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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왕비는 적국의 왕에게 시집갑니다
버려진 왕비는 적국의 왕에게 시집갑니다
Author: Jino

1화. 폐위 선고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1 12:08:18

「왕비 로잘린 카렌츠를 후사 없음의 사유로 폐위한다.」

“왕비의 자리를 거두겠다.”

라이너의 말이 끝나자 포셰가 문서를 펼쳤다. 종이 아랫단의 붉은 인장이 먼저 보였다.

로잘린은 왕좌 아래에 서 있었다. 아침부터 장부를 보느라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잉크가 묻어 있었다. 대회의실로 오라는 전갈에는 장부를 두고 오라는 말만 적혀 있었다.

왕좌 오른편에는 마들렌이 서 있었다. 재무대신의 딸이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였다. 붉은 머리 아래로 드러난 목이 희었다.

로잘린이 회의실에 들어올 때까지 그곳에는 왕비의 의자가 있었다.

지금은 없었다.

“전하의 뜻에 따라 문서를 읽겠습니다.”

포셰가 장갑 낀 손으로 종이를 바로잡았다. 반지에 박힌 돌이 창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았다.

폐위 사유는 짧았다. 혼인한 뒤 후사가 없었고, 왕실의 앞날을 위해 왕비의 자리를 비운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에는 왕의 은혜로 신변과 거처를 보장한다는 말이 길게 붙었다.

로잘린은 포셰가 읽는 동안 라이너를 보았다.

라이너는 왕좌 팔걸이에 손을 놓고 있었다. 손가락이 금박 무늬를 따라 움직였다. 로잘린과 눈이 마주치자 손을 멈췄다.

“내 생각엔, 이 편이 서로에게 낫겠어.”

로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궁에서 얼마나 애쓴 줄은 알아. 하지만 왕실에는 왕실의 사정이 있고, 귀족들도 더는 기다리기 어렵다는 뜻을 전해 왔으니…….”

말끝이 흐려졌다. 라이너가 포셰를 보았다.

포셰는 기다렸다는 듯 다음 줄을 읽었다.

“폐위된 로잘린 카렌츠는 멜리네 조약에 따른 평화의 보증으로 라우덴에 머문다.”

회의실 한쪽에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로잘린은 포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서를 주시겠어요.”

포셰의 낭독이 멎었다.

“아직 읽을 부분이 남았습니다.”

“끝까지 읽겠습니다.”

포셰는 라이너를 보았다. 라이너가 턱을 조금 움직였다. 그제야 문서가 로잘린의 손에 놓였다.

종이는 두꺼웠다. 잉크도 새로웠다. 접힌 자국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여러 번 고쳐 쓴 문서의 마지막 장이었다.

로잘린은 첫 줄부터 읽었다.

왕비의 이름은 정확했다. 카렌츠라는 성도, 폐위 사유도, 출발 날짜도 틀리지 않았다. 추수달 19일. 내일이었다.

손가락을 종이 가장자리에 대고 마지막 줄까지 내려갔다.

「멜리네 조약 2조에 따라 왕족으로서 라우덴에 간다.」

로잘린은 그 줄을 다시 읽었다.

왕비의 자리는 거두면서 왕족의 자격은 남겼다. 필요 없는 자리는 없애고, 필요한 이름은 문서 끝에 붙여 두었다.

“저를 왕족으로 보내시는군요.”

“조약에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라이너의 대답은 빨랐다. 준비해 둔 말처럼 들렸다.

“올덴에서 왕족 한 사람이 가야 했어. 미뤄 둔 일이지. 네가 가면 조약도 지키고 네 자리도 마련할 수 있어. 라우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야.”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쪽 궁이다. 조약에 적힌 대로.”

“왕비의 자리는 아니고요.”

라이너가 입술을 다물었다.

마들렌이 모은 손을 조금 내렸다. 손목에 걸린 얇은 팔찌가 소매 안으로 사라졌다.

포셰가 대신 나섰다.

“라우덴은 조약에 따라 정중히 대우할 의무가 있습니다. 거처와 식사, 필요한 물품은 그쪽에서 마련할 것입니다.”

“그 내용도 이 문서에 있습니까.”

“조약에 있습니다.”

“그럼 조약 원문을 함께 보내 주세요.”

“번역본이면 충분합니다.”

“제가 읽을 문서입니다. 원문으로 주세요.”

포셰는 종이를 돌려받으려던 손을 거뒀다. 라이너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는 내주도록 해. 오늘은 다투고 싶지 않아.”

로잘린은 문서를 다투자고 받아 든 것이 아니었다. 다만 종이에 무엇이 적혔는지 알아야 했다. 떠나는 날짜와 머무는 기한을 남의 입으로만 들을 수는 없었다.

종이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렸을 때, 인장 둘레의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올덴 왕실의 인장이 아니었다.

재무대신의 인장이었다.

로잘린은 왼손 엄지로 종이 끝을 눌렀다. 왕실 무역 장부를 제출할 때마다 보던 인장이었다. 세입 보고서와 창고 지급 명령서 아래에 찍히던 것.

포셰는 장갑 낀 손을 배 앞에 모으고 있었다.

“이 문서에도 대신의 인장을 쓰셨네요.”

“출발에 필요한 비용과 절차를 재무부에서 맡았습니다.”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로잘린은 다시 인장을 보았다. 출발 비용을 맡았다는 말과 왕비의 자리를 거둔다는 문장이 같은 종이에 있었다.

“왕실에서 받을 문서는 이것뿐입니까.”

“필요한 문서는 다 갖췄습니다.”

이번에도 포셰가 답했다.

로잘린은 더 묻지 않았다. 인장 바깥까지 번진 붉은 자국과 가장자리의 눌린 글자를 눈에 담았다. 문서를 접으려다 멈추고 그대로 들었다.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포셰의 시선이 종이로 내려갔다.

“출발할 때 마차꾼에게 맡겨도 됩니다.”

“제 이름이 적힌 문서니까요.”

라이너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로잘린, 아니…… 왕비. 이렇게까지 굳게 나올 일은 아니야. 네가 곤란하지 않도록 나도 생각을 많이 했어.”

왕비라는 호칭 뒤에서 잠깐 숨이 끊겼다.

로잘린은 왕좌 옆 빈 바닥을 보았다. 의자를 옮긴 자리의 먼지가 다른 곳보다 옅었다.

“언제 정하셨습니까.”

“여러 사정을 살펴서.”

“제게는 오늘 말씀하셨고요.”

“미리 말했으면 네 마음만 더 상했을 거야.”

로잘린은 문서의 윗부분을 잡았다. 손가락의 잉크가 종이에 닿지 않도록 손을 옮겼다.

라이너는 기다렸다. 변명할 때마다 그랬다. 로잘린이 먼저 괜찮다고 말해 주면, 긴 설명을 끝낼 수 있다는 듯 입을 조금 벌린 채 기다렸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포셰가 헛기침했다.

“라우덴으로 가는 일은 평화에도 도움이 됩니다. 왕비께서도 멜리네 조약의 중요성은 아실 테니.”

“압니다.”

그 조약을 모르기는 어려웠다.

멜리네의 협상장에는 창이 열려 있었다. 바다 냄새가 들어왔고, 서기 앞의 잉크가 마르기 전에 다음 문장이 넘어왔다.

로잘린은 서기 뒤에 앉아 관세 조항을 고쳐 썼다. 수입하는 나라의 몫을 20퍼센트에서 8퍼센트로 낮췄다. 소금과 곡물이 국경을 넘을 때마다 붙는 돈을 장부 옆 여백에 적었다.

‘20에서 8을 빼면 12.’

그만큼 남아야 상인이 다시 배를 띄울 수 있었다.

로잘린이 고친 종이는 서기를 거쳐 왕 앞으로 갔다. 라이너는 조항을 읽고 협상이 순조롭다고 웃었다. 누가 숫자를 바꿨는지는 묻지 않았다.

지금도 라이너는 그 문서를 자신의 성과로 알고 있었다.

“네가 알아듣는다니 다행이야.”

라이너가 팔걸이에서 손을 뗐다.

“평화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해 줬으면 해.”

로잘린은 폐위 문서를 천천히 접었다. 인장이 접히지 않는 곳을 골랐다.

“원문은 제 방으로 보내 주세요.”

“그렇게 하마.”

“짐은 제가 정하겠습니다.”

포셰가 입을 열었다.

“왕실 물품은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

“제 물건만 가져가겠습니다.”

“목록을 확인해야 합니다.”

“목록도 드리죠.”

로잘린은 고개를 숙였다. 늘 회의가 끝날 때 하던 만큼만 숙였다.

돌아서는 길에 마들렌과 눈이 마주쳤다. 마들렌의 입술이 움직였으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로잘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문 앞의 시종이 문고리를 잡았다가 손을 바꿨다. 어느 정도로 문을 열어야 할지 망설이는 듯했다.

로잘린은 문이 벌어진 만큼 먼저 나갔다.

«▼»

복도 끝 창문이 열려 있었다. 대회의실보다 공기가 차가웠다.

로잘린은 창가에 잠시 섰다. 문서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손가락을 펴자 종이 끝이 조금 구겨져 있었다.

치마 아래에서 작은 손이 움직였다.

아홉 살쯤 된 꼬마 시녀가 무릎을 굽힌 채 헝겊으로 치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아침에 잉크병 뚜껑을 닫다가 묻힌 자국이었다.

“그만해도 돼.”

아이는 고개를 더 숙였다.

“금방 닦을게요.”

젖은 헝겊이 천을 지나갈수록 얼룩 가장자리가 넓어졌다. 아이가 손을 멈췄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죄송해요. 제가 더…….”

로잘린은 몸을 낮췄다. 접은 문서를 무릎 위에 놓고 손수건을 꺼냈다.

“잉크는 안 지워져.”

아이가 젖은 눈으로 치마를 보았다.

“그런데 왜 닦는 일을 시켰니.”

“지저분하면 안 된다고 해서요.”

“이건 내가 묻힌 거야.”

로잘린은 손수건을 아이 손에 쥐여 주었다. 작은 손가락이 젖은 헝겊과 마른 손수건을 함께 움켜쥐었다.

“얼굴부터 닦아.”

“돌려드릴게요.”

“지금은 써도 돼.”

아이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 로잘린은 일어나 치마를 한 번 털었다. 잉크 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복도 저편에서 페트라가 급히 걸어왔다. 입술을 누른 채 로잘린의 얼굴부터 살폈다.

“마님.”

“방으로 가자.”

페트라가 아이를 보고 걸음을 늦췄다. 아이가 벽 쪽으로 물러나자 로잘린이 말했다.

“저 아이에게 물을 좀 주고 와.”

페트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로잘린은 먼저 복도를 걸었다. 손수건이 있던 주머니는 비었고, 그 옆 손에는 문서가 남아 있었다.

«▼»

방에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에는 아침에 덮어 둔 무역 장부가 있었다.

로잘린이 펼쳐 놓았던 곳에 가느다란 끈이 끼워져 있었다. 곡물 대금과 소금 수입액을 맞추던 페이지였다. 아직 옮겨 적지 못한 메모도 옆에 남아 있었다.

페트라가 빈 상자를 바닥에 놓았다.

“옷부터 넣을까요.”

“튼튼한 걸로 골라 줘. 무거운 예복은 두고.”

“바닷가라면 바람이 세겠죠.”

“외투도 챙겨.”

페트라는 옷장 문을 열었다. 옷걸이를 빼다가 손을 멈췄다.

“올덴에선 이러지 않았어요.”

로잘린이 돌아보았다.

페트라는 옷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떠나는 손님에게도 짐 꾸릴 시간은 줬어요. 이런 큰 방을 내일 아침까지 비우라니요.”

“다 비울 필요는 없어. 내 것만 가져가면 돼.”

“마님 물건이 얼마나 있다고요.”

페트라가 옷을 상자에 놓았다. 접은 소매를 다시 폈다가 모서리를 맞춰 접었다.

로잘린은 책상 앞에 앉았다.

폐위 문서를 옆에 놓고 남길 물건의 목록부터 썼다. 왕실 장부, 왕실에서 내준 필기구, 문서함. 가져갈 목록에는 옷과 외투, 뼈 자, 깃펜 셋을 적었다.

페트라가 뒤에서 말했다.

“그 자도 확인하겠대요?”

“목록에 있으면 확인하기 쉽겠지.”

로잘린은 뼈 자를 손바닥에 올렸다. 한쪽의 눈금은 오래 만져 닳아 있었다. 모서리에 묻은 잉크를 손톱으로 긁다가 그대로 두었다.

잠시 뒤 시종이 조약 원문을 가져왔다. 얇은 묶음을 책상에 놓고도 손을 바로 거두지 않았다.

“가져가시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맞아요.”

“그럼 인수하셨다는 표시를 부탁드립니다.”

로잘린은 빈 줄에 이름을 적었다. 늘 왕실 장부에 쓰던 것과 같은 글씨였다.

시종이 문서를 받아 나가자 페트라가 조약 묶음을 보았다.

“저것까지 읽으셔야 해요?”

“어디서 어떻게 지낼지 적혀 있어.”

로잘린은 2조가 있는 곳을 펼쳤다. 기한은 5년이었다. 정중히 대우한다는 문장도 있었다.

폐위 문서에는 그 기한이 적혀 있지 않았다. 로잘린은 펜을 들어 폐위 문서 끝줄 옆 여백에 짧게 적었다.

「기한은 5년. 대우는 조약 2조를 따른다.」

제 이름이 적힌 문서였다. 남이 빠뜨린 것은 제 손으로 채워 두어야 했다.

그 아래 장을 넘기자 관세 조항이 나왔다. 깨끗하게 옮겨 적은 원문에는 지운 흔적이 없었다. 로잘린은 8퍼센트라는 부분에 손끝을 댔다가 뗐다.

자신이 고친 숫자는 남았고, 그 옆에 앉았던 자리는 사라졌다.

페트라가 책상 가까이 와서 물었다.

“저도 따라가도 되는 거죠?”

“같이 가겠다고 했으니.”

“혹시 저쪽에서 안 된다고 하면요.”

“내 시녀를 데려가는 데 안 된다는 조항은 없어.”

페트라가 조약을 내려다보았다. 글자를 읽으려는 듯 고개를 기울였지만 오래 보지는 못했다.

“그럼 제 짐도 넣을게요.”

“네 옷부터 챙겨. 내 옷만 넣지 말고.”

페트라가 그제야 상자 옆에 자신의 작은 보따리를 가져다 놓았다.

로잘린은 남겨 둘 장부를 덮었다. 끈은 빼지 않았다. 맡아 읽을 사람이 중간부터라도 찾을 수 있도록 아침의 메모를 반듯하게 끼웠다.

끝내지 못한 페이지에 서명을 하려던 손이 멈췄다.

아직 맞지 않은 돈이 있었다. 확인하지 않은 칸도 있었다.

로잘린은 서명 대신 확인이 끝난 곳까지 표시했다. 그 뒤의 빈칸은 그대로 남겼다.

«▼»

밤이 되자 방 안에는 짐과 침대만 남았다.

벽에 걸린 작은 거울은 두고 가기로 했다. 왕실 물품 목록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트라가 등불 아래에서 목록을 다시 읽으며 상자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로잘린은 침대 옆 낮은 서랍에서 가죽 장부를 꺼냈다.

표지는 어두운 갈색이었다. 잡는 곳은 부드럽게 닳았고, 모서리는 색이 옅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장부였다.

로잘린은 표지 위에 손바닥을 놓았다. 손가락의 잉크 자국이 가죽색과 겹쳐 보였다.

“그건 마님 곁에 두실 거죠?”

페트라가 물었다.

“짐 맨 밑에 넣을게.”

“꺼내기 불편하실 텐데요.”

“젖지 않게 천을 둘러 줘.”

페트라가 마른 천을 가져왔다. 로잘린은 장부를 감싸 상자 바닥에 눕혔다. 그 위에 접은 옷을 놓았다. 뼈 자와 깃펜은 작은 주머니에 따로 넣었다.

폐위 문서는 상자에 넣지 않았다. 조약 원문과 함께 마차 안에서 들고 갈 가방에 넣었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

페트라가 고개를 들었다. 로잘린은 상자 뚜껑에 손을 얹은 채 기다렸다.

발소리는 문 앞에서 멎었다. 노크는 없었다.

“왕비.”

라이너의 목소리였다.

페트라가 문 쪽으로 움직이려 했다. 로잘린이 고개를 저었다. 페트라는 상자 옆에 다시 앉았다.

“짐은 다 꾸렸나?”

“거의 끝났습니다.”

문고리가 조금 움직였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내 생각엔, 필요한 것은 가서 받는 편이 나을 거야. 너무 많이 가져가면 길에서 힘들 테니까.”

로잘린은 가방 덮개를 닫았다.

라이너는 문 밖에 그대로 있었다. 로잘린은 늘 이 시간이면 내일 결재할 서류를 골라 주었다. 오늘 책상 위에는 넘겨줄 서류가 없었다.

“불편한 게 있으면 나중에 서신을 보내.”

로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복도에서 옷자락이 스쳤다. 라이너가 문에 조금 더 가까이 선 듯했다.

“내일 아침 마차다. 조용히 가 주면 좋겠어.”

로잘린은 상자의 걸쇠를 눌렀다. 작은 소리가 났다. 문은 열지 않았다.

“조용히 갈게요. 조약대로.”

(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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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자리를 원한 적 없다. 이 말을 먼저 적어도 되는지 오래 망설였습니다.」로잘린은 두 손으로 받은 문서를 책상 위에 펼쳤다. 다리에서 묶어 온 끈을 풀자 올덴 왕실 인장이 창으로 들어온 빛을 받았다.바람달 20일이었다. 문서 끝에는 아직 다리 위에서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로잘린은 그 자국을 손끝으로 눌렀다. 종이가 쉽게 펴지지 않아 두꺼운 장부를 올려 두었다.페트라가 빈 문서함을 가져왔다.“어디에 둘까요, 마님?”“조약 사본 옆에.”“폐위 문서도 거기 있는데요.”“함께 두면 돼. 무엇을 바로잡았는지 알 수 있게.”페트라는 함 안의 종이를 옮겨 자리를 만들었다. 재무대신의 인장이 찍힌 문서 옆에 왕실 인장이 찍힌 문서가 놓였다. 로잘린은 두 문서의 모서리를 맞추고 뚜껑을 닫았다.책상 아래 서랍은 조금 열려 있었다. 문서함을 꺼낼 때 안쪽에 둔 편지가 걸린 탓이었다.로잘린은 서랍을 당겼다.올덴 책봉 서한 아래로 얇은 봉투가 나왔다. 봉한 자리는 뜯기지 않았고, 겉면에는 로잘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페트라가 봉투를 보고 손을 멈췄다.“그 편지도 옮겨 둘까요?”“아니. 오늘 읽을게.”로잘린은 봉투를 책상 위에 놓았다. 페트라는 창가로 가 커튼을 조금 더 걷었다. 바닷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창은 닫아 둔 채였다.편지칼이 봉투의 윗부분을 갈랐다.안에 든 종이는 얇았다. 펼치자 접힌 곳을 따라 글씨가 조금 번져 있었다. 첫 줄 아래에는 잉크를 긁어 지운 자국이 있었다.「당신 자리를 원한 적 없다. 이 말을 먼저 적어도 되는지 오래 망설였습니다.」로잘린은 편지를 내려놓지 않았다.마들렌의 글씨는 책봉 서한의 글씨와 달랐다. 줄 끝으로 갈수록 글자가 작아졌고, 종이 아래에 남겨 둔 여백은 거의 없었다.「아버지는 왕의 곁에 있는 일이 우리 집안을 지키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따랐습니다. 왕께서 손을 내미셨을 때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는 말로 그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압니다.」

  • 버려진 왕비는 적국의 왕에게 시집갑니다   37화. 두 둑이 같이 젖는다

    「삼국 협정 서문. 두 둑이 같이 젖는다. 두 나라는 서로의 백성이 먹고 살아갈 길을 함께 지킨다.」로잘린은 접어 둔 헨리크의 서한을 협정문 아래에 넣었다.바람달 15일의 강바람이 종이 모서리를 들었다. 마티아스가 탁자 끝을 눌러 주었다.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등에 찬 바람이 닿았다.“그 편지도 가져왔습니까?”“부탁받은 답을 해야 하니까요.”탁자는 하론 강 돌다리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올덴 쪽에서 오는 수레가 잠시 멈췄고, 라우덴 쪽에서는 소금 자루를 내리는 소리가 났다. 빈 수레가 지나갈 길은 가운데에 남겨 두었다.로잘린은 다리 난간의 돌을 보았다. 처음 이곳을 건넜을 때 손끝으로 더듬었던 글이 그대로 있었다.이번에는 그 글을 읽을 사람들이 돌 앞에 함께 섰다.헨리크가 외투의 여밈을 고치며 다가왔다. 흰 수염 끝이 바람에 흔들렸다. 뒤따라온 서기는 문서함을 탁자 옆에 내려놓았다.“보내 준 초안을 읽었소.”“고칠 곳이 있었나요?”“세입이 줄어드는 줄부터 다시 보았소. 통행세까지 없애면 당장은 받는 돈이 줄겠더군.”헨리크가 협정문 위에 손을 얹었다.“대신 떠났던 상인이 돌아와야 그 다음 장부가 채워지겠지.”“돌아올 이유를 오늘 적으려 해요.”“그 이유를 서로 다르게 읽지 않도록 해 주시오.”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사스는 토렌 쪽 문서를 펼쳐 놓고 있었다. 힐데는 구리 값이 적힌 장을 확인했고, 스벤은 소금과 대구의 약정이 붙은 끝장을 잡았다. 베크가 각 문서의 순서를 맞추어 탁자에 놓았다.헨리크가 난간 쪽으로 눈을 돌렸다.“저 글의 뜻도 오늘 듣게 되는 것이오?”“예.”로잘린은 협정문을 잠시 내려놓았다.«▼»돌에 새긴 글은 가운데가 조금 닳아 있었다. 로잘린은 홈에 낀 먼지를 손수건 끝으로 걷어 냈다.헨리크가 곁에 서고 마티아스가 바람이 오는 쪽을 막았다. 힐데와 사스도 돌 앞까지 다가왔다.“리타어입니다.”로잘린이 글을 따라 손을 옮겼다.“두 둑이 같이 젖는다.”스벤이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물이 양쪽

  • 버려진 왕비는 적국의 왕에게 시집갑니다   36화. 귀족회의

    「올덴 귀족회의 결의문. 라이너의 왕위를 거두고 헨리크 공을 왕으로 세운다. 앞서 나라의 이름으로 맺은 조약은 새 왕이 이어 지킨다.」로잘린이 펜을 내려놓은 자리에는 작은 잉크 자국이 남았다.사스는 빈 서명란에서 손을 거두지 않았다. 마티아스가 다리에서 가져온 회담 문서를 펼쳐 탁자 가운데로 밀었다.“귀족회의가 어떤 결정을 할지는 모릅니다.”“왕이 바뀌어도 이 약속이 남습니까?”“그것부터 글로 확인하겠습니다.”로잘린은 초안 위에 깨끗한 종이를 덮었다.“서명할 사람을 짐작해서 적지는 않을 거예요. 답이 오면 완성한 초안을 보내겠습니다.”사스는 그제야 펜을 놓았다.«▼»바람달 1일, 덮어 두었던 초안 위로 올덴 왕실 인장이 찍힌 서한이 놓였다.게르다가 가져온 쟁반에는 서한과 얇은 문서 묶음이 함께 있었다. 끈 끝에 길에서 묻은 마른 흙이 붙어 있었다.로잘린은 끈을 풀기 전에 인장부터 확인했다. 왕실 문양이었다. 추수달에 받았던 폐위 문서의 인장과는 달랐다.“회의실로 가져갈까요?”게르다가 물었다.“여기서 먼저 볼게요.”게르다는 문 옆에서 기다렸다. 로잘린이 봉인을 열자 접힌 종이 사이에서 결의문이 나왔다. 아래쪽에는 귀족회의의 확인을 마쳤다는 글과 서명이 이어져 있었다.왕위를 거둔다는 문장에 라이너의 이름이 있었다.로잘린은 종이 가장자리를 잡은 손을 조금 옮겼다. 파렌 성에서 왕의 이름을 적을 때는 늘 빈칸이 모자랐다. 라이너가 원한 수식어를 넣고 나면 세금과 곡물에 관한 문장은 다음 장으로 넘어가곤 했다.이 문서의 이름 앞에는 긴 말이 붙지 않았다.“왕비 전하?”“재상께 알려 주세요. 올덴에서 답이 왔어요.”“전하께도요?”“예.”게르다는 더 묻지 않고 문을 닫았다.로잘린은 다음 장을 넘겼다. 포셰의 재산 가운데 관세소 장부와 대조해 확인한 몫을 국고로 돌린다는 결정이 있었다. 아직 확인을 마치지 않은 재산은 따로 적어 두었다.해마다 2만 피른이 빠져나간 줄을 찾는 데 쓰였던 아버지의 글씨가 떠올랐다. 이제 올덴의 서

  • 버려진 왕비는 적국의 왕에게 시집갑니다   35화. 협정문 초안

    「삼국 협정 초안 1조. 올덴의 밀 1자루와 라우덴의 소금 3자루를 서로의 장부에 올려 직접 교환한다.」마티아스가 세워 주었던 외투 깃에는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로잘린은 회의실 문 옆에 외투를 걸고 깃을 폈다. 안주머니에서 가죽 덮개를 꺼내자 다리에서 받아 온 문서가 함께 나왔다. 바람달 15일에 다시 만나겠다는 글 아래로 두 왕의 서명이 나란히 있었다.오늘 탁자에 놓을 것은 그 약속이 아니라, 약속한 날 읽을 초안이었다.얼음달 10일 아침의 회의실에는 젖은 장화 냄새가 났다. 린드는 문 가까이에 앉았고, 스벤은 창에서 먼 자리를 골랐다. 산악 외투를 벗은 힐데는 구리 거래 장부를 펼쳤다.다시 멜리네에 온 사스는 탁자 가장자리의 잉크 자국부터 살폈다.“이번에는 저울이 없군요.”“운반 장부를 가져오셨으니까요.”로잘린이 초안을 나누어 주었다.“무게를 다시 확인할 일이 없으면 좋겠어요.”사스가 좋은 외투의 소매를 걷었다. 장부를 내려놓는 손은 전보다 조심스러웠다.베크는 초안을 읽다가 곧 고개를 들었다.“관세를 양쪽 모두 3퍼센트로 낮추는 겁니까?”“예. 수출하는 나라와 수입하는 나라가 각각 3퍼센트를 받습니다.”“하론 강 통행세도 없애고요?”“그 조항은 그 아래에 있어요.”베크가 종이를 조금 내렸다.“전하, 돈이 없습니다.”마티아스는 로잘린 옆에 앉아 있었다. 베크가 내민 조항을 읽은 뒤 종이를 다시 탁자 가운데로 놓았다.“빠질 돈부터 적으십시오.”베크는 빈 종이를 당겼다. 로잘린이 그 옆에 항구 세입 장부를 폈다.“들어올 돈도 그 종이에 적어 주세요.”“배가 더 들어온다는 보장이 있어야 합니다.”“그래서 지난 장부를 가져왔어요. 토렌 배가 한 달에 6척 들어왔을 때와 11척 들어왔을 때예요.”베크는 장부의 표시된 줄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배가 늘어도 관세를 낮추면 남는 돈이 줄 수 있습니다.”“맞아요. 배마다 싣는 물건도 다르고요. 그래서 척수만 곱하지 않았습니다.”로잘린은 밀과 소금이 적힌 줄만 골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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