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멜리네 조약 6조. 두 나라 상인은 상대 나라 항구와 시장에서 그 나라 상인과 같은 세를 낸다.」
항구로 내려가는 돌계단 끝에 물이 고여 있었다.
로잘린은 치맛단을 조금 들어 물을 피했다. 배에서 내려온 밧줄이 길을 가로막자 페트라가 먼저 발로 밀어 놓았다. 젖은 줄에서 바닷물이 떨어졌다.
사스의 배에서는 아직 돛을 거두고 있었다. 짐을 받을 사람들은 창고 문을 열고, 배에서 내려 줄 자루 수를 서로 확인했다.
베크가 부두 끝에서 손을 들었다.
“부인, 이쪽입니다.”
로잘린은 말아 온 견적서를 폈다. 바람에 들리지 않도록 뼈 자로 아래쪽을 눌렀다.
“사스는 어디에 있나요?”
“배 안에서 서류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하역이 끝난 뒤 만나겠다고 합니다.”
“짐을 받기 전에 값을 물을 수는 없나요?”
“왕비께서 오셨다고 전했습니다.”
베크는 배 쪽을 보았다. 좋은 외투를 입은 남자가 난간 안쪽에 서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서도 내려올 채비는 하지 않았다.
로잘린은 견적서에 적힌 밀의 값 옆에 짧게 표시했다.
“그럼 만날 날짜를 받아 주세요. 받은 물건과 받은 서류를 함께 보겠어요.”
베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에서 첫 자루가 내려왔다. 일꾼이 어깨에 받아 창고로 옮겼다. 로잘린은 자루가 문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보았다가 견적서를 다시 말았다.
«▼»
서리달 10일, 창고 앞에는 빈 나무 상자가 책상 대신 놓여 있었다.
상자 위에 사스의 장부와 매입 증서가 펼쳐졌다. 로잘린이 요청한 기록이었다. 베크가 먼저 도착해 서류 끝에 돌을 얹어 두고 있었다.
“받은 수량은 견적과 같습니다.”
“900자루죠?”
“그렇습니다. 창고지기와 배에서 내린 사람이 함께 셌습니다.”
로잘린은 목도리 끝을 외투 안으로 넣고 상자 앞에 섰다. 페트라는 종이와 깃펜을 꺼냈다. 뼈 자는 종이가 젖지 않은 자리까지 확인한 뒤 내려놓았다.
사스가 배에서 걸어왔다.
작은 눈이 베크에게 먼저 닿았다가 로잘린에게 옮겨 왔다. 외투 깃에는 바닷물이 튄 흔적이 없었다.
“부인께서 밀값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사스는 올덴어로 말했다. 말이 매끄러웠지만 인사는 짧았다.
로잘린은 토렌어로 아침 인사를 건넸다.
“배가 무사히 들어와 다행입니다. 요청한 기록도 가져와 주셨군요.”
사스가 장부를 집으려던 손을 멈췄다.
“토렌어를 하십니까?”
“어머니가 토렌 사람이에요.”
로잘린은 펼쳐진 매입 증서를 가리켰다.
“이 약어는 국경 창고에서 값을 치렀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사스도 토렌어로 답했다. 조금 전보다 말이 빨라졌다.
“창고에서 넘겨받을 때의 값과 배에 실은 뒤의 값은 다릅니다. 그 아래에 운반 기록이 있습니다.”
“줄여 쓴 말은 풀어서 설명해 주세요. 빠뜨리지 않고 읽고 싶어요.”
사스가 로잘린의 왼손을 보았다. 종이 모서리를 누르는 손가락에 잉크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장부를 자주 보시는 모양입니다.”
“지금은 이 장부를 보고 있어요.”
로잘린은 깃펜을 들었다.
“밀 1자루를 3.5피른에 사셨네요.”
“올덴 국경에서 받은 값입니다.”
“파렌 시장보다 비싸군요.”
“제가 파렌 시장에서 한 자루씩 살 수는 없지요. 모아 둔 밀을 사야 배를 채울 수 있습니다.”
로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값만 놓고 깎을 생각은 없었다. 날짜에 맞춰 모은 물량에 더 낸 돈은 기록에 남아 있었다.
“그 값은 그대로 두겠어요. 다음은 수출세예요.”
사스가 장부 한쪽을 짚었다.
“5퍼센트입니다.”
“통행세도 냈고요.”
“배 한 척에 4피른이지요.”
베크가 옆에서 말했다.
“이번에는 한 척에 300자루씩 실었습니다.”
로잘린은 통행세 기록과 배의 짐 목록을 나란히 놓았다. 배 전체에 낸 돈을 밀 한 자루마다 다시 붙일 수는 없었다.
“그럼 4피른을 300자루에 나누면 돼요.”
사스는 대답 대신 장부를 조금 앞으로 밀었다.
«▼»
부두 쪽에서 마티아스가 걸어왔다.
배를 세고 돌아오는 길인지 외투 어깨가 젖어 있었다. 로잘린은 인사를 하려다 상자 위 종이를 먼저 붙잡았다. 바람이 증서 끝을 들었다.
마티아스가 상자 옆으로 와 종이 위에 놓인 돌을 옮겼다.
“계속하십시오.”
사스가 허리를 숙였다.
“전하. 곡물은 주문하신 만큼 들였습니다.”
“창고에서 확인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대금을 마무리하면 됩니다.”
“값부터 확인하겠습니다.”
마티아스는 로잘린 옆에 섰다. 상자 위에는 장부와 견적서가 놓여 있었고, 대금을 치렀다는 확인서는 아직 없었다.
로잘린이 운반 기록을 짚었다.
“밀 한 자루에 운반비 0.4피른. 이것도 기록대로 넣었어요.”
“뱃사람에게 줄 돈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스가 말했다.
“창고에서 배까지 옮기는 사람에게도 줍니다.”
“그 항목도 이 운반비 안에 들어 있네요. 여기 확인을 받으셨어요.”
로잘린은 사스가 보여 준 줄 아래를 손끝으로 눌렀다. 돈을 받은 사람의 표식이 있었다.
사스가 입을 다물었다.
“라우덴에 들여오면서 낸 수입세는 8퍼센트고요.”
베크가 세관 영수증을 내놓았다. 로잘린은 사스의 장부와 영수증에 적힌 금액을 맞췄다.
“밀을 산 값에 세금과 통행세, 운반비를 더하면 한 자루에 약 4.4피른이에요. 지금 환율로 바꾸면 약 7세르고요.”
“약이라는 말이 붙는군요.”
“작은 돈까지 확인한 기록은 이쪽에 있어요.”
로잘린은 셈을 적은 종이를 사스에게 돌려놓았다.
“읽기 편하게 줄여 말한 거예요. 잘못 넣은 항목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사스는 종이를 들었다. 위에서 아래로 훑던 눈이 운반비에서 멈췄다가 마지막 줄로 내려갔다.
로잘린은 기다렸다.
베크도 장부를 덮지 않았다. 일꾼이 자루를 옮기는 소리만 상자 뒤로 지나갔다.
사스가 종이를 내려놓았다.
“돈을 잘 세시는군요.”
“틀린 곳은 없나요?”
“적힌 돈에는 없습니다.”
“그럼 남는 값은 4세르예요.”
‘11에서 7을 빼면 4.’
로잘린은 견적서의 값을 가리지 않았다.
“한 자루마다요.”
사스는 외투 앞섶을 여몄다.
“그것은 남는 돈이 아니라 위험 값입니다.”
“무슨 위험인지 장부에 나눠 적어 주실 수 있나요?”
“바람이 제때 불지 않을 위험. 배가 늦게 닿을 위험. 가져온 밀이 팔리지 않을 위험이지요.”
“이번 밀은 오기 전에 주문했어요.”
“주문한 나라에 돈이 없을 위험도 있습니다.”
베크의 손이 장부 끝에서 멈췄다.
로잘린은 베크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마티아스도 사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면 지급 날짜를 정하면 되겠네요.”
로잘린이 말했다.
“확인한 물량은 약속한 날에 지급하는 조건으로요. 팔리지 않을 위험도 없고, 돈 받을 날도 정해져요. 그만큼 값을 낮춰 주세요.”
“낮추지 않겠습니다.”
사스의 대답은 빨랐다.
“부인께서 종이에 날짜를 쓰셔도 제가 배를 띄운 때의 위험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들일 밀까지 이 조건으로 정하자는 말이에요.”
“앞으로도 배는 제가 구해야 합니다.”
사스가 장부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한 자루에 11세르입니다. 그 값으로 보내 달라고 하셨습니다.”
베크가 낮게 말했다.
“견적을 받은 뒤 물량을 요청했습니다.”
로잘린은 견적서 아래의 확인 표식을 보았다. 사스가 값을 바꾸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받은 밀을 도로 싣게 할 수는 없었다.
“값을 다시 정할 생각이 없으시군요.”
“없습니다.”
사스는 웃었다.
“다른 배가 더 싼 밀을 가져오면 그때는 저도 다시 셈하겠습니다.”
«▼»
마티아스가 베크에게 물었다.
“같은 때에 밀을 가져올 다른 상인이 있습니까?”
“지금은 없습니다.”
베크는 견적서를 펴 놓은 채 답했다.
“값을 묻는 답은 왔지만, 필요한 물량과 날짜를 함께 맞추겠다는 곳은 없었습니다.”
로잘린은 깃펜에 묻은 잉크를 털지 않고 펜촉을 종이 가장자리에 댔다. 오늘 값을 낮추려면 사스가 받아들일 이유가 더 있어야 했다.
장부를 읽어 준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사스는 라우덴이 밀을 돌려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잘린도 알았다.
“국경에서 산 값은 확인했어요. 배에 실어 여기까지 옮긴 돈도요.”
로잘린은 셈 종이를 반듯하게 폈다.
“남은 4세르를 전부 위험 값이라고 부르면, 다음 거래에서도 무엇을 줄일 수 있는지 알 수 없어요.”
“줄일 필요가 있습니까? 밀은 들어왔습니다.”
“라우덴은 겨울 동안 밀을 더 사야 해요. 사스 씨도 이번 거래로 끝낼 생각은 아니잖아요.”
사스가 장부를 덮으려다 멈췄다.
“계속 거래하고 싶으시면 배를 띄운 사람에게도 남는 것이 있어야지요.”
“남기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무엇에 얼마를 받는지 나누자는 거예요.”
“그렇게 나눠도 오늘의 값은 같습니다.”
사스는 마지막으로 견적서를 짚었다.
“11세르.”
로잘린은 새 값을 적으려고 비워 둔 자리에 짧게 선을 그었다. 사스가 거절한 조건은 별도 종이에 남겼다. 지급 날짜를 정해 주는 것만으로는 값을 바꾸지 않았다.
“숫자는 거짓말을 안 해요.”
사스가 웃으며 대꾸했다.
“사람은 하지요.”
로잘린은 펜을 내려놓았다.
“그럼 사람의 말은 기록과 맞춰 봐야겠네요.”
“얼마든지 보십시오. 요청한 기록은 다 가져왔습니다.”
사스가 손을 떼자 베크가 매입 증서와 운반 영수증을 모았다. 로잘린은 원래 순서대로 놓고 견적서를 맨 위에 얹었다.
마티아스가 물었다.
“더 확인할 것이 있습니까?”
“창고에 들어온 밀을 보겠어요.”
“문을 열게 하겠습니다.”
사스는 부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배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는 잠깐 배에 다녀오겠습니다. 대금 확인서는 재상께 드리지요.”
로잘린은 답하지 않고 밀 창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창고 앞에 모여 있던 아이들이 길을 비켰다.
한 아이가 로잘린의 손에 들린 종이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아이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건드렸다.
“장부 왕비야.”
작게 한 말이었지만 로잘린에게도 들렸다.
페트라가 고개를 돌리자 아이들이 물러섰다. 로잘린은 걸음을 늦추고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아이들 앞에서 바람에 펄럭이지 않게 뼈 자와 함께 쥐었다.
“밀을 받으러 왔니?”
아이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옮기는 것만 봐요.”
“그럼 문 앞은 비워 둬. 자루를 들고 오는 사람은 아래를 잘 못 보니까.”
아이들이 벽 쪽으로 붙었다. 피노는 그 사이에서 나와 로잘린 옆에 섰다. 맨발 발등에 밀가루가 조금 묻어 있었다.
“셈 선생님, 저도 볼래요.”
“일꾼들 사이로 들어가지는 마.”
“여기서 볼게요.”
로잘린이 문턱을 넘자 아이들이 뒤따라 움직였다. 치맛단 가까이 온 발소리에 페트라가 손바닥을 펴 보였다. 아이들은 그 앞에서 멈췄다.
멀리 소금 창고 문간에 린드가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로잘린과 눈이 마주쳤지만 다가오지는 않았다.
밀 창고 안에는 자루들이 줄을 맞춰 쌓여 있었다. 창고지기가 받은 날짜와 배 이름을 적은 판을 보여 주었다.
로잘린은 판과 자루의 표시를 맞춰 봤다. 견적서에 없는 다른 밀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피노가 문 옆에 놓인 자루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건 두고 봐.”
페트라가 말했지만 피노는 이미 자루 한쪽을 조금 들어 올린 뒤였다. 끌고 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밑에 낀 끈을 빼 주고 내려놓았다.
피노가 손바닥을 털었다.
“가벼워요.”
로잘린이 고개를 돌렸다.
“네가 들기에는 무거운 자루야.”
“다 들지는 못해요. 그런데 부엌에 가져가는 자루는 이만큼도 잘 안 올라가요.”
창고지기가 가까이 와 자루 입구를 살폈다. 끈은 풀리지 않았고 바닥에도 밀알은 떨어져 있지 않았다.
“젖은 자루와 마른 자루는 느낌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건 말라 있네요.”
로잘린은 자루 옆면을 손으로 눌렀다. 천에 적힌 숫자는 선명했다.
40.
안에 얼마나 들었는지는 눌러 보아도 알 수 없었다.
“항구 저울은 어디에 있나요?”
창고지기가 문밖을 가리켰다.
“창고 사이에 있습니다. 빈 자루를 재고 추를 확인한 뒤 쓰면 됩니다.”
“지금 확인해 주세요. 이 자루도 같이 가져가고요.”
피노가 다시 자루를 잡으려 하자 로잘린은 손을 내렸다.
“옮기는 건 맡겨. 너는 앞에 사람이 오는지 봐 줘.”
피노는 곧장 문으로 가 고개를 내밀었다. 구경하던 아이들에게 옆으로 비키라고 손짓했다.
“저울로 간대.”
아이들이 벽에 붙었다. 이번에는 치맛단을 따라오지 않고 자루가 나가는 것을 보았다.
«▼»
저울 아래 돌바닥은 젖지 않았다.
창고지기가 저울판을 비우고 추를 확인했다. 로잘린은 움직이던 표시가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페트라가 기록할 종이를 펴고, 베크가 곁으로 와 섰다.
마티아스는 뒤따라온 아이들이 저울 가까이 붙지 않도록 옆에 자리를 잡았다.
로잘린은 자루의 글씨가 바깥으로 보이게 돌려 달라고 했다. 옮겨 온 일꾼과 함께 자루를 받쳐 저울판에 올렸다.
저울이 기울었다.
창고지기가 추를 옮겼다. 로잘린은 뼈 자를 쥔 손을 멈추고 표시를 읽었다. 자루가 판 밖에 닿았는지 살폈다. 받쳐 둔 것은 없었다.
자루 옆면의 숫자를 다시 보았다.
“한 번 내려놨다가 다시 올려 주세요.”
일꾼이 자루를 들었다. 빈 저울이 돌아온 뒤 로잘린은 다시 자루를 올렸다. 창고지기는 추에 손을 대지 않았다.
같은 자리에서 저울이 멎었다.
로잘린은 종이 대신 자루에 적힌 글씨를 짚었다.
저울은 36킬로그램을 가리켰다. 자루 겉에는 40이라고 적혀 있었다.
(10화 끝)
「꽃달 1일, 왕과 왕비는 백성이 모은 소금 앞에서 혼례를 맺고 구리 관을 쓴다. 두 사람의 서약은 광장에 모인 이들이 듣는다.」마티아스는 문턱에 얹힌 로잘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을 조금 옮기자 잉크 자국 위로 엄지가 닿았다.“고칠 곳이 있었군요.”“예. 내일도 있으면 말씀드릴게요.”“듣겠습니다.”마티아스는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로잘린이 문을 닫을 때까지 문 앞에 서 있었다.혼례 옷은 의자 위에 펼쳐져 있었다. 로잘린은 펜을 다시 들지 않고 등불을 낮췄다.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천을 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도 곧 그쳤다.«▼»아침에 게르다가 가져온 것은 수프와 작은 접시였다.“옷부터 입으면 못 드십니다.”접시에는 꿀빵이 놓여 있었다. 표면의 소금이 아침 볕을 받아 희게 보였다. 로잘린이 의자를 당기자 페트라가 수프 그릇을 가까이 밀어 주었다.“광장에 나눌 빵은 옮겼어요. 이건 마님 몫이고요.”“먼저 먹어도 돼?”“마님이 드실 것을 먼저 빼 뒀어요.”페트라가 빵을 갈랐다. 로잘린은 수프를 먹은 뒤 빵 조각으로 접시의 꿀을 훑었다. 게르다는 빈 그릇을 확인하고서야 혼례 옷을 들었다.옷에는 금실도 보석도 없었다. 밝은 천의 소매 끝에 작은 바느질이 이어져 있었다. 로잘린이 팔을 넣자 페트라가 등 뒤를 여몄다.게르다는 어깨의 접힌 곳을 펴고 소매를 내려 주었다.“손을 뻗어 보세요.”로잘린은 책상 쪽으로 팔을 뻗었다. 소매 끝이 손등을 덮지 않았다.“펜을 잡아도 되겠어요.”“오늘도 잡으실 겁니까?”“날짜는 적어야죠.”게르다는 대답 대신 마지막 매듭을 고쳐 묶었다. 페트라가 머리를 빗어 하나로 모았다. 평소보다 천천히 빗살이 내려왔다.문밖에서 소냐가 물었다.“들어가도 돼요? 준비 다 됐어요? 관도 여기 있어요?”“들어와.”소냐는 문을 열자마자 말을 멈췄다. 로잘린의 옷을 보고, 머리를 보고, 다시 옷을 보았다.“언니가 계단을 내려오면 제가 먼저 광장에 알려도 돼요?”“뭐라고?”“우리 왕비가 나온다고요.”게
「왕비의 혼례를 앞두고 백성은 소금 한 줌씩을 광장에 모은다. 가져온 이의 이름과 소금의 양은 묻지 않는다.」복도 끝 서재 문이 열려 있었다.베크는 금고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열쇠를, 다른 손에는 금고 장부를 들고 있었다. 로잘린이 문턱에 서자 베크가 고개를 돌렸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왕비 전하, 돈이 생겼습니다.”한 번 더 말하는 목소리는 처음보다 낮았다.로잘린은 안으로 들어가 장부를 받았다. 마지막 줄에 2만 세르가 적혀 있었다. 베크의 글씨였다. 숫자 옆에 확인한 표시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베크의 손이었고 하나는 마티아스의 손이었다.“세어 보셨어요?”“세 번 셌습니다.”“세 번 다 맞았고요?”“예.”베크는 손등으로 눈가를 눌렀다.“돈이 없다고 말한 날을 셀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전하께서는 알겠다고만 하셨지요.”마티아스가 문 옆에 서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셈은 왕비가 했습니다.”“제가 적었습니다.”로잘린은 장부를 베크에게 돌려주었다.“그럼 둘이 맞춘 거네요. 적은 사람이 없으면 셈도 없어요.”베크는 장부를 받아 금고 위에 놓고, 열쇠를 돌려 문을 잠갔다. 손이 조금 느렸다. 다 잠근 뒤에야 지팡이를 찾아 들었다.“내일부터는 이 숫자로 시작하겠습니다.”“예. 내일 아침에 다시 봐요.”로잘린은 서재를 나오면서 마티아스를 보았다. 마티아스는 베크가 금고 열쇠를 품에 넣는 것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닫아 주었다.«▼»씨앗달 25일 아침, 로잘린은 금고 기록을 덮고 창가로 갔다. 그날부터 아침마다 확인한 장부 끝에는 오늘도 2만 세르가 적혀 있었다. 확인을 마친 기록은 서재로 돌려보내면 되었다.그런데 창밖에서 천을 터는 소리가 들렸다.광장 가운데에 넓은 천이 깔려 있었다. 게르다가 모서리를 잡고, 궁 하인들이 접힌 곳을 펴고 있었다. 천을 다 펼치기도 전에 한 사람이 작은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로잘린은 창을 열었다.소금이 그릇에서 쏟아졌다. 흰 알갱이가 천 위에 작은 무더기를 만들었다.
「당신 자리를 원한 적 없다. 이 말을 먼저 적어도 되는지 오래 망설였습니다.」로잘린은 두 손으로 받은 문서를 책상 위에 펼쳤다. 다리에서 묶어 온 끈을 풀자 올덴 왕실 인장이 창으로 들어온 빛을 받았다.바람달 20일이었다. 문서 끝에는 아직 다리 위에서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로잘린은 그 자국을 손끝으로 눌렀다. 종이가 쉽게 펴지지 않아 두꺼운 장부를 올려 두었다.페트라가 빈 문서함을 가져왔다.“어디에 둘까요, 마님?”“조약 사본 옆에.”“폐위 문서도 거기 있는데요.”“함께 두면 돼. 무엇을 바로잡았는지 알 수 있게.”페트라는 함 안의 종이를 옮겨 자리를 만들었다. 재무대신의 인장이 찍힌 문서 옆에 왕실 인장이 찍힌 문서가 놓였다. 로잘린은 두 문서의 모서리를 맞추고 뚜껑을 닫았다.책상 아래 서랍은 조금 열려 있었다. 문서함을 꺼낼 때 안쪽에 둔 편지가 걸린 탓이었다.로잘린은 서랍을 당겼다.올덴 책봉 서한 아래로 얇은 봉투가 나왔다. 봉한 자리는 뜯기지 않았고, 겉면에는 로잘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페트라가 봉투를 보고 손을 멈췄다.“그 편지도 옮겨 둘까요?”“아니. 오늘 읽을게.”로잘린은 봉투를 책상 위에 놓았다. 페트라는 창가로 가 커튼을 조금 더 걷었다. 바닷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창은 닫아 둔 채였다.편지칼이 봉투의 윗부분을 갈랐다.안에 든 종이는 얇았다. 펼치자 접힌 곳을 따라 글씨가 조금 번져 있었다. 첫 줄 아래에는 잉크를 긁어 지운 자국이 있었다.「당신 자리를 원한 적 없다. 이 말을 먼저 적어도 되는지 오래 망설였습니다.」로잘린은 편지를 내려놓지 않았다.마들렌의 글씨는 책봉 서한의 글씨와 달랐다. 줄 끝으로 갈수록 글자가 작아졌고, 종이 아래에 남겨 둔 여백은 거의 없었다.「아버지는 왕의 곁에 있는 일이 우리 집안을 지키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따랐습니다. 왕께서 손을 내미셨을 때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는 말로 그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압니다.」
「삼국 협정 서문. 두 둑이 같이 젖는다. 두 나라는 서로의 백성이 먹고 살아갈 길을 함께 지킨다.」로잘린은 접어 둔 헨리크의 서한을 협정문 아래에 넣었다.바람달 15일의 강바람이 종이 모서리를 들었다. 마티아스가 탁자 끝을 눌러 주었다.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등에 찬 바람이 닿았다.“그 편지도 가져왔습니까?”“부탁받은 답을 해야 하니까요.”탁자는 하론 강 돌다리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올덴 쪽에서 오는 수레가 잠시 멈췄고, 라우덴 쪽에서는 소금 자루를 내리는 소리가 났다. 빈 수레가 지나갈 길은 가운데에 남겨 두었다.로잘린은 다리 난간의 돌을 보았다. 처음 이곳을 건넜을 때 손끝으로 더듬었던 글이 그대로 있었다.이번에는 그 글을 읽을 사람들이 돌 앞에 함께 섰다.헨리크가 외투의 여밈을 고치며 다가왔다. 흰 수염 끝이 바람에 흔들렸다. 뒤따라온 서기는 문서함을 탁자 옆에 내려놓았다.“보내 준 초안을 읽었소.”“고칠 곳이 있었나요?”“세입이 줄어드는 줄부터 다시 보았소. 통행세까지 없애면 당장은 받는 돈이 줄겠더군.”헨리크가 협정문 위에 손을 얹었다.“대신 떠났던 상인이 돌아와야 그 다음 장부가 채워지겠지.”“돌아올 이유를 오늘 적으려 해요.”“그 이유를 서로 다르게 읽지 않도록 해 주시오.”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사스는 토렌 쪽 문서를 펼쳐 놓고 있었다. 힐데는 구리 값이 적힌 장을 확인했고, 스벤은 소금과 대구의 약정이 붙은 끝장을 잡았다. 베크가 각 문서의 순서를 맞추어 탁자에 놓았다.헨리크가 난간 쪽으로 눈을 돌렸다.“저 글의 뜻도 오늘 듣게 되는 것이오?”“예.”로잘린은 협정문을 잠시 내려놓았다.«▼»돌에 새긴 글은 가운데가 조금 닳아 있었다. 로잘린은 홈에 낀 먼지를 손수건 끝으로 걷어 냈다.헨리크가 곁에 서고 마티아스가 바람이 오는 쪽을 막았다. 힐데와 사스도 돌 앞까지 다가왔다.“리타어입니다.”로잘린이 글을 따라 손을 옮겼다.“두 둑이 같이 젖는다.”스벤이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물이 양쪽
「올덴 귀족회의 결의문. 라이너의 왕위를 거두고 헨리크 공을 왕으로 세운다. 앞서 나라의 이름으로 맺은 조약은 새 왕이 이어 지킨다.」로잘린이 펜을 내려놓은 자리에는 작은 잉크 자국이 남았다.사스는 빈 서명란에서 손을 거두지 않았다. 마티아스가 다리에서 가져온 회담 문서를 펼쳐 탁자 가운데로 밀었다.“귀족회의가 어떤 결정을 할지는 모릅니다.”“왕이 바뀌어도 이 약속이 남습니까?”“그것부터 글로 확인하겠습니다.”로잘린은 초안 위에 깨끗한 종이를 덮었다.“서명할 사람을 짐작해서 적지는 않을 거예요. 답이 오면 완성한 초안을 보내겠습니다.”사스는 그제야 펜을 놓았다.«▼»바람달 1일, 덮어 두었던 초안 위로 올덴 왕실 인장이 찍힌 서한이 놓였다.게르다가 가져온 쟁반에는 서한과 얇은 문서 묶음이 함께 있었다. 끈 끝에 길에서 묻은 마른 흙이 붙어 있었다.로잘린은 끈을 풀기 전에 인장부터 확인했다. 왕실 문양이었다. 추수달에 받았던 폐위 문서의 인장과는 달랐다.“회의실로 가져갈까요?”게르다가 물었다.“여기서 먼저 볼게요.”게르다는 문 옆에서 기다렸다. 로잘린이 봉인을 열자 접힌 종이 사이에서 결의문이 나왔다. 아래쪽에는 귀족회의의 확인을 마쳤다는 글과 서명이 이어져 있었다.왕위를 거둔다는 문장에 라이너의 이름이 있었다.로잘린은 종이 가장자리를 잡은 손을 조금 옮겼다. 파렌 성에서 왕의 이름을 적을 때는 늘 빈칸이 모자랐다. 라이너가 원한 수식어를 넣고 나면 세금과 곡물에 관한 문장은 다음 장으로 넘어가곤 했다.이 문서의 이름 앞에는 긴 말이 붙지 않았다.“왕비 전하?”“재상께 알려 주세요. 올덴에서 답이 왔어요.”“전하께도요?”“예.”게르다는 더 묻지 않고 문을 닫았다.로잘린은 다음 장을 넘겼다. 포셰의 재산 가운데 관세소 장부와 대조해 확인한 몫을 국고로 돌린다는 결정이 있었다. 아직 확인을 마치지 않은 재산은 따로 적어 두었다.해마다 2만 피른이 빠져나간 줄을 찾는 데 쓰였던 아버지의 글씨가 떠올랐다. 이제 올덴의 서
「삼국 협정 초안 1조. 올덴의 밀 1자루와 라우덴의 소금 3자루를 서로의 장부에 올려 직접 교환한다.」마티아스가 세워 주었던 외투 깃에는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로잘린은 회의실 문 옆에 외투를 걸고 깃을 폈다. 안주머니에서 가죽 덮개를 꺼내자 다리에서 받아 온 문서가 함께 나왔다. 바람달 15일에 다시 만나겠다는 글 아래로 두 왕의 서명이 나란히 있었다.오늘 탁자에 놓을 것은 그 약속이 아니라, 약속한 날 읽을 초안이었다.얼음달 10일 아침의 회의실에는 젖은 장화 냄새가 났다. 린드는 문 가까이에 앉았고, 스벤은 창에서 먼 자리를 골랐다. 산악 외투를 벗은 힐데는 구리 거래 장부를 펼쳤다.다시 멜리네에 온 사스는 탁자 가장자리의 잉크 자국부터 살폈다.“이번에는 저울이 없군요.”“운반 장부를 가져오셨으니까요.”로잘린이 초안을 나누어 주었다.“무게를 다시 확인할 일이 없으면 좋겠어요.”사스가 좋은 외투의 소매를 걷었다. 장부를 내려놓는 손은 전보다 조심스러웠다.베크는 초안을 읽다가 곧 고개를 들었다.“관세를 양쪽 모두 3퍼센트로 낮추는 겁니까?”“예. 수출하는 나라와 수입하는 나라가 각각 3퍼센트를 받습니다.”“하론 강 통행세도 없애고요?”“그 조항은 그 아래에 있어요.”베크가 종이를 조금 내렸다.“전하, 돈이 없습니다.”마티아스는 로잘린 옆에 앉아 있었다. 베크가 내민 조항을 읽은 뒤 종이를 다시 탁자 가운데로 놓았다.“빠질 돈부터 적으십시오.”베크는 빈 종이를 당겼다. 로잘린이 그 옆에 항구 세입 장부를 폈다.“들어올 돈도 그 종이에 적어 주세요.”“배가 더 들어온다는 보장이 있어야 합니다.”“그래서 지난 장부를 가져왔어요. 토렌 배가 한 달에 6척 들어왔을 때와 11척 들어왔을 때예요.”베크는 장부의 표시된 줄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배가 늘어도 관세를 낮추면 남는 돈이 줄 수 있습니다.”“맞아요. 배마다 싣는 물건도 다르고요. 그래서 척수만 곱하지 않았습니다.”로잘린은 밀과 소금이 적힌 줄만 골라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