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제2조(개정). 사내에선 공개. 단, 회의에선 봐주지 않는다.
(냅킨에는 더 쓸 자리가 없었다. 포스트잇에 써서 앞면 두 번째 줄 위에 붙였다.)
"네, 사귑니다."
이현이 다시 말했다. 이번엔 혼자였다. 서윤의 '아뇨'를 덮듯이, 천천히.
"서윤 씨는 회사에 알려지는 걸 싫어해서요. 그래서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한 거예요. 제가 비밀로 하자고 약속했었거든요."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순서만 조금 바꿨을 뿐이다. 서윤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언제부터?" 팀장이 물었다.
"여름휴가 끝나고부터요." 서윤이 대답했다. 차 안에서 맞춘 설정이었다.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넉 달, 아니, 다섯 달이요."
팀장이 테이블을 짚었다. 그리고 물을 찾았다. 테이블 위에 물은 없었다. 이현이 말없이 일어나 정수기에서 종이컵에 물을 받아 왔다. 팀장은 그걸 단숨에 마셨다.
"다섯 달 동안." 팀장이 컵을 내려놓았다. "그 다섯 달 동안 너희 회의에서 싸웠지. 줄바꿈 가지고. 식도 가지고."
"네."
"그것도 연기였어?"
서윤과 이현이 서로를 봤다. 이번엔 대답이 맞았다.
"아뇨. 그건 진짜였어요."
팀장이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엎어 두었던 휴대폰을 뒤집어 두 사람 앞으로 밀었다.
화면에는 '명절 특집 씨름 중계석'의 관리자 메뉴가 떠 있었다. 맨 위에 '방장'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팀장님?" 서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가 만들었어. 3년 전에." 팀장이 체념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 싸움 말리다 지쳐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기자고. 처음엔 다섯 명이었는데 지금은 스물아홉 명이야."
"회의 중에 공지 올리신 것도……."
"테이블 밑에서. 볼펜 떨어뜨린 척하고." 팀장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3년 동안 판을 깔았는데 결말을 몰랐다. 방장이."
이현이 헛기침을 했다. 웃음을 참는 헛기침이었다. 서윤은 테이블 밑에서 그의 신발을 밟았다. 식탁 밑에서 무릎을 톡 치던 것보다 조금 셌다.
"그래서." 팀장이 휴대폰을 도로 가져갔다. "공지해도 되냐."
"네?"
"방에. 공식 발표. 내가 방장으로서 책임이 있잖아."
비상계단. 오후 다섯 시. 서윤은 계단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현은 그 옆 한 칸 아래에 앉았다.
"제2조가 죽었어요." 서윤이 말했다.
"죽었죠."
"사망 원인은 할머니요."
"할머니랑 인사팀 과장님이요. 공동 정범."
서윤은 웃다가 무릎에 이마를 댔다. 웃음이 자꾸 새 나왔다. 어이가 없어서, 망해서, 그리고 조금은, 이상하게 홀가분해서.
"어떡해요, 이제."
"선택지는 두 개예요." 이현이 말했다. 회의에서 대안을 낼 때의 목소리였다. "하나. 월요일에 헤어졌다고 한다."
"그럼 씨름 방이 장례식장 돼요."
"둘. 공개한다. 계약 기간 끝날 때까지."
"설까지요."
"설까지."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 공개. 회사 사람들 앞에서도 연기를 한다는 뜻이었다. 점심을 같이 먹고, 퇴근을 같이 하고, 누가 물으면 웃어야 했다. 연기의 시간이 하루 종일로 늘어나는 것.
그리고 서윤에게는, 들킬 위험도 하루 종일로 늘어나는 것.
"공개하면 좋은 점도 있어요." 이현이 말했다.
"뭔데요."
"비상계단 안 와도 돼요. 커피를 그냥 자리에 갖다 드려도 되고요. 얼음 녹는 소리 걱정 안 해도 되고."
"……그게 좋은 점이에요?"
"저한텐요. 여기 겨울엔 추워요."
서윤은 비상계단의 차가운 벽을 봤다. 두 달 동안 이 계단에서 커피를 몇 잔 마셨는지 세어 보려다 그만뒀다. 컵마다 적힌 '1/2'이 전부 떠올랐다. 자리로 커피가 오면, 그 글씨를 옆자리 민지도 보게 될 것이다. 씨름 방 스물아홉 명도.
"……공개하죠." 서윤이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또 조건이요."
"회의에선 봐주지 않는다. 사귄다고 기획서 봐주면 팀에 민폐예요."
"원래 안 봐줬는데요."
"앞으로도요. 명문화해요."
서윤은 지갑에서 냅킨을 꺼냈다. 앞면은 네 조항과 부칙과 서명으로 꽉 차 있었다. 뒷면에는 제5조. 빈자리가 없었다.
이현이 셔츠 주머니에서 포스트잇을 꺼냈다. 노란색. 개발자의 주머니에는 늘 포스트잇이 있었다.
서윤이 적었다.
제2조(개정). 사내에선 공개. 단, 회의에선 봐주지 않는다.
그녀는 포스트잇을 냅킨 앞면 제2조 위에 붙였다. 원래 조항이 가려졌다. '사내에선 비밀'. 그 다섯 글자가 노란 종이 밑으로 사라졌다.
"서명은요?" 이현이 물었다.
"개정이니까 이니셜로 해요."
그녀가 '정'이라고 쓰고 볼펜을 넘겼다. 이현이 옆에 '차'라고 썼다. 여전히 반듯했다. 포스트잇 위에 두 글자가 나란히 있었다. 정, 차.
"정차네요." 이현이 말했다.
"네?"
"정, 차. 붙여 읽으면."
서윤은 볼펜으로 그의 팔을 톡 쳤다. "개발자 농담 금지."
"조항에 없는데요."
"방금 생겼어요."
월요일 아침. 팀 회의가 시작되기 전, 이현이 먼저 일어났다.
회의실의 여덟 명이 숨을 죽였다. 민지는 휴대폰 녹음 버튼 위에 엄지를 올려 두고 있었다. 팀장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민지는 엄지를 내렸다.
"공지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현이 말했다. 스펙 문서를 읽는 목소리였다. "정서윤 선임이랑 사귀고 있습니다. 업무에는 지장 없게 하겠습니다."
침묵. 그리고 서윤이 일어났다.
"그리고 회의에선 여전히 안 봐줍니다. 서로."
일 초. 이 초. 삼 초째에 개발팀 막내가 박수를 쳤다. 그러자 다들 박수를 쳤다. 팀장만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었다. 박수 소리 사이로 테이블 밑 휴대폰들이 일제히 진동했다.
회의가 끝나자 민지가 서윤의 자리로 달려왔다.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공지. 방장이 전한다. 두 사람은 사귄다. 다섯 달 되었다. 방장도 몰랐다. 미안하다.]
[방 이름 변경: 명절 특집 씨름 중계석 시즌2 연애 편]
[알림 999+]
"선배, 저 투표에서 이겼어요. '둘이 사귄다'에 건 사람 세 명밖에 없었거든요. 커피 쿠폰 스물여섯 장 받았어요."
"……민지야, 너 나한테 돈 걸었어?"
"선배를 믿었죠."
점심은 둘이 같이 먹었다. 공개 연애 첫날이니 그래야 한다고, 민지와 씨름 방 스물아홉 명이 입을 모았다. 회사 앞 국숫집. 창가 자리. 지나가는 사람마다 유리창 너머로 한 번씩 봤다.
"어색해요." 서윤이 젓가락을 쥐며 말했다.
"뭐가요."
"같이 밥 먹는 거요. 5년 동안 회식 때도 제일 멀리 앉았잖아요."
"그땐 맞은편 테이블이었죠. 대각선으로."
"……그것도 기억해요?"
"고사리 밀어 놓는 거 보이는 자리였어요."
서윤은 국수를 먹다 말고 이현의 그릇을 봤다. 고명으로 올라간 쑥갓을 그가 젓가락으로 한쪽에 모으고 있었다.
"쑥갓 싫어해요?"
이현의 젓가락이 멈췄다. "……아뇨."
"지금 밀어 놨잖아요."
"나중에 먹으려고요."
"콩송편도 나중에 먹으려고 파냈어요?"
이현이 쑥갓을 한 번에 집어 먹었다. 표정이 일자였다. 너무 반듯한 일자. 서윤은 웃음을 삼켰다. 콩송편 다음으로, 맞은편 사람이 싫어하는 음식을 하나 더 알게 됐다. 이현은 서윤의 것을 몇 개나 알고 있을까. 쌤쌤이 되려면 아직 한참 모자랄 것 같았다. 그래서 서윤은 앞으로 이 사람 젓가락 끝을 조금 더 보기로 했다. 맞은편이니까.
오후 내내 사람들이 번갈아 서윤의 자리에 들렀다. 결재 서류를 핑계로, 간식을 핑계로. 질문은 대부분 같았다.
"누가 먼저 고백했어요?"
"차 선임이요." 설정대로였다.
"차 선임님은 언제부터 좋아했대요?"
서윤이 대답하기 전에 파티션 너머에서 이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개발팀 막내가 똑같은 질문을 한 모양이었다.
"입사 첫날부터."
사무실 절반이 소리를 질렀다. 나머지 절반은 휴대폰을 꺼냈다.
서윤은 모니터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설정, 또 쓰네. 추석 식탁에서도, 이모들 앞에서도 똑같이 말했다. 망설임 없이. 연수 발표를 봤고, 그날 번호를 저장했다고. 연기가 너무 늘었다.
퇴근 시간, 둘은 처음으로 정문으로 나갔다. 로비에 사람이 많았다. 이현이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위로. 뒷골목 카페에서 처음 내밀던 그 모양 그대로.
"지금 필요해요?" 서윤이 작게 물었다.
"로비에 스무 명 있어요."
"……필요하네요."
서윤은 손을 얹었다. 이번엔 악수처럼이 아니었다.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깍지로 걸렸다. 회전문을 지나는 동안 등 뒤에서 누군가 "와" 하고 작게 말했다.
그때 민지가 뛰어 나왔다.
"선배! 차 선임님! 잠깐만요, 하나만!"
"뭔데."
"사내 커플 공개 첫날 국룰이 있어요. 서로 폰에 뭐라고 저장했는지 보여 주기. 씨름 방에서 다들 그것만 기다려요."
"싫어."
"선배 건 이미 알아요. '차이현(공수)'잖아요. 작년에 선배 폰 봤어요."
서윤은 할 말을 잃었다. 이현이 서윤을 봤다. '공수'라는 두 글자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차 선임님 거요. 차 선임님은 선배를 뭐라고 저장했어요?"
서윤은 이현이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사생활에 철저했다. 5년 동안 휴대폰 화면을 남에게 보여 주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현은 순순히 휴대폰을 꺼내 잠금을 풀었다. 그리고 서윤에게 내밀었다. 민지가 아니라, 서윤에게.
"직접 보세요."
너무 순순해서, 서윤은 그게 이상하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저는 쓰레기통이요.""네?""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무슨 부칙이요.""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그건 인정해요.""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청혼 기획서 v1.0입니다."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다."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멈췄다."……뭘요?""보름달 차오르는 연출이요. 유저가 편지를 쓰면 달이 한 칸씩 차오르는 거."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1년 전 이 회의실에서 서윤은 그 연출이 이벤트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현은 연휴 전에 못 넣는다고 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팀장이 간소화 버전으로 정리했다. 달은 끝내 차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 계약서가 생겼다."시즌2 기획서엔 그 연출 없었잖아요. 제가 뺐어요. 작년에 안 된다고 하셔서.""그래서 제가 넣었어요. 따로.""언제요?""작년 추석 끝나고부터요. 틈틈이.""1년 동안요?""공수가 많이 들었어요. 1년 걸렸어요." 이현이 화면을 넘겼다. 테스트 영상이었다. 유저가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까만 하늘의 달이 가장자리부터 차올랐다. 은은하게, 천천히. 마지막 편지가 들어가자 보름달이 꽉 찼다. 달 속에서 토끼가 고개를 들었다.회의실이 조용했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 잔을 든 채 굳었다. 옆에서 민지가 조용히 그의 컵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아 줬다.서윤은 화면을 봤다. 1년 전 그녀가 사흘 밤을 새워 그린 연출이었다. 그대로였다. 아니, 더 좋았다. 그녀가 그렸던 것보다 달이 천천히 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이거, 제 원래 기획서 그대로예요.""네. 원본 남겨 뒀어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테 선택권이 없어 보여. 의문형은 선택권을 주는데, 자신 없어 보이고.""차 선임님이라면 뭐라고 반박하실까요?"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1년 동안 들어서 토씨까지 외운 목소리."'청유형은 유저가 부담스러워해요. 의문형은 유저가 거절할 수 있어요. 거절 확률이 있는 문장은 공수 낭비예요.'"민지가 박수를 쳤다. "똑같아요. 소름.""그럼 그 사람은 뭐라고 할 것 같아?""그냥 '네' 하실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서윤은 슬라이드를 봤다. 마지막 장. 문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결혼해요. 결혼할래요. 둘 다 빨간 줄이 한 번씩 그어졌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그러니까 더 어려운 거야. 뭘 해도 '네' 할 사람한테 뭘 물어야 할지."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화면을 보더니 귀가 빨개졌다. 윤재하였다. 둘이 사귄 지 3주째였다. 컵에 쓰는 글씨는 매일 한 줄씩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선배, 제 친구가요, 아니 제가요." 민지가 휴대폰을 엎었다. "재하 씨한테 청유형이랑 의문형 중에 뭐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어떤 선배 얘기라고 하고.""……민지야.""이름은 안 말했어요! 근데 재하 씨가 그러더라고요. 개발자는 의문형을 좋아한대요. 반환값이 있으니까.""반환값.""네. '네'라는 반환값이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 회사 개발자들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큰이모: 기각]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거기서 멈췄다.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냅킨이 또 하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