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제5조. 본 계약의 기간을 설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 연장한다.
(냅킨 뒷면. 앞면 글씨가 비쳐서 조항 두 개가 겹쳐 보인다.)
문제는 할머니가 대문 앞에서 한 말이었다.
"설에 둘이 꼭 와라. 떡국은 내가 끓인다."
연휴 마지막 날 아침이었다. 할머니는 서윤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고 놓아주지 않았다. 손등이 따뜻하고 버석했다.
"할머니, 설은 아직 멀었는데요."
"금방 온다. 나이 먹으면 추석 지나고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설이야."
이현의 어머니는 옆에서 보자기를 하나 더 챙겨 주었다. 남색이 아니라 분홍이었다.
"이건 서윤 씨 거. 우리 엄마 콩송편은 빼고 쌌어."
서윤이 놀라 이현을 봤다. 이현은 차 트렁크를 닫고 있었다. 귀가 또 빨갰다.
"어머님이 어떻게……."
"얘가 어젯밤에 나한테 조용히 그러더라. 콩은 빼 달라고." 어머니가 웃었다. "쟤가 나한테 부탁하는 거 처음 봤어."
차가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서윤의 휴대폰이 울렸다. 가족 단톡방이었다.
[엄마: 설에 이현이 차례 지내고 바로 올라오라 그래라]
[큰이모: 설에는 윷놀이다. 준비시켜라]
[둘째 이모: 설에는 한복 입혀 봐야지. 키가 커서 잘 어울리겠다]
[막내 이모: 치과 총각 아직 대기 중]
[아빠: 사위 막걸리]
아빠의 문장은 단어 두 개였다. 서윤은 휴대폰을 뒤집어 무릎에 올렸다.
"저희 쪽도 설 얘기 나왔어요."
"알아요. 할머니한테 문자 왔어요." 이현이 턱으로 거치대의 휴대폰을 가리켰다.
[할머니: 손주며느리 설에 오나]
"……할머니가 벌써 전송을 마스터하셨네요."
"서윤 씨가 가르쳐 드렸잖아요."
그리고 고속도로는 주차장이었다.
한 시간에 십 킬로미터. 서윤은 창밖의 트럭 번호판을 외울 수 있을 지경이 됐다. 오후 두 시에 출발한 차가 저녁 여섯 시에 겨우 첫 휴게소에 들어갔다.
화장실 줄은 삼십 미터였다. 서윤이 줄을 서서 나왔을 때 이현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호두과자 봉지 하나. 손에는 컵 두 개.
"뜨거운 건 제 거, 아이스는 서윤 씨 거."
"휴게소에도 시럽 반만 돼요?"
"해 달라고 하면 돼요. 매직은 없어서 못 적었어요."
서윤은 컵을 받았다. 빨대를 꽂기 전에 컵 옆을 봤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게 조금 허전하다고 느낀 자신이 이상했다.
"호두과자 반 나눠요."
"여섯 개 들었어요. 세 개씩."
"저 네 개요."
"왜요."
"갑이니까요."
이현이 봉지를 서윤 쪽으로 밀었다. "다 드세요. 갑이니까."
그 말투가 너무 순순해서 서윤은 오히려 두 개만 먹었다.
"근데 차이현 씨."
"네."
"콩 빼 달라고 어머님한테 부탁한 거요. 그건 왜 했어요?"
이현은 호두과자 봉지를 접었다. 모서리를 두 번, 반듯하게.
"서윤 씨가 할머니 앞에서 세 개 먹었잖아요. 웃으면서."
"네."
"서울 가서까지 웃으면서 먹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서윤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호두과자를 하나 더 집었다. 세 번째였다. 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차에 오르자 해가 졌다. 라디오에서는 귀경길 정체 소식이 반복됐다. 서윤은 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잠깐만, 이라고 생각했다.
눈을 떴을 때 차 안은 어두웠다. 몸 위에 무언가 덮여 있었다. 이현의 재킷이었다.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회의실에서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냄새였다.
"몇 시예요?"
"열한 시 이십 분이요. 거의 다 왔어요."
"저 얼마나 잤어요?"
"두 시간 반이요. 코는 안 골았어요."
"그걸 왜 말해요."
"걱정하실 것 같아서요."
서윤은 재킷을 개어 뒷좌석으로 넘기려다, 그냥 무릎에 올려 두었다. 열한 시 이십 분. 서윤은 그 숫자를 속으로 다시 셌다.
제1조.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
사십 분 남았다.
"차이현 씨."
"네."
"회사 앞 편의점에 잠깐 세워 줄 수 있어요?"
이현은 대답 대신 깜빡이를 켰다.
편의점 파라솔은 그대로였다. 연휴 마지막 밤이라 거리가 텅 비어 있었다. 서윤은 복숭아 맛 맥주 하나와 라거 하나를 샀다. 이번엔 서윤이 계산했다.
탁. 캔 따는 소리가 두 번.
"그래서." 이현이 말했다. "회의하려고 세우신 거죠."
"안건은 하나예요."
서윤은 지갑에서 냅킨을 꺼내 테이블에 펼쳤다. 나흘 동안 접혔다 펴져서 모서리가 보풀처럼 일어나 있었다.
"원래 계획은 오늘 밤 '성격 차이로 헤어졌다'고 양가에 통보하는 거였어요."
"네."
"근데 우리 엄마는 설에 차례 지내고 올라오라고 했고, 큰이모는 윷놀이를 준비시키래요. 막내 이모는 치과의사를 대기시켜 놨고요."
"저희 할머니는 떡국을 끓이신대요. 어머니는 약사 선이 무산돼서 새 후보를 찾기 시작하셨고요."
"일단 원래 계획대로 해 볼게요." 서윤이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다. "헤어짐 통보문. 연휴 전에 써 놨어요."
"미리 써 놨어요?"
"기획자니까요." 서윤은 헛기침을 하고 읽었다. "'엄마, 우리 성격 차이로 헤어졌어. 서로 좋은 사람 만나기로 했어. 더 묻지 마.'"
이현이 라거를 한 모금 마셨다. "어머님 답장 예상해 볼까요."
"해 봐요."
"'성격 차이가 뭔데. 동그랑땡을 그렇게 잘 뒤집는 애랑 무슨 성격 차이가 나.'"
서윤은 반박하려다 멈췄다. 엄마라면 정확히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물음표 일곱 개와 함께.
"……그리고 아빠는 '사위 왜' 하겠죠."
"두 단어로요."
"저희 할머니는요?" 서윤이 물었다. 그리고 곧바로 고쳤다. "아니, 차이현 씨 할머니요."
이현이 서윤을 봤다. 서윤은 캔을 들어 얼굴을 반쯤 가렸다. 방금 '저희'라고 한 걸 이현이 못 들었기를 바랐다. 그는 들은 얼굴이었다.
"할머니는 아마 '손주며느리 곱다'라고 보내실 거예요. 헤어졌다고 해도."
"그 문장밖에 없으시니까요."
"네. 그래서 더 못 하겠어요."
"지금 헤어지면요?"
"양쪽 다 연말 전에 선 두 번씩. 최소."
"그리고 우리 아빠는 사위를 잃고요."
이현이 캔을 내려놓았다. "그건 좀 마음이 아프네요."
"진지하게 해요."
"진지한데요."
서윤은 빨대가 없어서 캔 입구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생각할 때 버릇이 갈 데가 없었다.
"비용 대비 효과로 보면." 이현이 먼저 말했다. "연장이 싸요. 헤어졌다고 하면 이유를 설명해야 되고, 위로를 받아야 되고, 선을 봐야 되잖아요. 연장하면 설에 한 번 더 가면 끝이에요."
"리스크는요."
"회사요. 제2조. 넉 달이 더 길어지니까."
"그건 관리하면 돼요." 서윤이 휴대폰 시계를 봤다. 열한 시 오십오 분.
"……저 지금 연장 제안하는 거예요."
"알아요."
"받을 거예요?"
"받아야죠. 아버님이 사위를 잃으시면 안 되니까."
서윤은 볼펜을 꺼냈다. 냅킨 앞면에는 자리가 없었다. 조항 네 개와 부칙, 서명 두 개로 꽉 차 있었다. 그녀는 냅킨을 뒤집었다.
앞면 글씨가 거꾸로 비쳐 보였다. 서윤은 그 사이에 적기 시작했다.
제5조. 본 계약의 기간을 설 연휴 마지막 날까지
"자정까지." 이현이 말했다.
"알아요. 쓰려고 했어요."
"저번에도 그러셨는데."
서윤은 '자정까지'를 덧붙였다. 이번엔 번지지 않게 천천히 썼다. 그런데 냅킨이 테이블의 맥주 물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볼펜이 헛돌았다. 글자 하나가 반쯤 끊겼다.
"아, 잠깐만요."
그녀는 볼펜을 흔들었다. 다시 그었다. 안 나왔다.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11:59.
"차이현 씨 볼펜 있어요?"
"차에요."
"가져와요, 빨리."
이현이 뛰어갔다. 서윤은 휴대폰 화면을 봤다. 숫자가 바뀌었다.
00:00.
이현이 볼펜을 들고 돌아왔을 때 서윤은 화면을 들어 보였다.
"지났어요."
"……그러네요."
"지금 계약 없는 거예요. 제1조 만료."
이현이 파라솔 아래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볼펜을 쥔 채였다. 가로등 불빛이 테이블 위의 냅킨을 비췄다. 둘 사이에 아무 조항도 없는 시간이었다.
"그럼 지금은." 이현이 말했다. "계약이랑 상관없는 말을 해도 되는 거네요."
서윤이 그를 봤다. 이현도 서윤을 봤다. 회의실에서 반박하기 직전의 얼굴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서윤 씨, 저는……."
서윤은 그의 손에서 볼펜을 낚아챘다. 그리고 '갑 정서윤'을 휘갈겨 썼다.
"서명했어요. 효력 발생. 차이현 씨도 해요, 빨리."
이현은 한동안 볼펜을 받아 든 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서윤의 서명 옆에, 여전히 반듯한 글씨로 '을 차이현'이라고 썼다. 휴대폰 시계는 00:01이었다.
"아까 하려던 말은요?" 서윤이 물었다. 묻고 싶지 않았는데 입이 먼저 물었다.
"계약 기간 중이라서요." 이현이 볼펜 뚜껑을 닫았다. "설 끝나고 할게요."
"그게 뭐예요."
"제5조 따르는 거예요. 갑이 쓴 조항."
서윤은 냅킨을 접어 지갑에 넣었다. 뒷면에 새 조항이 생겨서 전보다 조금 두꺼워졌다.
오피스텔 앞에서 이현은 트렁크에서 보자기 두 개를 꺼내 주었다. 엄마가 싼 남색 하나, 이현 어머니가 싼 분홍 하나.
"양가 반찬이네요."
"냉장고 자리 있어요?"
"없으면 만들죠."
서윤은 보자기를 양손에 들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차가 떠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돌아보니 이현이 운전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갈 때까지.
서윤은 한 손을 겨우 들어 흔들었다. 보자기가 같이 흔들렸다.
집에 와서 씻고 누운 뒤에도, 서윤은 천장을 보며 그 1분을 몇 번이고 다시 돌렸다.
0시와 0시 1분 사이. 아무 계약도 없던 그 1분 동안, 차이현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저는 쓰레기통이요.""네?""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무슨 부칙이요.""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그건 인정해요.""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청혼 기획서 v1.0입니다."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다."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멈췄다."……뭘요?""보름달 차오르는 연출이요. 유저가 편지를 쓰면 달이 한 칸씩 차오르는 거."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1년 전 이 회의실에서 서윤은 그 연출이 이벤트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현은 연휴 전에 못 넣는다고 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팀장이 간소화 버전으로 정리했다. 달은 끝내 차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 계약서가 생겼다."시즌2 기획서엔 그 연출 없었잖아요. 제가 뺐어요. 작년에 안 된다고 하셔서.""그래서 제가 넣었어요. 따로.""언제요?""작년 추석 끝나고부터요. 틈틈이.""1년 동안요?""공수가 많이 들었어요. 1년 걸렸어요." 이현이 화면을 넘겼다. 테스트 영상이었다. 유저가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까만 하늘의 달이 가장자리부터 차올랐다. 은은하게, 천천히. 마지막 편지가 들어가자 보름달이 꽉 찼다. 달 속에서 토끼가 고개를 들었다.회의실이 조용했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 잔을 든 채 굳었다. 옆에서 민지가 조용히 그의 컵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아 줬다.서윤은 화면을 봤다. 1년 전 그녀가 사흘 밤을 새워 그린 연출이었다. 그대로였다. 아니, 더 좋았다. 그녀가 그렸던 것보다 달이 천천히 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이거, 제 원래 기획서 그대로예요.""네. 원본 남겨 뒀어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테 선택권이 없어 보여. 의문형은 선택권을 주는데, 자신 없어 보이고.""차 선임님이라면 뭐라고 반박하실까요?"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1년 동안 들어서 토씨까지 외운 목소리."'청유형은 유저가 부담스러워해요. 의문형은 유저가 거절할 수 있어요. 거절 확률이 있는 문장은 공수 낭비예요.'"민지가 박수를 쳤다. "똑같아요. 소름.""그럼 그 사람은 뭐라고 할 것 같아?""그냥 '네' 하실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서윤은 슬라이드를 봤다. 마지막 장. 문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결혼해요. 결혼할래요. 둘 다 빨간 줄이 한 번씩 그어졌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그러니까 더 어려운 거야. 뭘 해도 '네' 할 사람한테 뭘 물어야 할지."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화면을 보더니 귀가 빨개졌다. 윤재하였다. 둘이 사귄 지 3주째였다. 컵에 쓰는 글씨는 매일 한 줄씩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선배, 제 친구가요, 아니 제가요." 민지가 휴대폰을 엎었다. "재하 씨한테 청유형이랑 의문형 중에 뭐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어떤 선배 얘기라고 하고.""……민지야.""이름은 안 말했어요! 근데 재하 씨가 그러더라고요. 개발자는 의문형을 좋아한대요. 반환값이 있으니까.""반환값.""네. '네'라는 반환값이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 회사 개발자들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큰이모: 기각]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거기서 멈췄다.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냅킨이 또 하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