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제3조. 스킨십은 손잡기까지만. 그것도 필요할 때만.
(을의 할머니 댁에서는 '필요할 때'가 하루 종일이었다.)
연휴 둘째 날 아침, 솔뫼리 대문 앞은 또 붐볐다.
엄마는 보자기 두 개를 들고 나왔다. 똑같은 남색 바탕에 흰 꽃무늬.
"하나는 할머님 드리고, 하나는 이현 씨 서울 가서 먹어. 동그랑땡이랑 깨송편."
"어머님,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받아. 서윤이 거랑 똑같이 쌌어. 둘이 나눠 먹으라고."
서윤은 보자기를 받아 드는 이현의 옆얼굴을 봤다. 또 그 얼굴이었다. 회의실에서 반박할 말을 고를 때처럼 조용한데, 어딘가 조금 풀린 얼굴.
막내 이모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치과의사 총각은 아직 대기 중이다."
"이모, 대기를 왜 시켜."
"혹시 모르잖니."
복실이가 이현의 바짓단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아빠가 복실이를 안아 들었다.
"사위, 설에 또 와라."
"아빠!"
아빠는 대답 대신 복실이의 앞발을 잡고 흔들었다. 바이바이. 이현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차가 마을을 빠져나가자 서윤은 조수석에 등을 붙였다.
"우리 아빠가 사위라고 한 거, 못 들은 걸로 해요."
"두 번 들었는데요."
"그러니까 두 번 다 못 들은 걸로요."
"노력해 볼게요."
청매골 할머니 댁까지는 한 시간 반이었다. 가는 동안 서윤은 태블릿에 새 목록을 만들었다. 제목은 '을의 가족 대응 매뉴얼'.
"할머니 좋아하시는 거."
"화투요. 근데 치지 마세요. 할머니는 확률 계산해도 이기세요."
"약점은요?"
"없어요."
"차이현 씨 어머님은요?"
이현이 잠깐 생각했다. "약사 선이 무산돼서 좀 서운하실 거예요. 근데 금방 풀리세요. 서윤 씨가 말 걸면."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어제 이모님 셋 다 넘어오셨잖아요. 한 분은 반쯤."
그건 이현 덕분이었다. 서윤은 반박하려다 빨대를 물었다. 컵은 비어 있었다.
할머니는 대문 밖 골목까지 나와 계셨다. 키가 서윤 어깨쯤 되는 작은 분이었다. 서윤을 보자마자 할머니가 손을 덥석 잡았다.
"아이고, 우리 손주며느리."
"안녕하세요, 할머니. 정서윤입니다."
"알아. 사진 봤어. 사진보다 곱네. 사진은 저놈이 못 찍어서 그래."
이현이 뒤에서 헛기침을 했다. 서윤은 웃음을 참느라 볼이 떨렸다.
이현의 어머니는 마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첫마디가 이랬다.
"약사 아가씨한테는 내가 사과했다."
"엄마."
"괜찮아. 그 아가씨도 남자친구 있더라." 어머니가 서윤을 보고 웃었다. "다들 거짓말을 하고 사네."
서윤의 등이 뻣뻣해졌다. 이현이 서윤의 손을 잡았다. 자연스럽게, 계단 하나 오르는 것처럼.
제3조. 필요할 때만. 지금은 필요했다. 명백히.
"그래서, 둘이 어떻게 만났어?" 어머니가 물었다.
"입사 동기예요." 서윤이 말했다.
"그건 알고. 어떻게 사귀게 됐냐고. 얘가 말을 안 해 줘."
서윤은 이현을 봤다. 이현은 서윤을 봤다. 차 안에서 맞춘 설정에는 '어떻게'가 없었다.
"……회의에서 자주 싸웠어요." 서윤이 입을 열었다. 거짓말을 지어낼 시간이 없어서, 사실부터 꺼냈다. "5년 동안요. 제가 기획을 올리면 이현 씨가 안 된다고 하고, 제가 된다고 하고."
"어머, 싸웠어?"
"많이요. 사내에 저희 싸움 구경하는 모임도 있대요."
어머니가 이현을 봤다. "니가 여자랑 싸워? 니가?"
"일이니까요." 이현이 말했다.
"얘가 학교 다닐 때 여자애가 말만 걸어도 도망가던 애야. 근데 싸웠다고?" 어머니가 손뼉을 쳤다. "그럼 됐다. 그 정도면 니가 엄청 좋아한 거다."
서윤은 웃었다. 어머니식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이현은 웃지 않았다. 대신 잡고 있던 손에 아주 조금 힘을 줬다.
점심은 할머니의 송편이었다. 접시 가득, 모양이 반달처럼 가지런했다.
"내가 빚었다. 먹어 봐라."
서윤은 하나를 집어 반 입 베어 물었다. 입안에서 콩이 씹혔다.
콩송편이었다. 접시 전체가.
"우리 할머니는 콩송편만 하세요." 이현이 조용히 말했다. "평생."
서윤은 웃으며 씹었다. 씹고 또 씹었다. 할머니가 기대에 찬 눈으로 보고 계셨다.
"맛있어요, 할머니."
"그치? 하나 더 먹어라."
접시에서 송편 세 개가 서윤 앞으로 넘어왔다. 서윤의 미소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기획 발표 5년 차의 내공이었다.
할머니가 식혜를 가지러 부엌에 간 사이, 이현이 서윤 앞의 송편 세 개를 제 접시로 옮겼다. 그리고 하나씩, 빠르게 먹었다.
"……뭐 해요?"
"도와드리는 거죠."
"콩 싫다고 제가 말했어요?"
"어제 이모님 퀴즈 정답이 저였잖아요."
할머니가 식혜를 들고 돌아와 이현의 빈 접시를 봤다.
"니가 웬일이냐. 어릴 때 콩 다 파내고 먹던 놈이."
서윤이 이현을 봤다. 이현은 식혜를 마셨다. 귀가 조금 빨갰다.
"……차이현 씨도 콩 싫어해요?"
"어른이 되면 입맛이 변해요."
"오늘 아침에 변했어요?"
"방금이요."
오후에는 할머니가 휴대폰을 들고 서윤을 불렀다.
"손주며느리야, 이거 좀 봐 줘라. 사진을 보내고 싶은데 자꾸 딴 데로 가."
화면은 글씨가 개미만 했다. 서윤은 설정을 열어 글씨를 제일 크게 키웠다. 할머니가 안경을 벗고 화면을 봤다.
"오메, 보인다."
"이렇게 누르시면 사진 보내져요. 여기 누르시면 이현 씨한테 바로 가고요."
"요걸 몰라서 칠 년을 못 보냈네."
"뭘요?"
"증손주 보고 죽겠다고." 할머니가 화면을 톡톡 눌렀다. "이제 매일 보낼 수 있겠다."
마루 끝에서 이현이 뒤를 돌아봤다. 서윤은 모른 척 할머니 휴대폰에 새 연락처를 저장했다. 이름 칸에 할머니가 불러 주는 대로 입력했다.
'손주며느리'.
"시험 삼아 하나 보내 보세요, 할머니."
할머니가 검지 하나로 화면을 눌렀다. 한참 걸렸다. 마루 끝에 앉은 이현의 휴대폰이 드르륵 울렸다.
이현이 화면을 보더니 그대로 굳었다.
"뭐 왔어요?"
그가 화면을 돌려 보여 줬다. 방금 할머니가 찍은 사진이었다. 초점은 흔들렸고, 서윤의 얼굴 반과 이현의 뒤통수가 찍혀 있었다.
[할머니: 손주며느리 곱다]
"또 그 말이네요."
"할머니 문장이 그거 하나예요."
"저 이제 매일 받겠네요, 그 문자."
"제가 받죠. 서윤 씨는 연락처가 없으시니까."
할머니가 서윤의 소매를 당겼다. "니 번호도 넣어라. 너한테도 보내게."
서윤은 제 번호를 입력했다. 이현이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계약이 끝나면 이 번호로 무슨 문자가 올지, 서윤은 그때 생각하지 못했다.
해가 기울 무렵 할머니가 말했다. "둘이 정자까지 걷다 와라. 동네 사람들 구경 좀 하게."
그래서 둘은 마을 길을 걸었다. 손을 잡고. 할머니가 대문 앞에서 지켜보고 계셨다.
모퉁이를 돌았다. 대문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안 보이시는데요." 서윤이 말했다.
"저 앞 느티나무 지나면 다시 보이세요. 옆집 담 너머로."
"그 짧은 사이에 놨다가 다시 잡으면 이상하니까요?"
"네. 공수가 더 들어요."
서윤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현도 놓지 않았다. 느티나무를 지났고, 옆집 담이 나왔고,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 구간이 한 번 더 있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자에는 동네 어르신 두 분이 앉아 계셨다. 한 분이 이현을 알아봤다.
"차씨네 손주 아니냐. 서울 간 놈."
"네, 안녕하세요."
"옆에는 누구여?"
이현이 대답하기 전에 서윤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여자친구예요."
말하고 나서야 알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입으로 그 말을 한 건 처음이었다. 엄마한테 보낸 문자는 글자였고, 이모들 앞에서는 이현이 대답했다.
"아이고, 참하네. 차씨네 할매 좋아서 잠 못 자겠네."
돌아오는 길에 이현이 물었다. "방금 그건 필요했어요?"
"뭐가요."
"여자친구라고 먼저 말한 거."
"……어르신이 물어보셨잖아요. 업무상 필요했죠."
"업무상." 이현이 앞을 보며 되뇌었다. 입꼬리가 일자가 아니었다.
정자에서 돌아오자 할머니가 앨범을 꺼내 놓고 계셨다.
"손주며느리한테 보여 줄라고."
"할머니, 그건 왜……." 이현이 손을 뻗었지만 할머니가 더 빨랐다.
첫 장은 돌 사진이었다. 두 볼이 떡처럼 부푼 아기가 연필을 쥐고 있었다.
"돌잡이 때 연필 잡았다. 공부하라고."
"지금은 키보드 잡아요." 서윤이 말했다.
"그게 그거지."
초등학교 운동회. 중학교 졸업식. 모든 사진에서 이현은 입꼬리가 일자였다. 서윤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 이렇게 생긴 거 맞네요."
"그렇다니까요." 이현이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 할머니가 비닐을 손으로 쓸었다.
"이건 회사 들어갈 때. 회사 사진 하나만 보내라 해서 받은 거다."
입사 연수 단체사진이었다. 강당 앞 계단. 백 명 가까운 신입 사원이 세 줄로 서 있었다.
서윤은 금방 자기를 찾았다. 둘째 줄 맨 오른쪽 끝. 스물셋의 정서윤이 발표 원고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머리가 지금보다 짧았다.
"어, 저 있다."
"그치? 내가 너를 첨부터 알았다니까."
그리고 이현. 맨 뒷줄 왼쪽. 다른 사람들이 전부 카메라를 보고 있는데, 그 혼자만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것 봐요, 차이현 씨 딴짓했네. 사진 찍는데 어디 봐요."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앨범을 덮으려는 손이 한 박자 늦었다.
서윤은 손가락으로 사진 위를 따라갔다. 뒷줄 왼쪽의 시선에서, 사선으로. 사람들 머리 위를 건너, 둘째 줄 맨 오른쪽 끝까지.
손가락이 멈춘 곳에는, 원고를 안은 스물세 살의 자기가 있었다.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저는 쓰레기통이요.""네?""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무슨 부칙이요.""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그건 인정해요.""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청혼 기획서 v1.0입니다."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다."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멈췄다."……뭘요?""보름달 차오르는 연출이요. 유저가 편지를 쓰면 달이 한 칸씩 차오르는 거."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1년 전 이 회의실에서 서윤은 그 연출이 이벤트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현은 연휴 전에 못 넣는다고 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팀장이 간소화 버전으로 정리했다. 달은 끝내 차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 계약서가 생겼다."시즌2 기획서엔 그 연출 없었잖아요. 제가 뺐어요. 작년에 안 된다고 하셔서.""그래서 제가 넣었어요. 따로.""언제요?""작년 추석 끝나고부터요. 틈틈이.""1년 동안요?""공수가 많이 들었어요. 1년 걸렸어요." 이현이 화면을 넘겼다. 테스트 영상이었다. 유저가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까만 하늘의 달이 가장자리부터 차올랐다. 은은하게, 천천히. 마지막 편지가 들어가자 보름달이 꽉 찼다. 달 속에서 토끼가 고개를 들었다.회의실이 조용했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 잔을 든 채 굳었다. 옆에서 민지가 조용히 그의 컵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아 줬다.서윤은 화면을 봤다. 1년 전 그녀가 사흘 밤을 새워 그린 연출이었다. 그대로였다. 아니, 더 좋았다. 그녀가 그렸던 것보다 달이 천천히 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이거, 제 원래 기획서 그대로예요.""네. 원본 남겨 뒀어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테 선택권이 없어 보여. 의문형은 선택권을 주는데, 자신 없어 보이고.""차 선임님이라면 뭐라고 반박하실까요?"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1년 동안 들어서 토씨까지 외운 목소리."'청유형은 유저가 부담스러워해요. 의문형은 유저가 거절할 수 있어요. 거절 확률이 있는 문장은 공수 낭비예요.'"민지가 박수를 쳤다. "똑같아요. 소름.""그럼 그 사람은 뭐라고 할 것 같아?""그냥 '네' 하실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서윤은 슬라이드를 봤다. 마지막 장. 문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결혼해요. 결혼할래요. 둘 다 빨간 줄이 한 번씩 그어졌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그러니까 더 어려운 거야. 뭘 해도 '네' 할 사람한테 뭘 물어야 할지."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화면을 보더니 귀가 빨개졌다. 윤재하였다. 둘이 사귄 지 3주째였다. 컵에 쓰는 글씨는 매일 한 줄씩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선배, 제 친구가요, 아니 제가요." 민지가 휴대폰을 엎었다. "재하 씨한테 청유형이랑 의문형 중에 뭐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어떤 선배 얘기라고 하고.""……민지야.""이름은 안 말했어요! 근데 재하 씨가 그러더라고요. 개발자는 의문형을 좋아한대요. 반환값이 있으니까.""반환값.""네. '네'라는 반환값이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 회사 개발자들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큰이모: 기각]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거기서 멈췄다.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냅킨이 또 하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