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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여름휴가 기획서

Author: Jino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0-15 08:41:55

여름휴가 기획서 제1조. 목적지는 양측 합의로 정한다.

(기획서는 두 부. 작성자 둘. 목적지 둘. 합의는 없었다. 큰이모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7월 셋째 주 토요일, 서윤의 오피스텔 거실.

테이블 위에 A4가 두 부 놓여 있었다. 둘 다 회사 기획서 양식이었다. 서윤이 만든 양식을 이제 둘 다 썼다.

왼쪽은 서윤의 것. 문서명 '여름휴가 기획서 v1.0'. 목적지 제주. 4박 5일. 일정표가 30분 단위로 짜여 있었다. 오름 두 개, 해변 세 곳, 카페 여섯 곳, 시장 하나. 이동 동선에 형광펜.

오른쪽은 이현의 것. 문서명 '여름휴가 기획서 v1.0'. 목적지 강원도 산속 펜션. 3박 4일. 일정표에는 한 줄뿐이었다.

'일정: 없음.'

"이게 기획서예요?" 서윤이 종이를 들어 올렸다.

"네."

"일정이 없잖아요."

"그게 기획이에요. 쉬는 거요."

"쉬는 것도 기획이 있어야죠. 몇 시에 일어나고, 뭘 먹고, 어디서 쉬는지."

"그건 가서 정하면 돼요."

"가서 정하면 결국 아무것도 안 해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목표예요."

서윤은 이현의 기획서를 뒤집었다. 뒷면도 비어 있었다. 그녀는 빨간 볼펜을 들었다. 이현이 재빨리 기획서를 도로 가져갔다.

"검토 요청 안 했어요."

"제 기획서는 검토하시려던 거 아니에요?"

이현이 서윤의 제주 기획서를 들여다봤다. 30분 단위 일정표. 그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첫날 오후 두 시 오름, 세 시 반 해변, 다섯 시 카페, 여섯 시 반 시장. 이동 시간이 비현실적이에요. 렌터카로 오름에서 해변까지만 사십 분이에요."

"빠르게 가면 돼요."

"휴가 때 빠르게 가면 그건 출장이에요."

"차이현 씨 기획은 그냥 잠자기예요."

"차이현 씨요?" 이현이 서윤을 봤다. "성 붙었어요."

서윤은 입을 다물었다. 싸울 때는 성이 자꾸 돌아왔다. 설 이후로 다섯 달, 호두과자 줄에서 뺀 성이 회의실과 휴가 기획서 앞에서만 슬그머니 되살아났다.

"……이현 씨 기획은 잠자기예요."

"고치셔도 늦었어요. 들었어요."

씨름은 한 시간 동안 이어졌다. 서윤은 제주의 장점을 슬라이드 없이 여섯 개 댔고, 이현은 강원도의 장점을 세 개 댔다. 세 개가 다 '조용함'의 다른 표현이었다. 부칙 제1항에 따라 그날 안에 끝내야 했지만 파라솔까지 갈 기운이 없었다. 둘은 거실 바닥에 나란히 드러누웠다.

"타협안 없어요?" 서윤이 천장을 보며 물었다.

"제주 산속은요?"

"그런 데 있어요?"

"찾으면 있겠죠."

그때 두 사람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가족 단톡방이었다.

[큰이모: 복실이 새끼 낳았다]

[큰이모: 셋]

사진이 따라왔다. 마루 밑 상자 안에 복실이가 누워 있었다. 배 옆에 털뭉치 셋. 눈도 못 뜬 채 꼬물거렸다.

[둘째 이모: 하나는 복실이 닮았고 둘은 옆집 누렁이 닮았다]

[막내 이모: 이름 공모한다]

[할머니: 나도 보러 간다]

[큰이모: 서윤이랑 이현이 여름휴가 언제냐]

[큰이모: 합의서 제1조 확대 해석. 명절 말고 휴가도 솔뫼리로 와라]

서윤과 이현은 바닥에 누운 채 서로를 봤다. 그리고 각자의 기획서를 봤다. 제주. 강원도.

"……이것도 합의로 정해야 돼요?"

"큰이모님 해석은 반박 불가예요. 고추장 지장 찍었잖아요."

서윤은 제주 기획서를 반으로 접었다. 이현도 강원도 기획서를 반으로 접었다. 둘 다 반듯하게.

솔뫼리의 여름은 매미 소리로 시작했다.

대문을 열자 복실이가 나왔다. 배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현의 바짓단을 물고 마루 밑으로 끌고 갔다. 새끼들을 보여 주려는 거였다. 꼬리가 마루 기둥을 탁탁 쳤다. 자랑하는 얼굴이었다. 이현은 마루 앞에 쭈그려 앉았다. 상자 안의 털뭉치 셋이 이제 눈을 뜨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상자를 기어 나왔다. 제일 작은 놈이었다. 비틀거리며 이현의 운동화까지 오더니, 운동화 끈을 베고 잠들었다.

"……움직이면 안 되겠네요." 이현이 속삭였다.

"평생 거기 있을 거예요?"

"깰 때까지요."

그는 그대로 삼십 분을 앉아 있었다. 서윤은 그 옆에서 수박을 먹었다. 치과 대기실의 사십 분이 떠올랐다. 이 사람은 기다리는 자세가 늘 똑같았다. 움직이지 않고, 대상만 보고.

저녁상에서 이름 공모 결과가 발표됐다. 큰이모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퀴즈 때의 자세였다.

"첫째는 복실이 닮았으니까 복돌이. 둘째는 누렁이 닮았으니까 누리."

"셋째는요?" 서윤이 물었다. 이현 운동화에서 잠든 그 제일 작은 놈이었다.

"셋째는." 큰이모가 이현을 봤다. "부칙."

"……네?"

"제일 늦게 나와서 붙은 거니까. 너네 계약서에도 그런 거 있다며. 끝에 붙는 거."

이현이 밥을 삼키다 사레가 들렸다. 서윤이 등을 두드렸다. 막내 이모가 '부칙아'를 불러 봤다. 마루 밑에서 작은 소리로 끙, 하는 대답이 났다. 셋째는 그렇게 부칙이 됐다.

다음 날 오전에는 계곡에 갔다. 이모 셋이 앞장섰다. 큰이모는 돗자리를, 둘째 이모는 수박을, 막내 이모는 양산을 들었다. 서윤과 이현은 아이스박스를 하나씩 들고 뒤따랐다. 제주 기획서의 오름보다 가팔랐다.

계곡물은 차가웠다. 서윤이 발을 담그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이현은 발을 담그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대신 표정이 일자가 됐다. 콩송편 먹을 때의 얼굴이었다.

"차가우면 차갑다고 해요."

"안 차가워요."

"얼굴이 일자예요."

"원래 일자예요."

둘째 이모가 바위 위에서 수박을 자르며 말했다. "더 반듯한 일자다. 관찰 결과."

막내 이모는 양산 아래에서 부채질을 하며 둘을 구경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물었다.

"그래서 너네, 제5조는 준비하고 있냐?"

서윤의 발이 물속에서 미끄러졌다. 이현이 팔을 잡아 줬다. 반사적으로. 그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1년 뒤 추석이면 두 달 남았다." 막내 이모가 부채를 접었다. "냅킨이든 뭐든. 기간 없이. 까먹은 거 아니지?"

"까먹을 리가요." 서윤이 말했다. "이모가 달력 뒷면에 제일 크게 쓰셨잖아요."

"그래서 누가 쓰는데."

서윤과 이현이 서로를 봤다. 둘 다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대답을 상대에게 들키면 안 되는 얼굴들이었다.

둘째 이모가 수박 한 조각을 서윤에게 건네며 조용히 말했다. "둘 다 눈을 피하네. 관찰 결과."

다음 날 할머니가 청매골에서 오셨다. 분홍 보자기에 쌀가루와 콩 소를 싸 들고.

"추석 연습이다. 송편."

"할머니, 지금 7월이에요."

"연습은 미리 하는 거다. 이놈한테 배웠다." 할머니가 이현을 가리켰다. "공수 미리 잡는다며."

마루에 반죽이 펼쳐졌다. 할머니와 막내 이모가 콩송편을 빚었다. 둘은 설부터 동맹이었다. 서윤도 옆에 앉아 반죽을 떼었다. 할머니가 서윤 손을 잡고 모양을 가르쳐 줬다. 손끝으로 오므리는 법. 주름을 반듯하게 잡는 법.

"니는 손힘이 좋다. 반죽을 잘 치댄다."

"둘째 이모도 그러셨어요."

"맞는 말은 다 같이 한다."

서윤은 콩송편 열두 개를 빚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부엌에 간 사이, 주머니에서 작은 비닐봉지를 꺼냈다. 아침에 몰래 볶은 깨였다. 설탕에 버무린 것.

반죽 하나를 떼어 깨를 넣었다. 오므렸다. 콩송편과 똑같은 모양으로. 다만 끝을 아주 조금 비틀어 표시를 했다. 다른 사람은 모를 만큼만.

찜기에서 송편이 나왔다. 할머니가 접시에 담아 마루에 내놓았다. 이현이 접시 앞에서 멈췄다. 콩송편만 가득한 접시. 그는 늘 그렇듯 표정 없이 하나를 집으려다, 끝이 살짝 비틀린 하나를 봤다.

그걸 집었다. 한 입 베어 물었다. 씹는 속도가 느려졌다.

"……깨네요."

"뭐가요?" 서윤은 모른 척했다.

"콩송편 사이에 깨송편이 하나 있어요."

"실수로 들어갔나 봐요."

"끝이 비틀렸어요. 표시하신 거죠."

"몰라요."

이현은 나머지 반쪽을 먹었다. 천천히. 이 사람은 콩송편을 먹을 때 얼굴이 일자가 됐다. 깨송편을 먹을 때는 일자가 아니었다.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서윤은 그걸 봤다. 할머니도 봤다. 막내 이모도 봤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 할머니가 콩송편 하나를 집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추석엔 깨도 좀 사 놔야겠다. 한 되만." 막내 이모가 콩 동맹을 배신당한 얼굴로 할머니를 봤다. 할머니는 모른 척 송편을 씹었다.

그날 밤 서윤은 마루에 누워 부칙을 배에 올려놓고 있었다. 이현은 마당 평상에 아빠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막걸리 한 병이 둘 사이에 놓였다. 모기향 연기가 가늘게 올라갔다.

아빠와 이현은 한참 말이 없었다. 둘 다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서윤은 눈을 감고 매미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게. 드물게, 긴 문장이었다.

"자네. 추석에 할 말 있지?"

서윤의 눈이 번쩍 떠졌다.

평상에서 이현이 막걸리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배 위의 부칙이 깼다. 그리고 마루가 떠나가라 짖었다. 태어나서 처음 짖는 소리였다. 마루 밑에서 복실이가 따라 짖었고, 복돌이와 누리도 짖었다. 작은방에서 큰이모가 "왜 이렇게 시끄러워!" 하고 소리쳤다.

개 네 마리가 조용해졌을 때, 평상의 대화는 이미 끝나 있었다. 아빠가 이현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두 번. 서윤은 그 소리를 알았다. 설에 운전석 창틀을 두드리던 소리였다. 아빠식 포옹. 그리고 아빠는 대답이 마음에 들 때만 그걸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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