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아삭.마이크에 씹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어갔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이를 키운 농부가 카메라 밖에서 참지 못하고 말했다."거봐요. 내가 멀쩡하다 했잖소.""어르신, 목소리만 나오셨어요. 얼굴도 보여 드릴까요?""어허! 거시기 오이만 가까이 잡으라니까!"댓글창에 웃음 표시가 빠르게 늘었다. 소율은 완성된 상자를 저울 위에 올렸다. 화면에 무게가 보이도록 카메라를 낮추고, 검수 직원이 외관과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까지 그대로 보여 줬다."모양은 달라도 상자마다 받는 무게는 같습니다. 오늘 확인한 상품만 포장하고, 상태가 기준에 맞지 않으면 여기서 제외합니다."준호도 옆 상자를 열어 토마토를 하나씩 보여 줬다."어느 농장에서 왔는지 상자 안쪽 카드에 적겠습니다. 조리하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조합으로 바로 연락 주세요."그때 태블릿에서 맑은 소리가 울렸다.띠링!해나가 화면을 내려다봤다. 집밥 상자 첫 주문이 들어와 있었다."주문 들어왔어요! 첫 상자요!"오이를 키운 농부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마주쳤다.짝!박수를 친 뒤에는 민망했는지 급히 모자를 고쳐 썼다. 하지만 입가에 번진 웃음까지 감추지는 못했다.곧 두 번째 알림이 울렸다.띠링! 띠링!차갑던 댓글 사이에 조리법을 묻는 질문과 주문 완료 표시가 섞이기 시작했다.방송은 곧바로 폭발하지 않았다.첫 주문 뒤에도 숫자는 한동안 3에서 멈췄고, 다시 7까지 올라가는 데 10분이 걸렸다. 생산자들은 주문 알림이 울릴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가, 조용해지면 손에 든 상품을 괜히 다시 닦았다.소율은 조급하게 가격을 내리지 않았다. 어떤 질문에서 사람들이 오래 머무는지 확인하고, 필요한 답을 생산자에게 넘겼다."소스 상자는 토마토가 너무 익어서 배송 중 터지지 않느냐는 질문이에요."토마토를 가져온 여성이 한 알을 손바닥에 올렸다."손가락으로 눌러 보세요. 물렁한 건 여기서 빼고 있어요. 집에 받으시면 절반은 바로 소스 끓이시고, 단단한 건 서늘한 데 두셨다가 드시면 돼요."처음에는 카
해나는 두 사람이 건넨 메모를 읽었다.– 3분만 주세요. 보완해서 다시 보내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통화가 끊기자 해나는 곧바로 노트북을 열었다. 빠진 숫자를 채우고 소율의 승인 서명과 도현의 계산표를 첨부했다. 전송 버튼을 누를 때까지 정확히 2분 41초가 걸렸다.잠시 뒤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보완본 확인했습니다. 장비 임대와 임시 결제 회선 모두 승인했습니다. 장비는 인근 협력업체에서 오전 11시까지 도착합니다.해나가 화면의 시계를 확인했다. 승인 요청을 다시 보낸 지 1분도 지나지 않았다.– 벌써요?– 필요한 숫자가 모두 들어왔으니까요.– ...김 실장님, 말은 되게 답답하게 하시는데 일은 빠르시네요.전화기 너머에서 키보드 소리가 잠깐 멎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네. 그렇게 들으세요. 감사합니다.해나는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까다로운 본사 고참을 상대했다고 생각했는데, 일 처리가 빨라 화를 오래 낼 수도 없었다.같은 시각 서울에서는 김선우가 해담지사 보완 요청을 승인 목록 맨 위에 올렸다. 그는 3분도 안 돼 서류를 완성한 윤 대리를 떠올렸다. 목소리는 급했지만 현장 경력이 꽤 오래된 직원 같았다.두 사람 모두 상대가 자신과 동갑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오전 11시가 되자 이동식 카메라와 조명이 도착했다. 해나는 지역 상인 2명까지 데려왔다. 박정임 사장은 도마를 내려놓자마자 굽은 오이를 집어 들었다."이 정도 휜 걸로 못 판다고? 칼은 직선만 자르는 물건이 아닌데."준호가 작게 웃었고, 오이를 가져온 농부는 입꼬리를 누르느라 고개를 돌렸다.소율은 준비한 진행 원고를 접었다. 자신이 카메라 앞에서 상품을 설명하는 것보다, 지금 나온 한마디가 훨씬 살아 있었다."제가 앞에서 설명하려던 계획은 바꿀게요."그녀가 생산자들을 촬영대 앞으로 불렀다."오늘 주인공은 물건을 키운 분들입니다. 저는 필요한 질문만 드릴게요. 왜 이런 모양이 됐는지, 집에서 어떻게 먹으면 좋은지 직접 말씀해 주세
"외관 기준에서 빠진 이유를 공개하고, 구성과 판매처를 분리해야 합니다. 정규 납품 상품과 경쟁하지 않게 한정 수량으로 끝내겠습니다."소율은 그의 계산표를 본 뒤 상자 옆에 새 종이를 붙였다.[해담 못난이 한 상자]글씨를 읽은 농부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저기... 그래도 못난이는 좀 그렇지 않소? 휘었어도 맛은 멀쩡한데..."그 말에 해나도 종이를 다시 봤다. 이름이 눈에는 잘 들어왔지만, 물건을 키운 사람에게는 속상하게 들릴 수 있었다.소율은 펜을 내려놓지 않았다."그래서 생산자분들의 설명이 필요해요. 못난이라는 말을 흠을 감추는 이름으로 쓰지 않겠습니다. 매장 규격에는 맞지 않았지만 맛과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는 걸 상자마다 밝힐게요. 그래도 싫으시면 다른 이름을 찾겠습니다."농부가 구부러진 오이를 한 번 내려다봤다."흠... 이름을 숨기자는 건 아니고... 누가 왜 이렇게 생겼냐고 물으면 그건 내가 말은 할 수 있지.""어떻게 말씀하시겠어요?""비 많이 온 다음 날 갑자기 컸다고. 생긴 건 굽었어도 썰어 놓으면 똑같다고 해야지."해나가 얼른 종이 아래에 받아 적었다.[비 온 뒤 급하게 자란 오이. 얇게 썰어 냉국과 무침에 사용하세요.]농부가 문장을 읽더니 헛기침했다. 조금 전보다 어깨가 펴졌다."그 정도면 됐네. 얼굴은 가까이 잡지 마시오.""하하, 네. 오이부터 가까이 잡을게요."해나가 웃으며 대답하자 주변의 굳은 분위기도 조금 풀렸다.소율은 상품을 3가지로 나눴다. 채소를 묶은 집밥 상자, 토마토 중심의 소스 상자, 건조 수산물을 담은 바다 상자였다. 무게를 기준으로 구성해 크기가 달라도 소비자가 받는 양은 같게 맞췄다.도현은 계산기를 두드리며 각 상자의 가격 하한선을 적었다. 생산자에게 돌아갈 금액을 먼저 고정하고 포장비와 결제 수수료를 더했다. 배송비를 포함해도 손실이 나지 않는 선에서 가격이 나왔다."이 아래로는 내릴 수 없습니다."도현이 계산표를 소율 앞으로 돌렸다."대신 2상자를 함께 주문하면 같은 지
"48시간 안에 이 물량을 다 팔지 못하면, 저희 조합은 태성과 거래를 끊겠습니다."툭.강준호가 반품 예정표를 접이식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어 휴대전화의 타이머를 48시간에 맞춰 소율 앞에 세웠다.월요일 오전 8시 3분.해담지사 입고장 앞에는 트럭 4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지난주에 왔던 생산자들뿐 아니라 처음 보는 얼굴도 여럿이었다. 구부러진 오이, 크기가 제각각인 토마토, 끝이 갈라진 당근이 투명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바다 쪽 생산자들이 가져온 마른 미역과 반건조 멸치도 포장 규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출고를 기다리고 있었다.물건의 상태보다 생산자들의 얼굴이 먼저 굳어 있었다.허리가 굽은 농부가 오이 하나를 들어 보였다."이게 상했습니까? 조금 휘었다고 창고에서 다시 빼라는데, 계속 이러면 밭을 갈아엎는 게 낫지."옆에 서 있던 중년 여성이 토마토 상자를 끌어안았다. 꼭지를 직접 따 온 사람답게 손끝에 초록물이 배어 있었다."토요일에 장 열어 주신 건 고맙죠. 그런데 하루 팔고 또 원래대로 돌아가면 우리도 더 못 버텨요."지난 수요일, 준호는 지사가 달라지는지 1주일만 더 보겠다고 했다. 그 기한이 끝나는 수요일 아침까지 이제 48시간 남았다. 오늘 가져온 물량은 그동안 반품 통보를 받았거나 대형 매장 출고에서 빠진 상품들이었다.소율은 타이머보다 먼저 상자들을 봤다."전체 수량부터 확인할게요."해나가 들고 있던 목록을 펼쳤다."전부 300상자예요. 채소와 토마토가 220상자, 건조 수산물이 80상자요. 상해서 돌아온 건 빼고, 모양이나 크기 때문에 출고 보류된 것만 다시 모았어요.""제가 상태를 같이 확인하겠습니다."준호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확인만 하다가 이틀 다 보내지는 마십시오."말이 거칠었지만 목소리 끝에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준호 뒤에 선 생산자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팔지 못하면 돈을 받지 못하고, 또 실패하면 지사와 거래를 이어 갈 이유도 사라졌다.소율은 고개를 끄덕였다."오전 중에 상품을 나
도현은 열린 문 너머에 다른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공용문을 닫았다. 소율이 자료를 챙겨 201호로 들어가자 그도 따라 들어가 세탁실 쪽 관리 문을 잠갔다. 아내는 가방을 내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해나가 사라지자 도현은 조금 전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옆집에 사는 사내부부. 그의 시선이 202호 문으로 갔다가 소율에게 돌아왔다."오늘은 옆집으로 돌아가지 말까."오늘 밤도 201호에서 함께 자겠다는 뜻이었다. 소율은 남편이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따라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처음부터 그러실 생각이었잖아요.""들켰네."소율은 그의 손을 잡아 거실로 데려갔다. 나란히 앉자 도현이 테이블 위 자료를 내려다봤다. 오늘 아침까지 두 사람을 의심하던 해나는 이제 돕겠다며 제 수첩까지 내줬다."윤 대리님께 말씀드리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졌어요.""그분도 편해졌겠지. 오늘 종일 우리 때문에 고민했다잖아.""그래도 일은 끝까지 해 주셨고요."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율이 목걸이 줄을 꺼내자 그도 자기 반지를 빼 손가락에 끼웠다. 소율도 제 반지를 끼운 뒤 빈 목걸이를 그의 것 옆에 내려놓았다. 낮 동안 옷 속에 숨겨졌던 두 반지가 나란히 드러났다.도현은 소율에게 손을 내밀었다."이제 내 손만 보고 있지 말고 좀 쉬어."그가 등을 받쳐 주자 소율은 소파에 편하게 기댔다. 아침부터 서 있던 다리가 이제야 묵직했다. 그녀가 발끝을 쭉 펴자 도현이 옆자리의 작은 쿠션을 가져다줬다."여기에 올려.""도현 씨도 계속 들고 옮기셨잖아요. 팔 괜찮아요?""괜찮아. 아까 당신이 계속 왼쪽으로 보내서 조금 더 썼고.""후훗. 그 얘기를 아직 기억하세요?""당신이 내 앞에서 같이 움직이는데 어디에 내려놓으라는 건가 싶었지."소율이 웃으며 그의 팔을 쓸었다. 남편은 장난을 받아 주는 손을 잡아 제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밖에서는 티가 날까 봐 잠깐만 닿았던 손이었다. 지금은 편하게 맞잡고 있어도 됐다."내일은 오전 7시까지예요."도현이 아내의 얼굴을 봤다.
통화를 끝낸 그녀가 서류에 번호를 적었다. 이어서 다른 이름 옆에도 메모를 붙였다."이분은 문자보다 전화로요. 배 타고 나가시면 답이 늦으세요. 이분은 따님한테 같이 알려 드리면 되고요. 농장에서 일하실 땐 휴대전화 소리 잘 못 들으셔서."소율은 메모가 늘어나는 걸 봤다. 지사 목록에는 생산자와 번호만 있었지만, 해나에게는 연락이 닿는 방법까지 있었다."윤 대리님이 따로 정리해 둔 게 있나요?""수첩이 있어요. 반품됐을 때 들은 얘기도 조금 적어 뒀고요. 공식 자료랑 같이 보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해나는 망설이다가 덧붙였다."정리해서 드릴게요. 말 그대로 속상해서 하신 말씀도 있으니까, 숫자랑 사실은 확인하셔야 해요.""네. 말씀을 듣는 것부터 시작하죠. 자료와 다른 부분도 바로 결론 내리지 않고 확인하겠습니다."도현이 연락처 메모를 받아 들었다."본사에 올라가는 기록만으로는 이런 문제를 알기 어렵습니다. 도움 부탁드리겠습니다."해나는 그 말에 조금 웃었다. 아까 휴게실에서 자기 편을 들어 달라고 부탁할 때보다 대답하기 쉬웠다. 지금은 자신이 할 일이 분명했다."그건 제가 잘해요. 대신 제가 전화했다고 다 한꺼번에 물건 보내시라고 하시면 안 돼요. 여기 분들, 된다고 하면 그때요.""확인할 것부터 나눠서 요청드릴게요."소율이 서류를 봉투에 넣었다. 해나는 봉투를 받아 들고 먼저 계단 쪽으로 갔다가 도현을 돌아봤다."차 과장님, 아침에 옆방으로 돌아가실 때 반지 빼는 거 잊지 마세요. 다른 직원이 보면 저처럼 오해할 수도 있잖아요.""네. 내일은 챙기겠습니다."소율이 벤치에서 일어서며 웃었다.해나의 당부는 다른 직원에게 들키지 않도록 반지를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소율은 그 말을 남편이 자기 방에서 나가기 전에 직접 챙겨 주겠다는 말로 받아쳤다."제 방에서 나가시기 전에 저도 한번 더 물어볼게요."오늘 밤에도 201호에서 함께 자겠다는 뜻이 자연스럽게 섞였다. 도현도 아내가 건넨 장난을 놓치지 않았다.도현이 아내 쪽으로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