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연애 기획서 v1.1 부록 제2항. 2021년 3월 2일은 을의 기념일로 한다. 갑은 그날 을이 원하는 걸 한 가지 들어준다.
(조항 해석은 갑이 한다. 갑은 이 조항을 쓰고 열여드레 동안 후회했다. 조금.)
청솔 연수원은 3월에도 추웠다.
셔틀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서윤은 코트 깃을 여몄다. 산 공기가 서울보다 한 겹 얇았다. 11월 워크숍 때는 비가 왔고, 6년 전 오늘은 눈이 조금 날렸다. 오늘은 맑았다.
"기억나요?" 이현이 물었다. 버스 계단을 내려와 서윤 옆에 섰다.
"뭐가요."
"6년 전 오늘도 이 버스 정류장이었어요. 서윤 씨는 캐리어 바퀴가 하나 빠져서 끌고 올라갔어요. 드르륵거리면서."
"……그걸 왜 기억해요."
"그 소리가 커서 다들 돌아봤어요. 저도요. 그게 첫 번째로 본 거예요."
서윤은 걸음을 멈췄다. 6년 동안 그녀는 그 캐리어를 창피한 기억으로만 갖고 있었다. 바퀴 빠진 캐리어를 끌고 연수원 언덕을 올라가던 스물세 살. 사원증도 받기 전이었다.
"첫 번째로 본 게 그거예요? 발표가 아니라?"
"발표는 두 번째요. 첫 번째는 캐리어. 세 번째는 점심때 콩자반 남긴 거."
"콩자반은 왜요."
"저도 남겨서요. 같은 테이블에서 둘만."
서윤은 할 말을 잃었다. 이 사람의 5년 11개월에는 그녀가 모르는 목록이 너무 많았다.
강당은 그대로였다. 계단식 좌석, 무대 위의 연단, 맨 뒷줄 창가의 햇빛. 앞쪽 좌석에 신입 서른두 명이 앉아 있었다. 다들 긴장한 얼굴이었다. 6년 전의 자기들처럼.
고 과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선배 특강은 기획팀 정서윤 선임, 개발팀 차이현 선임께서 해 주시겠습니다. 두 분은 입사 동기시고요, 사내에서 회의를 제일…… 활발하게 하시는 분들입니다."
신입 몇 명이 웃었다. 이미 소문을 들은 얼굴들이었다. 씨름 방은 신입 연수 전에 신입들에게까지 초대 링크를 돌렸다는 소문이 있었다. 방장은 부인했다.
특강 제목은 '기획과 개발이 싸우는 법'이었다. 팀장이 지어 준 제목이었다. 서윤은 싫다고 했고, 이현은 정확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대로 갔다.
"기획자는 유저를 봅니다." 서윤이 말했다.
"개발자는 서버를 봅니다." 이현이 받았다.
"그래서 싸웁니다."
"싸워야 합니다. 둘 중 하나만 보면 둘 다 망하거든요."
서른두 명이 필기를 시작했다. 둘은 실제 사례를 들었다. 달토끼 편지 40자 논쟁. 까치 줄바꿈 4번. 색 열두 가지와 열세 번째 색. 서윤이 기획 의도를 말하면 이현이 공수를 말했다. 이현이 제약을 말하면 서윤이 대안을 말했다. 회의실에서 5년 동안 한 걸 무대에서 그대로 했다. 다른 건 딱 하나였다. 둘 다 웃으면서 했다.
"참고로 열세 번째 색 이름은 유저 투표로 정했습니다." 서윤이 슬라이드를 넘겼다. "후보는 아이보리와 냅킨색이었고요."
"결과는 냅킨색 62퍼센트였습니다." 이현이 덧붙였다.
"편의점 가면 다 안다는 논리가 통했어요. 유감스럽게도."
신입들이 웃었다. 무슨 뜻인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래도 웃었다. 둘이 서로를 보는 얼굴이 웃겼을 테니까.
질의응답 시간. 맨 앞줄의 신입이 손을 들었다. 단발머리였다. 작년 워크숍의 디자인팀 신입을 닮았다. 요즘 신입은 다 용감했다.
"두 분이 사귀신다는 게 사실이에요?"
강당이 조용해졌다. 고 과장이 마이크를 뺏으려다 멈췄다. 뒤쪽에서 인사팀 직원 하나가 휴대폰을 들었다. 씨름 방 회원이 분명했다.
서윤은 이현을 봤다. 이현은 서윤을 봤다. 작년 11월에도 이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시연 회의실에서, 할머니 알림이 화면에 크게 뜬 직후에. 그때는 동시에 다른 대답이 나왔다. 한 사람은 '아뇨', 한 사람은 '네'.
이번엔 누구도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네."
"네."
동시였다. 강당에 탄성이 번졌다. 누군가 박수를 쳤고, 곧 서른두 명이 다 쳤다. 서윤은 연단을 붙잡았다. 볼이 뜨거웠다. 무대 조명 때문이라고 하기엔 조명이 약했다.
"그럼 처음 만난 날 기억하세요?" 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
이현이 마이크를 잡았다. 서윤이 옆구리를 찌르기 전에.
"6년 전 오늘이요. 이 강당에서요. 조별 발표 때 이분이 원고를 덮고 이렇게 말했어요." 이현이 한 박자 쉬었다. "'이건 제 의견이 아니라, 유저가 이렇게 느낄 거라는 얘기예요.'"
"……그걸 왜 여기서 말해요."
"질문에 답한 거예요."
"토씨 하나 안 틀리고요?"
"좋은 문장은 오래 가요."
강당이 다시 뒤집어졌다. 고 과장이 마이크를 정중하게 회수했다. "네, 오늘 특강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신입 여러분, 점심은 식당입니다. 콩자반 나옵니다."
신입들이 빠져나가고 강당이 비었다. 창가로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맨 뒷줄 의자 몇 개가 빛 속에 떠 있었다.
서윤은 연단에서 내려와 이현 앞에 섰다.
"오늘이에요."
"네."
"부록 제2항. 원하는 거 한 가지. 생각해 뒀어요?"
"네."
"뭔데요."
이현이 맨 뒷줄을 봤다. 창가 끝자리. 햇빛이 제일 많이 드는 자리.
"저기 앉을 테니까, 발표 한 번 더 해 주세요. 그날 거요."
서윤은 웃으려다 말았다. 농담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이런 걸로 농담하지 않았다.
"……원고 없는데요."
"그날도 덮으셨잖아요."
이현이 계단을 올라가 맨 뒷줄 창가 끝자리에 앉았다. 6년 전 그 자리였다. 서윤은 그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는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았다. 신입처럼.
서윤은 연단으로 돌아갔다. 강당은 넓었고, 청중은 한 명이었다. 파라솔 아래에서 한 발표와 같았다. 다만 이번엔 반박당할 걱정이 없었다.
"조별 과제 주제는 '신규 유저가 이탈하는 이유'였습니다." 서윤이 말했다. 6년 전의 첫 문장이었다. 기억하고 있었다. 이 사람 때문에 다시 떠올렸다. "저희 조는 원래 튜토리얼이 길어서라고 결론을 냈는데요."
그녀는 연단을 짚었다.
"이건 제 의견이 아니라, 유저가 이렇게 느낄 거라는 얘기예요. 유저는 튜토리얼이 길어서 떠나는 게 아니에요. 아무도 자기를 봐 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떠나요."
맨 뒷줄에서 이현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저는 제안합니다. 누군가 한 명은, 계속 보고 있어야 한다고요."
6년 전에는 여기서 끝났다. 원고에는 없던 말이었고, 떨리는 목소리였고, 조장은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 서윤은 거기서 한 문장을 더 붙였다.
"……근데 그 한 명이, 맨 뒷줄에 있었대요. 6년 동안. 저는 몰랐고요."
이현이 일어났다. 계단을 내려왔다. 한 칸씩, 서두르지 않고. 서윤은 연단 앞에서 기다렸다.
"발표 좋았어요." 그가 말했다. 맨 앞줄 앞에 서서.
"반박 없어요?"
"없어요. 5년 11개월 만에 처음이에요."
"……6년이에요. 오늘부로."
"아, 그러네요."
서윤은 휴대폰을 꺼냈다. 연락처를 열었다. '차이현(공수)'. 추가한 날짜 2021년 6월 11일. 첫 협업 회의 다음 날.
그녀는 이현이 보는 앞에서 이름을 지웠다. 그리고 새로 적었다. 두 글자.
'이현'.
추가한 날짜는 바뀌지 않았다. 2021년 6월 11일. 이름만 바뀌었다.
"날짜는 못 바꿔요." 서윤이 화면을 보여 줬다. "저는 3월 2일이 아니라서요. 석 달 늦었어요."
"석 달이면 빠른 거예요."
"뭐가요."
"저는 번호 저장하고 첫 메시지 보내는 데 5년 반 걸렸어요. 추석 앞둔 그 주 밤에요."
"그건 느린 거죠."
"그러니까 석 달은 빠른 거예요."
이현이 서윤의 손에서 휴대폰을 가져가 화면을 한참 봤다. '이현'. 괄호도, 성도, 공수도 없는 두 글자. 그의 엄지가 그 이름 위에 잠깐 머물렀다.
그리고 그가 휴대폰을 돌려주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강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가의 햇빛만 있었다. 서윤은 눈을 감았다. 그믐의 평상보다 조금 길었다.
강당 문이 벌컥 열린 건 그다음이었다.
"두 분, 단체사진이요!" 고 과장이었다. 고 과장은 문틈에서 굳었다가, 아무것도 못 본 사람처럼 천장을 봤다. "……계단에서 찍습니다. 천천히 오세요. 아주 천천히."
계단 단체사진에서 이현은 카메라를 봤다. 6년 만에 처음으로 앞을 봤다. 대신 서윤이 옆을 봤다. 고 과장은 셔터를 누르고 한참 화면을 들여다보다 중얼거렸다. "이번엔 반대네." 그리고 그 사진을 워크숍 사진첩 18번에 넣겠다고 했다. 17번 바로 다음이었다.
점심은 신입들과 같은 식당이었다. 식판에 콩자반이 나왔다. 고 과장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서윤은 자리에 앉자마자 콩자반을 식판 구석으로 밀었다. 젓가락 끝으로, 한 알도 남김없이. 맞은편에서 이현도 똑같이 밀었다. 같은 구석으로. 같은 속도로.
옆 테이블의 단발머리 신입이 그걸 봤다. 그리고 자기 동기에게 속삭였다. 서윤은 다 들었다.
"봤어? 콩 미는 것까지 똑같아."
"원래 사귀면 닮는대."
"아니야, 저건 원래 닮은 거야. 6년 전부터."
서윤은 식판을 내려다봤다. 구석에 모인 콩자반이 작은 언덕이 되어 있었다. 6년 전 이 식당, 같은 테이블에서도 이랬을 것이다. 그녀만 몰랐을 뿐.
"……콩자반 기억은 진짜였네요."
"제 기억은 다 진짜예요." 이현이 국을 떠먹었다. "캐리어 바퀴는 왼쪽 뒤였어요."
"그것까지는 말 안 해도 돼요."
돌아오는 셔틀버스에서 이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화면을 보더니 조용히 서윤에게 내밀었다.
[어머니: 토요일에 서울 간다]
[어머니: 치우지 마라. 원래대로 보자]
[어머니: 서윤이도 불러라. 우리 편이니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저는 쓰레기통이요.""네?""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무슨 부칙이요.""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그건 인정해요.""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청혼 기획서 v1.0입니다."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다."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멈췄다."……뭘요?""보름달 차오르는 연출이요. 유저가 편지를 쓰면 달이 한 칸씩 차오르는 거."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1년 전 이 회의실에서 서윤은 그 연출이 이벤트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현은 연휴 전에 못 넣는다고 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팀장이 간소화 버전으로 정리했다. 달은 끝내 차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 계약서가 생겼다."시즌2 기획서엔 그 연출 없었잖아요. 제가 뺐어요. 작년에 안 된다고 하셔서.""그래서 제가 넣었어요. 따로.""언제요?""작년 추석 끝나고부터요. 틈틈이.""1년 동안요?""공수가 많이 들었어요. 1년 걸렸어요." 이현이 화면을 넘겼다. 테스트 영상이었다. 유저가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까만 하늘의 달이 가장자리부터 차올랐다. 은은하게, 천천히. 마지막 편지가 들어가자 보름달이 꽉 찼다. 달 속에서 토끼가 고개를 들었다.회의실이 조용했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 잔을 든 채 굳었다. 옆에서 민지가 조용히 그의 컵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아 줬다.서윤은 화면을 봤다. 1년 전 그녀가 사흘 밤을 새워 그린 연출이었다. 그대로였다. 아니, 더 좋았다. 그녀가 그렸던 것보다 달이 천천히 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이거, 제 원래 기획서 그대로예요.""네. 원본 남겨 뒀어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테 선택권이 없어 보여. 의문형은 선택권을 주는데, 자신 없어 보이고.""차 선임님이라면 뭐라고 반박하실까요?"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1년 동안 들어서 토씨까지 외운 목소리."'청유형은 유저가 부담스러워해요. 의문형은 유저가 거절할 수 있어요. 거절 확률이 있는 문장은 공수 낭비예요.'"민지가 박수를 쳤다. "똑같아요. 소름.""그럼 그 사람은 뭐라고 할 것 같아?""그냥 '네' 하실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서윤은 슬라이드를 봤다. 마지막 장. 문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결혼해요. 결혼할래요. 둘 다 빨간 줄이 한 번씩 그어졌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그러니까 더 어려운 거야. 뭘 해도 '네' 할 사람한테 뭘 물어야 할지."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화면을 보더니 귀가 빨개졌다. 윤재하였다. 둘이 사귄 지 3주째였다. 컵에 쓰는 글씨는 매일 한 줄씩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선배, 제 친구가요, 아니 제가요." 민지가 휴대폰을 엎었다. "재하 씨한테 청유형이랑 의문형 중에 뭐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어떤 선배 얘기라고 하고.""……민지야.""이름은 안 말했어요! 근데 재하 씨가 그러더라고요. 개발자는 의문형을 좋아한대요. 반환값이 있으니까.""반환값.""네. '네'라는 반환값이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 회사 개발자들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큰이모: 기각]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거기서 멈췄다.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냅킨이 또 하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