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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교제 시작일

Author: Jino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0-15 08:40:25

연애 기획서 v1.1 개정안. 부록 제1항. 기념일은 하나로 한다.

(발의: 정서윤. 반대: 차이현. 심사: 인사팀 고 과장, 팀장, 그리고 왜인지 민지.)

금요일 오후 네 시. 12층 작은 회의실.

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제목은 '교제 시작일 선정의 건'. 부제는 '근거 중심으로'. 서윤이 이틀 밤을 새운 기획서였다. 달토끼 이벤트 때보다 슬라이드가 세 장 많았다.

테이블 맞은편에는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고 앉아 있었다. 그 옆에 고 과장. 고 과장 옆에 팀장. 팀장 옆에, 아무도 부르지 않은 민지.

"민지 씨는 왜 여기 있어요?" 이현이 물었다.

"서기요." 민지가 수첩을 흔들었다. "둘째 이모님 역할이요."

서윤은 이현을 돌아봤다. "둘째 이모 얘기를 민지한테 했어요?"

"안 했어요."

"그럼 어떻게 알아."

"단톡방에서 봤어요." 민지가 태연하게 말했다. "선배 어머님이 저 추가하셨어요. 설에 보내 주신 식혜 사진 잘 받았다고 했더니요. 지금 17명이에요."

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이 회사와 솔뫼리 사이에 경계선이 사라지고 있었다.

"자, 시작하자." 팀장이 손뼉을 쳤다. "나는 오늘 중재가 아니라 심사야. 방장 자격으로."

"방장은 공식 직함이 아니잖아요."

"오늘부턴 공식이야."

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들었다. 발표할 때의 목소리가 나왔다.

"먼저 사실관계부터 정정하겠습니다. 공식 발표했던 '작년 여름휴가 이후'는 사실이 아닙니다."

팀장이 물컵을 들다 멈췄다.

"두 사람은 작년 추석을 앞둔 주에, 회사 앞 편의점에서 가짜 연애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명절 선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요. 계약서는 냅킨입니다."

민지가 수첩에 '냅킨!!!'이라고 쓰고 느낌표를 세 개 그렸다. 팀장이 물컵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가짜?"

"네. 계약 기간 중에는 가짜였고, 1월에 계약을 파기하면서 진짜가 됐습니다."

"그럼 11월에 내 앞에서 사귄다고 한 것도……."

"그때도 계약 중이었어요."

팀장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천장을 봤다. 3년 동안 판을 깔아 온 사람의 얼굴이었다. 결말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시작부터 몰랐다는 걸 알게 된 사람.

"……그래서 냅킨색이었구나." 팀장이 중얼거렸다. "나 오늘 공지 써야겠다. 긴 거."

"방장님, 그건 나중에요." 고 과장이 부드럽게 말렸다. "신고서부터요."

서윤은 다음 장으로 넘겼다.

"후보는 세 개입니다. 첫째, 작년 추석 전 그 주. 계약일. 둘째, 올해 1월 22일. 계약 파기일이자 쌍방 확인일. 셋째." 서윤은 잠깐 이현을 봤다. "2021년 3월 2일. 을이 번호를 저장한 날."

"을?" 고 과장이 물었다.

"차이현 씨요. 계약서상 명칭이에요."

"아, 네." 고 과장이 메모했다. 표정이 점점 즐거워지고 있었다.

"선정 기준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 쌍방성. 둘 다 알고 있었는가. 둘, 진정성. 가짜가 아닌가. 셋, 선언. 말로 확인했는가."

다음 장은 표였다. 가로에 후보 셋, 세로에 기준 셋. 동그라미와 엑스가 반듯하게 채워져 있었다.

"추석 전 계약일은 쌍방성 동그라미, 진정성 엑스, 선언 엑스. 3월 2일은 쌍방성 엑스, 선언 엑스. 1월 22일만 셋 다 동그라미입니다. 따라서 교제 시작일은 1월 22일이 타당합니다. 이상입니다."

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탁. 완벽했다. 5년 동안 수백 번 해 본 발표 중에 가장 근거가 탄탄했다.

"질문 있습니다." 이현이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진정성 칸이요. 3월 2일에 왜 칸이 비어 있어요?"

서윤은 표를 다시 봤다. 3월 2일 줄. 쌍방성 엑스, 선언 엑스. 진정성 칸은 비어 있었다. 그녀가 비워 놓은 거였다. 엑스를 칠 수가 없어서.

"……그건 판단 보류예요."

"보류 사유는요?"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확인할 방법 있어요." 이현이 노트북을 완전히 덮었다. 회의실에서 처음 보는 동작이었다. 반쯤이 아니라, 끝까지. "제가 증언하면 돼요. 진정성 동그라미요. 5년 11개월 동안 한 번도 가짜였던 적 없어요."

민지가 수첩에 뭔가를 쓰다가 볼펜을 놓쳤다. 팀장은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고 과장은 메모를 멈추고 턱을 괴었다.

"그리고 기준 하나를 추가 제안합니다." 이현이 말을 이었다. "지속성이요. 교제는 시작일부터 지금까지 끊기지 않고 이어져야 하잖아요. 1월 22일은 지속성은 있지만 짧아요. 3월 2일은 6년 가까이 끊긴 적이 없어요. 한쪽만이긴 했지만요."

"한쪽은 교제가 아니잖아요."

"그럼 추석부터 1월까지는요? 계약 중이긴 했지만, 서윤 씨도 워크숍 이후로는 진짜였다고 청문회에서 자백하셨잖아요."

"그건 가족회의 속기록이에요. 여기서 인정 안 돼요."

"서기 있어요." 이현이 민지를 가리켰다. "민지 씨, 둘째 이모님 수첩 사진 단톡방에 올라왔죠."

"올라왔어요." 민지가 휴대폰을 들었다. "'넷. 피고, 우산 하나에 넘어감. 왼쪽 어깨.' 여기요."

"민지야!"

고 과장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인사팀 과장의 체면을 지키려고 입을 막았지만 늦었다. 팀장은 이미 테이블에 이마를 대고 어깨를 떨고 있었다.

회의는 사십 분 동안 이어졌다. 서윤이 '쌍방성은 연애의 최소 요건'이라고 하면 이현이 '최소 요건은 시작이 아니라 성립'이라고 받았다. 이현이 '시작은 먼저 시작한 사람 기준'이라고 하면 서윤이 '그럼 경쟁사가 먼저 기획하면 우리 기획 시작일이 바뀌냐'고 받았다. 민지의 수첩이 두 장 넘어갔다.

결국 고 과장이 손을 들었다.

"두 분, 제안 하나 드려도 될까요."

"네."

"네."

"교제 시작일 칸에는 날짜를 하나만 쓰세요. 그건 1월 22일로 하죠. 쌍방이 확인된 날이 인사 기록엔 제일 깔끔하니까요." 고 과장이 신고서를 뒤집어 비고란을 가리켰다. "대신 비고란에 나머지를 적으세요. 비고란엔 칸 제한이 없거든요."

서윤과 이현이 서로를 봤다. 그리고 동시에 볼펜을 들었다.

십 분 뒤, 신고서 두 장이 고 과장 앞에 놓였다. 교제 시작일 칸은 똑같았다. 1월 22일. 비고란도 똑같았다. 둘이 같이 불러 가며 적었으니까.

'비고: 작년 추석 전 주(계약, 가짜) / 올해 1월 22일(파기, 진짜) / 2021년 3월 2일(을 단독, 진짜)'

고 과장이 신고서를 들고 한참 봤다.

"……비고란이 본문보다 길어요."

"반려예요?"

"아뇨. 수리합니다." 고 과장이 도장을 꺼냈다. 인사팀 결재 도장이었다. 인주는 있었다. "인사팀 역사상 제일 성실한 신고서예요. 보통은 날짜 하나 쓰고 끝이거든요."

도장이 찍혔다. 쾅. 고추장보다 선명한 빨강이었다.

회의실을 나오면서 서윤은 이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민지를 증인으로 부르는 건 반칙이에요."

"서윤 씨가 표에서 칸 비운 건 반칙 아니고요?"

"그건 판단 보류라니까요."

"엑스 칠 수 있었잖아요."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엑스를 칠 수 없었던 이유를 이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씨름 방 투표 결과가 떴다.

[긴급 투표 마감. ③ 냅킨과 관련 있다 — 1표. 투표자: 한민지. 커피 쿠폰 다섯 장 걸었음.]

[방장: 정답자 한민지. 배당은 방장이 개인적으로 지급한다.]

[방장: 전체 경위는 주말에 공지하겠다. 길다. 각오해라.]

"민지 혼자 맞혔대요." 서윤이 화면을 보여 줬다.

"보자기 때부터 알았다던 사람이니까요." 이현이 엘리베이터 숫자를 올려다봤다. "민지 씨한테 커피 한 잔 사야겠네요. 제가."

"왜 이현 씨가요?"

"우리 교제 시작일에 건 유일한 사람이잖아요. 냅킨 쪽에."

엘리베이터가 1층에 섰다. 문이 열리기 직전, 이현이 서윤 손등에 손가락을 한 번 스쳤다. 사내 공개 조항이 살아 있는데도,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서만 하는 습관이었다. 비밀 연애 두 달이 남긴 버릇이었다.

그날 밤, 이현의 집. 김치찌개를 먹고 설거지를 나눠 하고, 서윤은 가방에서 A4 한 장을 꺼냈다. 연애 기획서 v1.0. 한 달 사이에 모서리가 조금 닳았다.

그녀는 빨간 볼펜을 들었다. 조항 아래 빈 공간에 적었다.

'v1.1 개정. 부록 제1항. 기념일은 하나로 한다. 1월 22일.'

이현이 어깨 너머로 봤다. "결국 이기셨네요."

"아직 안 끝났어요."

서윤은 한 줄을 더 적었다. 조금 삐뚤게. 빨간 볼펜이라 번지지 않았다.

'부록 제2항. 단, 2021년 3월 2일은 을의 기념일로 한다. 갑은 그날 을이 원하는 걸 한 가지 들어준다.'

이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윤은 볼펜 뚜껑을 닫고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A4를 보고 있었다. 오래. 파라솔 아래에서 제1조의 번진 '자정까지'를 보던 것처럼.

"……한 가지면, 뭐든 돼요?"

"조항 해석은 갑이 해요."

"그럼 생각해 둘게요."

"기한은 3주 안이에요. 3월 2일까지 열여드레 남았어요."

"알아요." 이현이 말했다. "6년째 세고 있어요."

월요일 아침, 팀장이 둘을 동시에 불렀다. 팀장의 눈 밑이 거뭇했다. 주말 내내 공지를 쓴 얼굴이었다.

"인사팀에서 요청 왔어. 올해 신입 연수 선배 특강." 팀장이 출력물 한 장을 내밀었다. "날짜는 3월 2일. 장소는 청솔 연수원 강당. 강사는 둘 다."

서윤과 이현이 동시에 출력물을 봤다. 강당. 3월 2일. 6년 전 그날, 그 장소.

"……팀장님이 추천하셨어요?"

"아니. 고 과장이." 팀장이 한숨을 쉬었다. "비고란 보고 바로 정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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