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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빙신(氷神), 출근합니다
EX급 빙신(氷神), 출근합니다
Author: 고독한포켓

1화: 최종 병기, 출근합니다 1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1 11:47:31

2025년 12월, 부산.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창틀을 덜컹거렸다.

​"으으... 춥다."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알람을 껐다. 오전 05:30.

'국방의 의무를 수행 중인 전문 인력'에게 늦잠은 사치다. 몸을 일으켜 커튼을 젖히자, 익숙하면서도 끔찍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2 해안 방어선: 접근 금지]

​집채만한 테트라포드가 산맥처럼 쌓여 있고, 그 위로는 높이 50미터의 회색 방벽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저 너머엔 바다가 있다. 낭만 가득한 겨울 바다가 아니라, 인류를 씹어 먹으려는 [심연(The Abyss)] 놈들이 득시글거리는 지옥의 수조가.

​10년 전, 2015년. [대해식(Great Sea Erosion)]이 시작됐다.

태평양 깊은 곳, 포인트 니모 인근 심해에서 '그것'들이 기어 올라왔다. 우주가 아니라 발밑의 바다에서 열린 지옥문.

가장 가까운 섬나라였던 일본은 지도에서 지워졌고, 살아남은 피난민들은 한국으로 넘어와 우리와 섞였다.

​그 대가로 한국은 인류 최후의 방파제가 되었다.

놈들의 심장인 '마석' 덕분에 때아닌 에너지 경제 호황을 누리고 있다지만, 매일 아침 방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해귀(海鬼)'들의 울음소리를 듣는 부산 사람들에겐 그저 생존 게임일 뿐이다.

​"후우..."

​거울 속의 남자가 푸석한 얼굴로 나를 노려본다.

짧은 흑발, 굳은살 박인 손.

[대한민국 육군 해안 방위사령부 상병 하태수]

​그리고 내 눈앞에만 보이는 반투명한 상태창.

​[이름: 하태수 (23세)]

[등급: EX]

[특성: 빙정(氷精) - 동결 상태]

​EX급.

17살 생일, 협회 직원이 내 상태창을 보고 기절초풍하며 국가 전략병기니 뭐니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결과는?

이놈의 빙정은 꼼짝도 안 한다. 마력을 쏟아붓든, 억대 영약을 처먹든, 뱃속에 들어앉은 얼음 구슬은 녹지도 깨지지도 않는다.

그냥 뱃속에 든 차가운 돌덩이.

​그날 이후 내 별명은 정해졌다.

EX급 빙신(氷神).

발음을 좀 더 세게 해서, '병신'.

​"출근이나 하자. 니가 무슨 영화 주인공이라고."

​군복을 걸치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야 이 화상아! 밥 처먹고 가라니까 또 그냥 가나!"

​계단을 다 내려오기도 전에 쩌렁쩌렁한 고함이 고막을 때린다. 하숙집 주인, 최 여사님이다.

머리에 왕만두만 한 헤어롤을 말고 국자를 든 모습이 흡사 전장의 지휘관 같다.

​"이모, 늦었다니까요. 오늘 장비점검 있어요"

"지랄하고 자빠졌네! 멸치대가리 맹키로 말라가꼬 무슨 로보트를 만진다 카노! 니가 밥심으로 살지, 깡으로 사냐?"

"에이, 로보트 아니고 '전술기동병기'라니까 참..."

​최 여사님은 내 등짝을 찰싹 때리며 식탁에 억지로 앉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지은 밥과 시래기국.

10년 전 대해식 때 부모님을 잃고 고아가 된 나를 거둬준 게 이 하숙집 사람들이다. 핏줄 하나 안 섞였지만, 이 밥상이 나에겐 유일한 가족이다.

​"......"

​마당 평상엔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최 여사님의 시어머니. 치매기가 있으셔서 정신이 오락가락하시지만, 해 뜰 무렵이면 꼭 저렇게 평상에 앉아 동쪽을 보신다.

​"할매, 밥 드이소. 날 춥다."

"......해 떴나."

​할머니의 시선은 잿빛 방벽 너머를 향해 있었다. 초점이 흐릿하던 눈동자가 나를 보자 잠시 맑아졌다.

​"우리 태수... 배 타고 나갈 시간이가."

​할머니의 아들, 그러니까 최 여사님의 남편은 10년 전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할머니에게 나는 죽은 아들이자, 동시에 살아있는 손자였다.

​나는 할머니의 거친 손을 잠시 잡았다.

​"예, 할매요. 댕겨 오께요. 오늘 파도 잔잔합니데이. 걱정 마소."

"......그래. 물 조심해라. 물이 젤로 무섭데이."

​할머니의 그 말이, 오늘따라 유난히 서늘하게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대문을 나서자 익숙한 골목길 풍경이 펼쳐진다.

괴수들이 판치는 세상에서도 사람 사는 냄새는 여전한 부산의 달동네.

​"아이고, 내 팔자야! 남들은 길드 가서 떼돈 번다는데, 니는 와 사서 고생을 할라 카노!"

"아빠는 쫌! 내 꿈이 파일럿이라 안 카나! 길드 가봤자 짐꾼밖에 더하나? 내는 '저거노트' 탈끼다!"

​세탁소 앞이 아침부터 시끄럽다.

세탁소 주인 김성배 아저씨와 그 딸내미, 희선이다.

희선이 저 기집애, 저거 저래 보여도 무려 A급 각성자다. 대형 길드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빗발치는데도 굳이 군대에 가겠다고 저 난리다.

"A급 짐꾼이 뭐 어때서! 남들 칼질하고 괴물한테 뜯길 때, 니는 뒤에서 짐이나 지키고 있으면 월급이 수천이라는데! 그게 최고지, 안 그나?"

성배 아저씨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아저씨 눈에는 제 딸이 전장에서 화염을 내뿜는 영웅이 되기보다, 차라리 안전한 후방에서 '귀하신 몸' 대접받으며 짐짝이나 옮기는 게 백배 천배 나아 보이는 모양이었다. 제아무리 A급이라 한들, 전방은 언제 죽어나갈지 모르는 사지(死地) 아니던가.

"아빠, 그건 그냥 노가다지! 내는 하늘 날면서 빵빵 쏘는 게 체질이라니까?"

"이 가시나야, 그게 다 죽는 소리다! 군대 가면 저기 최전방 괴물 구덩이에 처박힐 낀데, 애비 속 뒤집어지는 꼴 보고 싶어 이카나? 그냥 길드 가서 짐꾼 해라! 짐꾼도 A급이면 대기업 임원급이야!"

하지만 희선의 눈은 이미 '저거노트'를 향해 번뜩이고 있었다.

​"오! 태수 햄! 출근하나!"

​나를 발견한 희선이가 그 눈 그대로 반짝이며 달려왔다. 교복 치마 아래로 체육복 바지를 덧입은 패션.

​"오빠라 불러라, 좀. 그리고 니는 학교나 가라. 지각이다."

"햄, 오늘 부대 가면 신형 기체 나왔는지 좀 봐도! '블랙 맘바' 시리즈 배치됐다던데!"

어디서... 기밀을...

"기밀이다. 그리고 니 아빠 속 좀 그만 썩이고."

​성배 아저씨가 한숨을 푹 쉬며 나에게 눈짓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 아저씨 마음도 이해가 간다.

10년 전, 괴수들이 처음 상륙했을 때 아저씨의 아내분은 피난길에 오르지도 못하고 파편에 깔려 돌아가셨다. 그 트라우마로 세탁소 문도 한동안 닫으셨었는데, 금쪽같이 키운 외동딸이 제 발로 괴수 잡으러 가겠다니 억장이 무너질 만도 하지.

​골목 어귀 편의점 앞, 익숙한 등짝이 보인다.

후줄근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윤철수.

​"태수냐?"

"아침부터 궁상이다. 담배 좀 줄여라."

"야... 이번에 대기업 공채 떴다. 5년 지원금도 올해가 끝인데... 나 될까?"

​철수는 F급, 즉 비각성자다.

부모님이 부산 굴지의 길드장인데, 자식은 F급이라니. 그 자격지심이 오죽할까. 녀석의 어깨가 오늘따라 더 처져 보인다.

​"되겠지. 니 머리 좋잖아. 괴수 잡는 게 전부는 아니다."

​그때, 골목 저편에서 뜀박질 소리가 들려왔다.

​"태수 오빠아아아! 충성!!"

​3단 고음을 연상케 하는 쩌렁쩌렁한 목소리. 타치바나 히나다.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뛰어오는 저 귀여운 여중생이, 사실은 대한민국에 다섯 명도 없는 S급 각성자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이고, 히나야. 살살 좀 뛰어라. 땅 울린다."

"헤헤, 오빠 휴가 나오면 떡볶이 콜? 제가 쏠게요! 이번에 협회에서 용돈 들어왔거든요!"

​히나가 내 팔에 매달리며 애교를 부렸다.

일본이 가라앉을 때 넘어온 피난민 자매. 동생인 히나는 국가 전략 자산급 능력을 가졌지만, 언니와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정부의 배려로 신분을 숨기고 일반 학교에 다닌다.

​"히나, 오빠 바쁘시다. 까불지 말고 빨리 가자."

​뒤따라오던 언니, 하루 씨가 시크하게 히나의 뒷덜미를 잡았다.

F급이지만 생활력 만렙인 하루 씨. 별다방 알바에 각종 부업까지, 사실상 이 자매의 가장이다.

​"안녕하세요, 하루 씨."

"네, 태수 씨도 출근 잘하세요. 가자, 히나."

​하루 씨가 히나를 끌고 가려는데, 히나가 갑자기 코를 킁킁거리며 멈춰 섰다.

​"어? 언니, 잠깐만."

"왜 또."

"태수 오빠, 오늘따라 바다 비린내가 엄청 심한데요? 뭔가 찝찝해."

​히나의 장난기 어린 눈빛이 순간 묘하게 가라앉았다.

S급의 감각. 일반인들은 맡지 못하는 심연의 악취를 본능적으로 감지한 거겠지.

​"조심해요, 오빠. 오늘 느낌이 진짜 별로야."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버스 정류장 근처로 향했다.

하지만 바로 버스를 탈 순 없다. 나의 참새 방앗간, '별다방'이 거기 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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