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클로이 벤넷의 프로젝트 발표 이후, CB의 프라이빗 회의실은 연일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강도진은 팀원들의 자율성과 피드백을 존중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정작 실무진 사이에서는 미묘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문제는 찰스가 제출한 드레스 메인 스케치와 한유현이 올린 슈즈 디자인의 조화에서 터졌다. 찰스의 드레스는 화려함과 장식성이 강했던 반면, 유현이 설계한 슈즈는 클로이의 걸음걸이와 실루엣을 고려한 정갈하고 모던한 라인이었다. 둘을 함께 놓으니 미묘한 어색함과 위화감이 감돌았다.
스케치를 번갈아 살펴보던 도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유현 씨. 찰스 총괄은 CB에서 수년간 드레스를 책임져 온 베테랑입니다. 슈즈 라인이 드레스의 화려함을 잡아주지 못하고 다소 따로 노는 느낌이군요. 아직 경험이 부족한 유현 씨가 찰스 총괄의 드레스 콘셉트에 맞춰 슈즈 디자인을 재조정해 보세요.”
도진
CB 내부가 오만과 서러움, 그리고 성과에 눈이 먼 침묵으로 균열을 일으키는 동안, 제이아우라의 프라이빗 회의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화려한 가시적 스케치로 눈길을 사로잡으려던 여느 브랜드들과 달리, 이지수와 총괄 디자이너 지나, 그리고 전담 팀원들은 밤을 지새우며 ‘클로이 벤넷’이라는 한 인간의 생애와 서사를 해석하는 1차 기획안 작성에 사력을 다했다.이번 1차 심사는 완성된 드레스 도안을 제출하는 단계가 아니었다. 클로이 벤넷이라는 아이콘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떠한 비전과 방향성(Mood Board)으로 그녀의 프로젝트를 총괄할 것인지 브랜드의 ‘철학과 감각’을 증명해야 하는 서류 및 비주얼 콘셉트 입찰 단계였다.유진이 수집해 온 클로이의 프라이빗 서사와 지나의 섬세한 텍스처 기획, 그리고 지수의 직관적인 보석 및 스타일링 디렉팅이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졌다.지수는 팀원 한 명 한 명의 디테일한 아이디어와 피드백에 일일이 귀를 기울였다. 심지어 막내 디자이너가 클로이의 10년 전 인터뷰 구석에서 찾아낸 ‘어린 시절 어머니의 정원에서 처음 보았던 작은 야생화의 기억’이라는 키워드조차 놓치지 않았다. 지수는 그 야생화를 향후 실물 제작 단계에서 '클로이의 숨겨진 위로'로 구현해 내겠다는 감성적인 서사 콘셉트를 기획서 중앙에 녹여냈다.지나가 완성된 1차 무드보드와 콘셉트 포트폴리오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대표님…… 이건 단순히 클로이의 패션 취향을 분석한 기획서가 아니에요. 클로이가 걸어온 삶의 발자취이자, 그녀 자신조차 잊고 있던 순수함을 일깨워 줄 하나의 서사시예요. 클로이가 이 제안서를 펼쳐 본다면, 가슴이 울컥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지수가 피곤함 속에서도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품평회 기획 회의실을 나선 한유현은 가슴을 짓눌러오는 답답함에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차가운 복도 공기를 허겁지겁 마셔보았지만, 서러움으로 타들어 가는 목구멍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억울함에 입술을 세게 깨물던 유현은 결국 결심한 듯 발걸음을 돌려 강도진의 대표실 앞으로 향했다.똑, 똑.자신을 바닥에서 발탁해 주고 가능성을 알아보아 준 사람. CB의 수장이자 존경하는 스승인 강도진 대표만큼은 자신의 진심을 믿어줄 거라는, 마지막 희망 하나 때문이었다."들어오세요."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무심한 목소리에 유현은 침을 꿀꺽 삼키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대표실로 들어서자마자 도진의 눈빛에 스치는 깊은 피로감을 유현은 놓치지 못했다.'또 저 어리광을 받아줘야 하나…….'도진은 속으로 짙은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찻잔을 받침대에 내려놓았다. 유현은 떨리는 손을 꽉 쥐며 벅차오르는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대표님, 정말입니다. 오늘 찰스 총괄님이 내놓으신 수정안은…… 제가 붉은 펜으로 드레스 실루엣 라인과 자수 위치를 직접 고쳐 그린 제 디자인입니다. 절대로,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유현의 눈가에 간발의 차로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그녀의 호소를 듣는 도진의 반응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유현 씨.”도진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유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나도 유현 씨의 감각을 높게 평가합니다. 하지만 실증적인 물증이나 증거가 없는 이상, 앞으로 수년간 CB를 이끌어 갈 총괄 디자이너 대신 유현 씨의 편을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대표님……!”“그리고 유현 씨. 지난번에도 중요한 초기 디
클로이 벤넷의 프로젝트 발표 이후, CB의 프라이빗 회의실은 연일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강도진은 팀원들의 자율성과 피드백을 존중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정작 실무진 사이에서는 미묘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문제는 찰스가 제출한 드레스 메인 스케치와 한유현이 올린 슈즈 디자인의 조화에서 터졌다. 찰스의 드레스는 화려함과 장식성이 강했던 반면, 유현이 설계한 슈즈는 클로이의 걸음걸이와 실루엣을 고려한 정갈하고 모던한 라인이었다. 둘을 함께 놓으니 미묘한 어색함과 위화감이 감돌았다.스케치를 번갈아 살펴보던 도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유현 씨. 찰스 총괄은 CB에서 수년간 드레스를 책임져 온 베테랑입니다. 슈즈 라인이 드레스의 화려함을 잡아주지 못하고 다소 따로 노는 느낌이군요. 아직 경험이 부족한 유현 씨가 찰스 총괄의 드레스 콘셉트에 맞춰 슈즈 디자인을 재조정해 보세요.”도진의 말은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는 여전히 경력과 위계를 우선시하는 은근한 압박이 깔려 있었다. 유현은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였다.“……알겠습니다. 다시 수정해 보겠습니다.”회의가 끝난 후 서류를 챙겨 나온 유현은 아무도 없는 휴게실에서 홀로 서류 봉투를 펼쳤다. 찰스의 드레스 디자인에 자신의 슈즈를 맞추는 게 아니라, 오히려 찰스의 드레스 라인을 다듬어 슈즈와 완벽한 일체감을 이루도록 만들고 싶었다.유현은 회의 때 공유 자료로 받았던 찰스의 드레스 스케치 출력물을 꺼냈다. 그리고 그 위에 붉은 펜으로 찰스의 고집스러운 장식을 깎아내고, 슈즈의 힐 곡선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드레스의 트레인과 자수 위치를 재설계해 나갔다. 홧김에 시작한 작업이었지만, 유현의 감각이 더해지자 스케치는 기적처럼 살아났다.하지만 '내가 감히 총괄 디자이너의 옷을 지적하다니'라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며,
한수진의 실형 구속과 아이의 해외 입양 건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그 여파로 깎여 나간 CB의 브랜드 이미지와 추락한 주가는 쉽게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표직을 겨우 보전한 강도진에게는 지금 당장 분위기를 단숨에 반전시킬 수 있는 강력한 한 방, 이른바 '게임 체인저'가 절실했다.그러던 도진의 귀에 패션·주얼리 업계를 들썩이게 만들 거대한 소식 하나가 들려왔다.세계적인 팝스타이자 할리우드의 톱스타인 '클로이 벤넷(Chloe Bennett)'의 세기적인 결혼식 소식이었다. 전 세계 매체와 팬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그녀의 공식 SNS 계정에 업계의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짧은 공고문 하나가 올라온 것이다.@Chloe_Bennett_Official“기존 명품 브랜드들의 틀에 박힌 협찬이나 이미 완성된 기성복 드레스는 사양합니다. 제 인생의 가장 특별한 날, 화려함 뒤에 숨겨진 '가장 나다운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해 줄 드레스, 주얼리, 그리고 슈즈 디렉팅을 찾습니다. 브랜드의 이름값이나 규모는 상관없습니다. 나를 진짜 나답게 만들어 줄 제안이라면 누구에게나 문은 열려 있습니다.”전 세계의 그 어떤 디자이너나 브랜드라도 자유롭게 제안서를 보낼 수 있는 파격적인 프라이빗 오픈 공고였다.'클로이 벤넷이라니……!'도진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전 세계의 조명을 받는 톱스타의 웨딩 프로젝트를 CB가 전담하게 된다면? 그간의 스캔들과 도덕성 리스크 따위는 단숨에 씻겨 내려가고, 글로벌 시장에서 CB의 위상을 재립할 수 있는 최고의 도약대가 될 터였다.도진은 즉시 각 분야 실력자들로 구성된 '클로이 벤넷 전담 TF팀'을 출범시켰다. 드레스 파트는 총괄 디자이너 찰스가, 주얼리는 주얼리 1팀이, 슈즈 파트는 한유현이 담당하는 구도였다.첫 회의실에 모인 팀원들을 둘러본 도진은
A국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부 법정.차가운 쥐색 수의를 입은 한수진이 피고인석을 향해 걸어 들어왔다. 법정에 들어서자마자 수진은 불안한 듯 초조하게 방청석 주위를 둘러보며 강도진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토록 갈망하던 도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얼룩지고 푸석해진 머리타래 사이로 드러난 수진의 얼굴은 불과 며칠 사이에 십 년은 늙어버린 듯 앙상하게 마르고 피기가 없었다. 화려했던 과거의 자취는 온데간데없고, 절망과 원망에 휩싸인 죄수의 형상만 남아 있었다.검사의 구형이 끝나고, 피고인 측 변호인의 최후 변론 차례가 되었다. 강도진이 붙여준 대형 로펌의 호화 변호사는 단정한 수트 차림으로 단상 앞에 서서, 아주 정중하고도 매끄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인 한수진은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다만, 본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살피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변호사는 서류를 넘어다보며 판사를 향해 담담하고 차가운 법률적 언어들을 내뱉기 시작했다.“피고인은 과거 브랜드 기획자로서의 입지가 흔들리자, 개인적인 공명심과 성과에 대한 과도한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본 범행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활용된 피해 기업의 고객 정보 유출 및 사업 기획 건은, 오롯이 피고인 한수진 단독의 판단과 독단적인 주도로 감행된 개인의 범행입니다.”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수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변호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을 구하기 위한 변명이 아니었다.“당시 CB의 강도진 대표를 비롯한 경영진은 피고인의 이러한 독단적 행위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으며, 피고인의 개인적 과욕으로 인해 CB 역시 심대한 브랜드 이미지 실추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은 명백한 피해자입니다. 즉, 피고인은 회사의 정당한 지휘 체계를 벗어나 단독으로 시장 질서를 교란한 것에 불과합니다.&r
다음 날 아침, 증권 시장이 열리자마자 모니터 속 주가 창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전날 이사회장에서 강도진의 구구절절한 궤변과 바닥을 친 도덕성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소액주주들과 기관 투자자들이 절망에 빠진 채 물량을 사정없이 던져대기 시작한 것이다. 해임안 부결 소식은 호재가 아니라 '경영진 리스크의 고착화'라는 최악의 악재로 작용했다. 매도 잔량 숫자가 억 단위로 찍히며 CB의 주가는 바닥을 뚫고 지하실로 차갑게 굴러떨어졌다.붉은색 하락 화살표가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주가 창을 노려보던 강도진은 입술을 바짝 깨물었다.전날 이사회장에 들어섰을 때 빼곡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던 수많은 소액주주들의 살벌한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장이 열리면 주가가 폭락하고 투매 물량이 물밀듯 쏟아질 것이라는 건 도진 역시 충분히 예측한 바였다.‘다 쓸어 담아야 한다. 헐값으로 나뒹굴 때 내가 모조리 사들여서 지분율을 더 단단하게 고혀 놓아야 해……!’도진은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고 자금 담당 이사를 대표이사실로 긴급히 불러들였다.“지금 시장에 나오는 CB 매물들, 모조리 매수 주문 넣어. 단 한 주도 남김없이 싹 쓸어 담아라!”그러나 지시를 내리는 도진의 고성과 달리, 자금 담당 이사의 얼굴은 흙빛으로 질려 있었다. 이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동원할 수 있는 현금 유동성이 턱없이 부족합니다.”“뭐? 현금이 부족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 개인 계좌 잔고는 다 어디 가고!”“얼마 전 강수한 회장님께 넘기신 위로금 전액과 A국 대형 로펌 자문단 계약금으로 대표님의 개인 사재 대부분이 단단히 묶여버린 상태입니다. 회사 자금을 함
슬비를 만나고 잠시 RV에서 현재까지 도진의 회사에 투자된 내역을 훝어보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지수는 아랫쪽의 축축한 감각에 번쩍 눈을 떳다.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도 실패한 것이다. 임신이라는 희망이 이내 절망으로 뒤바뀌는 이 지독한 상실감은, 몇번을 겪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평소와 다르게 일찍 돌아온 도진은 지수를 찾으며 방문을 열었을때 무기력하게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는 지수의 모습을 보았다. 이번 시술은 유난히 지수를 갉아먹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된 지수를 보며, 힘들었을 순간 곁을 지켜주
아침에 일어난 지수는 싸늘하게 식어있는 옆자리를 보았다. 몇일 집에 잘 들어오던 도진은 어젯밤 들어오지 않았다.생리가 시작하기 전에 느껴지는 익숙한 배의 묵직한 불편감에 불안감이 든 지수는 자신의 아랫배를 살살 만지며 제발 이번에는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과 편하게 강도진을 떠나기 위해 이번에도 실패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양가적인 생각에 웃음이 났다. 잠시 후 오랫만에 슬비를 만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가던 중 가정부의 통화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이번에는 사장님께서 가출하신 것 같아요. 집에 안들어 오시네요. 아마 작은
진우가 근무하는 HN은행 근처의 조용한 카페. 진우는 초조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은 슬비를 바라보았다. 슬비는 지현의 비서답게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갑작스러운 연락에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박진우씨"진우는 서류를 열어보려다가 멈칫하며 슬비를 응시했다."저를 어떻게 아시는지, 그리고 이지현태표님의 비서께서 왜 저를 찾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저희 은행은 GS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슬비는 차갑지만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으며 서류봉투를 눈짓했다. 거기에는 슬비가 미리 준비한
지수는 사무실 문 앞에서도 도진과 수진의 적나라한 대화를 듣고 있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도진의 목에 팔을 감으며 지수를 반히 쳐다봤다. 도진은 그런 수진을 보며 한 번 씩 웃고는, 손으로 수진의 허리를 쓸며 차갑게 지수를 쳐다봤다" 왜 왔어? 여기가 니가 오고 싶으면 오는 놀이터야?"지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진이 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지수는 도진의 물음에 대답대신 들고 온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툭 던져두고 차갑게 돌아서려했다. 그런 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