เข้าสู่ระบบ제5조. 본 계약의 기간을 설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 연장한다.
(남은 날, 38일. 둘 다 세고 있었다. 서로 모르게.)
새해 첫 회의는 십오 분 만에 끝났다.
"까치 오픈 문구 최종안입니다." 서윤이 말했다.
"확인했습니다. 이견 없습니다." 이현이 말했다.
"오픈 시각은 오전 열 시로 하겠습니다."
"네. 서버 준비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이상입니다."
회의실의 여섯 명이 커피를 들었다. 마실 타이밍이 오지 않았다. 싸움이 없으니 끼어들지 않겠다는 표시를 할 일도 없었다. 다들 컵을 든 채 어정쩡하게 앉아 있었다.
팀장이 헛기침을 했다. "……끝이야?"
"네." 동시였다. 그것만은 여전했다.
회의실을 나서며 개발팀 막내가 민지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이런 회의 처음 봐요. 무서워요."
"나도."
"싸워 주셨으면 좋겠어요. 제발."
씨름 방의 공지는 3주째 바뀌지 않았다.
[휴전 중. 방장은 기다린다.]
민지가 점심때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배, 요즘 차 선임님을 '차 선임'이라고 부르시는 거 알아요?"
"원래 그렇게 불렀어."
"아니요. 작년 가을부터는 '차이현 씨'였어요. 회의 때도. 사귄다고 공개하고 나서는 더 자주요." 민지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차 선임님도 선배를 '정 선임'이라고 불러요. 요즘."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이름이 직함으로 돌아가는 데 사흘이 걸렸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둘은 여전히 같이 퇴근했다. 공개 연애였으니까. 로비를 지날 때는 손을 잡았다. 로비에 사람이 있었으니까. 회전문을 지나면 손을 놓았다. 거기서부터는 필요 없었으니까.
지하철역까지의 오 분 동안, 둘은 필요한 말만 했다.
"설에 솔뫼리는 몇 시에 출발할까요."
"추석 때처럼 아침 여덟 시요."
"선물은 제가 준비할게요. 배랑 한과, 막걸리."
"네. 계약이니까요."
"네. 계약이니까요."
가족 단톡방은 그런 사정을 몰랐다.
[둘째 이모: 설에 이현이 한복 입힌다. 치수 보내라]
[큰이모: 윷놀이 판 새로 샀다]
[막내 이모: 치과 원장이 안부 전하란다. 걔는 요새 간호사랑 사귄단다]
[아빠: 막걸리 두 병]
서윤은 개인 메신저를 열었다.
[정서윤: 둘째 이모가 한복 치수 달래요.]
[차이현: 상의 105, 하의 32입니다.]
[정서윤: 키는 이모가 아시니까 됐고요.]
[차이현: 백팔십이요. 맞히셨던.]
[정서윤: 네.]
[차이현: 계약이니까 한복도 입겠습니다.]
서윤은 그 문장을 캡처해서 둘째 이모에게 보내려다 멈췄다. 앞의 치수만 잘라서 보냈다. 뒤의 한 줄은 이모들이 보면 안 되는 문장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되도록이면 보고 싶지 않은 문장이었다.
그 말이 둘 사이에서 자꾸 오갔다. 둘 다 그 말을 방패처럼 들었다. 무엇으로부터 막는 건지는 서로 다르게 알고 있었다.
***
이현은 부엌 식탁에 남색 텀블러를 올려 두고 노트북을 켰다.
메일 작성 창에 '파란등대 스튜디오 인사팀'이 적혀 있었다. 제목은 '제안 수락의 건'. 본문은 세 줄. 사흘 전에 썼다. 보내지 않았다.
그는 버그를 추적하듯 다시 되짚었다. 크리스마스이브까지는 정상이었다. 트리 앞에서 그녀는 웃었다. 할머니가 '싸운 사람들 같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이틀 뒤, 그녀가 직접 산 커피가 책상에 놓여 있었다. 할 말이 있다는 메시지에는 야근이라는 답이 왔다. 그날 문구 검수는 여덟 시에 끝났다. 공유 문서의 수정 기록에 그렇게 찍혀 있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그녀는 알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리고 듣지 않기로 한 것이다. 조용히, 예의 바르게. 기획자답게, 반려 사유를 적지 않은 채로.
'좋은 조건이면 가야죠. 계약은 설까지니까, 상관없고요.'
그녀는 처음부터 답을 줬다. 그가 못 알아들었을 뿐.
이현은 텀블러 뚜껑을 엄지로 쓸었다. '뜨거운 거, 식혀서'. 식혀서. 어쩌면 이것도 답이었는지 몰랐다.
설까지만. 할머니 떡국을 먹고, 솔뫼리에 인사를 가고, 아버님과 막걸리를 한 잔 하고. 그리고 자정이 지나면, 계약서의 을답게 조용히 물러나면 됐다. 5년 동안 해 온 일이었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 이번엔 조금 더 멀리.
그는 메일 창을 닫지 않고 노트북만 덮었다.
다음 날 회사에서도 그 창은 열려 있었다. 모니터 한쪽 구석에, 작게. 개발팀 막내가 코드 리뷰를 받으러 왔다가 그 제목을 봤다. 이현은 창을 내리지 않았다. 숨길 기운이 없었다.
"선임님……."
"리뷰 보자."
"선임님, 가세요?"
이현은 막내의 코드를 봤다. 변수 이름이 엉망이었다. 평소라면 한 줄씩 짚었을 것이다.
"변수 이름 다시 지어 와."
"네. 근데 선임님."
"응."
"정 선임님은 뭐래요?"
이현은 모니터 구석의 제목을 봤다. 제안 수락의 건.
"좋은 조건이면 가야 한대."
막내는 한참 서 있다가 말했다. "……그거 진짜 그렇게 말씀하신 거 맞아요? 정 선임님이 기획서 반려할 때도 그렇게 짧게는 안 하시던데요."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막내가 돌아간 뒤에도 한참, 반려 사유 없는 반려에 대해 생각했다.
***
1월 셋째 주 목요일 저녁, 서윤의 휴대폰에 처음 보는 화면이 떴다. 문자가 아니라 전화였다. 발신자는 '할머니'.
"여보세요, 할머니?"
"손주며느리냐."
목소리가 문자보다 훨씬 또렷했다. 받침도 전부 있었다.
"네, 할머니. 진지 드셨어요?"
"먹었다. 니는?"
"먹었어요."
"거짓말. 목소리가 밥 안 먹은 목소리다."
서윤은 웃다가, 웃음이 조금 이상하게 나왔다. 할머니는 그걸 모른 척했다.
"설에 오지?"
"……네."
"떡 뽑았다. 두 되."
"문자 봤어요."
"이현이가 요새 전화를 하면 말이 없어. 원래도 없는데, 요새는 더 없어." 할머니가 혀를 찼다. "니들 싸웠냐."
"아니요, 할머니. 안 싸웠어요."
정말이었다. 싸우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그놈은 원래 그래." 할머니가 말했다. "좋은 걸 좋다고 못 하고, 싫은 걸 싫다고 못 해. 콩송편 싫단 말도 스무 살 넘어서 처음 하더라. 그전엔 내가 줄 때마다 콩을 몰래 파내고 먹었어. 내가 모르는 줄 알고."
서윤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러니까 저놈이 뭐라고 하면, 반대로 들어라." 할머니가 말했다. "상관없다 하면 상관있는 거고, 괜찮다 하면 안 괜찮은 거다. 싫은 건 먹는 척하고, 좋은 건 안 좋은 척하고. 팔십 년 살면서 그런 놈은 우리 손주 하나 봤다."
전화를 끊고 서윤은 오래 앉아 있었다.
상관없다 하면 상관있는 거고.
횡단보도 앞. 빨간불. '그렇네요. 상관없네요.' 일 초쯤 서 있다가 걷던 사람.
서윤은 지갑을 열었다. 냅킨을 펼쳤다. 제4조 끝, 괄호 안의 네 글자.
(을은 예외)
해석 A. 을은 빠질 일이 없다.
해석 B. 을이 빠져도, 계약은 깨지지 않는다.
좋은 걸 좋다고 못 하는 사람이, 서명하는 순간 몰래 적을 수 있는 문장은 어느 쪽일까.
서윤은 한 번도 그 질문을 이 방향으로 던져 본 적이 없었다.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그녀가 믿고 싶은 쪽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의 문제였다.
5년 동안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싸우려면 봐야 하니까. 그녀도 봤다. 반박할 때 노트북을 덮는 손. 져 줄 때 너무 자연스럽게 지는 얼굴. 우산을 세 걸음마다 기울이는 팔. 사십 분 동안 식은 커피를 버리고 다시 사 오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는 절대 안 빠진다'를 괄호 안에 몰래 적을까.
옥상에서의 목소리도 떠올랐다. 식탁 밑 깍지를 위반이라고 스스로 자백하던 사람. 아무도 못 봤으니 필요 없었다고, 필요 없는데 잡았으니 위반이라고. 그 계산을 일주일 동안 하고 있었다고.
자기 위반은 그렇게 꼼꼼하게 신고하는 사람이었다. 5년 전적을 내주면서까지.
그런데 제4조에 대해서만은, 넉 달 동안 한 번도 신고하지 않았다. 괄호 속에 숨겨 놓고.
아니었다. '나는 절대 안 빠진다'는 차이현의 문장이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민지가 출근하자마자 서윤의 자리로 달려왔다. 얼굴이 하얬다.
"선배, 들었어요?"
"뭘."
"차 선임님이요. 파란등대 쪽에서 설 전에 답을 달라고 했대요. 다다음 주 금요일까지. 개발팀 막내가 그러는데, 차 선임님이 어제 메일 초안을 열어 놓고 한참 보고 계셨대요. 제목이 '수락의 건'이었대요."
다다음 주 금요일. 설 연휴 전날이었다.
서윤은 모니터를 봤다. 까치 오픈 D-10. 달력 한구석에 작게 적힌 숫자.
정리할 게 하나 있다고 했다. 설 끝나면 다 정리하고 연락드린다고. 그 '하나'가 뭔지, 그녀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해석만 했다. 혼자서, 제일 아픈 쪽으로.
기획자는 해석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유저한테 묻는다.
서윤은 서랍을 열었다. 매직 네 자루. 그녀는 초록을 꺼내 오늘 컵에 적었다. 삐뚤었지만, 어제보다는 덜 삐뚤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었다. 개인 메신저. '차이현'. 3주 동안 필요한 말만 오간 창.
[정서윤: 오늘 저녁 일곱 시. 회사 앞 편의점 파라솔.]
[정서윤: 안건은 하나예요.]
읽음 표시가 바로 떴다. 답장은 한참 뒤에 왔다.
[차이현: 네. 갈게요.]
서윤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지갑 속 냅킨이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졌다.
제4조. 즉시 계약 파기. 갑이 쓴 조항이었다. 발동할 수 있는 것도, 갑이었다.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저는 쓰레기통이요.""네?""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무슨 부칙이요.""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그건 인정해요.""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청혼 기획서 v1.0입니다."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다."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멈췄다."……뭘요?""보름달 차오르는 연출이요. 유저가 편지를 쓰면 달이 한 칸씩 차오르는 거."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1년 전 이 회의실에서 서윤은 그 연출이 이벤트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현은 연휴 전에 못 넣는다고 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팀장이 간소화 버전으로 정리했다. 달은 끝내 차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 계약서가 생겼다."시즌2 기획서엔 그 연출 없었잖아요. 제가 뺐어요. 작년에 안 된다고 하셔서.""그래서 제가 넣었어요. 따로.""언제요?""작년 추석 끝나고부터요. 틈틈이.""1년 동안요?""공수가 많이 들었어요. 1년 걸렸어요." 이현이 화면을 넘겼다. 테스트 영상이었다. 유저가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까만 하늘의 달이 가장자리부터 차올랐다. 은은하게, 천천히. 마지막 편지가 들어가자 보름달이 꽉 찼다. 달 속에서 토끼가 고개를 들었다.회의실이 조용했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 잔을 든 채 굳었다. 옆에서 민지가 조용히 그의 컵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아 줬다.서윤은 화면을 봤다. 1년 전 그녀가 사흘 밤을 새워 그린 연출이었다. 그대로였다. 아니, 더 좋았다. 그녀가 그렸던 것보다 달이 천천히 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이거, 제 원래 기획서 그대로예요.""네. 원본 남겨 뒀어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테 선택권이 없어 보여. 의문형은 선택권을 주는데, 자신 없어 보이고.""차 선임님이라면 뭐라고 반박하실까요?"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1년 동안 들어서 토씨까지 외운 목소리."'청유형은 유저가 부담스러워해요. 의문형은 유저가 거절할 수 있어요. 거절 확률이 있는 문장은 공수 낭비예요.'"민지가 박수를 쳤다. "똑같아요. 소름.""그럼 그 사람은 뭐라고 할 것 같아?""그냥 '네' 하실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서윤은 슬라이드를 봤다. 마지막 장. 문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결혼해요. 결혼할래요. 둘 다 빨간 줄이 한 번씩 그어졌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그러니까 더 어려운 거야. 뭘 해도 '네' 할 사람한테 뭘 물어야 할지."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화면을 보더니 귀가 빨개졌다. 윤재하였다. 둘이 사귄 지 3주째였다. 컵에 쓰는 글씨는 매일 한 줄씩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선배, 제 친구가요, 아니 제가요." 민지가 휴대폰을 엎었다. "재하 씨한테 청유형이랑 의문형 중에 뭐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어떤 선배 얘기라고 하고.""……민지야.""이름은 안 말했어요! 근데 재하 씨가 그러더라고요. 개발자는 의문형을 좋아한대요. 반환값이 있으니까.""반환값.""네. '네'라는 반환값이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 회사 개발자들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큰이모: 기각]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거기서 멈췄다.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냅킨이 또 하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