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솔뫼리 부속 합의서 제3조. 경조사는 둘이 같이 간다. 하나만 오면 둘째가 반드시 물어본다.
(첫 적용 사례. 신랑은 치과 원장. 신부는 그 치과 간호사. 주선자는 본인 주장에 따르면 막내 이모.)
예식장 입구에 막내 이모가 서 있었다.
연분홍 투피스에 진주 목걸이. 머리는 아침에 미용실에서 했다고 했다. 신랑 어머니보다 화려했다. 그리고 가슴에 명찰을 달고 있었다. 직접 코팅한 명찰이었다.
'주선자'.
"이모, 그거 누가 달라고 했어요?"
"내가 달았다. 내가 주선자니까."
"이모가 주선한 건 저랑 원장님이잖아요."
"그래서 원장이 대기실에서 간호사를 봤잖아. 너 스케일링 받는 동안.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내가 주선한 거지."
옆에서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과관계는 성립하네요."
"편들지 마요."
"사실관계예요."
막내 이모가 이현의 팔을 톡 쳤다. "역시 차 서방은 말이 통해."
둘째 이모도 와 있었다. 막내 이모의 운전기사 자격이었다. 솔뫼리에서 올라오는 세 시간 동안 막내 이모의 축사 연습을 들었다고 했다. 둘째 이모의 얼굴이 조금 지쳐 보였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반짝였다. 관찰형의 눈이었다.
"둘이 옷 색 맞췄네." 둘째 이모가 말했다.
서윤은 자기 원피스를 내려다봤다. 남색. 이현의 넥타이를 봤다. 남색.
"안 맞췄어요."
"그럼 더 무섭네."
하객석은 원형 테이블이었다. 막내 이모는 신랑 측 앞쪽 테이블로 곧장 걸어갔다. 테이블 위에 이름표가 놓여 있었다. 네 장. 막내 이모, 둘째 이모, 정서윤, 차이현. 그리고 테이블 한가운데 작은 팻말.
'주선자석'.
"이것도 이모가 만들었어요?"
"이건 원장이 만들었다." 막내 이모가 턱을 들었다. "내가 부탁은 했지만."
식이 시작되기 전, 신랑이 테이블로 인사를 왔다. 백승우 원장이었다. 턱시도를 입으니 치과에서보다 훨씬 긴장해 보였다. 서윤을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정서윤 씨. 이 시린 건 괜찮으세요?"
"네, 덕분에요."
"그리고……." 원장이 이현을 봤다. 이현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원장이 잠깐 기억을 더듬더니 손뼉을 쳤다. "대기실! 사십 분!"
"……네."
"그날 진짜 인상 깊었어요. 따뜻한 라떼 들고 사십 분을 기다리셨잖아요. 식으니까 나가서 새로 사 오시고. 잡지도 안 보시고. 진료실 문만 보셨어요." 원장이 웃었다. "간호사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저런 사람 처음 본다고. 그 얘기를 하다가 저희가 처음으로 밥을 먹었어요."
서윤은 이현을 봤다. 이현은 원장의 나비넥타이만 보고 있었다. 귀가 빨갰다.
"그러니까 두 분이 저희 주선자예요. 진짜로요."
"들었지?" 막내 이모가 둘째 이모 옆구리를 찔렀다. "진짜로래."
"그럼 주선자는 이 둘이지, 니가 아니잖아." 둘째 이모가 말했다.
"이 둘은 내가 주선했으니까 결국 나지."
"주선이 성공한 적이 없잖아. 둘 다."
"둘 다 결혼하면 성공이지!"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둘 다 결혼하면. 서윤은 물컵을 들었다. 이현은 포크를 반듯하게 정렬했다. 이미 반듯한 포크를.
식은 짧고 따뜻했다. 신부 유다정은 단발머리에 웃음소리가 큰 사람이었다. 입장할 때 하객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주선자석을 지나갈 때는 서윤에게 윙크를 했다.
축사 순서에 막내 이모가 일어났다. 아무도 부탁하지 않았다고 둘째 이모가 속삭였다. 막내 이모는 준비한 종이를 꺼냈다. 세 장이었다.
"신랑 백승우 군은 제가 개원 화분을 보낸 사람으로서……."
축사는 칠 분이었다. 그중 사 분이 서윤과 이현 얘기였다. 추석, 식탁, 치과 대기실, 설, 고추장. 냅킨 얘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어떤 계약'이라고 했다. 하객들은 무슨 소린지 몰랐다. 신랑 신부는 알았다. 둘 다 웃다가 울었다.
그리고 부케 순서였다.
사회자가 말했다. "신부님이 부케를 받을 분을 미리 정하셨다고 합니다. 앞으로 나와 주세요. 정서윤 님!"
서윤은 굳었다. 막내 이모가 등을 밀었다. 둘째 이모가 다른 쪽 등을 밀었다. 서윤은 떠밀려 신부 뒤에 섰다. 사진 기사가 카메라를 들었다.
"하나, 둘……."
부케가 날아왔다. 하얀 꽃다발이 천장 조명을 가르며 포물선을 그렸다. 정확히 서윤을 향해.
그리고 서윤의 몸이 움직였다. 5년 동안 회의실에서 날아오는 반박을 피하던 반사신경이었다. 날아오는 건 일단 피하고 본다. 그녀는 한 발 옆으로 비켜섰다.
부케가 그녀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뒤에서, 누군가의 두 손에 떨어졌다.
반듯하게. 받은 자세 그대로. 꽃이 한 송이도 흐트러지지 않게.
이현이었다. 서윤이 떠밀려 나갈 때 따라 나와 뒤에 서 있던.
식장이 뒤집어졌다. 하객들이 환호했다. 신부가 뒤돌아보고 박수를 쳤다. 신랑은 웃다가 나비넥타이가 풀렸다. 막내 이모가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자가 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
둘째 이모가 팔짱을 끼고 대답했다. 관찰 결과를 발표하듯이.
"먼저 하겠다는 거지."
사진 기사가 셔터를 연달아 눌렀다. 부케를 든 이현과, 한 발 비켜선 채 입을 벌린 서윤. 사진 속에서 이현은 부케를 서윤 쪽으로 내밀고 있었다. 서윤은 그걸 받지도 못하고 피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왜 피해요." 이현이 부케를 든 채 작게 물었다.
"반사신경이에요. 날아오는 건 일단 피하고 봐요. 회의 때문에."
"회의에서 제 반박은 안 피했잖아요."
"그건 날아오는 게 아니라 들이받는 거고요."
"그럼 이건요?" 이현이 부케를 조금 더 내밀었다.
서윤은 부케를 받았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꽃이 생각보다 무거웠다. 하객석에서 박수가 한 번 더 터졌다.
피로연은 뷔페였다. 서윤이 부케를 테이블에 올려놓자 막내 이모가 꽃을 한 송이씩 세기 시작했다. 스물세 송이라고 했다.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신부가 한복으로 갈아입고 테이블을 돌다가 주선자석에 멈췄다. 유다정은 서윤의 손을 덥석 잡았다.
"부케 피하신 거 진짜 웃겼어요. 평생 얘기할 거예요."
"……죄송해요. 반사신경이라서."
"아니에요. 더 좋았어요. 받을 사람이 받았잖아요." 유다정이 이현을 힐끗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날 대기실에서요. 저 접수대에 있었거든요. 저분이 라떼를 계속 손으로 감싸고 계셨어요. 식을까 봐. 사십 분 동안. 원장님이 진료실 창으로 그걸 보시고 저한테 물으셨어요. '저 사람 여자친구 기다리는 거 맞지?' 그래서 제가 그랬죠. '저건 여자친구 기다리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 기다리는 거예요.'"
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날 진료실을 나왔을 때, 라떼는 따뜻했다. 한 번 식어서 새로 사 왔다는 건 들었다. 그 컵마저 식지 않게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는 건 몰랐다.
"그때 서윤 씨는요?" 유다정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여자친구였어요,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서윤은 이현 쪽을 봤다. 이현은 막내 이모의 부케 꽃 세기를 돕고 있었다. 모르는 척. 귀만 빨갛게.
"……반반이요. 그때는요."
"지금은요?"
"지금은 좋아하는 사람이요." 서윤이 말했다. 작게. 그런데 테이블이 좁았다. 이현의 손이 꽃 한 송이 위에서 멈췄다. 막내 이모가 열둘까지 세다가 멈췄다.
유다정이 박수를 한 번 치고 다음 테이블로 갔다.
서윤이 음료 잔을 들고 있을 때였다. 둘째 이모가 그녀 손을 한참 봤다. 잔을 쥔 손가락. 정확히는 왼손 넷째 손가락.
"서윤아, 너 반지 안 끼지?"
"안 껴요. 불편해서요."
"그렇지." 둘째 이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눈으로 더 오래 봤다. 추석 때 이현의 키를 처음 보고 '180'이라고 맞힌 눈이었다. 1센티미터도 틀리지 않았다고 이현이 말한 적이 있다.
잠시 뒤 서윤이 접시를 채우러 간 사이, 둘째 이모가 이현 옆으로 의자를 붙였다. 서윤은 샐러드 코너에서 돌아오다가 그 장면을 봤다. 둘째 이모가 이현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하게. 회의에서 공수를 받아 적을 때처럼.
서윤이 테이블에 거의 다 왔을 때, 둘째 이모의 마지막 말만 들렸다.
"……11이다."
"……네?" 이현이 되물었다.
"11. 틀림없다."
서윤이 접시를 내려놓았다. 둘째 이모와 이현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너무 동시였다.
"11이 뭐예요?"
"……접시요." 이현이 말했다. "뷔페 접시. 이모님이 오늘 열한 번째 접시시래요."
"이모 아직 두 번째잖아요."
"관찰 결과다." 둘째 이모가 태연하게 말했다. "이 사람이 먹을 접시 수를 예측한 거지."
이현은 접시를 한 번밖에 안 채웠다. 서윤은 그걸 알았다. 이현도 서윤이 안다는 걸 알았다. 둘째 이모만 모른 척했다.
막내 이모는 옆에서 부케 꽃을 다시 세고 있었다. 이번엔 스물네 송이라고 했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서윤은 부케를 무릎에 올려놓고 창밖을 봤다. 11. 열한 번째 접시는 거짓말이었다. 이현의 거짓말은 늘 서툴렀다. 그렇다면 11은 뭘까.
기획자의 머리가 돌기 시작했다. 11. 이현의 생일은 11월이었다. 워크숍 첫날. 작년에는 그녀가 몰라서 '까치 일정 밀려요'라고 보냈다. 올해는 알았다. 그렇다면 둘째 이모가 이현에게 생일 계획을 물었나. 아니, 이모가 왜 이현한테 이현 생일을.
옆자리에서 이현은 부케 포장 리본을 반듯하게 다시 묶고 있었다. 한 번도 서윤 쪽을 보지 않았다. 너무 열심히 리본만 보고 있었다.
그날 밤 서윤은 집에 돌아와 벽 달력을 넘겼다. 11월. 워크숍 첫날 칸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그 칸을 오래 봤다.
엉뚱한 곳을 보고 있다는 걸, 그녀는 아직 몰랐다.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저는 쓰레기통이요.""네?""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무슨 부칙이요.""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그건 인정해요.""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청혼 기획서 v1.0입니다."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다."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멈췄다."……뭘요?""보름달 차오르는 연출이요. 유저가 편지를 쓰면 달이 한 칸씩 차오르는 거."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1년 전 이 회의실에서 서윤은 그 연출이 이벤트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현은 연휴 전에 못 넣는다고 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팀장이 간소화 버전으로 정리했다. 달은 끝내 차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 계약서가 생겼다."시즌2 기획서엔 그 연출 없었잖아요. 제가 뺐어요. 작년에 안 된다고 하셔서.""그래서 제가 넣었어요. 따로.""언제요?""작년 추석 끝나고부터요. 틈틈이.""1년 동안요?""공수가 많이 들었어요. 1년 걸렸어요." 이현이 화면을 넘겼다. 테스트 영상이었다. 유저가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까만 하늘의 달이 가장자리부터 차올랐다. 은은하게, 천천히. 마지막 편지가 들어가자 보름달이 꽉 찼다. 달 속에서 토끼가 고개를 들었다.회의실이 조용했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 잔을 든 채 굳었다. 옆에서 민지가 조용히 그의 컵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아 줬다.서윤은 화면을 봤다. 1년 전 그녀가 사흘 밤을 새워 그린 연출이었다. 그대로였다. 아니, 더 좋았다. 그녀가 그렸던 것보다 달이 천천히 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이거, 제 원래 기획서 그대로예요.""네. 원본 남겨 뒀어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테 선택권이 없어 보여. 의문형은 선택권을 주는데, 자신 없어 보이고.""차 선임님이라면 뭐라고 반박하실까요?"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1년 동안 들어서 토씨까지 외운 목소리."'청유형은 유저가 부담스러워해요. 의문형은 유저가 거절할 수 있어요. 거절 확률이 있는 문장은 공수 낭비예요.'"민지가 박수를 쳤다. "똑같아요. 소름.""그럼 그 사람은 뭐라고 할 것 같아?""그냥 '네' 하실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서윤은 슬라이드를 봤다. 마지막 장. 문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결혼해요. 결혼할래요. 둘 다 빨간 줄이 한 번씩 그어졌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그러니까 더 어려운 거야. 뭘 해도 '네' 할 사람한테 뭘 물어야 할지."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화면을 보더니 귀가 빨개졌다. 윤재하였다. 둘이 사귄 지 3주째였다. 컵에 쓰는 글씨는 매일 한 줄씩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선배, 제 친구가요, 아니 제가요." 민지가 휴대폰을 엎었다. "재하 씨한테 청유형이랑 의문형 중에 뭐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어떤 선배 얘기라고 하고.""……민지야.""이름은 안 말했어요! 근데 재하 씨가 그러더라고요. 개발자는 의문형을 좋아한대요. 반환값이 있으니까.""반환값.""네. '네'라는 반환값이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 회사 개발자들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큰이모: 기각]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거기서 멈췄다.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냅킨이 또 하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