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솔뫼리 가족회의 안건 제1호. 이 계약, 추석 때부터였냐?
(발의: 큰이모. 장소: 마루. 증거물: 냅킨 한 장, 노란 포스트잇 두 장.)
세배는 중단됐다.
큰이모네 손주 셋은 세뱃돈을 쥔 채 작은방으로 쫓겨났다. 문틈으로 눈 여섯 개가 반짝였다. 복실이는 칭찬을 기다리다 지쳐 마루 끝에 엎드렸다.
마루 한가운데에 밥상이 펴졌다. 떡국 대신 냅킨이 올라갔다.
서윤은 그 냅킨을 내려다봤다. 넉 달 넘게 지갑 카드칸에서 접혔다 펴지며 천처럼 부드러워진 종이. 편의점 로고가 반쯤 지워진 모서리. 거기 적힌 조항 네 개와 부칙 하나를, 지금 온 가족이 보고 있었다. 회의실에서 기획서가 전원 반려당할 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다.
옆에서 이현이 작게 말했다.
"기획서 발표라고 생각하세요."
"청중이 너무 많잖아요."
"본부장님보단 적어요."
"본부장님은 고추장 안 던져요."
"이모님들도 안 던지세요."
"우리 큰이모는 던져요. 추석 때 삼촌한테."
"앉아라."
큰이모가 말했다. 서윤과 이현은 밥상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둘 다 그렇게 앉았다.
맞은편에 이모 셋이 앉았다. 가운데 큰이모, 왼쪽 둘째 이모, 오른쪽 막내 이모. 둘째 이모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수첩을 펼쳤다. 막내 이모는 팔짱을 꼈다. 할머니는 한 발 뒤에서 방석을 깔고 앉았고, 엄마는 부엌 문턱에 행주를 든 채 섰다. 아빠는 마루 기둥에 기대어 막걸리 병을 땄다.
"아빠, 아침부터요?"
"청문회엔 막걸리지." 아빠가 말했다. 드물게 신이 난 목소리였다.
큰이모가 돋보기를 고쳐 썼다.
"지금부터 가족회의를 시작한다. 서기는 둘째."
"예." 둘째 이모가 볼펜 끝을 눌렀다.
"검사는 막내."
"예." 막내 이모가 턱을 들었다.
"변호인은……." 큰이모가 할머니를 돌아봤다. "사돈 어른이 하시겠습니까."
"나는 방청객 할란다." 할머니가 말했다. "재밌는 거는 앞에서 봐야지."
서윤은 이현을 곁눈질했다. 이현은 등을 곧게 폈다. 본부장 보고 들어갈 때 자세였다.
"자, 피고 정서윤."
"피고요?"
"피고." 큰이모가 냅킨을 들었다. "이 글씨, 네 글씨 맞지?"
"……네."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 이건 누구 글씨냐. '자정까지'만 반듯하다."
이현이 손을 들었다. "제 글씨입니다."
"을이냐."
"을입니다."
둘째 이모가 수첩에 적었다. 서윤은 그 수첩을 보고 싶었다. '을, 자정 추가, 반듯함' 같은 게 적혀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묻는다." 큰이모가 목소리를 낮췄다. 추석에 '서윤이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물을 때와 같은 목소리였다. "이 계약, 추석 때부터였냐?"
마루가 조용해졌다. 작은방 문틈의 눈 여섯 개도 깜빡이지 않았다.
서윤은 거짓말을 고를 수 있었다. 회사 워크숍 장난이었다든가, 기획 회의 소품이라든가. 5년 동안 회의실에서 단련된 순발력이면 삼십 초 안에 그럴듯한 얘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식탁 밑이 아니라서, 이현의 손이 무릎 옆에 그냥 놓여 있었다. 모두가 보는 데서.
서윤은 그 손을 봤다. 그리고 말했다.
"네. 추석 때부터였어요."
엄마가 행주를 쥔 손을 입에 댔다.
"추석 앞둔 그 주에 편의점에서 썼어요. 엄마가 치과의사 선 본다고 문자 보낸 날이요. 이현 씨도 선 압박을 받고 있어서, 서로 명절만 넘기자고. 그래서 가짜로……."
"가짜로." 막내 이모가 천천히 따라 했다. 검사의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네가 백 원장을 찬 게, 가짜 남자친구 때문이었다는 거네?"
"찬 건 아니고요, 스케일링만……."
"스케일링만 받고 나왔지. 이 사람이 대기실에서 사십 분 기다리고."
"그건 계약 관리였어요."
"계약 관리!" 막내 이모가 무릎을 쳤다. "들었어? 계약 관리래. 내가 그때 이 사람 보고 '이번 한 번만 봐준다' 했는데, 그게 다 연극이었어?"
둘째 이모가 볼펜을 멈췄다. "막내야, 흥분하지 말고. 서기가 못 따라간다."
"적어! 계약 관리라고!"
서윤은 고개를 숙였다. 할 말이 없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서.
그때 옆에서 이현이 입을 열었다.
"이의 있습니다."
모두 이현을 봤다. 아빠만 막걸리를 한 모금 마셨다.
"말해 봐라." 큰이모가 돋보기 너머로 눈을 가늘게 떴다.
"가짜는 서윤 씨 쪽만이었습니다."
"……뭐?"
"제 쪽은 5년 전부터 진짜였어요." 이현이 말했다. 회의실에서 공수를 읽을 때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다만 귀가 끝까지 빨갰다. "입사 연수 첫날부터요. 추석에 여기서 '입사 첫날부터 좋아했다'고 말씀드린 거,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대본에 없는 말이었어요."
작은방 문틈에서 누군가 "우와" 했다. 큰이모가 헛기침을 하자 문이 탁 닫혔다.
"그러니까." 이현이 덧붙였다. "계약 기간 동안 거짓말을 한 건 서윤 씨고, 저는 계약서만 가짜였고 나머지는 전부 진짜였습니다. 대기실 사십 분도요."
막내 이모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다시 벌렸다.
"……그럼 사기는 서윤이가 친 거네?"
"이모!"
"맞잖아! 이 사람은 진짜였고, 너는 가짜였고. 그럼 누가 누굴 속인 거야?"
서윤은 이현을 노려봤다. "지금 저 팔아요?"
"사실관계를 정리한 거예요."
"회의에서도 그러더니."
"회의에선 봐주지 않는다면서요. 여기도 회의예요."
둘째 이모가 수첩에 뭔가를 빠르게 적었다. 서윤은 확신했다. '또 싸움. 근데 웃음'이라고 적었을 것이다.
큰이모가 냅킨을 다시 들여다봤다. 네 번째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제4조. 서로에게 진짜로 빠지면 즉시 계약 파기. 그럼 이건 어떻게 된 거냐. 이 사람은 처음부터 빠져 있었다며."
"그게……." 이현이 냅킨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제4조 끝에 괄호 보이십니까. 접힌 자리에."
큰이모가 돋보기를 한 번 더 코에 밀어 올렸다. 한참 봤다.
"……을은, 예외?"
"네. 서명할 때 몰래 썼습니다."
마루가 두 번째로 조용해졌다. 이번엔 좀 다른 종류의 조용함이었다.
아빠가 막걸리 잔을 내려놓았다. "그건 좀 치사하네."
"아빠!"
"치사한데." 아빠가 이현을 한참 봤다. "잘했다."
엄마가 부엌 문턱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행주로 입을 막았지만 늦었다.
막내 이모는 여전히 분이 안 풀린 얼굴이었다. 그녀는 서윤을 향해 손가락을 세웠다.
"그럼 너는. 너는 언제부터였어. 가짜가 진짜가 된 게."
서윤은 어제 점심상에서 한 대답을 떠올렸다. 기준표 만들 때쯤이요. 가을에. 그때는 아무도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워크숍 다녀와서요. 비 오던 날."
"비 오던 날 뭐."
"우산이 하나였어요."
"그래서."
"그래서……." 서윤은 말끝을 흐렸다. 옆에서 이현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봤다. 이 사람도 이 얘기는 처음 듣는 거였다.
"왼쪽 어깨가 젖어 있었어요. 이 사람."
이모 셋이 동시에 이현의 왼쪽 어깨를 봤다. 둘째 이모가 수첩에 뭔가를 적고 동그라미를 쳤다.
"서기, 지금까지 읽어 봐라." 큰이모가 말했다.
둘째 이모가 수첩을 들고 헛기침을 했다.
"하나. 피고 정서윤, 추석 앞둔 주 편의점에서 가짜 계약 체결. 자백함."
"둘. 을 차이현, 5년 전부터 진짜. 대본에 없는 말 함. 귀 빨개짐."
"셋. 을, 괄호 몰래 씀. 아빠 판정 치사한데 잘했음."
"넷. 피고, 우산 하나에 넘어감. 왼쪽 어깨."
"그리고 다섯." 둘째 이모가 수첩 너머로 둘을 봤다. "청문회 시작하고 지금까지, 둘이 무릎 옆에서 새끼손가락이 세 번 닿았다 떨어짐. 본인들은 모름."
서윤은 무릎 옆을 내려다봤다. 이현의 새끼손가락이 그녀의 손 옆에 있었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였다. 그녀가 슬쩍 손을 당기자, 이현도 동시에 손을 당겼다. 둘 다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았다. 너무 반듯하게.
"방금 네 번째." 둘째 이모가 적었다.
"이모, 그건 기록 안 해도 되잖아요."
"서기는 본 대로 적는다."
엄마가 부엌 문턱에서 끼어들었다. "나도 증언할 거 있는데."
"어머니 증언 받는다." 큰이모가 손짓했다.
"얘가 추석 때까지 전화하면 맨날 '그 차 씨가 또' 그랬거든. 싸운 얘기만. 근데 11월부터 커피 얘기를 하더라고. '그 차 씨가 또 커피를 사 왔어.' 그러더니 두부 얘기를 해. 반듯하대. 두부가."
"엄마……."
"12월엔 매직 얘기. 1월엔 전화를 안 받더라. 받으면 울 것 같았대나." 엄마가 행주를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지금은 '이현이가' 그래. 나는 그게 다 가짜였다고 해도 상관없어. 목소리는 진짜였으니까."
서윤은 고개를 더 숙였다. 귀까지 뜨거웠다. 옆에서 이현이 아주 작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 이 사람은 이 얘기도 처음 듣는 거였다. 오늘 이 사람한테 처음 들려주는 얘기가 너무 많았다. 그것도 가족 전원 앞에서.
큰이모가 돋보기를 벗었다. 오래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냅킨을 밥상 위에 반듯하게 내려놓았다.
"판결은 점심 먹고 한다. 그 전에 증인 한 명 더 부르자."
"증인이요?"
큰이모가 몸을 돌렸다. 한 발 뒤, 방석 위의 할머니를 향해.
"사돈 어른. 청매골에서 이 둘 보셨지요. 그때 뭐 이상한 거 없었습니까."
할머니는 느긋하게 식혜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상한 거야 있었지."
서윤과 이현이 동시에 할머니를 돌아봤다.
"나는 청매골서부터 알았다. 둘이 가짜인 거."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저는 쓰레기통이요.""네?""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무슨 부칙이요.""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그건 인정해요.""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청혼 기획서 v1.0입니다."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다."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멈췄다."……뭘요?""보름달 차오르는 연출이요. 유저가 편지를 쓰면 달이 한 칸씩 차오르는 거."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1년 전 이 회의실에서 서윤은 그 연출이 이벤트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현은 연휴 전에 못 넣는다고 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팀장이 간소화 버전으로 정리했다. 달은 끝내 차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 계약서가 생겼다."시즌2 기획서엔 그 연출 없었잖아요. 제가 뺐어요. 작년에 안 된다고 하셔서.""그래서 제가 넣었어요. 따로.""언제요?""작년 추석 끝나고부터요. 틈틈이.""1년 동안요?""공수가 많이 들었어요. 1년 걸렸어요." 이현이 화면을 넘겼다. 테스트 영상이었다. 유저가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까만 하늘의 달이 가장자리부터 차올랐다. 은은하게, 천천히. 마지막 편지가 들어가자 보름달이 꽉 찼다. 달 속에서 토끼가 고개를 들었다.회의실이 조용했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 잔을 든 채 굳었다. 옆에서 민지가 조용히 그의 컵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아 줬다.서윤은 화면을 봤다. 1년 전 그녀가 사흘 밤을 새워 그린 연출이었다. 그대로였다. 아니, 더 좋았다. 그녀가 그렸던 것보다 달이 천천히 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이거, 제 원래 기획서 그대로예요.""네. 원본 남겨 뒀어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테 선택권이 없어 보여. 의문형은 선택권을 주는데, 자신 없어 보이고.""차 선임님이라면 뭐라고 반박하실까요?"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1년 동안 들어서 토씨까지 외운 목소리."'청유형은 유저가 부담스러워해요. 의문형은 유저가 거절할 수 있어요. 거절 확률이 있는 문장은 공수 낭비예요.'"민지가 박수를 쳤다. "똑같아요. 소름.""그럼 그 사람은 뭐라고 할 것 같아?""그냥 '네' 하실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서윤은 슬라이드를 봤다. 마지막 장. 문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결혼해요. 결혼할래요. 둘 다 빨간 줄이 한 번씩 그어졌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그러니까 더 어려운 거야. 뭘 해도 '네' 할 사람한테 뭘 물어야 할지."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화면을 보더니 귀가 빨개졌다. 윤재하였다. 둘이 사귄 지 3주째였다. 컵에 쓰는 글씨는 매일 한 줄씩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선배, 제 친구가요, 아니 제가요." 민지가 휴대폰을 엎었다. "재하 씨한테 청유형이랑 의문형 중에 뭐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어떤 선배 얘기라고 하고.""……민지야.""이름은 안 말했어요! 근데 재하 씨가 그러더라고요. 개발자는 의문형을 좋아한대요. 반환값이 있으니까.""반환값.""네. '네'라는 반환값이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 회사 개발자들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큰이모: 기각]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거기서 멈췄다.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냅킨이 또 하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