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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볼모의 마차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1 12:08:25

「멜리네 조약 2조. 올덴은 평화의 보증으로 왕족 한 사람을 라우덴 궁에 머물게 한다. 기한은 5년. 라우덴은 그 사람을 정중히 대우한다.」

상자의 걸쇠는 새벽에도 잘 닫혀 있었다.

페트라가 양손으로 뚜껑을 눌러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로잘린은 외투를 입고 가방을 들었다. 폐위 문서와 조약 원문이 든 가방이었다.

“장부는 제가 꺼내 둘까요?”

“마차에 실은 뒤에. 지금은 손이 모자라.”

페트라는 자신의 보따리를 어깨에 걸쳤다. 방문을 나서기 전, 책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왕실 무역 장부는 어젯밤 덮은 그대로였다. 확인을 마친 곳에 끼워 둔 끈이 책상 밖으로 늘어져 있었다.

로잘린은 끈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아래에는 미처 계산하지 못한 메모가 남아 있었다. 종이 끝이 들리지 않게 장부를 조금 밀었다.

“가자.”

복도에는 이른 아침의 찬 공기가 고여 있었다. 페트라가 앞서 문을 열었다. 로잘린은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뒷계단으로 향했다.

«▼»

성 뒷문에 마차가 서 있었다.

말이 돌바닥을 발굽으로 긁었다. 마차꾼은 짐받이에 깔린 천을 펴고 있었고, 올덴 호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의 안장을 살폈다.

배웅하러 나온 사람은 클라라 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작은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로잘린이 가까이 가자 꾸러미를 페트라에게 건넸다.

“길에서 먹어라. 마차가 멈출 때까지 기다리면 끼니를 놓친다.”

페트라가 받아 들고 고개를 숙였다.

클라라는 딸의 외투 깃을 바로잡았다. 오른쪽이 접혀 있었다. 손끝으로 펴도 잘 눕지 않자 접힌 선을 따라 한 번 더 눌렀다.

“목은 가려야겠구나.”

“잘 여밀게요.”

“바닷바람은 여기 바람과 다르다더라.”

“도착하면 편지할게요.”

어머니의 손이 외투에서 내려왔다. 로잘린은 그 손을 잡았다. 새벽 공기 탓인지 손끝이 차가웠다.

클라라는 잠시 딸의 왼손을 들여다보았다. 가운데 손가락의 잉크 자국은 씻고 나와도 남아 있었다.

“토렌 말도 잊지 않았겠지.”

“어머니가 오실 때마다 쓰는데요.”

“내가 자주 왔느냐.”

로잘린은 어머니의 장갑이 외투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것을 보고 꺼내 드렸다. 클라라는 받지 않고 딸의 손을 조금 더 쥐었다.

그리고 토렌어로 말했다.

“장부를 잊지 마라.”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쓰던 말이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돌아온 날에도, 아버지의 관세소로 심부름을 가던 날에도 들었다. 무엇을 받았고 무엇을 내주었는지 적어 두라는 뜻이었다.

로잘린은 토렌어로 답했다.

“제 짐에 넣었어요.”

“가져간다고 다가 아니다. 펼쳐 봐야지.”

“펼쳐 볼게요.”

그제야 클라라가 손을 놓았다. 로잘린은 어머니의 손에 장갑을 얹었다.

마차꾼이 모자를 벗고 다가왔다.

“짐은 다 실었습니다. 출발 전에 이걸 보셔야 한다고 해서요.”

내민 서한에는 라우덴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종이의 접힌 선이 여러 번 눌려 희게 닳아 있었다.

로잘린은 봉투에서 서한을 꺼냈다.

「라우덴 호위 넷이 하론 강 돌다리에서 기다린다. 올덴 호위는 다리까지 동행한다.」

그 아래에는 마차와 짐을 함께 넘겨받는다는 내용이 있었다.

“다리까지 가는 길은 익숙하신가요?”

“짐마차로는 여러 번 갔습니다. 이번에는 성의 마차라 좀 조심스럽습니다만.”

마차꾼이 바퀴 쪽을 보았다.

“축도 확인했습니다. 길만 마르면 나흘 안에 닿습니다.”

“서한은 누가 주었어요?”

“오늘 새벽에 성에서 받았습니다. 다리에 도착하면 라우덴 쪽에 보여 주랍니다.”

로잘린은 서한을 다시 접어 돌려주었다.

“꺼내기 쉬운 데 두세요. 비에 젖지 않게요.”

마차꾼은 안주머니에 넣고 손바닥으로 눌렀다.

페트라가 먼저 마차에 올라 보따리를 안쪽으로 밀었다. 로잘린은 발판에 발을 얹었다가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클라라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한쪽 손가락이 끝까지 들어가지 않아 잡아당기는 중이었다.

로잘린이 내려가 장갑 끝을 펴 드렸다.

“이제 됐어요.”

“그래.”

“안으로 들어가세요. 추워요.”

“마차가 나가는 건 보고.”

클라라는 로잘린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로잘린은 마차에 올라 어머니 쪽 창을 열어 두었다.

문이 닫혔다. 마차꾼이 자리에 앉자 말고삐가 짧게 울렸다.

마차가 움직일 때 클라라는 손을 높이 들지 않았다. 외투 앞에 모은 손을 조금 펴 보였다. 로잘린도 창가에 손을 올렸다.

뒷문을 벗어나자 어머니의 모습은 담에 가려졌다.

로잘린은 창을 닫으려다 성 쪽을 보았다.

위층 창에 붉은 머리가 보였다.

마들렌이었다. 창틀에 손을 댄 채 떠나는 마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깨에는 얇은 숄을 걸쳤고, 머리는 묶지 않았다.

로잘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바퀴가 돌길의 틈을 넘었다. 마차 안이 흔들렸지만 창가에 둔 손은 그대로였다. 마들렌도 창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성벽 모서리가 두 사람 사이에 들어올 때까지 로잘린은 그 창을 보았다.

곧 길이 꺾였다. 창도 성의 지붕도 보이지 않았다.

페트라가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으려 보따리를 옮겼다.

“닫을까요, 마님?”

“조금만 더 열어 두자.”

성 밖에는 빵 굽는 냄새가 났다. 가게 문 앞을 쓸던 사람이 마차를 비켜 섰다. 아침 장에 나가는 수레가 옆길로 지나갔다.

로잘린은 그 수레에 묶인 빈 자루들을 보았다.

“장부를 꺼내 줄래?”

«▼»

페트라는 첫 정차 때 짐받이의 상자를 열었다.

옷을 걷고 바닥에서 천에 감싼 장부를 꺼내 왔다. 상자 뚜껑을 다시 닫고 올라오면서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맨 밑이어서 다 꺼낼 줄 알았는데, 옷 사이로 손이 들어갔어요.”

“젖지는 않았지?”

“천은 말랐어요.”

로잘린은 가죽 장부를 무릎에 놓았다. 가방에서 뼈 자를 꺼내 옆에 두었다. 마차 안의 빛은 창 가까운 자리에서만 충분했다.

표지를 열자 아버지의 글씨가 나왔다.

「하론 강 관세소 세입 사본.」

첫 장의 글씨는 크고 반듯했다. 뒤로 갈수록 글자가 작아졌지만 숫자의 간격은 같았다. 배가 들어온 날, 실은 물품, 받은 통행세와 관세가 차례로 적혀 있었다.

로잘린은 종이 한 장을 들어 빛에 비춰 보았다. 얇은 종이 뒷면으로 다음 장의 글씨가 비쳤다.

“아버님이 쓰신 거죠?”

페트라가 몸을 조금 기울였다.

“관세소 장부를 옮겨 적으신 거야. 15년 치.”

“이걸 다요?”

“필요한 줄만 남기셨어.”

종이 사이에는 좁은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날짜와 장부 쪽수가 적혀 있었다. 로잘린은 쪽지가 빠지지 않도록 손가락으로 눌렀다.

세입을 적은 줄 끝마다 포셰의 이름이 있었다.

그 옆 칸은 비어 있었다.

다음 장도, 그다음 장도 같았다. 배의 이름과 물품은 달랐지만 포셰의 이름 옆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다.

로잘린은 뼈 자를 가로로 놓았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는 줄을 건너 읽기 쉬웠다.

“이쪽은 왜 안 쓰셨어요?”

“아직 모르겠어.”

“빠뜨리신 걸까요?”

로잘린은 앞장으로 돌아가 그 칸을 살폈다. 빈 곳의 폭이 일정했다. 종이 끝까지 빽빽한 장에서도 그 칸만 남겨 두었다.

“빠뜨리셨다면 확인 표시를 하셨을 거야.”

아버지는 잘못 적은 숫자를 지울 때 선을 긋고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 이 장부에도 그런 점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포셰 이름 옆에는 선도 점도 없었다.

페트라가 장부 위로 떨어진 실밥을 집어 치웠다.

“마님이 쓰신 것도 있어요?”

로잘린은 아래쪽 여백을 가리켰다.

어린 글씨로 소금과 구리가 적혀 있었다. 배에서 내린 물건의 이름을 받아 적고, 아버지가 옆에 바른 철자를 덧붙인 자리였다.

“이건 내 글씨야.”

“지금보다 커요.”

“작게 쓰면 나도 못 읽었어.”

페트라는 손가락을 대려다 거뒀다. 로잘린이 장부를 조금 더 가까이 기울여 주었다.

여백에는 라우덴어 낱말도 있었다. 소금을 실어 온 뱃사람이 불러 준 것을 적었던 기억이 났다. 발음을 잘못하면 뱃사람은 물건을 손에 들고 다시 말해 주었다.

로잘린은 입 안에서 그 낱말을 소리 없이 읽었다.

마차가 흔들렸다. 뼈 자가 무릎에서 미끄러지자 페트라가 받아 주었다.

“이건 제가 잡고 있을게요.”

“고마워.”

로잘린은 다시 포셰의 이름이 있는 줄을 찾았다. 당장 채울 수 없는 칸이었다. 빈 곳을 짐작으로 메우지는 않았다.

장부에 끼어 있던 쪽지를 그대로 두고 천천히 덮었다.

«▼»

해가 높아지자 마차가 길가의 물통 앞에 멈췄다.

마차꾼이 말에게 물을 먹이는 동안 페트라는 어머니가 준 꾸러미를 풀었다. 빵과 천에 싼 치즈가 들어 있었다.

로잘린은 빵을 나눠 들고 마차에서 내렸다. 한참 한 자세로 앉아 있어 무릎이 뻣뻣했다. 외투 자락을 여미고 길가를 조금 걸었다.

마차꾼은 말의 목을 쓸며 작은 자루를 열었다.

페트라가 빵을 건넸다.

“아침은 드셨어요?”

“출발 전에 먹었습니다.”

“그래도 받아 두세요. 저희도 먹는 중이에요.”

마차꾼이 손을 털고 빵을 받았다. 로잘린은 자루 안에 든 소금을 보았다.

“말에게 주는 건가요?”

“조금씩 줍니다. 땀을 많이 흘리니까요.”

마차꾼은 자루 입구를 단단히 묶었다.

“사람 먹는 소금도 아껴야 할 판인데 말 몫까지 사려니 돈이 듭니다. 시장에서는 한 자루에 5피른이라더군요.”

“파렌 값이 그렇죠.”

“해마다 소금 배는 들어오는데 싸질 줄을 모릅니다. 바닷가에서는 좀 낫겠지요?”

“라우덴 염전에서는 한 자루에 1.5세르예요.”

마차꾼이 묶던 끈을 멈췄다.

“세르는 얼마인지 잘 몰라서요.”

“지금은 1피른이 1.6세르예요. 그러니 염전에서는 한 자루를 사도 1피른이 채 들지 않아요.”

마차꾼이 자루를 내려다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값이 붙겠군요.”

“운반비도 들고, 관세도 내야 해요.”

“그런데도 5피른입니까?”

로잘린은 빵을 든 손을 바꿨다.

“어디서 얼마나 붙는지는 장부를 봐야 알아요.”

마차꾼은 더 묻지 않았다. 소금 자루를 짐 아래 넣고 말을 돌아보았다.

“들었지. 너는 천천히 먹어라.”

말이 젖은 코를 마차꾼의 소매에 문질렀다. 마차꾼은 소매를 빼며 다시 말했다.

“비싼 거다. 흘리지 말고.”

페트라가 빵 조각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치마 위에 천을 폈다. 로잘린은 마지막 한 입을 먹고 꾸러미를 접었다.

작은 부스러기가 천 안에 남았다. 털어 버리려다 길가에서 씨앗을 쪼는 새를 보고 땅에 내려놓았다.

마차꾼이 물통 뚜껑을 덮었다.

“오늘 묵을 여관은 길에 있습니다. 해 지기 전에 닿을 겁니다.”

“짐을 내릴 수 있는 곳이면 좋겠어요.”

“마당이 있고, 안으로 들이는 것도 됩니다. 제가 옮기겠습니다.”

로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에 올라 이번에는 장부를 가방 바로 옆에 두었다.

페트라가 맞은편에 앉았다.

“이제 맨 밑에 안 넣으세요?”

“길에서도 읽어야겠어.”

페트라는 흔들릴 때 떨어지지 않도록 보따리를 장부 옆에 받쳤다.

오후에는 창을 반쯤 닫았다. 햇빛이 무릎 위로 들어왔다가 길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옆으로 옮겨 갔다.

페트라는 바느질감을 꺼냈다. 로잘린의 외투 안쪽 끈이 느슨해진 것을 보고 정차할 때 고치겠다고 했다.

“지금 입고 있으니 네 손을 찌르겠다.”

“벗어 주시면 되는데요.”

“너도 좀 쉬어.”

페트라는 바늘을 천에 꽂았다. 보따리에 기대고도 한동안 창밖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로잘린은 가방에서 조약을 꺼냈다. 종이가 바퀴의 움직임에 맞춰 조금씩 떨렸다. 장부를 받침 삼아 읽으니 흔들림이 덜했다.

머무는 기한은 5년이었다.

로잘린은 그 부분을 손으로 가리지 않고 펼쳐 두었다. 그동안 필요한 옷은 마차에 실렸고, 읽을 문서는 무릎에 있었다.

창밖의 밭은 아직 밝았다. 지나온 길을 보기 위해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

여관에 닿았을 때는 식당에 등불이 켜져 있었다.

로잘린과 페트라는 안쪽 방을 받았다. 낮은 침대와 물주전자, 벽에 붙인 작은 탁자가 있었다. 창은 마당 쪽으로 났고, 아래에서 말을 매는 소리가 들렸다.

마차꾼이 상자를 들여놓았다. 페트라는 짐받이에 깔았던 천을 걷어 먼지를 턴 뒤 방 한쪽에 접어 두었다.

로잘린은 먼저 가방을 탁자에 놓았다. 장부를 그 옆에 두고 물주전자의 밑바닥을 만져 보았다. 물기가 있었다.

페트라가 마른 천을 가져다 깔았다.

“문서 쪽으로 흐르겠어요.”

“네 옷은 젖지 않았어?”

“안쪽에 있어서 괜찮아요.”

페트라는 보따리를 풀어 자기 옷도 확인했다. 로잘린은 외투를 벗어 건넸다. 낮에 고치지 못한 끈을 손으로 잡아 보였다.

“이제 꿰매도 되겠네.”

페트라는 침대 끝에 앉아 바늘에 실을 꿰었다. 로잘린은 탁자 앞에서 손을 씻었다. 가운데 손가락을 문질렀지만 잉크 자국은 여전히 남았다.

아래층에서 식사가 올라왔다. 따뜻한 수프와 빵이었다.

페트라는 바느질을 멈추고 그릇을 놓았다. 숟가락을 건네려다 로잘린의 손을 보고 자기 수건을 내밀었다.

“물부터 닦으세요.”

로잘린은 손을 닦고 수프를 먹었다. 낮 동안 덜컹거리던 마차와 달리 탁자 위의 그릇은 움직이지 않았다.

페트라는 빵을 뜯다가 문 쪽을 보았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로잘린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페트라는 빵 조각을 수프에 적셨다가 먹지 않고 그릇 가장자리에 놓았다.

“말할 게 있으면 말해.”

“아래에서 라우덴 얘기를 들었어요.”

“짐 옮길 때?”

“네. 국경으로 간다니까 주방 사람이 물어보더라고요. 정말 거기서 살 거냐고.”

로잘린은 물잔을 페트라 쪽으로 밀었다.

“뭐라고 답했어?”

“마님이 가시니까 저도 간다고 했죠.”

페트라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고 무릎 위의 바느질감을 만졌다.

“우리 음식은 못 먹을 거라고도 했어요. 바닷가에서는 온종일 생선만 먹는다고요.”

“가 보면 알겠지.”

“저는 생선 가시를 잘 못 바르는데요.”

“천천히 먹으면 돼.”

로잘린이 빵을 집자 페트라도 그릇 가장자리의 조각을 먹었다. 그러고도 문 쪽을 한 번 더 살폈다.

이번에는 목소리를 낮췄다.

“마님, 라우덴 사람들은 사람을 잡아먹는대요.”

로잘린은 입가에 가져가던 빵을 멈췄다.

페트라는 웃지 않았다. 손에 든 숟가락을 놓고 로잘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로잘린은 라우덴어로 말했다.

“그럼 짜겠네.”

페트라는 못 알아듣고 눈만 깜빡였다.

로잘린은 오늘 처음 웃었다.

(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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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자리를 원한 적 없다. 이 말을 먼저 적어도 되는지 오래 망설였습니다.」로잘린은 두 손으로 받은 문서를 책상 위에 펼쳤다. 다리에서 묶어 온 끈을 풀자 올덴 왕실 인장이 창으로 들어온 빛을 받았다.바람달 20일이었다. 문서 끝에는 아직 다리 위에서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로잘린은 그 자국을 손끝으로 눌렀다. 종이가 쉽게 펴지지 않아 두꺼운 장부를 올려 두었다.페트라가 빈 문서함을 가져왔다.“어디에 둘까요, 마님?”“조약 사본 옆에.”“폐위 문서도 거기 있는데요.”“함께 두면 돼. 무엇을 바로잡았는지 알 수 있게.”페트라는 함 안의 종이를 옮겨 자리를 만들었다. 재무대신의 인장이 찍힌 문서 옆에 왕실 인장이 찍힌 문서가 놓였다. 로잘린은 두 문서의 모서리를 맞추고 뚜껑을 닫았다.책상 아래 서랍은 조금 열려 있었다. 문서함을 꺼낼 때 안쪽에 둔 편지가 걸린 탓이었다.로잘린은 서랍을 당겼다.올덴 책봉 서한 아래로 얇은 봉투가 나왔다. 봉한 자리는 뜯기지 않았고, 겉면에는 로잘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페트라가 봉투를 보고 손을 멈췄다.“그 편지도 옮겨 둘까요?”“아니. 오늘 읽을게.”로잘린은 봉투를 책상 위에 놓았다. 페트라는 창가로 가 커튼을 조금 더 걷었다. 바닷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창은 닫아 둔 채였다.편지칼이 봉투의 윗부분을 갈랐다.안에 든 종이는 얇았다. 펼치자 접힌 곳을 따라 글씨가 조금 번져 있었다. 첫 줄 아래에는 잉크를 긁어 지운 자국이 있었다.「당신 자리를 원한 적 없다. 이 말을 먼저 적어도 되는지 오래 망설였습니다.」로잘린은 편지를 내려놓지 않았다.마들렌의 글씨는 책봉 서한의 글씨와 달랐다. 줄 끝으로 갈수록 글자가 작아졌고, 종이 아래에 남겨 둔 여백은 거의 없었다.「아버지는 왕의 곁에 있는 일이 우리 집안을 지키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따랐습니다. 왕께서 손을 내미셨을 때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는 말로 그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압니다.」

  • 버려진 왕비는 적국의 왕에게 시집갑니다   37화. 두 둑이 같이 젖는다

    「삼국 협정 서문. 두 둑이 같이 젖는다. 두 나라는 서로의 백성이 먹고 살아갈 길을 함께 지킨다.」로잘린은 접어 둔 헨리크의 서한을 협정문 아래에 넣었다.바람달 15일의 강바람이 종이 모서리를 들었다. 마티아스가 탁자 끝을 눌러 주었다.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등에 찬 바람이 닿았다.“그 편지도 가져왔습니까?”“부탁받은 답을 해야 하니까요.”탁자는 하론 강 돌다리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올덴 쪽에서 오는 수레가 잠시 멈췄고, 라우덴 쪽에서는 소금 자루를 내리는 소리가 났다. 빈 수레가 지나갈 길은 가운데에 남겨 두었다.로잘린은 다리 난간의 돌을 보았다. 처음 이곳을 건넜을 때 손끝으로 더듬었던 글이 그대로 있었다.이번에는 그 글을 읽을 사람들이 돌 앞에 함께 섰다.헨리크가 외투의 여밈을 고치며 다가왔다. 흰 수염 끝이 바람에 흔들렸다. 뒤따라온 서기는 문서함을 탁자 옆에 내려놓았다.“보내 준 초안을 읽었소.”“고칠 곳이 있었나요?”“세입이 줄어드는 줄부터 다시 보았소. 통행세까지 없애면 당장은 받는 돈이 줄겠더군.”헨리크가 협정문 위에 손을 얹었다.“대신 떠났던 상인이 돌아와야 그 다음 장부가 채워지겠지.”“돌아올 이유를 오늘 적으려 해요.”“그 이유를 서로 다르게 읽지 않도록 해 주시오.”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사스는 토렌 쪽 문서를 펼쳐 놓고 있었다. 힐데는 구리 값이 적힌 장을 확인했고, 스벤은 소금과 대구의 약정이 붙은 끝장을 잡았다. 베크가 각 문서의 순서를 맞추어 탁자에 놓았다.헨리크가 난간 쪽으로 눈을 돌렸다.“저 글의 뜻도 오늘 듣게 되는 것이오?”“예.”로잘린은 협정문을 잠시 내려놓았다.«▼»돌에 새긴 글은 가운데가 조금 닳아 있었다. 로잘린은 홈에 낀 먼지를 손수건 끝으로 걷어 냈다.헨리크가 곁에 서고 마티아스가 바람이 오는 쪽을 막았다. 힐데와 사스도 돌 앞까지 다가왔다.“리타어입니다.”로잘린이 글을 따라 손을 옮겼다.“두 둑이 같이 젖는다.”스벤이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물이 양쪽

  • 버려진 왕비는 적국의 왕에게 시집갑니다   36화. 귀족회의

    「올덴 귀족회의 결의문. 라이너의 왕위를 거두고 헨리크 공을 왕으로 세운다. 앞서 나라의 이름으로 맺은 조약은 새 왕이 이어 지킨다.」로잘린이 펜을 내려놓은 자리에는 작은 잉크 자국이 남았다.사스는 빈 서명란에서 손을 거두지 않았다. 마티아스가 다리에서 가져온 회담 문서를 펼쳐 탁자 가운데로 밀었다.“귀족회의가 어떤 결정을 할지는 모릅니다.”“왕이 바뀌어도 이 약속이 남습니까?”“그것부터 글로 확인하겠습니다.”로잘린은 초안 위에 깨끗한 종이를 덮었다.“서명할 사람을 짐작해서 적지는 않을 거예요. 답이 오면 완성한 초안을 보내겠습니다.”사스는 그제야 펜을 놓았다.«▼»바람달 1일, 덮어 두었던 초안 위로 올덴 왕실 인장이 찍힌 서한이 놓였다.게르다가 가져온 쟁반에는 서한과 얇은 문서 묶음이 함께 있었다. 끈 끝에 길에서 묻은 마른 흙이 붙어 있었다.로잘린은 끈을 풀기 전에 인장부터 확인했다. 왕실 문양이었다. 추수달에 받았던 폐위 문서의 인장과는 달랐다.“회의실로 가져갈까요?”게르다가 물었다.“여기서 먼저 볼게요.”게르다는 문 옆에서 기다렸다. 로잘린이 봉인을 열자 접힌 종이 사이에서 결의문이 나왔다. 아래쪽에는 귀족회의의 확인을 마쳤다는 글과 서명이 이어져 있었다.왕위를 거둔다는 문장에 라이너의 이름이 있었다.로잘린은 종이 가장자리를 잡은 손을 조금 옮겼다. 파렌 성에서 왕의 이름을 적을 때는 늘 빈칸이 모자랐다. 라이너가 원한 수식어를 넣고 나면 세금과 곡물에 관한 문장은 다음 장으로 넘어가곤 했다.이 문서의 이름 앞에는 긴 말이 붙지 않았다.“왕비 전하?”“재상께 알려 주세요. 올덴에서 답이 왔어요.”“전하께도요?”“예.”게르다는 더 묻지 않고 문을 닫았다.로잘린은 다음 장을 넘겼다. 포셰의 재산 가운데 관세소 장부와 대조해 확인한 몫을 국고로 돌린다는 결정이 있었다. 아직 확인을 마치지 않은 재산은 따로 적어 두었다.해마다 2만 피른이 빠져나간 줄을 찾는 데 쓰였던 아버지의 글씨가 떠올랐다. 이제 올덴의 서

  • 버려진 왕비는 적국의 왕에게 시집갑니다   35화. 협정문 초안

    「삼국 협정 초안 1조. 올덴의 밀 1자루와 라우덴의 소금 3자루를 서로의 장부에 올려 직접 교환한다.」마티아스가 세워 주었던 외투 깃에는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로잘린은 회의실 문 옆에 외투를 걸고 깃을 폈다. 안주머니에서 가죽 덮개를 꺼내자 다리에서 받아 온 문서가 함께 나왔다. 바람달 15일에 다시 만나겠다는 글 아래로 두 왕의 서명이 나란히 있었다.오늘 탁자에 놓을 것은 그 약속이 아니라, 약속한 날 읽을 초안이었다.얼음달 10일 아침의 회의실에는 젖은 장화 냄새가 났다. 린드는 문 가까이에 앉았고, 스벤은 창에서 먼 자리를 골랐다. 산악 외투를 벗은 힐데는 구리 거래 장부를 펼쳤다.다시 멜리네에 온 사스는 탁자 가장자리의 잉크 자국부터 살폈다.“이번에는 저울이 없군요.”“운반 장부를 가져오셨으니까요.”로잘린이 초안을 나누어 주었다.“무게를 다시 확인할 일이 없으면 좋겠어요.”사스가 좋은 외투의 소매를 걷었다. 장부를 내려놓는 손은 전보다 조심스러웠다.베크는 초안을 읽다가 곧 고개를 들었다.“관세를 양쪽 모두 3퍼센트로 낮추는 겁니까?”“예. 수출하는 나라와 수입하는 나라가 각각 3퍼센트를 받습니다.”“하론 강 통행세도 없애고요?”“그 조항은 그 아래에 있어요.”베크가 종이를 조금 내렸다.“전하, 돈이 없습니다.”마티아스는 로잘린 옆에 앉아 있었다. 베크가 내민 조항을 읽은 뒤 종이를 다시 탁자 가운데로 놓았다.“빠질 돈부터 적으십시오.”베크는 빈 종이를 당겼다. 로잘린이 그 옆에 항구 세입 장부를 폈다.“들어올 돈도 그 종이에 적어 주세요.”“배가 더 들어온다는 보장이 있어야 합니다.”“그래서 지난 장부를 가져왔어요. 토렌 배가 한 달에 6척 들어왔을 때와 11척 들어왔을 때예요.”베크는 장부의 표시된 줄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배가 늘어도 관세를 낮추면 남는 돈이 줄 수 있습니다.”“맞아요. 배마다 싣는 물건도 다르고요. 그래서 척수만 곱하지 않았습니다.”로잘린은 밀과 소금이 적힌 줄만 골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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