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 27화. 청매골 점검표

Share

27화. 청매골 점검표

Author: Jino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0-15 08:40:43

청매골 점검표 제1항. 냉장고를 연다. 아들이 말리면 두 번 연다.

(작성: 이현 어머니. 수첩 뒷장. 항목은 일곱 개. 점검 보조: 정서윤.)

토요일 오전 열 시, 고속버스 터미널.

서윤은 도착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따뜻한 보리차 두 병이 들려 있었다. 이현은 없었다. 어머니가 금지했다.

[어머니: 이현이는 집에 있으라 해라. 너만 나와라. 작전 회의 해야지]

작전 회의라는 말에 서윤은 전날 밤 잠을 설쳤다. 5년 동안 수백 번 회의를 했지만, 남자친구 어머니와의 작전 회의는 처음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어머니는 분홍 보자기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서윤이 하나를 받아 들자 묵직했다.

"뭐가 이렇게 무거워요, 어머님."

"반찬. 그리고 이거."

어머니가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약국 이름이 찍힌 작은 수첩이었다. 뒷장을 펼치자 볼펜으로 쓴 목록이 나왔다.

'점검표. 1. 냉장고. 2. 신발장. 3. 책장. 4. 옷장. 5. 달력. 6. 컵. 7. 그 애 얼굴.'

"일곱 번은 뭐예요?"

"마지막에 볼 거. 제일 중요한 거."

택시 안에서 어머니가 작전을 설명했다. 간단했다. 어머니가 점검하고, 서윤은 옆에서 고개만 끄덕이면 된다. 이현이 변명하면 서윤이 반박한다.

"반박은 잘하지?"

"……5년 동안 그것만 했어요."

"그래서 불렀지." 어머니가 서윤의 손등을 토닥였다. "쟤는 나한테는 반박을 안 해. 대답만 해. '네, 어머니.' 그게 제일 얄미워."

이현의 집 현관문이 열렸다. 이현이 앞치마를 두르고 서 있었다. 부엌에서 된장찌개 냄새가 났다.

"오셨어요."

어머니는 대답 대신 아들의 얼굴을 한참 봤다. 위아래로. 그리고 서윤을 돌아보며 작게 말했다. "일곱 번은 나중에."

점검이 시작됐다.

1항, 냉장고. 이현이 앞을 막아섰다.

"어머니, 냉장고는 괜찮아요. 제가 정리……."

"비켜라."

어머니가 냉장고를 열었다. 반찬통이 크기 순서대로 줄 서 있었다. 통마다 라벨이 붙어 있었다. '김치(솔뫼리)', '김치(청매골)', '멸치볶음 3/1', '장조림 3/4'. 날짜까지.

"……김치를 출처별로 나눴어?"

"맛이 달라서요."

"어느 게 더 맛있어?"

이현이 멈췄다. 그리고 서윤을 힐끗 봤다. 서윤은 모른 척 고개만 끄덕였다. 작전대로.

"……둘 다요."

"거짓말." 어머니가 냉장고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두 번째에는 문 칸을 봤다. 그리고 멈췄다.

문 칸 맨 위에 바닐라 시럽 한 병이 서 있었다. 카페에서 파는 큰 병. 뚜껑에 매직으로 적혀 있었다. '1/2만'.

"이건 뭐니."

"……커피 시럽이요."

"너 단 거 안 먹잖아."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가 서윤을 봤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 잊었다. 대신 바닐라 시럽 병만 봤다. 뚜껑의 '1/2만'. 매직 글씨. 그녀가 이 집에 올 때마다 커피가 나왔는데, 그게 어디서 나오는지 그녀는 물어본 적이 없었다.

"1항 합격." 어머니가 수첩에 동그라미를 쳤다.

2항, 신발장. 신발 앞코가 전부 같은 방향이었다. 한 켤레만 빼고. 운동화 한 짝이 뒤집혀 있었다.

어머니가 그걸 집어 들었다. "이건 일부러 뒤집었지."

"……아뇨."

"이놈 봐라. 치우지 말라니까 일부러 흐트러뜨렸네. 사람 사는 집처럼 보이려고."

서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작전에 없던 일이었다. 이현이 서윤을 봤다. 배신당한 얼굴이었다.

"서윤 씨는 제 편 아니에요?"

"오늘은 어머님 편이에요. 계약했어요."

"무슨 계약이요."

"보리차 두 병이요."

3항, 책장. 책이 키 순서대로 꽂혀 있었다. 역시 한 권만 삐뚤게 튀어나와 있었다. 어머니가 그걸 뽑았다. 회사 기획서 양식 사용 설명서였다. 3년 전 사내 공모에서 뽑힌 양식. 표지에 작성자 이름이 있었다. 정서윤.

"……이거 왜 갖고 있어요?" 서윤이 물었다.

"사내 배포물이에요. 다들 받았어요."

"다들 받고 다들 버렸어요. 저도 버렸어요."

"그래서 제가 갖고 있는 거예요. 원본 하나는 남아 있어야죠."

어머니가 그 책을 서윤에게 건넸다. 책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3년 동안 몇 번이나 펼쳐 본 책이었다.

"3항도 합격." 어머니가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4항 옷장은 이현이 필사적으로 막았다. 어머니는 문을 반만 열어 보고 닫았다. "셔츠가 다 파랑이네. 서윤아, 다음에 다른 색 하나 사 줘라." 서윤은 수첩에 적는 척했다.

5항, 달력. 벽에 걸린 달력은 3월이었다. 2일 칸에 동그라미가 두 개 겹쳐 있었다. 하나는 반듯했고, 하나는 삐뚤었다. 서윤이 지난주에 몰래 그린 것이었다.

어머니가 동그라미 두 개를 한참 봤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동그라미를 쳤다. 수첩에.

6항, 컵. 선반 위에 컵이 두 개 있었다. 남색 텀블러. 그리고 '시럽 1/2, 얼음 조금'이라고 적힌 머그컵. 두 컵은 손잡이가 서로 마주 보게 놓여 있었다.

"컵은 두 개면 됐다." 어머니가 말했다.

점심은 된장찌개였다. 두부는 역시 전부 같은 크기였다. 어머니는 두부를 한 숟가락 떠서 들여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얘가 어릴 때부터 이랬어. 일곱 살 때 크레파스를 색 순서대로 안 넣으면 울었어."

"어머니."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반장 선거 나가서 두 표 받았어. 할머니한테 들었지?"

"들었어요." 서윤이 말했다. "본인 표랑 짝꿍 표요."

어머니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공책이었다. 표지에 '그림일기, 3학년 2반 차이현'. 글씨가 벌써 반듯했다.

"어머니!" 이현이 숟가락을 놓았다.

"서윤이한테 보여 주려고 가져왔어. 작전 회의 때 약속했거든."

서윤은 공책을 받았다. 이현이 손을 뻗었지만 어머니가 그 손등을 찰싹 쳤다. 서윤은 표시된 쪽을 펼쳤다.

'반장 선거를 했다. 두 표가 나왔다. 한 표는 내가 나를 뽑았다. 한 표는 짝꿍이 뽑아 줬다. 짝꿍한테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못 했다. 대신 지우개를 반으로 잘라서 줬다. 반듯하게 잘랐다.'

서윤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그리고 이현을 봤다. 이현은 식탁 모서리만 보고 있었다. 귀가 끝까지 빨갰다.

"……이때부터 말 대신 반듯하게 뭘 줬네요."

"그러니까. 5년 동안 커피에 글씨 쓴 것도 그거야." 어머니가 두부를 먹었다. "말을 못 해서."

식사가 끝나자 어머니가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A4를 네 번 접은 것이었다. 펼치자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목록이 나왔다. 여섯 명. 맨 위는 '약사, 친구 딸'.

"이게 작년 추석 이후로 내가 모은 명단이야." 어머니가 서윤을 봤다. "어떻게 할까."

서윤은 목록을 봤다. 그리고 어머니를 봤다. 작전 회의에는 없던 질문이었다. 그래서 작전 없이 대답했다.

"찢어 주세요. 반듯하게요."

어머니가 웃었다. 그리고 목록을 반으로 찢었다. 다시 반으로. 네 조각이 식탁 위에 반듯하게 쌓였다. 이현의 집에서 제일 반듯한 쓰레기였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이현을 봤다. 위아래로, 오래. 아침에 문 열 때 본 것처럼.

"7항."

"……네?"

"얼굴." 어머니가 수첩에 동그라미를 쳤다. "추석 때보다 좋다. 설 때보다도 좋고. 합격."

어머니를 터미널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길, 이현이 말했다.

"오늘 저 배신하셨어요."

"계약대로 했어요."

"보리차 두 병에 넘어가셨어요."

"지우개 반쪽에 넘어갔어요." 서윤이 말했다. "그림일기 보고요."

이현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한참 뒤에 다시 걸었다. 말 대신 서윤의 손을 잡았다. 반듯하게, 손가락 사이사이 빈틈없이.

"그 시럽이요." 서윤이 물었다. 신호등 앞이었다. "언제 샀어요?"

"……물어보실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언제요."

이현이 신호등을 올려다봤다. 빨간불이 초를 세고 있었다. 사십이, 사십일.

"작년 10월이요. 연수원 다녀오기 전이요."

서윤은 날짜를 셌다. 작년 10월이면 계약 중이었다. 비상계단에서 몰래 커피를 건네던 때였다. 그녀가 이 집에 처음 온 건 1월, 김치찌개를 먹던 날이었다.

"그럼 석 달 동안 안 쓴 시럽이 냉장고에 있었던 거예요?"

"네."

"왜 샀는데요."

"언젠가 오시면 드리려고요. 카페 거랑 똑같이. 반만 넣어서."

"안 왔으면요?"

"그럼 유통기한까지 두려고 했어요. 확인해 보니까 내년 봄까지더라고요." 이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때까지 안 오시면 부산 가서 버리려고 했어요."

신호가 바뀌었다. 초록불. 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했다. 서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잡힌 손 때문에 이현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 얘기, 어머님 앞에서 안 한 거 잘했어요."

"왜요."

"어머님 우셨을 거예요."

"서윤 씨는요?"

"저는 안 울어요." 서윤이 코를 한 번 훌쩍였다. "바람 불어서 그래요."

바람은 불지 않았다. 이현은 반박하지 않았다. 신호가 다시 빨간불로 바뀔 때까지 둘은 거기 서 있었다. 그리고 다음 초록불에 건넜다.

일요일 밤, 서윤의 휴대폰에 팀장의 메시지가 왔다. 업무 시간 외 연락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팀장: 미안. 급해서.]

서윤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팀장이 사과부터 하는 메시지는 5년 동안 두 번 봤다. 두 번 다 좋은 일이 아니었다.

[팀장: 내일 오전에 부산에서 손님 와. 파란등대 스튜디오 대표.]

[팀장: 합동 이벤트 제안인데, 기획 담당으로 너를 지명했다.]

Patuloy na basahin ang aklat na ito nang libre
I-scan ang code upang i-download ang App

Pinakabagong kabanata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40화. 제1조,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저는 쓰레기통이요.""네?""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무슨 부칙이요.""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그건 인정해요.""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청혼 기획서 v1.0입니다."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39화. 추석 연휴 전날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다."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멈췄다."……뭘요?""보름달 차오르는 연출이요. 유저가 편지를 쓰면 달이 한 칸씩 차오르는 거."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1년 전 이 회의실에서 서윤은 그 연출이 이벤트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현은 연휴 전에 못 넣는다고 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팀장이 간소화 버전으로 정리했다. 달은 끝내 차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 계약서가 생겼다."시즌2 기획서엔 그 연출 없었잖아요. 제가 뺐어요. 작년에 안 된다고 하셔서.""그래서 제가 넣었어요. 따로.""언제요?""작년 추석 끝나고부터요. 틈틈이.""1년 동안요?""공수가 많이 들었어요. 1년 걸렸어요." 이현이 화면을 넘겼다. 테스트 영상이었다. 유저가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까만 하늘의 달이 가장자리부터 차올랐다. 은은하게, 천천히. 마지막 편지가 들어가자 보름달이 꽉 찼다. 달 속에서 토끼가 고개를 들었다.회의실이 조용했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 잔을 든 채 굳었다. 옆에서 민지가 조용히 그의 컵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아 줬다.서윤은 화면을 봤다. 1년 전 그녀가 사흘 밤을 새워 그린 연출이었다. 그대로였다. 아니, 더 좋았다. 그녀가 그렸던 것보다 달이 천천히 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이거, 제 원래 기획서 그대로예요.""네. 원본 남겨 뒀어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38화. 역제안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테 선택권이 없어 보여. 의문형은 선택권을 주는데, 자신 없어 보이고.""차 선임님이라면 뭐라고 반박하실까요?"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1년 동안 들어서 토씨까지 외운 목소리."'청유형은 유저가 부담스러워해요. 의문형은 유저가 거절할 수 있어요. 거절 확률이 있는 문장은 공수 낭비예요.'"민지가 박수를 쳤다. "똑같아요. 소름.""그럼 그 사람은 뭐라고 할 것 같아?""그냥 '네' 하실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서윤은 슬라이드를 봤다. 마지막 장. 문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결혼해요. 결혼할래요. 둘 다 빨간 줄이 한 번씩 그어졌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그러니까 더 어려운 거야. 뭘 해도 '네' 할 사람한테 뭘 물어야 할지."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화면을 보더니 귀가 빨개졌다. 윤재하였다. 둘이 사귄 지 3주째였다. 컵에 쓰는 글씨는 매일 한 줄씩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선배, 제 친구가요, 아니 제가요." 민지가 휴대폰을 엎었다. "재하 씨한테 청유형이랑 의문형 중에 뭐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어떤 선배 얘기라고 하고.""……민지야.""이름은 안 말했어요! 근데 재하 씨가 그러더라고요. 개발자는 의문형을 좋아한대요. 반환값이 있으니까.""반환값.""네. '네'라는 반환값이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 회사 개발자들은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37화. 거사 준비위원회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큰이모: 기각]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거기서 멈췄다.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냅킨이 또 하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36화. 구겨진 냅킨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35화. 친구 얘기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

Higit pang Kabanata
Galugarin at basahin ang magagandang nobela
Libreng basahin ang magagandang nobela sa GoodNovel app. I-download ang mga librong gusto mo at basahin kahit saan at anumang oras.
Libreng basahin ang mga aklat sa app
I-scan ang code para mabasa sa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