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제3조. 스킨십은 손잡기까지만. 그것도 필요할 때만.
(비가 오면 '손'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건, 조항에 없었다.)
청솔 연수원으로 가는 버스에서 서윤은 맨 앞자리에 앉았다. 이현은 맨 뒷자리에 앉았다. 제2조의 모범 답안이었다.
민지는 서윤 옆에서 과자 봉지를 뜯으며 말했다.
"선배, 7조 된 거 운명 아니에요?"
"제비뽑기야."
"제비가 둘을 뽑았잖아요. 서른 명 중에서."
"확률상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차 선임님도 똑같이 말했대요. '확률상 있을 수 있는 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서윤은 창밖을 봤다. 누가 누구 말투를 닮아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연수원에 도착하자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인사팀 과장이었다. 그는 이 행사를 일 년 내내 기다린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첫 번째 게임! 짝꿍 취향 맞히기!"
서윤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추석 점심상의 큰이모가 떠올랐다.
"7조! 차이현 선임, 정서윤 선임이 제일 좋아하는 음료는?"
강당이 웃음으로 술렁였다. 다들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원수가 원수의 취향을 알 리 없다는 기대.
"아이스 바닐라라떼. 시럽 반, 얼음 적게." 이현이 말했다.
강당이 조용해졌다.
"……정답입니까, 정 선임?"
서윤은 입을 열었다. 여기서 틀렸다고 해야 했다. 제2조. 그런데 뒤쪽 테이블에 민지가 휴대폰을 든 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회의 때 맨날 들고 가니까요. 맞은편이면 보여요."
"아, 그렇죠! 원수는 원수를 제일 잘 안다!" 사회자가 알아서 포장해 줬다. 강당에 웃음이 터졌다. 서윤은 숨을 내쉬었다.
"그럼 정 선임! 차 선임이 제일 싫어하는 음식은?"
콩송편. 할머니 댁에서 알았다. 콩을 다 파내고 먹던 아이.
"……모르겠는데요."
"하나도요?"
"관심이 없어서요."
강당이 다시 웃었다. 이번엔 이현이 조금 늦게 웃었다. 서윤은 그걸 봤다. 봐 놓고 모른 척했다.
두 번째 게임은 2인 3각이었다. 발목을 끈으로 묶고 반환점을 돌아오는 경기.
"어깨동무하세요!" 사회자가 외쳤다. "그래야 안 넘어집니다!"
서윤과 이현은 출발선에서 서로를 봤다. 다른 조들은 벌써 어깨를 두르고 있었다.
"……어깨는 손이 아니죠." 서윤이 작게 말했다.
"손이 아니죠."
"그럼 제3조 위반이에요."
"그럼 손으로 잡죠."
"손 잡고 2인 3각을 어떻게 뛰어요."
"해 보면 알겠죠."
출발 신호가 울렸다. 둘은 손을 잡고 뛰었다. 발목은 묶였는데 어깨는 떨어져 있어서, 세 걸음 만에 몸이 기우뚱했다. 서윤이 넘어지려는 순간 이현이 잡은 손을 확 당겼다. 서윤은 그의 옆구리에 부딪혔다.
"하나, 둘." 이현이 낮게 말했다. "묶인 발부터."
"하나, 둘."
생각보다 잘 맞았다. 5년 동안 회의에서 박자를 맞춰 싸운 덕인지도 몰랐다. 둘은 반환점을 돌았다. 꼴찌였지만 넘어지지 않은 유일한 조였다.
"7조, 손잡고 뛰었어요!" 사회자가 소리쳤다. "원수끼리 손을!"
강당이 떠나가게 웃었다. 서윤은 발목 끈을 풀며 이현을 흘겨봤다. 이현은 태연하게 끈을 감아 사회자에게 돌려줬다. 귀가 빨갰다.
자리로 돌아오자 팀장이 종이컵에 사이다를 따라 주며 말했다.
"너네, 넘어지지 않은 건 칭찬한다."
"감사합니다."
"근데 왜 손을 잡고 뛰었어? 어깨동무하라니까."
"어깨동무는 좀……." 서윤이 말끝을 흐렸다.
"싫어서요." 이현이 이어받았다.
"그럼 손은 괜찮고?"
둘 다 대답하지 못했다. 팀장은 사이다를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 밑으로 휴대폰을 내렸다. 엄지가 빠르게 움직였다.
저녁은 바비큐였다. 여덟 시쯤부터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더니, 아홉 시가 되자 제법 굵어졌다. 다들 강당으로 옮겨 가 술을 마셨다.
"선배애." 민지가 서윤의 팔에 매달렸다. 맥주 두 캔째였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요. 딸기 맛."
"비 오는데."
"그러니까요. 비 오니까요."
무슨 논리인지 몰랐지만 서윤은 일어났다. 강당 안에서는 누가 누구를 좋아하느냐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 테이블에서 '7조'라는 단어가 들렸다. 빠져나갈 핑계가 필요했다.
편의점은 언덕 아래에 있었다. 걸어서 십 분. 서윤은 연수원 현관에 꽂힌 우산을 찾았다. 하나도 없었다. 다들 바비큐 때 가져가 강당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뛰어가면 되지."
뛰어갔다. 편의점에 도착했을 때 머리가 반쯤 젖어 있었다. 딸기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계산대에서 물었다.
"우산 있어요?"
"아까 다 나갔어요. 연수원 분들이 다 사 가셔서."
서윤은 편의점 문 앞에 섰다. 빗줄기가 아까보다 굵었다. 아이스크림 봉지가 손에서 차가웠다.
그때 언덕 위에서 누군가 내려왔다. 검은 우산 하나. 반듯하게 걷는 걸음.
"……왜 왔어요?"
"민지 씨가 강당에서 '선배가 비 맞으러 갔어요' 하고 울던데요."
"울어요?"
"취해서요."
이현이 편의점 처마 아래로 들어왔다. 우산을 접지 않고, 그대로 서윤 쪽으로 기울였다. 작은 우산이었다. 한 사람용. 연수원 비품이라고 손잡이에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이거 하나밖에 없었어요."
"강당에 많던데요."
"다들 쓰고 있어서요."
거짓말이었다. 서윤은 알았다. 강당 입구에 우산이 열 개쯤 꽂혀 있었다. 나올 때 봤다. 그런데 말하지 않았다.
둘은 언덕을 올랐다. 우산이 작아서 어깨가 계속 부딪혔다. 이현은 우산을 서윤 쪽으로 기울였다. 서윤이 알아채고 우산대를 밀어 가운데로 돌려놓았다. 삼 걸음 뒤, 우산은 다시 서윤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차이현 씨 어깨 다 젖어요."
"원래 왼쪽은 잘 안 써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른손잡이라서요."
또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서윤은 반박을 미루고 언덕 위를 올려다봤다. 비에 젖은 연수원 건물이 보였다. 강당 앞 돌계단도.
"여기, 입사 연수 때 왔던 데죠."
"네. 5년 전 3월."
"저 계단에서 단체사진 찍었잖아요. 할머니 앨범에 있던 거."
"……네."
"그때 저 조별 발표 망쳤는데. 준비한 원고 다 버리고 즉흥으로 했어요. 떨려서."
"망치지 않았어요."
서윤이 이현을 봤다. 이현은 앞만 보고 있었다.
"'이건 제 의견이 아니라, 유저가 이렇게 느낄 거라는 얘기예요.'" 그가 말했다. 담담하게, 외운 문장을 읽듯이.
서윤은 걸음을 멈출 뻔했다. 자기가 한 말이었다. 그날 강당에서. 원고를 덮고 나서 제일 처음 한 말.
"……그걸 어떻게 기억해요?"
"강당 맨 뒷줄이었는데, 잘 들렸어요."
"5년 전인데요."
"좋은 문장은 오래 가요. 코드도 그렇고."
서윤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발밑을 봤다. 그리고 발을 헛디뎠다. 언덕길이 젖어 미끄러웠다. 이현의 팔이 서윤 앞을 막았다. 그녀는 그 팔을 붙잡았다. 정확히는, 팔꿈치 근처의 소매를.
"……이건요." 서윤이 말했다.
"네."
"팔이에요. 손 아니고. 제3조 위반인가요."
이현이 우산 아래에서 서윤을 내려다봤다. 가로등 불빛이 빗줄기 사이로 번졌다. 첫날 편의점 파라솔 위에서 번지던 것과 같은 색이었다.
"소매 잡고 계신 거죠."
"네."
"소매는 옷이에요. 스킨십 아니고요."
서윤은 웃음이 터졌다. 빗소리에 섞여 작게.
"차이현 씨, 그거 완전 편법이에요."
"법 해석이에요. 갑이 쓴 조항을 을이 최대한 유리하게 읽는 거."
"그럼 을한테 유리한 게 뭔데요. 제가 소매 잡는 게."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앞을 보고 걸었다. 우산은 여전히 서윤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서윤은 소매를 놓지 않았다. 필요할 때만, 이라고 속으로 말했다. 비 오고, 길이 미끄럽고, 우산이 작았다. 필요했다. 명백히.
그런데 연수원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서윤은 걸음을 조금 늦췄다. 이현도 따라서 늦췄다. 둘 다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현관 앞 처마에 닿자 이현이 우산을 접었다. 그의 왼쪽 어깨가 짙은 색으로 젖어 있었다. 셔츠가 살에 달라붙을 만큼.
서윤의 오른쪽 어깨는 말라 있었다. 한 방울도 없이.
"……수건 가져다줄게요."
"괜찮아요. 방에 있어요."
"아이스크림 녹겠다. 들어가요."
이현이 먼저 현관으로 들어갔다. 서윤은 아이스크림 봉지를 든 채 한참 서 있었다. 현관 안쪽 어딘가에서 휴대폰 화면 하나가 켜졌다 꺼졌다. 서윤은 그걸 보지 못했다.
방으로 돌아가자 민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딸기 아이스크림을 머리맡에 두고, 서윤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렸다.
오른쪽 어깨를 만져 봤다. 보송했다. 그 사람의 왼쪽 어깨와 정확히 반대로.
휴대폰을 들었다.
[정서윤: 어깨 말렸어요?]
[차이현: 말리는 중이에요.]
[정서윤: 감기 걸리면 까치 일정 밀려요.]
[차이현: 걱정하시는 게 까치예요?]
서윤은 답장을 쓰지 못했다. 까치라고 쓰면 거짓말이었다. 아니라고 쓰면 그다음 문장을 써야 했다.
[차이현: 주무세요. 내일 아침 9시 집합이에요.]
[정서윤: 알아요.]
불을 끄고 누웠다. 빗소리가 창을 두드렸다. 눈을 감으면 우산이 기울던 각도가 보였다. 세 걸음마다 다시 기울던 우산. 오른손잡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 팔꿈치 근처의 젖은 소매.
제3조를 쓴 건 자기였다. 선을 그은 것도 자기였다. 그런데 오늘 밤 그 선에 계속 먼저 발을 올린 것도, 자기였다.
서윤은 어둠 속에서 천장을 봤다. 처음으로, 그 질문이 문장이 되어 떠올랐다.
빠진 건, 나인가.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저는 쓰레기통이요.""네?""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무슨 부칙이요.""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그건 인정해요.""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청혼 기획서 v1.0입니다."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다."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멈췄다."……뭘요?""보름달 차오르는 연출이요. 유저가 편지를 쓰면 달이 한 칸씩 차오르는 거."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1년 전 이 회의실에서 서윤은 그 연출이 이벤트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현은 연휴 전에 못 넣는다고 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팀장이 간소화 버전으로 정리했다. 달은 끝내 차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 계약서가 생겼다."시즌2 기획서엔 그 연출 없었잖아요. 제가 뺐어요. 작년에 안 된다고 하셔서.""그래서 제가 넣었어요. 따로.""언제요?""작년 추석 끝나고부터요. 틈틈이.""1년 동안요?""공수가 많이 들었어요. 1년 걸렸어요." 이현이 화면을 넘겼다. 테스트 영상이었다. 유저가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까만 하늘의 달이 가장자리부터 차올랐다. 은은하게, 천천히. 마지막 편지가 들어가자 보름달이 꽉 찼다. 달 속에서 토끼가 고개를 들었다.회의실이 조용했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 잔을 든 채 굳었다. 옆에서 민지가 조용히 그의 컵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아 줬다.서윤은 화면을 봤다. 1년 전 그녀가 사흘 밤을 새워 그린 연출이었다. 그대로였다. 아니, 더 좋았다. 그녀가 그렸던 것보다 달이 천천히 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이거, 제 원래 기획서 그대로예요.""네. 원본 남겨 뒀어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테 선택권이 없어 보여. 의문형은 선택권을 주는데, 자신 없어 보이고.""차 선임님이라면 뭐라고 반박하실까요?"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1년 동안 들어서 토씨까지 외운 목소리."'청유형은 유저가 부담스러워해요. 의문형은 유저가 거절할 수 있어요. 거절 확률이 있는 문장은 공수 낭비예요.'"민지가 박수를 쳤다. "똑같아요. 소름.""그럼 그 사람은 뭐라고 할 것 같아?""그냥 '네' 하실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서윤은 슬라이드를 봤다. 마지막 장. 문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결혼해요. 결혼할래요. 둘 다 빨간 줄이 한 번씩 그어졌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그러니까 더 어려운 거야. 뭘 해도 '네' 할 사람한테 뭘 물어야 할지."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화면을 보더니 귀가 빨개졌다. 윤재하였다. 둘이 사귄 지 3주째였다. 컵에 쓰는 글씨는 매일 한 줄씩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선배, 제 친구가요, 아니 제가요." 민지가 휴대폰을 엎었다. "재하 씨한테 청유형이랑 의문형 중에 뭐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어떤 선배 얘기라고 하고.""……민지야.""이름은 안 말했어요! 근데 재하 씨가 그러더라고요. 개발자는 의문형을 좋아한대요. 반환값이 있으니까.""반환값.""네. '네'라는 반환값이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 회사 개발자들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큰이모: 기각]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거기서 멈췄다.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냅킨이 또 하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