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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부칙 해석, 계약 관리

Author: Jino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0-15 08:37:37

부칙.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누가 먼저 지느냐로 싸우게 될 줄은, 쓸 때는 몰랐다.)

목요일 오전 열 시. 회의실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안건과 상관없는 디자인팀 두 명이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둘 다 노트를 펴 놓고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까치 구조 설계안입니다." 이현이 화면을 띄웠다.

서윤은 심호흡을 했다. 목록은 외워 왔다. 순순히 수긍한다. 기능을 뺀다. 억울해 보이지 않게.

"편지 저장은 연휴 기간만 서버에 두고, 끝나면 요약본만 남기겠습니다."

"좋아요." 서윤이 말했다.

회의실이 술렁였다. 뒷자리 디자인팀 한 명이 드디어 노트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리고 까치 색은 여덟 가지로……."

"여덟 가지면 충분해요. 아니, 많아요. 여섯으로 줄여도 돼요."

이현이 서윤을 봤다. 서윤은 억울해 보이지 않는 얼굴을 했다. 연습한 대로였다.

"……열두 가지까지 가능한데요."

"네?"

"구조를 바꿔서 색은 늘려도 공수가 거의 안 늘어요. 열두 가지로 하죠."

"아뇨, 여섯이요. 차이현 씨 팀 설에 집에 가야죠."

"열두 가지요. 유저는 자기 까치가 특별하길 바라니까요. 서윤 씨가 기획서에 그렇게 쓰셨잖아요."

"그건 제가 욕심낸 거고요."

"좋은 욕심이었어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팀장이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개발팀 막내 둘은 서로의 얼굴을 봤다. 이 회의에서 누가 누구 편인지 아무도 몰랐다.

"……그러니까 지금." 팀장이 천천히 말했다. "기획이 기능을 빼자고 하고, 개발이 더 넣자고 하는 거지?"

"네." 둘이 동시에 대답했다.

"5년 만에 처음 보는 광경이네."

서윤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지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그럼 차이현 씨 안대로 가죠. 열두 가지. 제가 질게요."

"아뇨, 서윤 씨 안대로……."

"차 선임." 팀장이 손을 들었다. "정 선임이 진다잖아. 받아."

이현은 입을 다물었다. 서윤은 억울하지 않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한 번 졌다. 부칙 이행 완료. 이상하게 이긴 것보다 개운했다.

회의는 십이 분 만에 끝났다. 회사 역사상 최단 기록이었다.

민지가 자리로 돌아오며 휴대폰을 흔들었다.

"선배, 씨름 방 난리 났어요. 투표 1표 쪽이 이겼대요. 그 1표 누군지 다들 찾고 있어요."

"……그게 누군데."

"모르죠. 익명 투표라서요."

서윤은 파티션 너머를 봤다. 이현은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입꼬리가 일자가 아니었다.

[차이현: 제가 지려고 했는데요.]

[정서윤: 제가 졌어요. 팀장님이 인정하셨어요.]

[차이현: 열두 가지 받으신 게 어떻게 진 거예요. 원하시던 거잖아요.]

[정서윤: 제가 여섯이라고 했으니까요. 제 주장을 꺾었으니까 진 거예요.]

[차이현: 그런 해석이 어디 있어요.]

[정서윤: 방금 생겼어요.]

한참 답이 없었다. 파티션 너머로 이현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이마를 짚는 게 보였다. 어깨가 한 번 흔들렸다. 웃는 거였다.

[차이현: 그럼 정산하죠. 을 한 번, 갑 한 번. 부칙 이행 완료.]

[정서윤: 정산 완료.]

서윤은 메신저 창을 닫았다. 닫고 나서야 생각이 났다. 정산이 끝났다는 건, 둘 다 한 번씩 위반했다는 뜻이었다. 식탁 밑에서. 같은 순간에.

사건은 그날 저녁 막내 이모의 전화로 시작됐다.

"서윤아, 너 이 시리다고 했지?"

"응, 좀."

"이모가 스케일링 예약해 놨다. 네 회사에서 두 정거장. 이모 친구 아들이 개원했어. 공짜래. 토요일 열한 시."

"공짜? 진짜?"

"이모가 말해 놨지."

서윤은 별생각 없이 고맙다고 했다. 이 시린 건 사실이었고, 공짜는 더 사실이었다. 이모가 '공짜'라고 말할 때 목소리가 유난히 밝았다는 건, 그때는 신경 쓰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 비상계단에서 그 얘기를 하자 이현이 커피를 마시다 멈췄다.

"막내 이모님 친구 아드님이요?"

"네."

"치과요?"

"네."

"……서윤 씨, 추석 때 막내 이모님이 보여 주신 사진 기억나요?"

서윤은 기억을 더듬었다. 식탁. 막내 이모의 휴대폰. 이현이 정중하게 들여다보며 '치아 관리를 잘하셨네요'라고 했던 얼굴.

"설마요. 이모도 제가 남자친구 있는 거 아는데."

"막내 이모님은 대기 중이라고 하셨어요. 두 번."

"그래도 스케일링은 스케일링이에요. 공짜고요."

이현은 더 말하지 않았다. 종이컵을 반듯하게 접었을 뿐이었다.

토요일 열한 시. 병원은 새것 냄새가 났다. 개원 축하 화분이 입구에 줄지어 있었다. 그중 하나의 리본에 낯익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축 개원. 솔뫼리 김미숙'. 막내 이모 이름이었다.

서윤은 그 리본 앞에서 삼 초쯤 서 있었다. 돌아갈까. 하지만 접수대 직원이 이미 웃으며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공짜 스케일링의 대가는 생각보다 비쌀지도 몰랐다.

서윤이 진료 의자에 눕자 마스크를 쓴 의사가 다가와 모니터를 봤다. 그리고 서윤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다시 모니터를.

"……정서윤 씨?"

"네."

"혹시 솔뫼리."

서윤은 천장 조명을 보며 눈을 감았다. 그랬다. 이모는 그랬다. 화분 리본을 봤을 때 이미 알았어야 했다. 입구에서 돌아섰어야 했다.

의사가 마스크를 내렸다. 사진보다 인상이 순했다. "백승우입니다. 저도 방금 알았어요. 이모님께서는 '스케일링 환자 한 명 잘 봐 달라'고만 하셔서요."

"저희 이모가 죄송해요."

"저희 어머니도 한몫하셨을 거예요." 그가 웃었다. "일단 스케일링은 해 드릴게요. 이 시린 건 진짜시죠?"

"진짜예요."

"그럼 그건 진짜로 해 드리죠."

그는 스케일링을 꼼꼼히 했다. 중간에 사적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서윤은 그게 고마웠다. 다만 입을 벌리고 누워 있는 동안, 머릿속엔 이상하게 한 사람의 얼굴만 떠올랐다. 반듯하게 접힌 종이컵.

진료가 끝나고 대기실로 나오자 창가 소파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종이컵 하나. 뚜껑 위로 김이 올라왔다.

"……차이현 씨?"

이현이 일어났다. "끝났어요?"

"여기서 뭐 해요?"

"계약 관리요."

서윤 뒤에서 백승우 원장이 따라 나왔다. 그는 이현을 보더니 알아봤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남자친구분이시구나. 사진이랑 똑같으시네요."

"선생님도 사진이랑 똑같으시네요." 이현이 말했다. 정중했다. 지나치게. "치아 관리를 잘하셨네요."

백승우 원장이 소리 내 웃었다. "그 말씀, 이모님께 전해 들었어요. 추석 때 하셨다고."

막내 이모는 대체 어디까지 전하고 다니는 걸까. 서윤은 대기실 바닥 무늬를 셌다.

"스케일링 하셔서 한동안 찬 거 드시면 시리실 거예요." 원장이 이현에게 말했다. 서윤이 아니라 이현에게. "며칠은 따뜻한 걸로 주세요."

"네. 준비해 왔습니다." 이현이 종이컵을 들어 보였다. 따뜻한 바닐라라떼. 컵 옆에 '시럽 1/2'.

원장은 그 컵을 잠깐 보더니 서윤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모님께는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가망 없다고."

"……네?"

"저도 커피 취향을 컵에 적어 주는 사람은 못 이겨요."

병원을 나서자 가을 햇볕이 따가웠다. 서윤은 따뜻한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이가 시리지 않았다.

"계약 관리요?" 서윤이 물었다.

"네."

"그런 조항 없는데요."

"부칙의 확장 해석이에요. 계약 기간 중에 제삼자가 개입하면, 계약 당사자는 계약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그런 해석 누가 정했어요."

"방금 생겼어요."

첫날 편의점에서 서윤이 한 말이었다. 이 사람은 서윤의 말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꼭 이럴 때 돌려줬다.

"근데 병원은 어떻게 찾았어요? 저 이름 말 안 했는데."

"두 정거장이라고 하셨잖아요. 회사에서 두 정거장 안에 이번 달 새로 연 치과가 하나였어요."

"그걸 검색했어요?"

"지도 앱에 '개원'이라고 치면 나와요."

"……차이현 씨, 그거 좀 무서운 거 알죠?"

"관찰력이라고 해 주세요. 회의 때 서윤 씨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잖아요. '유저 관찰'."

"저는 유저를 관찰하는 거고요."

"저도 유저를 관찰하는데요. 제 서비스의 유일한 유저."

서윤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은 게 아니라, 떠오른 말이 전부 들키는 말이었다.

"몇 시부터 기다렸어요?"

"조금이요."

"조금이 몇 분인데요."

"커피 한 번 식혀서 다시 사 올 만큼이요."

서윤은 걸음을 멈췄다. 이현도 멈췄다.

"……그거 질투 아니에요?"

"계약 관리예요."

"질투처럼 보이는데요."

"그럼 계약 관리를 잘한 거죠. 남들 보기에 질투처럼 보여야 가짜 연애가 진짜처럼 보이니까."

논리적이었다. 여전히 너무 논리적이어서, 서윤은 반박을 포기하고 라떼를 마셨다. 따뜻한 게 목을 타고 내려갔다. 시린 데 없이.

그날 밤 가족 단톡방에 막내 이모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막내 이모: 치과 총각이 그러는데, 그 청년 커피 들고 대기실에서 사십 분 서 있었단다]

[막내 이모: 커피를 한 번 버리고 다시 사 왔단다. 식었다고]

[큰이모: 어머어머]

[막내 이모: 이번 한 번만 봐준다]

서윤은 그 줄을 오래 봤다. 사십 분. 조금이라더니.

월요일 아침, 사내 공지가 떴다.

[가을 워크숍 안내. 1박 2일, 청솔 연수원. 레크리에이션은 2인 1조. 조 편성은 제비뽑기.]

제비뽑기 결과는 다음 날 나왔다. 민지가 모니터 앞에서 비명을 삼켰다.

7조. 정서윤, 차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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