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멜리네 조약 7조. 한 나라가 흉년이면 다른 나라는 곡물 수출을 막지 않는다. 다만 자기 백성이 먹을 양은 뺀다.」
마티아스가 린드에게 내밀었던 빈 종이 자리를 보았다.
“계산한 것을 가져오게 하겠습니다.”
“받은 값만 적어 오면 안 돼요. 낸 돈의 기록도 있어야 해요.”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로잘린은 영수증을 날짜순으로 모았다. 린드의 장부를 받기 전에는 빈칸을 채울 수 없었다. 확인하지 못한 줄 옆에는 짧은 획만 그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깨에 걸친 외투가 내려왔다. 로잘린은 떨어지기 전에 받아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목도리는 그 아래에서 한쪽으로 밀려 있었다.
“외투 덕분에 끝까지 읽었어요.”
마티아스는 외투를 집지 않고 먼저 문을 열었다.
“남은 것은 내일 보십시오.”
“린드의 기록이 오면요.”
“그 기록은 아직 없습니다.”
로잘린은 들고 있던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더 넘긴다고 생길 기록은 아니었다.
“그럼 다른 장부부터 보겠어요.”
마티아스는 문밖의 하인에게 불을 밝혀 달라고 했다. 로잘린은 목도리를 바로 여미고 서재를 나왔다.
«▼»
서리달 8일, 장부방 문 앞에 곡물 장부가 놓여 있었다.
묶음을 받친 나무판까지 차가웠다. 로잘린은 책상에 옮긴 뒤 천으로 겉장을 닦았다. 바닥에 놓인 쪽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페트라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재상께서 두고 가셨대요. 읽고 계시면 오시겠다고요.”
“린드에게서 온 것은?”
“아직 없어요.”
로잘린은 소금 기록을 옆으로 밀었다. 그 위에는 린드에게 확인할 항목을 적은 종이가 놓여 있었다. 종이를 치우지 않고 곡물 장부를 펼쳤다.
보리 창고에서 보낸 기록이 먼저 나왔다. 창고별로 거둬들인 양을 적고, 맨 아래에는 지난해 수확과 비교한 줄이 있었다.
올해 수확은 평년의 절반이었다.
로잘린은 다른 창고의 기록을 찾아 나란히 놓았다. 어느 한곳에서 덜 거둔 것이 아니었다.
“보리는 여기서도 나는 거죠?”
페트라가 빈 물잔을 가져가며 물었다.
“응. 그런데 올해는 이것만으로 겨울을 날 수 없어.”
“항구 창고에 자루가 많던데요.”
“들어온 것과 남은 것은 달라. 궁뿐 아니라 시장에도 나가니까.”
로잘린은 곡물을 내보낸 장부를 펼쳤다. 받은 곳에는 빵집과 시장, 궁의 부엌이 적혀 있었다. 같은 날짜의 창고 장부와 자루 수를 맞추며 읽었다.
“얼마나 모자라는지는 아직 모르겠어.”
페트라는 물잔을 들고도 잠깐 서 있었다.
“그럼 점심은 여기로 가져올게요.”
“책상 위에 놓지는 마. 옆에 자리를 비워 둘게.”
페트라가 나가고 얼마 뒤 베크가 들어왔다. 팔 아래에는 얇은 장부가 끼워져 있었다.
“부인, 창고에서 보낸 보고를 보셨습니까.”
“올해 보리가 평년의 절반이라고 적혀 있어요.”
“지난해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남겨 둔 것으로 메우기 어렵습니다.”
베크는 가져온 장부를 펼쳐 곡물 장부 옆에 놓았다. 창고 이름보다 돈을 받은 사람과 내준 사람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겨울에 들일 곡물은 이쪽에 있습니다.”
로잘린은 첫 장부터 읽었다. 같은 거래가 창고 기록에서는 자루 수로, 베크의 장부에서는 세르로 적혀 있었다. 출고와 세입만큼이나 함께 읽어야 하는 기록이었다.
장마달 항목에서 손이 멈췄다.
곡물 대금은 8천 세르였다. 창고에 들어온 기록도 있었고, 돈을 받은 쪽의 확인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 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적는 칸만 비어 있었다.
로잘린은 앞뒤 줄을 다시 보았다.
“이 칸에는 금고에서 내준 기록을 적나요?”
“그렇습니다.”
“다른 줄에는 금고 장부를 찾을 표식이 있는데, 여기에는 없어요.”
베크가 몸을 숙였다. 로잘린이 짚은 곳을 보고도 장부를 당겨 가지는 않았다.
“장마달에 들어온 곡물입니다.”
“들어온 기록은 맞아요. 대금도 8천 세르라고 양쪽에 적혀 있고요.”
로잘린은 손가락을 빈칸으로 옮겼다.
“이 돈의 출처는 어디에서 확인하면 되나요?”
베크의 입술이 다물렸다.
밖에서 장부방 문을 지나가는 발소리가 났다. 베크는 소리가 멀어진 뒤에도 빈칸을 보고 있었다. 지팡이를 쥔 손의 손가락만 조금 움직였다.
로잘린은 펜을 들었다.
“이쪽은 지금 설명하지 않으실 건가요?”
베크가 로잘린을 보았다. 대답은 없었다.
“그럼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적어 둘게요.”
로잘린은 별도 종이에 장마달과 곡물 대금을 옮겼다. 그 아래에는 돈이 나온 곳을 확인해야 한다고 적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도, 금고에서 빠졌다고도 쓰지 않았다.
베크가 낮게 말했다.
“곡물값은 모두 치렀습니다.”
“그 기록은 봤어요. 다시 내야 할 돈으로 셈하지 않겠어요.”
로잘린은 종이를 장부 사이에 끼우지 않고 옆에 놓았다.
“지금 살펴볼 것은 겨울에 필요한 돈이죠.”
베크는 잠시 뒤 다음 장을 넘겼다. 접혀 있던 종이를 펴서 로잘린 쪽으로 밀었다.
“토렌 상인에게 받은 견적입니다.”
«▼»
종이 아래에는 요나스 사스의 이름이 있었다.
로잘린은 토렌어로 적힌 항목들을 읽었다. 밀의 값과 자루에 담는 양, 배로 들여올 곳이 짧은 말로 적혀 있었다.
「밀 1자루, 40킬로그램. 11세르.」
로잘린은 마지막 값을 다시 읽었다.
“이번 겨울 곡물은 이 상인이 들이나요?”
“사스가 맡습니다. 이미 주문한 물량도 있습니다.”
“다른 상인에게도 값을 물었어요?”
“물었습니다. 원하는 때에 이만큼을 싣고 올 수 있다는 답은 사스에게서 받았습니다.”
베크는 책상에 손을 짚었다.
“곡물만 구한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배가 있어야 하고, 겨울 전에 창고에 넣어야 합니다.”
“알아요. 그래서 값을 따로 봐야 해요.”
로잘린은 견적서를 펼친 채 올덴에서 쓰던 깃펜을 꺼냈다.
“파렌 시장에서는 밀 1자루가 3피른이었어요.”
“파렌과 멜리네의 값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같다고 하려는 게 아니에요. 지금 환율로 4.8세르라는 뜻이에요.”
로잘린은 두 값을 나란히 적었다.
‘11에서 4.8을 빼면.’
펜촉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남는 값이 모두 사스의 몫은 아니었다. 세금과 운반비를 빼려면 매입 기록부터 알아야 했다.
“사스가 밀을 산 값은 이 종이에 없군요.”
“우리에게 넘기는 값입니다.”
“그럼 산 값과 옮기는 데 든 돈은 아직 모르는 거네요.”
“값이 높다는 것은 압니다.”
베크의 말끝이 짧아졌다.
“하지만 그 밀을 안 받을 수는 없습니다.”
로잘린은 견적서 모서리를 눌렀다. 물건이 필요한 쪽에서 급하다고 말하면, 값을 정하는 쪽은 그 말을 기억했다.
“안 받겠다는 말은 아직 하지 않았어요.”
“값을 낮춰 달라고는 했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배를 띄우는 위험까지 자기가 맡는다고 했습니다.”
로잘린은 사스의 이름을 다시 보았다.
“만나서 더 물어봐야겠어요.”
베크가 고개를 들었다.
“토렌어를 읽으십니까?”
“이 견적서는 읽을 수 있어요.”
“장부에는 더 줄여 쓴 말이 많습니다.”
“그럼 줄이지 말고 설명해 달라고 하죠.”
베크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견적서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이번에 오는 것은 밀 900자루입니다. 배는 세 척이고요.”
로잘린은 그 줄을 읽었다. 배와 물량은 적혀 있었지만, 매입한 곳은 없었다.
“언제 도착하나요?”
“오늘 들어올 예정입니다. 항구에서 소식을 주기로 했습니다.”
로잘린은 견적서를 곡물 장부 위에 놓았다.
“도착하면 저에게도 알려 주세요.”
베크는 책상에 놓인 별도 종이를 보았다. 장마달의 공란을 적어 둔 종이였다.
“그것도 가져가십니까?”
“오늘은 사스의 견적만 가져갈 거예요.”
로잘린은 종이를 따로 접어 책상 안쪽에 두었다.
“이건 여기서 확인할 일이니까요.”
베크가 나간 뒤 로잘린은 장마달 장부를 덮었다. 책등에 손바닥을 잠깐 대었다가, 겨울 곡물 견적을 앞으로 당겼다.
«▼»
점심 뒤 소냐가 찾아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로잘린이 고개를 들자, 문틈으로 검은 곱슬머리가 먼저 보였다.
“올덴 언니, 바빠요? 항구에 가요? 저도 들어가도 돼요?”
“들어와요. 항구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어요.”
소냐는 의자를 끌어 앉았다. 견적서를 들여다보려다 로잘린의 펜 곁에서 손을 멈췄다.
“이건 어느 나라 말이에요?”
“토렌어예요.”
“그럼 오늘은 토렌어를 가르쳐 주세요.”
“올덴어 인사부터 배우기로 했잖아요.”
“그건 금방 할 수 있어요.”
소냐는 등을 펴고 로잘린을 보았다. 로잘린은 올덴어로 아침 인사를 말했다. 소냐가 따라 하자 끝 음절이 조금 길어졌다.
“마지막을 짧게요.”
소냐가 다시 말했다.
로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러면 저녁 인사는요?”
“앞에 붙는 말이 달라요.”
로잘린이 저녁 인사를 들려주자 소냐는 손가락으로 무릎을 짚으며 따라 했다. 이번에는 끝을 짧게 끊었다.
“라이너 왕도 그렇게 말해요?”
로잘린은 펜 뚜껑을 씌우다 멈췄다.
“올덴에서 쓰는 인사예요. 누가 해도 같아요.”
소냐가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모았다.
“저는 언니에게 할게요.”
“저녁에 해 줘요. 지금은 아직 이르니까.”
소냐는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책상 옆에 놓인 셈 종이를 보았다.
“이건 라우덴 셈이에요?”
“장부에 적힌 것을 옮긴 거예요.”
“왜 이 옆에는 다른 표시가 있어요?”
“내가 익숙한 방식으로 확인하려고요.”
소냐는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로잘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럼 이번에는 제가 가르칠래요.”
소냐가 손으로 무릎을 두드렸다. 라우덴 말로 수를 부르는 짧은 노래였다. 로잘린은 관세소에서 뱃사람들이 짐을 셀 때 쓰던 말을 떠올렸다. 낱말은 알았지만 노래의 빠르기는 달랐다.
“여기까지 하고, 열둘이 되면 묶는 거예요.”
소냐가 다시 처음부터 불렀다.
로잘린도 따라 했다. 열을 지난 뒤 익숙한 올덴식 순서로 넘어가자 소냐의 손이 멈췄다.
“아직 묶으면 안 돼요.”
“열둘까지였죠.”
“언니는 열에서 묶었어요.”
로잘린은 셈 종이를 뒤집었다.
“다시 해 볼게요.”
두 번째에는 열둘까지 갔다. 묶음을 부르는 말이 나오자 로잘린의 대답이 노래보다 늦었다. 소냐는 박자를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틀린 거죠?”
로잘린이 묻자 소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낱말은 맞는데, 거기서 쉬면 다음 것을 놓쳐요.”
로잘린은 펜을 내려놓았다. 숫자를 적으면서 들으면 더 쉬울 줄 알았는데, 손이 오히려 박자를 늦췄다.
세 번째에는 소냐의 손만 보고 따라 했다. 이번에는 묶음을 넘기는 말을 앞당겨 불렀다.
소냐가 끝내 웃었다.
“올덴 언니가 저보다 못하는 것도 있네요.”
“이 노래는 소냐 공주가 잘해요.”
“장부는 언니가 잘하고요.”
“노래를 틀렸다고 장부까지 틀리면 곤란하죠.”
소냐는 펼쳐진 곡물 견적서를 조심스럽게 옆으로 밀었다. 빈 종이를 가운데 놓고 손바닥을 얹었다.
“그럼 천천히 할게요. 저도 어릴 때 빨리 못 했어요.”
이번에는 박자가 느렸다. 로잘린은 열을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 열둘을 묶고 다음 말을 따라 하자 소냐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부른 뒤 소냐는 의자에서 조금 높이 앉았다.
“제가 가르쳤어요.”
“네. 잘 배웠어요.”
소냐가 저녁 인사를 다시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건 저녁에요.”
로잘린은 소냐가 돌려놓은 견적서를 집었다. 모서리가 접히지 않도록 밀어 둔 것이 보였다.
“고마워요.”
소냐는 이번에는 올덴어로 짧게 답했다. 조금 전 배운 인사가 아니라, 늘 쓰던 라우덴어 대답을 올덴어인 듯 힘주어 말했다.
로잘린이 웃자 소냐도 웃었다.
«▼»
문밖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항구에 다녀온 하인이 문을 열고 멈췄다. 소냐는 의자를 옆으로 당겨 길을 비켜 주었다.
“부인, 토렌 배가 보입니다.”
로잘린은 견적서를 내려놓았다.
“사스의 배인가요?”
“예. 재상께서 항구로 가셨습니다.”
로잘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낮은 지붕들 너머에 돛이 보였다. 바람을 받아 부풀었던 돛이 항구 가까이에서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소냐도 창가로 왔다.
“밀을 가져오는 배죠?”
“그렇게 주문했어요.”
“많이 오면 빵도 더 만들 수 있겠네요.”
로잘린은 견적서의 900자루라는 줄을 접지 않았다. 종이를 반듯하게 말아 들고 목도리를 여몄다.
“먼저 들어오는 것을 봐야겠어요.”
페트라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항구에 간다는 말을 듣고 로잘린의 장갑을 가져왔지만, 로잘린은 장갑을 주머니에 넣었다. 종이를 펼쳐 읽으려면 맨손이 편했다.
장부방에 돌아가 견적을 베껴 둔 종이를 챙겼다. 장마달의 공란을 적은 종이는 책상 안쪽에 그대로 두었다. 그 위에 다른 기록이 덮이지 않도록 장부를 옆으로 밀었다.
마지막으로 뼈 자를 집었다. 한쪽에는 올덴에서 쓰는 눈금이, 반대쪽에는 라우덴의 눈금이 있었다.
페트라가 물었다.
“그것도 가져가세요?”
“배에서 받은 종이를 읽을 때 필요할지 몰라.”
로잘린은 깃펜을 종이와 함께 챙겼다. 펜촉이 옷에 닿지 않도록 천으로 감싼 뒤 문을 나섰다.
궁 밖에서는 밧줄 당기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금 창고 앞을 지나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항구를 보았다.
사스의 배 세 척이 차례로 항구 안에 들어왔다.
밀 900자루를 받기로 한 날이었다.
로잘린은 뼈 자를 손에 쥐고 항구로 내려갔다.
(9화 끝)
「꽃달 1일, 왕과 왕비는 백성이 모은 소금 앞에서 혼례를 맺고 구리 관을 쓴다. 두 사람의 서약은 광장에 모인 이들이 듣는다.」마티아스는 문턱에 얹힌 로잘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을 조금 옮기자 잉크 자국 위로 엄지가 닿았다.“고칠 곳이 있었군요.”“예. 내일도 있으면 말씀드릴게요.”“듣겠습니다.”마티아스는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로잘린이 문을 닫을 때까지 문 앞에 서 있었다.혼례 옷은 의자 위에 펼쳐져 있었다. 로잘린은 펜을 다시 들지 않고 등불을 낮췄다.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천을 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도 곧 그쳤다.«▼»아침에 게르다가 가져온 것은 수프와 작은 접시였다.“옷부터 입으면 못 드십니다.”접시에는 꿀빵이 놓여 있었다. 표면의 소금이 아침 볕을 받아 희게 보였다. 로잘린이 의자를 당기자 페트라가 수프 그릇을 가까이 밀어 주었다.“광장에 나눌 빵은 옮겼어요. 이건 마님 몫이고요.”“먼저 먹어도 돼?”“마님이 드실 것을 먼저 빼 뒀어요.”페트라가 빵을 갈랐다. 로잘린은 수프를 먹은 뒤 빵 조각으로 접시의 꿀을 훑었다. 게르다는 빈 그릇을 확인하고서야 혼례 옷을 들었다.옷에는 금실도 보석도 없었다. 밝은 천의 소매 끝에 작은 바느질이 이어져 있었다. 로잘린이 팔을 넣자 페트라가 등 뒤를 여몄다.게르다는 어깨의 접힌 곳을 펴고 소매를 내려 주었다.“손을 뻗어 보세요.”로잘린은 책상 쪽으로 팔을 뻗었다. 소매 끝이 손등을 덮지 않았다.“펜을 잡아도 되겠어요.”“오늘도 잡으실 겁니까?”“날짜는 적어야죠.”게르다는 대답 대신 마지막 매듭을 고쳐 묶었다. 페트라가 머리를 빗어 하나로 모았다. 평소보다 천천히 빗살이 내려왔다.문밖에서 소냐가 물었다.“들어가도 돼요? 준비 다 됐어요? 관도 여기 있어요?”“들어와.”소냐는 문을 열자마자 말을 멈췄다. 로잘린의 옷을 보고, 머리를 보고, 다시 옷을 보았다.“언니가 계단을 내려오면 제가 먼저 광장에 알려도 돼요?”“뭐라고?”“우리 왕비가 나온다고요.”게
「왕비의 혼례를 앞두고 백성은 소금 한 줌씩을 광장에 모은다. 가져온 이의 이름과 소금의 양은 묻지 않는다.」복도 끝 서재 문이 열려 있었다.베크는 금고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열쇠를, 다른 손에는 금고 장부를 들고 있었다. 로잘린이 문턱에 서자 베크가 고개를 돌렸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왕비 전하, 돈이 생겼습니다.”한 번 더 말하는 목소리는 처음보다 낮았다.로잘린은 안으로 들어가 장부를 받았다. 마지막 줄에 2만 세르가 적혀 있었다. 베크의 글씨였다. 숫자 옆에 확인한 표시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베크의 손이었고 하나는 마티아스의 손이었다.“세어 보셨어요?”“세 번 셌습니다.”“세 번 다 맞았고요?”“예.”베크는 손등으로 눈가를 눌렀다.“돈이 없다고 말한 날을 셀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전하께서는 알겠다고만 하셨지요.”마티아스가 문 옆에 서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셈은 왕비가 했습니다.”“제가 적었습니다.”로잘린은 장부를 베크에게 돌려주었다.“그럼 둘이 맞춘 거네요. 적은 사람이 없으면 셈도 없어요.”베크는 장부를 받아 금고 위에 놓고, 열쇠를 돌려 문을 잠갔다. 손이 조금 느렸다. 다 잠근 뒤에야 지팡이를 찾아 들었다.“내일부터는 이 숫자로 시작하겠습니다.”“예. 내일 아침에 다시 봐요.”로잘린은 서재를 나오면서 마티아스를 보았다. 마티아스는 베크가 금고 열쇠를 품에 넣는 것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닫아 주었다.«▼»씨앗달 25일 아침, 로잘린은 금고 기록을 덮고 창가로 갔다. 그날부터 아침마다 확인한 장부 끝에는 오늘도 2만 세르가 적혀 있었다. 확인을 마친 기록은 서재로 돌려보내면 되었다.그런데 창밖에서 천을 터는 소리가 들렸다.광장 가운데에 넓은 천이 깔려 있었다. 게르다가 모서리를 잡고, 궁 하인들이 접힌 곳을 펴고 있었다. 천을 다 펼치기도 전에 한 사람이 작은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로잘린은 창을 열었다.소금이 그릇에서 쏟아졌다. 흰 알갱이가 천 위에 작은 무더기를 만들었다.
「당신 자리를 원한 적 없다. 이 말을 먼저 적어도 되는지 오래 망설였습니다.」로잘린은 두 손으로 받은 문서를 책상 위에 펼쳤다. 다리에서 묶어 온 끈을 풀자 올덴 왕실 인장이 창으로 들어온 빛을 받았다.바람달 20일이었다. 문서 끝에는 아직 다리 위에서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로잘린은 그 자국을 손끝으로 눌렀다. 종이가 쉽게 펴지지 않아 두꺼운 장부를 올려 두었다.페트라가 빈 문서함을 가져왔다.“어디에 둘까요, 마님?”“조약 사본 옆에.”“폐위 문서도 거기 있는데요.”“함께 두면 돼. 무엇을 바로잡았는지 알 수 있게.”페트라는 함 안의 종이를 옮겨 자리를 만들었다. 재무대신의 인장이 찍힌 문서 옆에 왕실 인장이 찍힌 문서가 놓였다. 로잘린은 두 문서의 모서리를 맞추고 뚜껑을 닫았다.책상 아래 서랍은 조금 열려 있었다. 문서함을 꺼낼 때 안쪽에 둔 편지가 걸린 탓이었다.로잘린은 서랍을 당겼다.올덴 책봉 서한 아래로 얇은 봉투가 나왔다. 봉한 자리는 뜯기지 않았고, 겉면에는 로잘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페트라가 봉투를 보고 손을 멈췄다.“그 편지도 옮겨 둘까요?”“아니. 오늘 읽을게.”로잘린은 봉투를 책상 위에 놓았다. 페트라는 창가로 가 커튼을 조금 더 걷었다. 바닷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창은 닫아 둔 채였다.편지칼이 봉투의 윗부분을 갈랐다.안에 든 종이는 얇았다. 펼치자 접힌 곳을 따라 글씨가 조금 번져 있었다. 첫 줄 아래에는 잉크를 긁어 지운 자국이 있었다.「당신 자리를 원한 적 없다. 이 말을 먼저 적어도 되는지 오래 망설였습니다.」로잘린은 편지를 내려놓지 않았다.마들렌의 글씨는 책봉 서한의 글씨와 달랐다. 줄 끝으로 갈수록 글자가 작아졌고, 종이 아래에 남겨 둔 여백은 거의 없었다.「아버지는 왕의 곁에 있는 일이 우리 집안을 지키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따랐습니다. 왕께서 손을 내미셨을 때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는 말로 그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압니다.」
「삼국 협정 서문. 두 둑이 같이 젖는다. 두 나라는 서로의 백성이 먹고 살아갈 길을 함께 지킨다.」로잘린은 접어 둔 헨리크의 서한을 협정문 아래에 넣었다.바람달 15일의 강바람이 종이 모서리를 들었다. 마티아스가 탁자 끝을 눌러 주었다.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등에 찬 바람이 닿았다.“그 편지도 가져왔습니까?”“부탁받은 답을 해야 하니까요.”탁자는 하론 강 돌다리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올덴 쪽에서 오는 수레가 잠시 멈췄고, 라우덴 쪽에서는 소금 자루를 내리는 소리가 났다. 빈 수레가 지나갈 길은 가운데에 남겨 두었다.로잘린은 다리 난간의 돌을 보았다. 처음 이곳을 건넜을 때 손끝으로 더듬었던 글이 그대로 있었다.이번에는 그 글을 읽을 사람들이 돌 앞에 함께 섰다.헨리크가 외투의 여밈을 고치며 다가왔다. 흰 수염 끝이 바람에 흔들렸다. 뒤따라온 서기는 문서함을 탁자 옆에 내려놓았다.“보내 준 초안을 읽었소.”“고칠 곳이 있었나요?”“세입이 줄어드는 줄부터 다시 보았소. 통행세까지 없애면 당장은 받는 돈이 줄겠더군.”헨리크가 협정문 위에 손을 얹었다.“대신 떠났던 상인이 돌아와야 그 다음 장부가 채워지겠지.”“돌아올 이유를 오늘 적으려 해요.”“그 이유를 서로 다르게 읽지 않도록 해 주시오.”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사스는 토렌 쪽 문서를 펼쳐 놓고 있었다. 힐데는 구리 값이 적힌 장을 확인했고, 스벤은 소금과 대구의 약정이 붙은 끝장을 잡았다. 베크가 각 문서의 순서를 맞추어 탁자에 놓았다.헨리크가 난간 쪽으로 눈을 돌렸다.“저 글의 뜻도 오늘 듣게 되는 것이오?”“예.”로잘린은 협정문을 잠시 내려놓았다.«▼»돌에 새긴 글은 가운데가 조금 닳아 있었다. 로잘린은 홈에 낀 먼지를 손수건 끝으로 걷어 냈다.헨리크가 곁에 서고 마티아스가 바람이 오는 쪽을 막았다. 힐데와 사스도 돌 앞까지 다가왔다.“리타어입니다.”로잘린이 글을 따라 손을 옮겼다.“두 둑이 같이 젖는다.”스벤이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물이 양쪽
「올덴 귀족회의 결의문. 라이너의 왕위를 거두고 헨리크 공을 왕으로 세운다. 앞서 나라의 이름으로 맺은 조약은 새 왕이 이어 지킨다.」로잘린이 펜을 내려놓은 자리에는 작은 잉크 자국이 남았다.사스는 빈 서명란에서 손을 거두지 않았다. 마티아스가 다리에서 가져온 회담 문서를 펼쳐 탁자 가운데로 밀었다.“귀족회의가 어떤 결정을 할지는 모릅니다.”“왕이 바뀌어도 이 약속이 남습니까?”“그것부터 글로 확인하겠습니다.”로잘린은 초안 위에 깨끗한 종이를 덮었다.“서명할 사람을 짐작해서 적지는 않을 거예요. 답이 오면 완성한 초안을 보내겠습니다.”사스는 그제야 펜을 놓았다.«▼»바람달 1일, 덮어 두었던 초안 위로 올덴 왕실 인장이 찍힌 서한이 놓였다.게르다가 가져온 쟁반에는 서한과 얇은 문서 묶음이 함께 있었다. 끈 끝에 길에서 묻은 마른 흙이 붙어 있었다.로잘린은 끈을 풀기 전에 인장부터 확인했다. 왕실 문양이었다. 추수달에 받았던 폐위 문서의 인장과는 달랐다.“회의실로 가져갈까요?”게르다가 물었다.“여기서 먼저 볼게요.”게르다는 문 옆에서 기다렸다. 로잘린이 봉인을 열자 접힌 종이 사이에서 결의문이 나왔다. 아래쪽에는 귀족회의의 확인을 마쳤다는 글과 서명이 이어져 있었다.왕위를 거둔다는 문장에 라이너의 이름이 있었다.로잘린은 종이 가장자리를 잡은 손을 조금 옮겼다. 파렌 성에서 왕의 이름을 적을 때는 늘 빈칸이 모자랐다. 라이너가 원한 수식어를 넣고 나면 세금과 곡물에 관한 문장은 다음 장으로 넘어가곤 했다.이 문서의 이름 앞에는 긴 말이 붙지 않았다.“왕비 전하?”“재상께 알려 주세요. 올덴에서 답이 왔어요.”“전하께도요?”“예.”게르다는 더 묻지 않고 문을 닫았다.로잘린은 다음 장을 넘겼다. 포셰의 재산 가운데 관세소 장부와 대조해 확인한 몫을 국고로 돌린다는 결정이 있었다. 아직 확인을 마치지 않은 재산은 따로 적어 두었다.해마다 2만 피른이 빠져나간 줄을 찾는 데 쓰였던 아버지의 글씨가 떠올랐다. 이제 올덴의 서
「삼국 협정 초안 1조. 올덴의 밀 1자루와 라우덴의 소금 3자루를 서로의 장부에 올려 직접 교환한다.」마티아스가 세워 주었던 외투 깃에는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로잘린은 회의실 문 옆에 외투를 걸고 깃을 폈다. 안주머니에서 가죽 덮개를 꺼내자 다리에서 받아 온 문서가 함께 나왔다. 바람달 15일에 다시 만나겠다는 글 아래로 두 왕의 서명이 나란히 있었다.오늘 탁자에 놓을 것은 그 약속이 아니라, 약속한 날 읽을 초안이었다.얼음달 10일 아침의 회의실에는 젖은 장화 냄새가 났다. 린드는 문 가까이에 앉았고, 스벤은 창에서 먼 자리를 골랐다. 산악 외투를 벗은 힐데는 구리 거래 장부를 펼쳤다.다시 멜리네에 온 사스는 탁자 가장자리의 잉크 자국부터 살폈다.“이번에는 저울이 없군요.”“운반 장부를 가져오셨으니까요.”로잘린이 초안을 나누어 주었다.“무게를 다시 확인할 일이 없으면 좋겠어요.”사스가 좋은 외투의 소매를 걷었다. 장부를 내려놓는 손은 전보다 조심스러웠다.베크는 초안을 읽다가 곧 고개를 들었다.“관세를 양쪽 모두 3퍼센트로 낮추는 겁니까?”“예. 수출하는 나라와 수입하는 나라가 각각 3퍼센트를 받습니다.”“하론 강 통행세도 없애고요?”“그 조항은 그 아래에 있어요.”베크가 종이를 조금 내렸다.“전하, 돈이 없습니다.”마티아스는 로잘린 옆에 앉아 있었다. 베크가 내민 조항을 읽은 뒤 종이를 다시 탁자 가운데로 놓았다.“빠질 돈부터 적으십시오.”베크는 빈 종이를 당겼다. 로잘린이 그 옆에 항구 세입 장부를 폈다.“들어올 돈도 그 종이에 적어 주세요.”“배가 더 들어온다는 보장이 있어야 합니다.”“그래서 지난 장부를 가져왔어요. 토렌 배가 한 달에 6척 들어왔을 때와 11척 들어왔을 때예요.”베크는 장부의 표시된 줄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배가 늘어도 관세를 낮추면 남는 돈이 줄 수 있습니다.”“맞아요. 배마다 싣는 물건도 다르고요. 그래서 척수만 곱하지 않았습니다.”로잘린은 밀과 소금이 적힌 줄만 골라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