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제2조. 사내에선 비밀.
(조항 중에 제일 짧다. 그래서 제일 먼저 구멍이 났다.)
연휴가 끝난 첫 출근 날, 서윤은 엘리베이터에서 거울을 보며 표정을 연습했다.
무표정. 조금 짜증. 차이현을 보면 약간 더 짜증.
5년 동안 저절로 되던 표정이 오늘따라 잘 안 됐다. 입꼬리가 자꾸 제멋대로 움직였다. 서윤은 볼을 두 번 두드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선배, 연휴 잘 보냈어요?" 민지가 의자를 굴려 왔다. "얼굴 탔다. 시골 다녀오셨구나."
"응. 본가."
"치과의사는요? 둘째 날 점심."
"안 봤어."
"오, 왜요?"
"일이 있었어."
"무슨 일이요?"
서윤은 모니터를 켰다. "민지야, 달토끼 결과 보고서 오늘까지지?"
"네에. 말 돌리시는 거죠?"
"보고서 돌리는 거야."
오전 열 시, 달토끼 이벤트 결과 회의가 열렸다. 연휴 동안 편지가 이십만 통 넘게 쌓였다. 반응은 좋았다. 불만 게시판의 1위는 역시 글자 수였다.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 이게 추천 수 1위예요." 서윤이 화면을 가리켰다. "제가 뭐랬어요."
"서버 비용 보고서 보셨어요?"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편지 한 통당 저장 공간이."
"유저는 서버 비용을 안 봐요."
"회사는 봐요."
익숙한 흐름이었다.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마셨다. 서윤은 안심했다. 잘하고 있었다. 제2조, 이상 무.
다만 반박하는 동안 이현의 머그컵이 눈에 들어왔다. 연휴 전과 다른 컵이었다. 하얀 바탕에 작은 달토끼 그림. 이벤트 굿즈 샘플이었다. 그녀가 기획 단계에서 억지로 끼워 넣었던 것. 이현은 그때 "누가 이런 컵을 써요"라고 했다.
서윤은 빨대를 물려다 멈췄다. 씹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반박당해서 씹는 게 아니라는 걸, 이현은 알아챌 것 같았다.
문제는 점심시간이었다.
서윤은 연휴에 받아 온 동그랑땡을 도시락통에 담아 왔다. 엄마가 싸 준 남색 보자기에 싸서. 버리기엔 양이 너무 많았고, 엄마 보자기는 튼튼했다.
그녀가 책상 위에서 보자기 매듭을 푸는 순간, 민지의 의자가 멈췄다.
"……선배."
"응."
"그 보자기요."
"우리 엄마 거야."
민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파티션 너머, 개발팀 쪽. 차이현의 책상 위에 똑같은 남색 보자기가 놓여 있었다. 흰 꽃무늬까지 똑같았다. 이현은 그 위에 도시락통을 올려놓고 동그랑땡을 먹고 있었다.
"선배 어머님 보자기가 왜 저기 있어요?"
서윤은 머리를 굴렸다. 기획 회의에서 반박을 받을 때보다 빨리.
"……우리 엄마가 회사 사람들 나눠 주라고 여러 개 싸 줬어. 차 선임이 우연히 하나 가져간 거야."
"차 선임님이요? 선배가 차 선임님한테 반찬을 나눠 줬다고요?"
"남으니까."
"선배는 차 선임님한테 볼펜도 안 빌려주잖아요. 작년에 '차이현 씨는 본인 펜 쓰세요' 했잖아요."
"그건 그 펜이 비싼 거여서……."
민지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몇 번 누르더니 서윤에게 내밀었다.
"이거 보세요."
오픈 채팅방이었다. 방 이름은 '명절 특집 씨름 중계석'. 참여자 스물일곱 명.
"……이거 진짜 있었어?"
"있죠. 저 부방장이에요."
"부방장?"
"방장은 비밀이에요."
서윤은 화면을 내렸다. 공지에 표가 하나 걸려 있었다.
[누적 전적: 정서윤 23승 / 차이현 21승 / 팀장 중재 무승부 40]
그 아래로 오늘 아침 올라온 글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연휴 뒤 첫 회의 중계. 차 선임 노트북 덮은 횟수 4회. 전부 정 선임 발언 때]
[정 선임 오늘 빨대 안 씹음. 특이사항]
[차 선임 머그컵 교체. 달토끼 굿즈. 본인이 반대했던 그 컵]
그리고 방금 올라온 글.
[속보. 두 사람 점심 보자기 동일. 남색 흰 꽃무늬. 사진 첨부 예정]
"민지야, 이거 너가 쓴 거지."
"사진은 아직 안 찍었어요. 선배 허락받으려고요."
"허락 안 해."
"그럼 추리만 할게요." 민지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하나, 연휴 동안 둘 다 연락이 안 됐다. 둘, 선배 얼굴이 탔다. 차 선임님도 탔다. 셋, 오늘 회의 때 선배가 빨대를 안 씹었다. 넷, 보자기."
"그게 무슨 추리야."
"결론. 두 사람은 연휴 동안 같은 시골에 있었다."
서윤은 동그랑땡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 민지의 입에 넣었다.
"……맛있다."
"우리 엄마 솜씨야. 더 먹을래?"
"뇌물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민지가 우물거렸다. "근데 추리는 안 접어요."
서윤은 책상 밑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개인 메신저. 창 맨 위에는 '차이현'.
[정서윤: 보자기 숨겨요. 지금.]
[차이현: 이미 다 먹었는데요.]
[정서윤: 보자기를 숨기라고요.]
[차이현: 접어서 서랍에 넣었습니다. 반듯하게.]
[정서윤: 씨름 방 진짜 있어요. 민지가 부방장이래요.]
파티션 너머에서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아주 잠깐, 서윤 쪽을 봤다. 그리고 다시 모니터로 돌아갔다.
[차이현: 방장은요?]
[정서윤: 비밀이래요.]
[차이현: 비상계단. 3시.]
오후 두 시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윤은 휴대폰을 들고 탕비실로 피신했다.
"동그랑땡 먹었니?"
"먹었어."
"이현이도?"
"……몰라, 걔가 먹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같은 회사라며. 가서 물어봐."
"엄마, 회사에선 비밀이라니까. 사내 연애는 원래 그래."
"그게 무슨 연애야. 첩보 영화지."
그때 탕비실 문이 열렸다. 이현이 달토끼 머그컵을 들고 들어오다 서윤을 보고 멈췄다. 서윤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나가요.
이현은 나가지 않았다. 커피 머신 버튼을 누르고, 기계가 웅웅 도는 사이 서윤의 휴대폰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어머님, 동그랑땡 잘 먹었습니다."
"어머! 이현이니? 거기 같이 있어?"
"네. 커피 타러 왔다가요."
"둘이 같이 커피 마셔? 회사에서? 비밀이라며!"
"비밀입니다, 어머님." 이현이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 여기 둘밖에 없어서요."
그 순간 탕비실 문 유리창 너머로 민지의 정수리가 지나갔다. 서윤은 이현의 등을 떠밀었다. 이현은 머그컵을 든 채 순순히 밀려 나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가 한마디 했다.
"보자기 잘 쓰겠다고 전해 주세요."
"들었어, 들었어!" 엄마가 소리쳤다. "서윤아, 쟤 진짜 괜찮다."
"엄마, 끊어."
서윤은 전화를 끊고 탕비실 벽에 이마를 댔다. 벽이 차가웠다. 얼굴이 뜨거운 건 커피 머신 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세 시 정각. 비상계단은 서늘했다. 서윤이 문을 열자 이현이 계단 난간에 기대 서 있었다. 손에 종이컵이 두 개였다.
"아이스는 안 돼요. 여기선 얼음 녹는 소리 나요."
"그런 것까지 생각해요?"
"제2조니까요."
서윤은 따뜻한 바닐라라떼를 받았다. 컵 옆에 볼펜으로 작게 적혀 있었다. '시럽 1/2'. 얼음 칸은 비어 있었다. 이번엔 얼음이 없으니까.
"대응책 회의 해요." 서윤이 말했다. "민지 추리가 너무 정확해요."
"어디까지 알아요?"
"같은 시골에 있었다는 데까지요."
이현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틀린 말이 아니네요."
"그러니까 문제죠."
"그리고 탕비실은 반칙이었어요. 엄마 앞에서."
"어머님이 물어보셨잖아요. 먹었냐고."
"저한테 물어보신 거예요."
"그럼 서윤 씨가 대답하셨어야죠. 저 먹었다고."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보자기 반듯하게 접었다고 메시지 보냈잖아요. 다 먹었으니까 접었죠."
서윤은 입을 다물었다. 이 사람과 말싸움을 하면 5년째 이런 식이었다.
"방법은 두 가지예요." 이현이 말했다. "첫째, 회의에서 평소보다 더 세게 싸운다. 사귀는 사람들은 그렇게 못 싸우니까."
"둘째는요?"
이현이 컵을 내려다봤다. 잠깐 뜸을 들였다.
"둘째는, 제가 부칙을 이행하는 거요."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서윤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이현이 등을 두드려 주려다 손을 멈췄다. 비상계단 문 너머로 발소리가 지나갔다. 둘 다 숨을 죽였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건 대응책이 아니잖아요." 서윤이 목소리를 낮췄다. "차이현 씨가 회의에서 지면 씨름 방이 뒤집혀요. 5년 동안 한 번도 안 졌잖아요."
"한 번도 안 졌죠."
"그러니까 더 수상해진다고요."
"알아요." 이현이 종이컵을 구겼다. "그래도 부칙은 지켜야죠. 계약서니까. 안 지키면 낙서라고, 제가 그랬잖아요."
"뭘 위반했는데요?"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비상계단 문을 밀고 나가며 한마디만 남겼다.
"회의 끝나고 말씀드릴게요."
그날 밤 열 시,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아니, 아는 번호였다. 청매골 마루에서 서윤이 직접 저장해 드린 번호.
[할머니: 손주며느리 밥 먹엇나]
받침 하나가 빠져 있었다. 서윤은 한참 화면을 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정서윤: 네 할머니. 동그랑땡 먹었어요. 할머니도 진지 드셨어요?]
[할머니: 먹엇다]
[할머니: 이현이 밥 잘 챙겨라]
서윤은 '네'라고 보냈다. 그리고 할머니 번호를 연락처에 저장했다. 이름 칸에서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 결국 '할머니'라고만 적었다.
그날 밤 열한 시, 메신저가 울렸다.
[차이현: 내일 오전 설 이벤트 킥오프 회의. 제가 집니다.]
[차이현: 부칙 이행입니다.]
서윤은 답장 칸에 '뭘 위반'까지 쓰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가 또 지웠다. 세 번째에는 아예 휴대폰을 베개 밑에 밀어 넣었다.
묻는 순간 답을 들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답을, 이상하게도, 서윤은 이미 알 것 같았다.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저는 쓰레기통이요.""네?""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무슨 부칙이요.""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그건 인정해요.""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청혼 기획서 v1.0입니다."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다."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멈췄다."……뭘요?""보름달 차오르는 연출이요. 유저가 편지를 쓰면 달이 한 칸씩 차오르는 거."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1년 전 이 회의실에서 서윤은 그 연출이 이벤트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현은 연휴 전에 못 넣는다고 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팀장이 간소화 버전으로 정리했다. 달은 끝내 차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 계약서가 생겼다."시즌2 기획서엔 그 연출 없었잖아요. 제가 뺐어요. 작년에 안 된다고 하셔서.""그래서 제가 넣었어요. 따로.""언제요?""작년 추석 끝나고부터요. 틈틈이.""1년 동안요?""공수가 많이 들었어요. 1년 걸렸어요." 이현이 화면을 넘겼다. 테스트 영상이었다. 유저가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까만 하늘의 달이 가장자리부터 차올랐다. 은은하게, 천천히. 마지막 편지가 들어가자 보름달이 꽉 찼다. 달 속에서 토끼가 고개를 들었다.회의실이 조용했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 잔을 든 채 굳었다. 옆에서 민지가 조용히 그의 컵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아 줬다.서윤은 화면을 봤다. 1년 전 그녀가 사흘 밤을 새워 그린 연출이었다. 그대로였다. 아니, 더 좋았다. 그녀가 그렸던 것보다 달이 천천히 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이거, 제 원래 기획서 그대로예요.""네. 원본 남겨 뒀어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테 선택권이 없어 보여. 의문형은 선택권을 주는데, 자신 없어 보이고.""차 선임님이라면 뭐라고 반박하실까요?"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1년 동안 들어서 토씨까지 외운 목소리."'청유형은 유저가 부담스러워해요. 의문형은 유저가 거절할 수 있어요. 거절 확률이 있는 문장은 공수 낭비예요.'"민지가 박수를 쳤다. "똑같아요. 소름.""그럼 그 사람은 뭐라고 할 것 같아?""그냥 '네' 하실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서윤은 슬라이드를 봤다. 마지막 장. 문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결혼해요. 결혼할래요. 둘 다 빨간 줄이 한 번씩 그어졌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그러니까 더 어려운 거야. 뭘 해도 '네' 할 사람한테 뭘 물어야 할지."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화면을 보더니 귀가 빨개졌다. 윤재하였다. 둘이 사귄 지 3주째였다. 컵에 쓰는 글씨는 매일 한 줄씩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선배, 제 친구가요, 아니 제가요." 민지가 휴대폰을 엎었다. "재하 씨한테 청유형이랑 의문형 중에 뭐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어떤 선배 얘기라고 하고.""……민지야.""이름은 안 말했어요! 근데 재하 씨가 그러더라고요. 개발자는 의문형을 좋아한대요. 반환값이 있으니까.""반환값.""네. '네'라는 반환값이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 회사 개발자들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큰이모: 기각]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거기서 멈췄다.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냅킨이 또 하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