리에가 누런 밀랍을 깼다. 소리 내어 읽었다. 이졸드가 계단에서 내려와 제 푸른 밀랍을 깼다. 교장이 학교 인장을. 마지막으로 오렐의 봉투. 오렐의 이름이 찢어지며 열렸다.
네 벌이 다 같았다. 테오가 맞대 읽었던 그대로.
「첫째 자루 — 보정 없음. 해 지는 쪽, 조금 남쪽. 조금 떠오름. 스물다섯 걸음.」
「둘째 자루 — 보정함. 원진 안에 섬.」
「방향이 틀리면 이 셈 전체가 틀린 것.」
백색탑 참관인이 흰 장갑 낀 손으로 오틸리에의 종이를 받아 보았다. 모래의 파인 자리를 보았다. 말뚝 숫자를 보았다. 원진 한가운데 앉은 둘째 자루를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품에서 종이를 꺼내 적었다. 오래.
엿새 동안 여관에서 적던 그 종이였다. 루엔은 그가 무엇을 적는지 보지 못했다. 다만 그 사제는 봉투가 다 열리자 가장 먼저 마당을 나갔다. 수레를 기다리지 않았다. 말 한 필을 빌려, 아스테른 쪽으로.
*
루엔은 모래 가장자리에 서서 셈을 했다.
빠르기가 열에 하나 조금 못 되게 느렸다. 방향은 맞고 빠르기만 모자라면, 틀린 건 한 군데였다. 세상의 크기.
땅이 돈다면 빠르기는 세상이 클수록 크다. 같은 한 바퀴를 하루에 돌려면 큰 공의 겉이 더 빨리 가야 하니까. 빠르기가 열에 하나 느렸다면 세상이 열에 하나 작았다.
루엔은 거꾸로 셈했다. 오늘 모래에 파인 자리에서 세상 둘레를.
열세 살 때 걸어서 잰 둘레보다 열에 하나 조금 못 되게 작았다.
두 값은 서로 가까웠다. 둘 다 탑들이 믿는 크기보다 셋에 하나쯤 큰 자리에서, 열에 하나 안쪽으로 붙어 있었다. 하나는 걸음과 말 발굽과 북극성으로. 하나는 모래 자루와 일식과 텔레포트로. 서로 아무 상관 없는 두 길이 같은 크기를 가리켰다.
만났다.
루엔은 수첩을 폈다. 두 해 반 전 여름 표. 학교에서 언덕으로, 북쪽, 해 뜨는 쪽으로 반 발짝. 그 아래 비워 둔 칸. 「제멋대로가 아니다」 아래, 무엇인지 몰라 비워 둔 칸.
그 칸을 채우기 전에 루엔은 고개를 돌렸다.
테오가 곁에 서 있었다. 모래를 보고, 자루를 보고, 교장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지는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무언가 크게 맞았다는 건 아는 얼굴.
“테오.”
“어.”
“알게 되면 제일 먼저 말하기로 했습니다.”
테오가 멈칫했다. 그러다 기억해 냈다. 두 해 반 전 여름, 언덕에서 돌아오는 길.
“… 해 뜨는 쪽.”
“예.” 루엔이 말했다. 테오에게만 들리게. “땅이 하루에 한 바퀴 돕니다. 그래서 밀립니다.”
테오는 한참 말이 없었다. 발밑을 보았다. 케른바흐의 모래. 언 땅.
“지금도?”
“지금도 돕니다.”
“하나도 안 어지러운데.”
“다 같이 돌아서 그렇습니다. 텔레포트만 같이 안 돕니다.”
테오가 천천히 웃었다. 제일 늦게 웃고, 이번엔 제일 늦게 그쳤다.
루엔은 비워 둔 칸에 적었다.
「땅이 하루에 한 바퀴 돈다. 떠난 땅과 닿은 땅의 빠르기가 달라 밀린다. 세 리에 반 발짝, 이백칠십 리에 스물한 걸음 반. — 열여섯 겨울, 케른바흐. 테오 마일스에게 가장 먼저 말함.」
그리고 돌담 위 모든 사람이 들리게, 처음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땅이 돕니다.”
봉화는 한 가지밖에 말하지 못했다.왔다.불이 오르면 적이 왔다는 뜻이었다. 몇이 왔는지, 어디로 왔는지, 기병인지 보병인지는 싣지 못했다. 그걸 알려면 봉화대 옆에서 말 탄 전령이 따로 달려야 했다. 본진에서 왕도까지 전령은 말을 갈아타며 이틀. 봄 싸움이 시작되면 이틀은 너무 길었다.루엔은 하르트령 망루 둘 사이에서 거울 신호를 처음 해 본 게 열두 살 여름이었다. 형이 보낸 첫 신호가 「대충 잘 지냄」이었다. 그때는 망루 둘, 거리 이십 리, 주고받는 사람도 둘이었다.이번엔 본진에서 왕도까지였다.*루엔은 점과 선 그림을 다시 폈다.이번엔 길이 아니라 산등성이를 점으로 찍었다. 황색탑 측량 기록에서 높은 곳만 골랐다. 한 점에서 다음 점이 보이는지. 보이면 선을 그었다. 산이 가리면 긋지 않았다.그다음은 셈이었다.탑을 촘촘히 세우면 탑 사이가 가까워 흐린 날에도 잘 보인다. 대신 탑이 많아진다. 신호 하나가 탑마다 한 번씩 받아 적히고 다시 쏘아진다. 탑이 많을수록 그 받아 쏘는 시간이 쌓인다.탑을 드문드문 세우면 빠르다. 대신 흐린 날 안 보인다. 안 보이면 멈춘다.루엔은 날씨 기록을 모았다. 하르트 서기들이 본진에 온 날부터 날마다 적은 반년 치, 그리고 하르트령 망루 둘이 몇 해 동안 적어 둔 것. 맑은 날, 흐린 날, 안개 낀 아침. 흐린 날에 거울 빛이 몇 리까지 보였는지 망루 둘로 재어 둔 값이 있었다. 이십오 리까지는 흐린 날에도 대개 보였다. 삼십 리가 넘으면 열흘에 사흘은 안 보였다.“이십 리 안팎으로 세웁니다.” 루엔이 레오폴트에게 말했다. “본진에서 왕도까지 탑 열여섯. 한 탑에서 받아 적고 다시 쏘는 데 작은 모래시계 네 번. 열여섯이면 예순네 번. 한 시간이 조금 넘습니다.”“한 시간.&rdqu
지도는 너무 많은 걸 그리고 있었다.막료 천막 벽에 걸린 베스트리아 동부 지도였다. 황색탑 측량사들이 그린 것. 산은 산 모양으로, 숲은 나무 모양으로, 강은 굽이굽이 그대로. 마을마다 교회 첨탑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지도였다.그런데 루엔이 알고 싶은 건 하나였다. 어디가 끊기면 안 되는가.산 모양도, 나무 모양도, 강 굽이도 그걸 가리고 있었다.루엔은 새 종이를 폈다. 그리고 점을 찍었다.본진. 창고 마을. 왕도. 여섯 영지의 곡식 창고. 역참 열두 곳. 여울 셋. 모두 점 하나씩.그다음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수레가 다니는 길이면 선 하나. 다리가 있으면 선 위에 짧은 가로줄. 거리도 산 높이도 그리지 않았다.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만.마흔한 개의 점과 예순 개 남짓의 선이 남았다.테오가 어깨 너머로 보았다.“이게 지도야? 거미줄 같은데.”“지도에서 필요 없는 걸 다 뺀 겁니다.”“뭐가 필요 없는데.”“어디로 이어졌는지 빼고 전부 다.”*루엔은 선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렸다.선 하나를 가리고, 본진에서 출발해 점을 따라가 보았다. 모든 점에 닿으면, 그 선은 끊겨도 괜찮은 선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닿지 못하는 점이 생기면, 그 선은 끊기면 안 되는 선이었다.예순 번을 가렸다.대부분은 괜찮았다.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옆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멀어지긴 했지만 닿았다.세 선만 달랐다.메를 강 중류의 돌다리. 창고 마을로 들어가는 지류 위 나무다리. 그리고 왕도 동쪽 문 밖, 늪 사이로 난 둑길 위 다리.셋 중 하나만 끊겨도 점들이 두 덩이로 갈라졌다
재무대신 발터 크로이츠는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루엔은 그걸 첫눈에 알았다. 왕궁 재무실 벽에 장부가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등마다 해가 적혀 있었고, 해마다 빠진 권이 없었다. 탁자 위 셈판은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크로이츠는 쉰 남짓, 머리가 희고 손가락이 가늘었다. 루엔이 들어서자 일어나지 않고 셈판 알을 마저 튕겼다. 한 줄을 다 셈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앉으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오.”왕 레지날드 2세는 정말 곧 왔다. 이번에도 작은 금테만 둘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봄 싸움 돈이 모자란다.”크로이츠가 장부 한 권을 펼쳤다. 숫자가 빼곡했다. 옛 셈, 금화와 은화와 동화가 스물과 열둘로 얽힌 셈이었다. 그러나 줄이 반듯했고, 끝자리가 맞았다. 루엔은 곁눈으로 합계 셋을 속으로 셈해 보았다. 다 맞았다.“가을 싸움과 겨울 대치에 든 돈이 옛 금화로 만 사천 닢.” 크로이츠가 말했다. “봄에 레오폴트 장군이 국경 성채를 되찾으려면 삯군과 공성 기구를 더 들여야 하오. 새 금화로 이천 닢이 더 있어야 하오. 세금은 가을에 걷히오. 그때까지 빌려야 하오.”왕이 루엔을 보았다.“하르트 상단이 빌려줄 수 있나.”*루엔은 대답하기 전에 수첩을 폈다.클라리사가 어젯밤 적어 준 숫자가 있었다. 하르트 상단이 제 것으로 가진 금과 은, 창고의 물건, 받을 삯. 새 금화로 치면 삼천이백 닢 남짓. 보움 상단과 왕도 상인 조합 둘이 나눠 댄 몫까지 넣은 것이었다.“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루엔이 말했다. “삼백이십 닢까지.”크로이츠의 손가락이 셈판 위에서 멈췄다.“이천이라 했소.”
첫 롱 텔레포트는 눈 녹는 날 아침에 했다.참호 뒤 빈터에 원진을 그렸다. 지름 열두 걸음. 테오가 말뚝과 끈으로 원을 잡고, 루엔이 안쪽 선을 그었다. 원진 가운데에 짐 상자 둘, 그 옆에 루엔과 테오.도착지는 왕도 아스테른, 루엔 공방 뒷마당이었다. 거기엔 클라리사가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려 두었다. 사흘 전 편지로 보낸 그림대로.루엔은 보정표를 펼쳤다. 여기서 왕도까지의 거리, 두 곳의 위도, 오늘 해가 뜬 시각. 땅은 하루에 한 바퀴 돈다. 여기와 왕도는 도는 빠르기가 조금 다르다. 그 차이만큼 도착하는 몸을 미리 돌려 놓는다. 열여섯 살 겨울, 모래 자루 두 개로 보인 그 셈이었다.그때는 교장과 파비오가 루엔 식으로 걸었다. 루엔은 옆에서 보기만 했다. 여섯째 고리가 없었다.지금은 있었다.“무섭냐?” 테오가 물었다.“무섭지 않습니다. 셈을 세 번 했습니다.”“나는 무서운데.”“그럼 제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떨어지면 셈이 틀어집니다.”테오가 루엔 옷자락을 꽉 쥐었다.루엔은 걸었다.한 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발밑의 흙이 진창에서 마른 돌바닥으로 바뀌었다. 코끝의 냄새가 참호 연기에서 빵 굽는 냄새로 바뀌었다. 구스타프 분점이 두 골목 건너였다.짐 상자 둘이 발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울지도, 밀리지도 않았다.테오가 비틀거렸다. 루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어, 어…… 됐어?”“됐습니다. 원 가운데서 손가락 한 마디 어긋났습니다.”뒷마당 문간에서 클라리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원 끝에 분필로 적어 둔 작은 표를 가리켰다.&l
겨울은 링겐 고개 아래에서 멈췄다.마르케스군은 고개 발치의 국경 성채로 물러나 틀어박혔다. 가을 첫머리에 빼앗은 베스트리아 성채였다. 레오폴트는 그 앞 오 리 떨어진 곳에 참호를 파고 진을 쳤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어느 쪽도 성채 벽까지 가지 않았다. 가 봐야 얼어붙은 밭에서 죽을 뿐이었다.대신 새벽마다 안개가 왔다.한겨울 두 달은 조용했다. 양쪽 다 눈 속에서 장작과 곡식을 세며 버텼다. 하르트 서기들의 겨울 셈대로, 말먹이가 가장 먼저 바닥을 보였다. 레오폴트는 말 절반을 뒤쪽 고을로 돌려보냈다. 마르케스 쪽 성채에서도 말 울음이 줄었다. 저쪽도 같은 셈을 한 것이었다.첫 안개는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직 눈이 녹기 전 어느 새벽에 왔다. 성채 쪽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려 밀려왔다. 겨울 안개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앞 참호에 닿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이 뜨거웠다. 살갗에 닿으면 붉게 부어올랐다. 눈이 따가워 뜰 수 없었다. 김이 지나간 참호 바닥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되었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얼었다. 병사들 발이 진창째 얼어붙었다.사흘 동안 앞 참호에서 발가락을 잃은 병사가 열넷이었다.“적색탑 복합 술식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눈썹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불로 물을 끓이고 바람으로 민다. 옛날에 한 번 봤다. 그땐 이만큼 오래 가지 않았는데.”“교대를 합니다.” 루엔이 말했다. “가을 싸움 뒤로 적이 바꿨습니다. 번쩍임을 세어 보면, 밤을 셋으로 나눠 돌아가며 쏩니다. 한 번에 쏘는 사람은 열넷, 쉬는 사람이 스물여덟.”적도 셈을 했다. 사흘째 오후에 바닥나는 걸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엔 바닥나지 않게 나눠 쏘았다.*끓는 안개를 막으려면 같은 걸로 맞서야 했다.불과 물과 바람을 한꺼
요스트는 명령서를 두 번 읽었다.창고 마을은 본진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다. 메를 강 지류 가에 곡식 창고 여든 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섯 영지에서 보낸 곡식, 말먹이, 화살 다발이 전부 여기 모였다. 요스트는 그 창고 열쇠를 쥔 창고지기였다. 하르트령에서 온 사람이었다. 쉰 살,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명령서는 새벽에 왔다. 본진에서 출발한 전령이 중간 역참에서 명령을 옮겨 적어 다음 전령에게 넘겼고, 그 전령이 요스트에게 가져왔다.「71번 창고를 열어 곡식 이백 자루를 본진 빵 굽는 곳으로 보낼 것. 레오폴트.」번호 옆에 작은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71-9」.요스트는 입속으로 셈했다.앞자리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 뒷자리 하나를 더하면 열다섯. 열다섯을 열하나로 나누면 하나에 넷이 남는다.넷이어야 했다.명령서에는 아홉이 적혀 있었다.요스트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도로 걸었다.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구간 소년을 불렀다.“본진으로 가라. 가장 빠른 말로. 루엔 도련님께 이 종이를 드려라. 끝자리가 안 맞는다고.”소년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빵 수레를 몰고 온 보급 기사가 창고 앞에 섰다. 동쪽 영지 사람이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왜 안 여나. 장군님 명령이다.”“끝자리가 안 맞습니다.”“끝자리?” 기사가 명령서를 낚아채 보았다. 번호 옆 작은 글자를 한참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 꼬랑지 말이냐. 이게 뭐라고.”“번호가 제대로 옮겨졌는지 보는 겁니다.”“번호는 71이라고 적혀 있다. 장군님 서명도 있다. 본진에선 병사들이 빵을 기다린다. 창고지기가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