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찻숟가락이 접시 가장자리에서 한 번 더 흔들렸다.
레티는 손끝으로 숟가락을 눌렀다. 유리엘은 걸음을 멈추고 그 손을 보았다.
“무슨 일이 있나.”
“아니에요. 손이 미끄러졌어요.”
“그날 약속이 있나.”
생일 새벽에 신전으로 갈 생각이었다. 아직 상대에게 부탁조차 하지 못한 약속이지만, 적어도 황태자를 위해 비워 둔 날은 아니었다.
“제 생일이라서요.”
“알고 있다.”
레티는 숟가락을 접시 안쪽으로 옮겼다.
생일을 알고 있다는 대답이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다. 전생에는 시종이 올린 선물을 받고서야 유리엘이 날짜를 기억했겠거니 했다.
“집에서 가족들과 보내려고 해요.”
“공작에게도 말해 두지.”
“무엇을요?”
유리엘이 입을 열기 전에 내관이 다가왔다. 황제가 찾는다는 말에 유리엘은 정원 안쪽을 돌아보았다.
“나중에.”
레티는 가방을 쥐고 일어섰다.
나중에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혼인 칙서가 내려올 날짜를, 이번에는 미리 알려 주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안 비워 두면 안 내려오나.’
그럴 리 없었다. 레티는 의자를 밀어 넣었다. 뒤로 빠진 의자 다리가 천 끝에 걸리지 않게 살피고 돌아서는데, 유리엘의 손이 먼저 등받이에 닿았다.
“두고 가.”
“저도 할 수 있어요.”
“보인다.”
유리엘은 의자를 탁자 아래로 넣었다. 레티는 짧게 인사한 뒤 정원 출구로 걸었다.
등 뒤에서 누가 보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
정원과 마차 뜰 사이의 회랑에는 마지막 차를 준비한 탁자가 있었다.
돌아가는 손님들이 잠시 멈춰 잔을 받았다. 바깥에는 저녁 바람이 불었고, 시종들은 식은 주전자를 치우느라 바빴다.
레티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기둥 옆에 섰다. 가방을 열어 손수건이 있는지 확인하는데 그라시안 대공이 다가왔다.
“벌써 돌아가나?”
“아버지께서 나오시면요.”
“황제가 공작을 놓아주질 않는군. 잠깐 앉아 기다리는 게 어떻겠나.”
대공은 가까운 의자를 가리켰다. 레티가 사양하려 하자 시종이 새 주전자를 가져왔다.
“마침 좋은 차가 왔어. 잠이 잘 오는 차라 저녁에 마시기 좋지.”
시종이 잔을 놓고 주전자 뚜껑을 열었다.
레티의 손이 가방 안에서 멈췄다.
따뜻한 김에 섞여 희미한 잎 냄새가 올라왔다. 달지도 진하지도 않았다. 젖은 잎을 천천히 말렸을 때 남을 법한 냄새였다.
그런데 목 안쪽이 갑자기 좁아졌다.
레티는 입을 다물고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배 속이 울렁였다. 오후에 먹은 과자가 목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은방울잎 차일세.”
대공이 말했다.
시종이 잔을 들었다. 레티는 받으려고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이름을 들으니 냄새가 더 가까워졌다. 황태자궁에서 밤마다 곁에 놓았던 잔에도 이런 향이 났다. 식은 차를 마시고 침실의 촛불을 바라보던 일이 잠깐 떠올랐다.
그 차를 싫어했던가.
분명 거르지 않고 마셨다. 몸에 좋다고 해서, 잠을 푹 자야 덜 피곤하다고 해서.
지금은 잔을 보기만 해도 속이 뒤집혔다.
“입에 맞지 않나?”
“아직 마셔 본 적은 없어요.”
말을 마친 뒤 레티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눌렀다. 지금 이 나이에는 마셔 본 적이 없었다.
“다과를 조금 많이 먹었나 봐요.”
“그랬군. 무리할 필요는 없지.”
대공이 손짓하자 시종이 잔을 물렸다.
레티는 기둥 바깥으로 반걸음 옮겼다. 차 향이 옅어지고 나서야 손수건을 내릴 수 있었다.
“공작에게는 내가 잘 기다리고 있었다고 전해 주게. 딸을 혼자 두었다고 걱정할 테니.”
“네. 말씀드릴게요.”
대공은 가볍게 웃으며 다른 손님에게 갔다.
레티는 가방 입구를 닫았다. 잠금쇠가 한 번에 맞물리지 않았다. 다시 눌러 닫고, 주전자가 있던 탁자에서 눈을 돌렸다.
찻잎 냄새 하나 때문에 이러는 건 우스웠다.
하지만 다시 맡아 확인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
“아가씨.”
에런이 회랑 계단 아래에서 올라왔다. 레티는 입가에 대고 있던 손수건을 내렸다.
“얼굴이 조금 창백하십니다.”
“바람을 쐬면 괜찮을 것 같아요.”
“마차를 가까이 대겠습니다.”
“아버지는 아직 안 나오셨어요.”
“공작 각하께서 먼저 모셔 달라고 하셨습니다. 폐하와 의논하실 일이 남으셨다고요.”
에런이 접은 외투를 내밀었다. 아침에 그레고리가 마차에 넣어 둔 외투였다.
“당번이시잖아요.”
“교대했습니다. 각하께 인사드리러 갔다가 부탁을 받았습니다.”
레티는 외투를 받았다. 소매를 찾는 동안 에런이 뒤쪽 옷깃을 들어 주었다. 손이 어깨에 닿지는 않았다. 레티가 두 팔을 넣자 바로 물러섰다.
“아버지께 제가 먼저 갔다고 말씀해 주실 분은 계세요?”
“마부 한 분이 남아 계실 겁니다.”
“아버지 마차는요?”
“각하께서 함께 나오실 분의 마차를 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레고리 집사에게도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먼저 보낼 때에는 유난히 꼼꼼했다. 레티는 외투 앞섶을 여몄다.
“그럼 가도 되겠네요.”
“계단을 조심하십시오.”
계단 모서리에 드레스 자락이 걸렸다. 레티가 발을 멈추자 에런도 바로 멈췄다. 재촉하지 않고 아래쪽에 서서 기다렸다.
레티는 치맛자락을 조금 들어 올렸다.
‘차 한 잔도 안 마셨는데 넘어지기까지 하면 곤란하지.’
돌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바람이 뺨에 닿았다. 속이 조금 가라앉았다.
마차 뜰에는 황실 문장이 달린 검은 마차가 서 있었다. 그 뒤쪽으로 하르벨 공작가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검은 마차 앞에는 유리엘이 있었다.
▽
유리엘의 시선이 레티의 손수건에 멎었다.
“아픈가.”
“아니에요. 조금 답답해서 먼저 돌아가려고요.”
유리엘은 열린 회랑 쪽을 보았다가 마차 문을 잡았다.
“오늘은 내가 데려다주지.”
레티가 대답하기 전에 에런이 한 걸음 나섰다.
“싫습니다.”
유리엘의 손이 문손잡이 위에서 멈췄다.
“뭐?”
“공작 각하께서 아가씨를 부탁하셨습니다. 오늘은 제가 데려갑니다.”
에런의 목소리는 정원에서 물을 권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 고개도 공손하게 숙이고 있었다.
레티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유리엘은 문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에런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황실 마차의 발판만 내려와 있었다.
“공작저까지 가는 길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같이 가면 되겠군.”
“아가씨 마차가 왔습니다.”
하르벨 공작가 마차가 바로 옆에 멈췄다. 마부가 고삐를 당기고, 따라온 하인이 서둘러 발판을 내렸다.
에런이 그쪽 문을 열었다.
유리엘은 레티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르벨 영애.”
“네, 전하.”
“어느 쪽이 편하지.”
레티는 검은 마차 안을 보았다. 넓은 좌석과 두꺼운 덮개가 보였다. 황태자궁에서 외출할 때 타던 마차도 안쪽이 저렇게 어두웠다.
하르벨 마차에는 아침에 앉았던 자리에 작은 방석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제 마차를 타고 갈게요.”
유리엘이 문손잡이를 놓았다.
레티는 에런 쪽으로 걸었다. 에런이 내민 손 대신 문 옆의 손잡이를 잡고 발판에 올랐다. 아직 누구의 손을 잡고 싶은지까지 정한 것은 아니었다.
의자에 앉아 드레스 자락을 거두자 에런이 문밖에서 물었다.
“혼자 가시겠습니까? 저는 말을 타고 따라가도 됩니다.”
레티는 맞은편 좌석을 보았다.
말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늘도 미루면 내일에는 더 어려워질 것 같았다.
“안에 앉아 주세요. 여쭤볼 게 있어요.”
“알겠습니다.”
에런이 맞은편에 오르고 발판이 접혔다. 하인이 문으로 손을 뻗기 전에 유리엘이 가까이 왔다.
레티는 창가 쪽으로 조금 몸을 돌렸다.
유리엘은 아무 말 없이 문을 닫아 주었다. 장갑 낀 손이 바깥 손잡이를 눌러 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했다.
닫힌 창 너머로 짙은 파란 눈이 잠깐 보였다.
마차가 움직이자 유리엘의 얼굴이 창틀 뒤로 사라졌다.
레티는 무릎 위 가방을 똑바로 놓았다.
‘마차 문 하나 닫는 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이 필요해.’
▽
황궁 문을 벗어나자 바퀴가 돌길 위에서 덜컹거렸다.
레티의 구두 앞코가 좌석 아래 나무판에 닿았다. 에런은 그 소리를 듣고 옆에 접혀 있던 담요를 집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담요는 괜찮아요. 춥지 않아요.”
“발밑에 놓으려는 겁니다.”
에런은 담요를 길게 접어 바닥에 깔았다. 레티의 구두가 닿는 자리와 문틈 사이였다.
“이 마차는 아래쪽으로 바람이 조금 들어옵니다.”
레티는 발을 살짝 들어 자리를 내주었다.
담요 끝이 드레스 아래에 닿지 않도록 에런이 한 번 더 접었다. 바퀴가 큰 돌을 넘을 때에도 손을 바닥에 짚고 마무리했다.
“이런 것까지 아세요?”
“견습 때 마차를 닦았습니다.”
“검만 배우신 줄 알았어요.”
“검은 오후에 배웠습니다. 오전에는 말도 닦고, 마차도 닦고, 심부름도 했습니다.”
“말과 마차가 검보다 먼저였군요.”
“기사대장께서는 말이 저보다 비쌌다고 하셨습니다.”
레티가 웃었다. 웃음 끝에 속이 다시 울렁거려 입술을 다물었지만, 아까만큼 심하지는 않았다.
에런이 창을 조금 열었다.
“이 정도면 괜찮으십니까?”
“네. 좋아요.”
시장 골목을 지날 때 따뜻한 냄새가 들어왔다. 갓 구운 빵 냄새였다. 작은 가게 앞에서 종이봉투를 든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레티는 창밖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빵 굽는 냄새네요.”
“저 집은 저녁에도 굽습니다. 늦게 일을 마치는 사람들이 많이 사 갑니다.”
“경도 사 드셨어요?”
“심부름을 나왔을 때 가끔요.”
“아버지 심부름이요?”
“집사님 심부름이 많았습니다. 양초를 사 오고, 구두 수선한 것을 받아 오고.”
“빵은 심부름 목록에 없었겠네요.”
“없었습니다.”
“몰래 사신 거예요?”
에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돈으로 샀습니다.”
“그레고리한테 들키셨어요?”
“돌아갈 때마다 포장지를 버리고 갔는데, 알고 계셨습니다.”
“어떻게요?”
“소매에 밀가루가 묻어 있었습니다.”
레티는 에런의 제복 소매를 보았다. 지금은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레고리는 소매까지 보는군요.”
“다음 심부름부터는 아예 빵값을 따로 주셨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먹고 오라고요.”
“혼내지 않고요?”
“마차 닦을 때 배고프다고 티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레티는 가방 위에 얹었던 손을 풀었다. 집에 돌아가면 그레고리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에런이 빵을 몇 개나 먹었는지, 견습 때에도 이렇게 말이 차분했는지.
전생에는 알 필요가 없다고 넘긴 일이었다.
이번에는 알고 싶었다.
▽
빵집이 뒤로 멀어졌다. 좁은 골목을 나온 마차가 공작저 쪽 언덕길로 접어들었다.
에런은 열린 창을 손가락 너비만큼 닫았다. 바람이 외투 소매를 흔들지 않을 정도였다.
“속은 좀 괜찮으십니까?”
“네. 아까보다 나아요.”
“댁에 도착하면 물을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차 말고요?”
“지금은 물이 낫겠습니다.”
레티는 손수건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은방울잎 차가 놓였던 탁자가 다시 떠올랐다. 잔을 받지도 않았는데 손끝이 차가워졌던 이유는 몰랐다. 전생의 마지막 밤이 생각나서였을까.
가방 잠금쇠를 닫자 에런이 기다렸다는 듯 자세를 바로 했다.
“여쭤보실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네.”
“기사단에 확인할 일이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레티는 무릎 위의 가방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양손이 비자 어디에 두어야 할지 잠깐 망설였다. 손가락을 깍지 끼었다가 다시 풀었다.
에런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부탁을 들으면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럴 권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오래 알았다는 이유로, 오늘 잘 데려다주었다는 이유로 당연히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됐다.
“경께서 곤란하시면 거절하셔도 돼요.”
“먼저 들어 보겠습니다.”
“시간이 조금 필요하실 수도 있어요.”
“그러면 생각한 뒤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을 꺼내기 좋게 해 주는 대답이었다. 레티는 창밖을 보았다.
언덕 위로 공작저의 불빛이 보였다. 현관에는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고, 마차가 다가가자 문이 열렸다.
도착하면 노라가 외투를 받아 갈 터였다. 노엘이 저녁에 무엇을 먹었느냐고 묻고, 그레고리가 아버지는 언제 오시느냐고 확인할 터였다.
그러면 또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레티는 맞은편으로 몸을 돌렸다.
에런의 오른쪽 눈썹에 난 작은 흉이 가까이 보였다.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에런 경.”
“네, 아가씨.”
바깥에서 마부가 말을 달래는 소리가 들렸다. 바퀴가 느려지고 공작저 현관의 불빛이 창 안으로 들어왔다.
마차가 멈추기 직전, 레티가 말했다.
“저랑 결혼해 주실래요?”
(4화 끝)
레티는 남은 차를 천천히 마셨다. 잔 바닥에 볶은 보리 한 조각이 가라앉아 있었다.내일 아침에는 이것을 치울 시간이 없을 터였다. 레티는 잔을 씻어 받침 위에 엎어 두고, 북부로 보낼 답장을 봉투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등불을 끄기 전 예복 덮개를 살짝 들었다.흰 소매 끝에 작은 단추들이 가지런했다.레티는 손가락으로 단추 하나를 만진 뒤 덮개를 내렸다.▽“아가씨, 손을 조금만 더 내려 주세요.”레티는 거울 앞에서 손을 내렸다. 노라가 마지막 단추를 잠갔다. 새벽빛은 아직 창 아래까지 닿지 않았다.“너도 오늘은 손이 느리네.”“단추를 잘못 잠그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요.”“벌써 다섯 번은 확인한 것 같은데.”“여섯 번입니다.”노라는 대답하고도 소매 끝을 한 번 더 살폈다.‘이러다 생일이 끝나겠네.’레티가 웃자 노라도 입가를 풀었다. 탁자 위의 작은 여행 가방을 들기 전에 노라가 거울 속 레티와 눈을 맞췄다.“생일 축하드립니다, 아가씨.”“고마워.”“결혼도요.”“그건 조금 뒤에 다시 해 줘.”“두 번 해 드릴 수 있습니다.”노라가 방문을 열었다.복도에는 공작이 서 있었다. 안경을 벗었다 쓰던 손이 멈췄다. 레티가 다가가자 공작은 소매를 펴고 팔을 내밀었다.“불편한 곳은 없느냐?”“없어요.”“신발은?”“어제도 신어 봤잖아요.”“오늘은 오래 서 있어야 하니.”레티는 공작의 팔에 손을 올렸다. 단단히 굳어 있던 팔이 조금 내려갔다.계단 아래에서는 노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지 상자를 두 손으로 받친 채였다. 레티를 보자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왜?”“계단부터 내려오세요.”“말하면 내가 넘어질까 봐?”“그럴 수도 있잖아요.”노엘은 레티가 마지막 계단을 밟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누나, 생일 축하해.”“고마워.”“그리고 오늘은 상자 확인 안 해도 돼. 집사님하고 벌써 했어.”그레고리가 문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안에 반지도 있습니다.”“그것까지 말하시면 어떡해요.”노엘이 상자를 조금 몸 쪽으
“그건 벌써 주방에 말해 뒀어.”유리엘이 레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대답했다.“제가 받아 드리기 전부터요?”“네 식사니까.”레티는 반지가 끼워진 손을 조금 들었다. 창가의 불빛 아래에서 작은 돌이 반짝였다. 유리엘은 손가락이 불편하지 않은지 살피다가 천천히 손을 놓았다.“너무 꼭 맞나?”“아니요. 잘 맞아요.”“불편하면 고치면 돼.”“차부터 고쳐 드릴게요. 아주 식었어요.”레티가 빈 잔을 가져오자 유리엘이 주전자를 들어 주었다. 이번에는 레티가 손을 받치지 않았다. 차가 두 잔에 고르게 나뉘어 담겼다.“이제 혼자 하시네요.”“옆에서 보고 있잖아.”레티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유리엘도 잔을 들었다. 탁자 가운데의 빈 반지 상자는 닫지 않은 채 두었다.밖에서 마차 바퀴가 멎는 소리가 났다.레티는 남은 차를 마시고 일어났다. 유리엘이 먼저 의자를 밀어 주었다.“날짜도 정해야겠군.”“제 생일에 하고 싶어요.”유리엘의 손이 의자 등받이에 머물렀다.“같은 날에?”“네. 이번에는 제가 정한 일로 바쁘고 싶어요.”유리엘은 열린 반지 상자를 닫았다.“그럼 그렇게 하자.”▽봄 둘째 달에 들어서자 공작저 서재의 큰 탁자가 다시 서류로 덮였다.이번에는 한 지붕 법 조문이 아니었다. 손님 명단과 신전에서 보낸 준비 목록, 천 견본을 붙인 종이가 나란히 놓였다.공작은 안경을 올리고 명단을 살폈다.“아침 예식이면 피로연은 점심에 해야겠구나. 노엘, 그 상자는 탁자에 내려놓아도 된다.”“괜찮아요.”노엘은 작은 반지 상자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그레고리가 점심 쟁반을 들여왔을 때도 상자는 무릎 위에 있었다. 노엘은 한 손으로 빵을 집다가 다시 내려놓았다.레티가 손을 내밀었다.“먹는 동안 누나가 맡아 줄까?”“제가 맡기로 했잖아요.”“지금은 연습용 상자야. 반지는 아직 안 넣었어.”“그러니까 지금 연습해야죠.”노엘은 상자를 옆구리에 끼우고 빵을 먹었다. 한쪽 팔꿈치가 지나치게 올라가 있었다.유리엘이 빵 접시를 조금
유리엘이 외투 끈을 다시 묶어 주었다. 북쪽 길에서 불어온 바람에 풀린 매듭이었다.레티는 손을 내리고 매듭 끝을 잡았다.“너무 꽉 묶지는 마세요.”“바람이 들어온다.”“목까지 막으실 필요는 없어요.”유리엘의 손이 조금 내려갔다. 매듭이 느슨해지고, 접힌 옷깃이 펴졌다. 레티는 길의 굽은 곳을 한 번 더 본 뒤 마차 쪽으로 돌아섰다.마차 문을 연 유리엘이 손을 내밀었다.“빵은 잊지 않을게요.”“벌써 그 이야기인가.”“두 분이 성문까지 오는 동안 여러 번 말씀하셨잖아요.”“브리그 경은 옆에 두라고 했지.”“유리엘은요?”“먹는 것까지 확인한다고 했다.”레티가 내민 손을 잡았다.‘떠나도 승부는 남네.’마차에 오르자 유리엘이 외투 자락을 안으로 넣어 주었다. 문이 닫힌 뒤에도 레티는 무릎 위의 매듭을 잠깐 만졌다.▽봄 첫째 달 20일 오후, 봄날의 찻잔 창가에는 작은 빵 접시가 놓여 있었다.레티는 찻잎을 덜어 낸 뒤 그 접시를 곁눈질했다. 빵 위에 덮은 천의 모서리가 반듯했다. 접시 아래에는 유리엘이 접어 둔 쪽지가 있었다.「식기 전에 먹어.」빵은 이미 식었다.“찻잎 봉지를 묶는 동안 먹으려고 했어요.”맞은편에 앉은 유리엘이 접시를 보았다.“그 봉지는 다 묶었잖아.”“다음 봉지가 있었죠.”“지금은?”레티는 손에 든 빈 봉지를 내려놓았다.“지금은 먹을게요.”유리엘이 덮개를 걷었다. 레티는 빵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에런 경은 잘 보이는 데 놓아 달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제 손앞까지 밀어 달라고는 안 하셨는데요.”“눈앞에 있어도 안 먹으니.”“확인하겠다고 하신 건 기억해요.”“약속은 지켜야지.”레티가 한입 먹자 유리엘은 그제야 접시에서 손을 뗐다. 빵 부스러기가 새 앞치마에 떨어졌다. 레티는 손바닥으로 털어 작은 쓰레기통에 넣었다.다시 단 앞치마 걸이는 허리 높이에 있었다. 예전에는 문 옆에 높이 달려 있어 매번 까치발을 들었다. 새 걸이는 레티가 직접 자리를 정했다.작은 선반도, 찻잔을 말리는 받침도 그랬
종소리가 잦아들자 오르반이 칙서 위에 손을 얹었다.“말씀하신 이름대로 기록하겠습니다.”레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엘이 탁자 옆으로 다가왔고, 에런은 노엘이 선 쪽으로 몸을 돌렸다. 노엘은 아버지가 쥐여 준 손수건을 접지도 않은 채 들고 있었다.“형님, 내일 아침에는 있어요?”“있습니다.”“같이 먹어요?”“도련님께서 늦잠을 주무시지만 않으면요.”“안 잘 거예요.”에런이 노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레티는 두 사람이 나란히 신전 문을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에런의 보폭은 평소보다 짧았다.오르반이 서약 기록을 따로 거두었다.“내일은 작은 기도실로 오시면 됩니다. 두 분 손을 확인하고 서약을 거둘 겁니다.”“손을요?”레티가 왼손을 들었다.“없어진 줄이 잠깐 보일 수도 있습니다.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에런도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따로 준비할 것이 있습니까?”“맨손으로 오시면 됩니다.”레티는 약지를 엄지로 한번 문질렀다. 유리엘이 곁에서 기다렸다. 내밀지는 않은 손이 레티의 손 가까이에 있었다.밖으로 나서자 마고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내가 더 떨었네.”“계속 숨 안 쉬고 있었지?”“중간에 쉬었어. 네가 알려 줬을 때.”노라가 잉크병 뚜껑을 꼭 닫았다. 아버지는 가방을 들었고, 노엘은 에런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레티도 그 뒤를 따라갔다. 내일 올 때는 사람이 적을 터였다. 꽃이 걸린 신전 문을 한 번 돌아본 뒤 마차에 올랐다.▽다음 날 아침, 노엘은 식당에 가장 먼저 와 있었다.머리 뒤쪽이 눌려 있었고 소매 한쪽이 접혀 있었다. 그래도 자리에 앉아 빵이 담긴 바구니를 지키고 있었다.“늦잠 안 잤어요.”에런이 들어오자 노엘이 바로 말했다.“확인했습니다.”“빵도 남겨 뒀어요.”“감사합니다.”레티가 자리에 앉자 에런이 오른쪽 의자를 당겼다. 유리엘은 왼쪽에 앉았다. 그레고리가 놓은 잔과 접시는 어제와 수가 다르지 않았다.레티는 빵을 집다가 에런 앞에 놓인 작은 접시를 보았다. 노엘이 골라 놓은 듯
레티가 잔을 비우자 에런이 빈 잔을 받침 가운데로 옮겼다. 유리엘은 찻주전자 손잡이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더 마실 거야?”“아니요. 오늘은 이만 마실래요.”아버지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 아래에 밀어 둔 서류 가방을 챙기려다 레티와 눈이 마주쳤다.“내일 가져갈 것만 넣어 두마.”“법전은 제 방에 있어요.”“알고 있다.”“몰래 가져가시면 알아요.”“그레고리에게 부탁하지도 않았다.”아직이라는 말은 붙지 않았다. 레티는 아버지의 가방을 한 번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유리엘이 의자를 잡았다. 에런은 식탁 위에 놓인 레티의 얇은 숄을 들어 주었다. 이번에는 둘이 한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다.“내일 아침에 뵐게요.”“푹 주무십시오, 아가씨.”“늦게까지 일지 읽지 말고.”레티는 유리엘을 보았다.“노라가 이야기했어요?”“네 방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앞으로도 가끔 날 거예요.”“그래.”유리엘이 의자를 식탁 안으로 밀었다. 레티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식당을 나왔다.계단 끝에서 돌아보자 그레고리가 오른쪽 빈자리에 놓인 의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무도 앉지 않은 자리인데도 다른 의자와 똑같이 반듯하게 맞췄다.▽다음 날 아침, 노라는 레티의 소매 끝을 펴고 단추를 다시 확인했다.밝은 회색 드레스는 앉아도 무릎께가 많이 구겨지지 않는 옷이었다. 레티가 직접 골랐다. 노라가 꺼낸 진주 목걸이는 화장대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정말 안 하실 거예요?”“목이 좀 답답할 것 같아.”“그럼 이 핀만 꽂을게요.”노라가 머리 옆에 작은 핀을 꽂았다. 거울 속에서 밤색 머리카락 한 가닥이 다시 빠져나왔다. 노라는 손끝에 물을 조금 묻혀 눌러 주었다.“너도 앉을 자리 있지?”“신전에서 하인들 자리도 마련해 주신대요.”“기록하느라 계속 서 있지는 말고.”노라가 앞치마 대신 입은 단정한 옷의 주머니를 눌렀다. 작은 수첩 모서리가 보였다.“앉아서도 적을 수 있어요.”“오늘은 많이 적을 필요 없어.”“이름은 틀리면 안 되잖아요.”
“오늘만이라는 말, 유리엘한테도 하신 거예요?”에런이 동쪽 별채 창을 다시 보았다.“들리지는 않으셨을 겁니다.”“그럼 제가 전할까요?”“내일 아침에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레티는 장갑을 벗어 가방 위에 얹었다. 에런이 현관 문을 열어 주었다. 목도리는 아직 목에 느슨하게 둘려 있었다.“그런데 내일도 문을 먼저 열어 주시려고요?”“아침 식탁 의자는 먼저 빼 드릴 수 있습니다.”“퇴근길만 양보하신 거군요.”“오늘만이라고 했습니다.”레티는 웃으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 에런이 느릅관 쪽으로 돌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동쪽 창의 불도 아직 켜져 있었다.▽봄 첫째 달 14일 오후, 아버지의 서재 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레티가 문틈으로 들여다보자 에드윈 공작이 안경을 벗었다. 책상 위에는 낡은 법전과 얇은 서류철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서류철 모서리에 붙인 종이가 유난히 많았다.“들어오너라. 의자는 치웠다.”“왜 치우셨어요?”“아니, 의자에 있던 책을 치웠다는 말이다.”레티는 책상 앞 의자를 보았다. 앉을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대신 옆의 작은 탁자 위에 책이 높이 쌓여 있었다.‘옮긴 걸 치웠다고 하시는구나.’레티가 앉자 아버지는 법전을 밀어 주었다. 펼쳐진 곳의 종이는 다른 쪽보다 더 닳아 있었다.“이걸 또 읽고 계셨어요?”“마지막으로 확인했다.”“지난번에도 마지막이라고 하셨는데요.”“그때는 서약 해제에 관한 조항을 확인한 거고.”아버지는 헛기침을 했다. 레티는 책에 붙은 종이 하나를 들춰 보았다. 아버지의 글씨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딸이 직접 말할 것.」그 아래에는 그 말에 밑줄이 두 번 그어져 있었다.“이건 외우셨겠어요.”“첫날부터 외웠다.”“그런데 왜 계속 보세요?”아버지는 안경을 다시 썼다. 법전의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눌렀지만, 페이지는 자꾸 조금씩 들렸다.“혹시 다른 조항이 이 말을 막고 있을까 봐.”레티는 붙임 종이를 놓았다.아버지는 서류철을 열었다. 황실 문양이 찍힌 사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