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멜리네 조약 10조. 이 조약은 리타어로 적은 원문이 기준이다. 번역이 다르면 원문을 따른다.」
물병을 든 하인이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병 주둥이가 빈 잔 위에서 멈췄다.
로잘린은 내려놓았던 빵을 다시 집었다.
“물은 충분해요.”
라우덴어로 한 말에 하인이 물병을 거두었다. 쟁반을 든 사람도 식탁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둘 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찾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로잘린은 빵을 수프에 적셨다. 식기 전에 먹으려면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부인께서 저희 말을 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물병을 든 하인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알았으니 일하기 편하겠네요.”
로잘린은 접시 곁으로 밀려난 숟가락을 바로 놓았다.
“제가 못 알아들은 말이 있으면 다시 물을게요. 여러분도 그렇게 해 주세요.”
“예, 부인.”
쟁반을 든 하인이 먼저 대답했다. 두 사람이 물러나자 페트라가 로잘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무슨 말을 했어요?”
“빵 이야기를 했어.”
“그런데 왜 저렇게 서 있었대요?”
“내가 알아듣는 줄 몰랐나 봐.”
페트라는 하인들이 나간 문을 보았다. 로잘린은 남은 빵을 나누어 페트라의 접시 가장자리에 놓았다.
“식기 전에 먹어.”
페트라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문밖에서는 누군가 급히 걸어가는 소리가 났다. 잠깐 뒤, 다른 사람의 발소리도 그쪽으로 따라갔다.
«▼»
서리달 3일 아침, 게르다는 로잘린의 방문을 두드리고 안에서 대답이 난 뒤에 들어왔다.
팔에는 깨끗한 천을 얹고 있었다. 게르다는 책상 옆 작은 상에 천을 내려놓은 다음, 로잘린이 읽던 종이를 접을 때까지 기다렸다.
“왕비 전하, 아래층으로 가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로잘린은 종이 모서리에 두었던 손을 멈췄다.
게르다는 말을 고치지 않았다. 늘 하던 대로 빈 물잔을 가져갈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장부가 준비됐나요?”
“재상께서 복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곧 내려갈게요.”
로잘린은 혼인 문서를 서랍에 넣었다. 그 옆에 금고 열쇠가 놓여 있었다. 오늘 필요한 것은 금고 안의 은화보다 은화가 들어오고 나간 기록이었다.
깃펜과 뼈 자를 챙기자 페트라가 작은 가방을 내밀었다.
“손으로 들고 가시면 계단에서 떨어뜨려요.”
“장부를 들고 올라올 수도 있어. 빈자리를 남겨 줘.”
페트라는 가방 안에 넣으려던 천을 꺼냈다.
문을 나서자 계단 옆에 서 있던 하인들이 허리를 숙였다. 한 사람은 입을 열었다가 옆 사람을 보고 닫았다. 로잘린이 먼저 라우덴어로 아침 인사를 하자 두 사람이 거의 함께 답했다.
계단 아래에서는 베크가 기다리고 있었다.
베크는 로잘린의 가방을 보고, 뒤따라오는 페트라를 보았다. 손에 든 열쇠를 외투 안에 넣지는 않았지만 손가락으로 감싸 쥐었다.
“부인, 장부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것도 보여 주세요.”
“서류를 구분하는 중입니다. 관세 기록과 궁 지출이 섞여 있어 그대로 보시면 잘못 읽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묶음인지 알려 주시면 돼요.”
“먼저 저희가 분류한 뒤에 드리는 편이 낫겠습니다.”
로잘린은 가방 끈을 어깨에서 내려 손에 들었다.
“언제 끝나나요?”
베크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북쪽 복도 끝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로잘린을 보았다.
“확인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 제가 하려는 일이 그 확인이에요.”
“부인께서는 올덴의 장부에 익숙하시겠지요. 여기는 적는 법이 다릅니다.”
“알고 있어요. 모르는 표시는 물을게요.”
베크의 손에서 열쇠가 작게 부딪쳤다. 복도 반대편에서 문이 열렸다. 마티아스가 나와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장부방은 열었습니까.”
“전하, 아직 넘겨 드릴 상태가 아닙니다. 옛 기록에는 설명을 붙여야 할 곳이 많고, 담당자마다 쓰는 표기도 다릅니다.”
베크가 로잘린 쪽을 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혼인 조건에 열람을 넣으셨으나 먼저 살필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마티아스가 말했다.
“약속했습니다.”
베크는 열쇠를 내려다보았다. 더 붙이려던 말 대신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쪽입니다.”
로잘린은 베크가 돌아설 자리를 비켜 주었다. 마티아스는 로잘린의 걸음에 맞춰 옆에서 걸었다.
«▼»
장부방은 북쪽 복도 끝에 있었다.
문에는 오래된 창고 표지가 남아 있었다. 그 아래에 새로 쓴 장부방 표지가 붙어 있었지만, 모서리 하나가 들떠 있었다.
베크가 열쇠를 넣어 돌렸다. 문이 바로 열리지 않자 어깨로 조금 밀었다. 안쪽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창은 높고 좁았다. 선반마다 장부가 눕혀져 있었고, 묶은 서류가 장부 사이에 끼어 있었다. 가운데 책상에는 잉크병을 놓았던 둥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로잘린은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손끝으로 가장자리를 짚자 차가운 기운이 닿았다.
“이곳이 원래 창고였나요?”
“궁에서 쓰는 물건을 보관했습니다.”
베크가 창 아래 선반을 가리켰다.
“습기를 피하려고 종이는 바닥에 두지 않았습니다. 오래된 것은 뒤쪽에 있습니다.”
로잘린은 선반 위 장부 한 권을 꺼냈다. 겉장에 적힌 이름과 기간부터 읽었다. 겉은 라우덴어였고, 안쪽 항목은 리타어였다.
첫 장을 넘기자 셈을 적은 줄이 나왔다. 낱말 사이의 숫자 자리가 올덴 장부보다 좁았다. 로잘린은 손가락을 줄 아래에 대고 끝까지 따라갔다.
“이 점은 은화와 동전을 나눈 표시인가요?”
“예. 앞이 세르, 뒤가 뎀입니다.”
“이 짧은 획은요?”
“같은 항목이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베크는 장부를 돌려받으려다 손을 멈췄다. 로잘린이 다음 줄을 짚고 있었다.
“여기는 획 대신 낱말을 다시 썼네요.”
“다른 서기가 적었습니다.”
“쓰는 사람은 몇 명인가요?”
“이 장부에는 세 사람이 손을 댔습니다. 담당이 바뀌면서 앞사람의 기록을 이어 썼습니다.”
로잘린은 뒤쪽을 펼쳤다. 글씨가 작은 사람은 항목을 줄 안에 밀어 넣었고, 글씨가 큰 사람은 금액을 오른쪽으로 떨어뜨려 적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합계 아래에 짧은 선을 그었다.
한 낱말을 찾는 데도 페이지를 거듭 넘겨야 했다.
“글씨가 바뀐 곳에 표시부터 할게요.”
“내용은 이어집니다.”
“그래서 표시해야 해요. 적는 방식이 바뀌어도 같은 항목인지 확인하려고요.”
로잘린은 빈 종이에 장부 이름을 옮겼다. 베크가 펼쳐 둔 장을 내려다보았다.
“숫자는 익숙해지셨습니까.”
“읽을 수는 있어요. 그렇다고 오늘 모두 맞춰 볼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로잘린은 선반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궁 지출, 항구 세입, 곡물 매입이 각각 다른 묶음에 적혀 있었다.
“사흘은 걸리겠어요.”
마티아스가 물었다.
“전부 확인하는 데 말입니까.”
“아니요. 어느 장부와 어느 장부를 맞춰야 하는지 찾는 데요. 틀린 곳이 있는지는 그다음에 알 수 있어요.”
베크가 외투 앞자락을 펴며 말했다.
“앞의 합계를 뒤에서 그대로 받아 적은 곳도 있습니다.”
“그런 곳을 먼저 알려 주세요.”
로잘린은 빈 종이를 베크 쪽으로 밀었다.
“잘못된 줄을 찾기 전에, 옮겨 적은 줄을 구분하겠습니다.”
베크는 종이를 받아 장부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마티아스가 책상 옆으로 비켜서자 높은 창에서 들어온 빛이 종이 위에 닿았다.
로잘린은 잉크병을 빛이 가리지 않는 쪽으로 옮겼다.
“전하께 드릴 답도 사흘 뒤에 시작할 수 있어요.”
“서두르라는 뜻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마티아스는 문 곁의 작은 선반을 보았다. 물잔을 놓을 만한 빈 곳이 없었다.
“비울 곳이 있습니까.”
로잘린은 풀어 놓은 끈을 가리켰다.
“저건 책상 서랍에 넣어도 되겠어요.”
마티아스가 끈을 모아 서랍에 넣었다. 선반 위에는 물잔을 놓을 자리가 생겼다.
«▼»
마티아스가 나간 뒤에도 베크는 한동안 남았다.
로잘린이 장부를 펼칠 때마다 베크는 어디에서 넘어온 기록인지 알려 주었다. 대답이 짧을 때도 있었지만, 질문을 못 들은 척하지는 않았다.
로잘린은 궁 지출 장부를 덮고 항구 세입 묶음을 가져왔다.
“장부를 맞춰 보고 나면 빈 종이에 다시 적겠습니다.”
“원래 기록은 고치지 않으실 겁니까?”
“잘못됐다고 판단한 줄도 먼저 재상께 보여 드릴게요. 제가 표기를 잘못 읽었을 수 있으니까요.”
베크는 책상 위에 남은 장부를 반듯하게 맞췄다.
“그럼 이것은 두고 가겠습니다. 그 기간의 기록입니다.”
“고맙습니다.”
베크가 문을 나서자 페트라는 기다렸다는 듯 창 쪽으로 갔다. 손잡이를 살펴보고 틈에 손을 대 보았다.
“바람이 들어오네요.”
“종이는 날리지 않아.”
“종이 말고 마님이요.”
페트라는 가져온 천으로 책상 한쪽을 닦았다. 로잘린이 장부를 들어 주자 그 아래도 닦고, 가방을 빈 선반으로 옮겼다.
“의자도 차가워요.”
로잘린은 앉은 채 손을 무릎에 놓았다. 종이를 넘기던 손끝이 조금 뻣뻣해져 있었다.
“오래 앉아 있으니 그렇네.”
“방에서 보시면 안 돼요?”
“이 묶음 다음에 어떤 장부가 필요한지 아직 몰라. 전부 옮길 수는 없지.”
페트라는 대꾸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돌아왔을 때 팔에는 뜨개 목도리가 걸려 있었다.
로잘린이 펜을 내려놓자 페트라가 등 뒤에서 목도리를 둘러 주었다. 끝을 앞쪽으로 모아 주는 손이 장부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러웠다.
“올덴에선 이러지 않았어요.”
“여기선 이렇게 해.”
로잘린은 목도리를 한 번 더 감았다. 느슨한 끝을 어깨 위로 넘기니 책상에 고개를 숙여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페트라가 매듭을 보며 물었다.
“너무 조이지 않으세요?”
“괜찮아. 펜을 들 때 안 내려오네.”
페트라는 책상 가까이 의자를 가져왔다. 로잘린은 물잔을 옆으로 옮겨 페트라가 앉을 자리를 냈다.
“짐을 더 가져올까요?”
“오늘은 이걸로 됐어. 내가 묶음을 바꾸면 겉장 이름을 읽어 줘.”
“제가 읽을 수 있는 말인가요?”
“리타어로 적힌 건 내가 읽을게. 같은 글씨끼리만 모아 줘도 돼.”
페트라는 펼쳐진 장부를 들여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끈을 풀어 던지지 않고 장부마다 곁에 놓았다.
«▼»
밤에는 페트라를 먼저 올려보냈다.
로잘린은 빌려 온 촛대를 책상 가운데로 옮겼다. 목도리 끝에 잉크가 묻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낮에 적은 장부 목록을 다시 읽었다.
궁 지출의 합계는 세입 장부의 줄과 바로 맞지 않았다. 기록한 기간부터 달랐다. 한쪽은 달이 바뀔 때 끊었고, 다른 쪽은 물건을 받았을 때 끊었다.
로잘린은 잘못된 값이라는 표시 대신 날짜를 적었다. 내일은 날짜가 겹치는 묶음부터 봐야 했다.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리다가 빈 물잔을 들었다. 문밖의 복도에는 낮보다 불빛이 적었다. 로잘린은 계단 쪽 작은 상에 놓인 물병으로 잔을 채웠다.
위층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소냐였다.
낮에 질문을 쏟아 내던 말투와 달랐다. 낱말 사이를 길게 두었다가, 한 소리를 다시 조용히 되풀이했다.
로잘린은 물병을 상에 내려놓았다.
난간 위로 소냐의 옆모습이 조금 보였다. 소냐는 손에 든 종이를 보고 있었다. 읽은 뒤 입술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다시 말했을 때는 끝소리가 달랐다.
올덴어도 라우덴어도 아니었다.
목소리가 너무 낮아 문장 전체는 들리지 않았다. 로잘린은 잔을 든 채 기다렸다. 소냐가 이번에는 종이를 보지 않고 말하다가 중간에서 멈췄다.
로잘린이 계단 가까이 가자 소냐가 고개를 들었다. 종이를 접는 손이 빨랐다.
“올덴 언니, 아직 안 주무세요?”
“장부를 조금 더 보고 있어요.”
“이렇게 늦게까지요?”
“오늘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만 적고 끝내려고요.”
소냐는 접은 종이를 두 손 사이에 끼웠다.
“장부방에 계속 계셨어요?”
“방금 물을 가지러 나왔어요.”
“많이 추워요?”
로잘린은 목도리 끝을 들어 보였다.
“페트라가 가져다줬어요.”
소냐가 목도리를 보고 웃었다. 하지만 손은 여전히 종이를 꼭 잡고 있었다.
로잘린은 계단을 올라가지 않았다.
“공주께서도 늦었으니 쉬세요.”
“네. 올덴 언니도요.”
소냐는 돌아서서 복도 안쪽으로 걸어갔다. 문이 닫힌 뒤에도 로잘린은 잠깐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책상에 돌아와 물을 마셨다. 조금 전 들은 소리가 낱말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로잘린은 물잔을 내려놓고 장부 목록을 다시 당겼다.
«▼»
장부방의 촛불이 짧아졌다.
로잘린은 올해 세입을 적은 줄과 곡물 수입 계획서를 나란히 펼쳤다. 한쪽은 들어올 돈이고, 다른 쪽은 써야 할 돈이었다. 지금 금고에 있는 돈과 같게 읽어서는 안 됐다.
‘9만에서 6만을 빼면 3만.’
로잘린은 남은 돈으로 치러야 할 항목을 손끝으로 따라갔다. 궁에서 쓰는 물건과 배를 손보는 비용도 있었다. 곡물만 사고 끝낼 수 있는 살림이 아니었다.
항구 세입 장부를 다시 펼쳤다.
곡물 기록에는 자루 수와 값을 받아 적은 줄이 길게 이어졌다. 소금은 다른 묶음을 함께 봐야 했다. 나간 물량이 적힌 곳과 세금이 들어온 곳을 아직 연결하지 못했다.
로잘린은 낮에 베크가 써 준 장부 이름을 확인했다. 내일 꺼내야 할 묶음을 목록에서 표시한 뒤, 첫 장부의 마지막 기록 아래 남은 칸에 펜촉을 댔다.
「세입 9만. 곡물 6만. 남는 것 3만. 소금은 어디로 갔나.」
로잘린은 펜을 놓고 자로 책상을 두 번 두드렸다.
(7화 끝)
「꽃달 1일, 왕과 왕비는 백성이 모은 소금 앞에서 혼례를 맺고 구리 관을 쓴다. 두 사람의 서약은 광장에 모인 이들이 듣는다.」마티아스는 문턱에 얹힌 로잘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을 조금 옮기자 잉크 자국 위로 엄지가 닿았다.“고칠 곳이 있었군요.”“예. 내일도 있으면 말씀드릴게요.”“듣겠습니다.”마티아스는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로잘린이 문을 닫을 때까지 문 앞에 서 있었다.혼례 옷은 의자 위에 펼쳐져 있었다. 로잘린은 펜을 다시 들지 않고 등불을 낮췄다.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천을 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도 곧 그쳤다.«▼»아침에 게르다가 가져온 것은 수프와 작은 접시였다.“옷부터 입으면 못 드십니다.”접시에는 꿀빵이 놓여 있었다. 표면의 소금이 아침 볕을 받아 희게 보였다. 로잘린이 의자를 당기자 페트라가 수프 그릇을 가까이 밀어 주었다.“광장에 나눌 빵은 옮겼어요. 이건 마님 몫이고요.”“먼저 먹어도 돼?”“마님이 드실 것을 먼저 빼 뒀어요.”페트라가 빵을 갈랐다. 로잘린은 수프를 먹은 뒤 빵 조각으로 접시의 꿀을 훑었다. 게르다는 빈 그릇을 확인하고서야 혼례 옷을 들었다.옷에는 금실도 보석도 없었다. 밝은 천의 소매 끝에 작은 바느질이 이어져 있었다. 로잘린이 팔을 넣자 페트라가 등 뒤를 여몄다.게르다는 어깨의 접힌 곳을 펴고 소매를 내려 주었다.“손을 뻗어 보세요.”로잘린은 책상 쪽으로 팔을 뻗었다. 소매 끝이 손등을 덮지 않았다.“펜을 잡아도 되겠어요.”“오늘도 잡으실 겁니까?”“날짜는 적어야죠.”게르다는 대답 대신 마지막 매듭을 고쳐 묶었다. 페트라가 머리를 빗어 하나로 모았다. 평소보다 천천히 빗살이 내려왔다.문밖에서 소냐가 물었다.“들어가도 돼요? 준비 다 됐어요? 관도 여기 있어요?”“들어와.”소냐는 문을 열자마자 말을 멈췄다. 로잘린의 옷을 보고, 머리를 보고, 다시 옷을 보았다.“언니가 계단을 내려오면 제가 먼저 광장에 알려도 돼요?”“뭐라고?”“우리 왕비가 나온다고요.”게
「왕비의 혼례를 앞두고 백성은 소금 한 줌씩을 광장에 모은다. 가져온 이의 이름과 소금의 양은 묻지 않는다.」복도 끝 서재 문이 열려 있었다.베크는 금고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열쇠를, 다른 손에는 금고 장부를 들고 있었다. 로잘린이 문턱에 서자 베크가 고개를 돌렸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왕비 전하, 돈이 생겼습니다.”한 번 더 말하는 목소리는 처음보다 낮았다.로잘린은 안으로 들어가 장부를 받았다. 마지막 줄에 2만 세르가 적혀 있었다. 베크의 글씨였다. 숫자 옆에 확인한 표시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베크의 손이었고 하나는 마티아스의 손이었다.“세어 보셨어요?”“세 번 셌습니다.”“세 번 다 맞았고요?”“예.”베크는 손등으로 눈가를 눌렀다.“돈이 없다고 말한 날을 셀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전하께서는 알겠다고만 하셨지요.”마티아스가 문 옆에 서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셈은 왕비가 했습니다.”“제가 적었습니다.”로잘린은 장부를 베크에게 돌려주었다.“그럼 둘이 맞춘 거네요. 적은 사람이 없으면 셈도 없어요.”베크는 장부를 받아 금고 위에 놓고, 열쇠를 돌려 문을 잠갔다. 손이 조금 느렸다. 다 잠근 뒤에야 지팡이를 찾아 들었다.“내일부터는 이 숫자로 시작하겠습니다.”“예. 내일 아침에 다시 봐요.”로잘린은 서재를 나오면서 마티아스를 보았다. 마티아스는 베크가 금고 열쇠를 품에 넣는 것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닫아 주었다.«▼»씨앗달 25일 아침, 로잘린은 금고 기록을 덮고 창가로 갔다. 그날부터 아침마다 확인한 장부 끝에는 오늘도 2만 세르가 적혀 있었다. 확인을 마친 기록은 서재로 돌려보내면 되었다.그런데 창밖에서 천을 터는 소리가 들렸다.광장 가운데에 넓은 천이 깔려 있었다. 게르다가 모서리를 잡고, 궁 하인들이 접힌 곳을 펴고 있었다. 천을 다 펼치기도 전에 한 사람이 작은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로잘린은 창을 열었다.소금이 그릇에서 쏟아졌다. 흰 알갱이가 천 위에 작은 무더기를 만들었다.
「당신 자리를 원한 적 없다. 이 말을 먼저 적어도 되는지 오래 망설였습니다.」로잘린은 두 손으로 받은 문서를 책상 위에 펼쳤다. 다리에서 묶어 온 끈을 풀자 올덴 왕실 인장이 창으로 들어온 빛을 받았다.바람달 20일이었다. 문서 끝에는 아직 다리 위에서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로잘린은 그 자국을 손끝으로 눌렀다. 종이가 쉽게 펴지지 않아 두꺼운 장부를 올려 두었다.페트라가 빈 문서함을 가져왔다.“어디에 둘까요, 마님?”“조약 사본 옆에.”“폐위 문서도 거기 있는데요.”“함께 두면 돼. 무엇을 바로잡았는지 알 수 있게.”페트라는 함 안의 종이를 옮겨 자리를 만들었다. 재무대신의 인장이 찍힌 문서 옆에 왕실 인장이 찍힌 문서가 놓였다. 로잘린은 두 문서의 모서리를 맞추고 뚜껑을 닫았다.책상 아래 서랍은 조금 열려 있었다. 문서함을 꺼낼 때 안쪽에 둔 편지가 걸린 탓이었다.로잘린은 서랍을 당겼다.올덴 책봉 서한 아래로 얇은 봉투가 나왔다. 봉한 자리는 뜯기지 않았고, 겉면에는 로잘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페트라가 봉투를 보고 손을 멈췄다.“그 편지도 옮겨 둘까요?”“아니. 오늘 읽을게.”로잘린은 봉투를 책상 위에 놓았다. 페트라는 창가로 가 커튼을 조금 더 걷었다. 바닷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창은 닫아 둔 채였다.편지칼이 봉투의 윗부분을 갈랐다.안에 든 종이는 얇았다. 펼치자 접힌 곳을 따라 글씨가 조금 번져 있었다. 첫 줄 아래에는 잉크를 긁어 지운 자국이 있었다.「당신 자리를 원한 적 없다. 이 말을 먼저 적어도 되는지 오래 망설였습니다.」로잘린은 편지를 내려놓지 않았다.마들렌의 글씨는 책봉 서한의 글씨와 달랐다. 줄 끝으로 갈수록 글자가 작아졌고, 종이 아래에 남겨 둔 여백은 거의 없었다.「아버지는 왕의 곁에 있는 일이 우리 집안을 지키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따랐습니다. 왕께서 손을 내미셨을 때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는 말로 그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압니다.」
「삼국 협정 서문. 두 둑이 같이 젖는다. 두 나라는 서로의 백성이 먹고 살아갈 길을 함께 지킨다.」로잘린은 접어 둔 헨리크의 서한을 협정문 아래에 넣었다.바람달 15일의 강바람이 종이 모서리를 들었다. 마티아스가 탁자 끝을 눌러 주었다.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등에 찬 바람이 닿았다.“그 편지도 가져왔습니까?”“부탁받은 답을 해야 하니까요.”탁자는 하론 강 돌다리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올덴 쪽에서 오는 수레가 잠시 멈췄고, 라우덴 쪽에서는 소금 자루를 내리는 소리가 났다. 빈 수레가 지나갈 길은 가운데에 남겨 두었다.로잘린은 다리 난간의 돌을 보았다. 처음 이곳을 건넜을 때 손끝으로 더듬었던 글이 그대로 있었다.이번에는 그 글을 읽을 사람들이 돌 앞에 함께 섰다.헨리크가 외투의 여밈을 고치며 다가왔다. 흰 수염 끝이 바람에 흔들렸다. 뒤따라온 서기는 문서함을 탁자 옆에 내려놓았다.“보내 준 초안을 읽었소.”“고칠 곳이 있었나요?”“세입이 줄어드는 줄부터 다시 보았소. 통행세까지 없애면 당장은 받는 돈이 줄겠더군.”헨리크가 협정문 위에 손을 얹었다.“대신 떠났던 상인이 돌아와야 그 다음 장부가 채워지겠지.”“돌아올 이유를 오늘 적으려 해요.”“그 이유를 서로 다르게 읽지 않도록 해 주시오.”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사스는 토렌 쪽 문서를 펼쳐 놓고 있었다. 힐데는 구리 값이 적힌 장을 확인했고, 스벤은 소금과 대구의 약정이 붙은 끝장을 잡았다. 베크가 각 문서의 순서를 맞추어 탁자에 놓았다.헨리크가 난간 쪽으로 눈을 돌렸다.“저 글의 뜻도 오늘 듣게 되는 것이오?”“예.”로잘린은 협정문을 잠시 내려놓았다.«▼»돌에 새긴 글은 가운데가 조금 닳아 있었다. 로잘린은 홈에 낀 먼지를 손수건 끝으로 걷어 냈다.헨리크가 곁에 서고 마티아스가 바람이 오는 쪽을 막았다. 힐데와 사스도 돌 앞까지 다가왔다.“리타어입니다.”로잘린이 글을 따라 손을 옮겼다.“두 둑이 같이 젖는다.”스벤이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물이 양쪽
「올덴 귀족회의 결의문. 라이너의 왕위를 거두고 헨리크 공을 왕으로 세운다. 앞서 나라의 이름으로 맺은 조약은 새 왕이 이어 지킨다.」로잘린이 펜을 내려놓은 자리에는 작은 잉크 자국이 남았다.사스는 빈 서명란에서 손을 거두지 않았다. 마티아스가 다리에서 가져온 회담 문서를 펼쳐 탁자 가운데로 밀었다.“귀족회의가 어떤 결정을 할지는 모릅니다.”“왕이 바뀌어도 이 약속이 남습니까?”“그것부터 글로 확인하겠습니다.”로잘린은 초안 위에 깨끗한 종이를 덮었다.“서명할 사람을 짐작해서 적지는 않을 거예요. 답이 오면 완성한 초안을 보내겠습니다.”사스는 그제야 펜을 놓았다.«▼»바람달 1일, 덮어 두었던 초안 위로 올덴 왕실 인장이 찍힌 서한이 놓였다.게르다가 가져온 쟁반에는 서한과 얇은 문서 묶음이 함께 있었다. 끈 끝에 길에서 묻은 마른 흙이 붙어 있었다.로잘린은 끈을 풀기 전에 인장부터 확인했다. 왕실 문양이었다. 추수달에 받았던 폐위 문서의 인장과는 달랐다.“회의실로 가져갈까요?”게르다가 물었다.“여기서 먼저 볼게요.”게르다는 문 옆에서 기다렸다. 로잘린이 봉인을 열자 접힌 종이 사이에서 결의문이 나왔다. 아래쪽에는 귀족회의의 확인을 마쳤다는 글과 서명이 이어져 있었다.왕위를 거둔다는 문장에 라이너의 이름이 있었다.로잘린은 종이 가장자리를 잡은 손을 조금 옮겼다. 파렌 성에서 왕의 이름을 적을 때는 늘 빈칸이 모자랐다. 라이너가 원한 수식어를 넣고 나면 세금과 곡물에 관한 문장은 다음 장으로 넘어가곤 했다.이 문서의 이름 앞에는 긴 말이 붙지 않았다.“왕비 전하?”“재상께 알려 주세요. 올덴에서 답이 왔어요.”“전하께도요?”“예.”게르다는 더 묻지 않고 문을 닫았다.로잘린은 다음 장을 넘겼다. 포셰의 재산 가운데 관세소 장부와 대조해 확인한 몫을 국고로 돌린다는 결정이 있었다. 아직 확인을 마치지 않은 재산은 따로 적어 두었다.해마다 2만 피른이 빠져나간 줄을 찾는 데 쓰였던 아버지의 글씨가 떠올랐다. 이제 올덴의 서
「삼국 협정 초안 1조. 올덴의 밀 1자루와 라우덴의 소금 3자루를 서로의 장부에 올려 직접 교환한다.」마티아스가 세워 주었던 외투 깃에는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로잘린은 회의실 문 옆에 외투를 걸고 깃을 폈다. 안주머니에서 가죽 덮개를 꺼내자 다리에서 받아 온 문서가 함께 나왔다. 바람달 15일에 다시 만나겠다는 글 아래로 두 왕의 서명이 나란히 있었다.오늘 탁자에 놓을 것은 그 약속이 아니라, 약속한 날 읽을 초안이었다.얼음달 10일 아침의 회의실에는 젖은 장화 냄새가 났다. 린드는 문 가까이에 앉았고, 스벤은 창에서 먼 자리를 골랐다. 산악 외투를 벗은 힐데는 구리 거래 장부를 펼쳤다.다시 멜리네에 온 사스는 탁자 가장자리의 잉크 자국부터 살폈다.“이번에는 저울이 없군요.”“운반 장부를 가져오셨으니까요.”로잘린이 초안을 나누어 주었다.“무게를 다시 확인할 일이 없으면 좋겠어요.”사스가 좋은 외투의 소매를 걷었다. 장부를 내려놓는 손은 전보다 조심스러웠다.베크는 초안을 읽다가 곧 고개를 들었다.“관세를 양쪽 모두 3퍼센트로 낮추는 겁니까?”“예. 수출하는 나라와 수입하는 나라가 각각 3퍼센트를 받습니다.”“하론 강 통행세도 없애고요?”“그 조항은 그 아래에 있어요.”베크가 종이를 조금 내렸다.“전하, 돈이 없습니다.”마티아스는 로잘린 옆에 앉아 있었다. 베크가 내민 조항을 읽은 뒤 종이를 다시 탁자 가운데로 놓았다.“빠질 돈부터 적으십시오.”베크는 빈 종이를 당겼다. 로잘린이 그 옆에 항구 세입 장부를 폈다.“들어올 돈도 그 종이에 적어 주세요.”“배가 더 들어온다는 보장이 있어야 합니다.”“그래서 지난 장부를 가져왔어요. 토렌 배가 한 달에 6척 들어왔을 때와 11척 들어왔을 때예요.”베크는 장부의 표시된 줄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배가 늘어도 관세를 낮추면 남는 돈이 줄 수 있습니다.”“맞아요. 배마다 싣는 물건도 다르고요. 그래서 척수만 곱하지 않았습니다.”로잘린은 밀과 소금이 적힌 줄만 골라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