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여주댁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백숙 국물을 한 그릇 올렸다. 짙은 약재 냄새가 침실 안에 퍼졌다.‘어혈을 풀어주는 약재.’‘임신 중인데, 저런 국물을 억지로 마시면 아이가 위험해질 거야.’주예는 바로 거절했다. “괜찮아. 따뜻한 물만 마실게.”“안 먹으면 내가 직접 먹여 줄 수밖에 없어.”진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 다시 올라왔다. 도자기 그릇을 들고 주예의 거부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한 숟가락씩 먹이려고 했다.주예는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자 더 피할 곳도 없었다.진후의 숟가락이 점점 다가왔다. 곧 입술에 닿을 것 같았다.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닫자 주예는 불쑥 꾀를 냈다. “우욱!”거칠게 헛구역질을 하면서 재빨리 그릇을 쳐서 바닥에 떨어뜨렸다. 뜨거운 국물이 진후의 옷과 침실의 값비싼 캐시미어 카펫 위로 쏟아졌다.여주댁이 곧 가사도우미들을 불러 치우게 했다.처음에는 국물을 마시지 않으려고 연기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구역질이 시작되자 멈추지 않았다. 속이 거세게 뒤집히면서 여러 번 헛구역질을 했다. 눈가에는 반사적으로 눈물까지 맺혔다.진후는 크게 놀랐다. 바로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겨우 진정한 주예가 힘없이 숨을 몰아쉬었다.“신경 쓰지 마. 뭘 잘못 먹었나 봐.”진후는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리고 정말 겁이 났다. 창백하고 여린 몸으로 침대 구석에 웅크린 주예를 보니, 진후가 찾던 ‘진짜 규나’인 주예는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조심스럽게 보살펴야 하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억지로 강요해서는 안 됐다.진후는 가슴이 아파서 자꾸 움츠러들었다. 주예를 힘껏 안고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예는 진후를 그토록 거부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그 자리에 선 채 어쩔 줄 몰랐다.“핸드폰 줘.” 조금 진정한 주예가 말했다.진후의 표정이 누그러진 때를 놓치지 않았다.주예는 진후를 너무 잘 알았다.지난 3년 동안 늘 진후의 표정을 살폈다. 만든
정재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진석은 속으로 또 말을 쏟아 냈다. ‘임주예 씨하고 관계를 확인한 적이 언제 있다고, 혼자 지금 만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까?’‘바람피우는 걸 잡겠다니요?’‘그 부부한테 가서 뭘 잡으시겠다는 겁니까?’‘게다가 바람피우는 현장이라니, 회장님 분위기하고는 너무 안 어울리는데요.’전협은 계속 주예와 연락하려고 했다.전화할 때마다 진후가 받자 깊이 숨을 들이마시면서 말했다. “한진후 대표님, 임주예 씨에게 전화 좀 넘겨주시겠습니까? 직접 통화하고 싶습니다.”[자고 있어서 곤란합니다. 자기 집 침실에서 쉬는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소파에 기대 앉은 진후가 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차갑게 두드렸다. 목소리에는 경고가 실려 있었다. [운전기사치고는 참견이 지나치시군요.]전협도 난감했다. ‘그러게. 부부가 같이 있는 게 무슨 문제겠어?’ 주예에게 이혼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절차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도 몰랐다. 다시 마음이 돌아선 걸 수도 있었다.게다가 진후는 주예 대신 칼까지 맞았다.무작정 들어가야 할지, 전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진후는 정재가 지금 만나는 사람이라고 한 말에 잔뜩 자극을 받았다. 말투에서 소유욕이 분명히 느껴졌다. ‘주예가... 벌써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위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었다. 주예에게 확실히 물어볼 생각이었다.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주예가 고개를 들었다.“너... 남자친구 있어?” 진후는 주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인정하면 이 방에 영원히 가둬 둘 것 같은 눈이었다.“뭐?” 주예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너무 갑작스럽고 맥락도 없는 질문이었다.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진후는 마음을 놓았다. 주예의 놀란 표정은 연기가 아니었다.‘역시 그 남자가 날 떠본 거였어.’진후는 질문을 바꿔가며 반응을 살폈다. “네 오빠가 전화했어. 내가 받았고.”주예의 눈이 바로 밝아졌다. “오빠가 전화했어? 뭐라고 했는데?” 이내 진후를 나무
방금 일만 해도 예전 같았으면 진후의 상처를 걷어찼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찍 퇴원한 걸 후회하게 만들었을 터였다.마음을 가라앉힌 주예는 침실 문을 열어보려고 했다. 열리지 않았다. 전협이 구하러 와 주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진후와 다투는 사이에 핸드폰을 아래층에 두고 왔다.한 시간이 지났다. 전협은 주예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다. 핸드폰을 꺼내서 주예에게 전화했다....집 안 거실이었다.진후는 상처를 다시 드레싱하는 중이었다. 의사에게 진통제 주사를 맞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상태가 한결 나아졌고, 이성도 돌아왔다.문득 테이블 위에서 핸드폰이 진동하자 눈길이 갔다. 주예의 핸드폰이었다.진후가 집어 들었다. 발신자 이름은 ‘오빠’였다.진후의 동공이 움츠러들었다. 차 안에서 주예가 잠결에 중얼거린 말이 떠올랐다. 주예에게는 정말로 오빠가 있었다.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진후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 상대가 더 말하기를 기다렸다.[주예야?]다시 목소리가 들렸다.‘주예야? 저렇게 다정하게 부르다니. 대체 누구야?’진후는 속에서 분노가 치밀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여보세요. 제 아내에게 무슨 볼일이십니까?”정재는 막 비행기에서 내리자 주예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진후가 전화를 받을 줄은 몰랐다.아내라는 말을 듣자 정재의 얼굴에 짙은 먹구름이 내려앉았다.진후가 다시 물었다. “누구십니까?”정재는 비웃듯 웃었다.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주예는 어디 있습니까? 전화기 넘겨주시죠.]말에 소유욕이 짙게 묻어났다.진후도 물러서지 않았다. 목소리가 차가웠다.“찾으시는 사람은 제 아내입니다. 용건이 있으시면 제가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선을 넘으시는 건 아닙니까?”정재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아내요? 이미 이혼했다고 들었습니다만...]‘이혼한 걸 알고 있네. 정말
주예가 진지하게 물었다. “잠깐, 확인 좀 할게. 친남매는 아니지? 피가 섞인 사이는 아닌 거지?”진후는 말문이 막히면서 표정이 굳어졌다. “당연히 아니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주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는 오빠가 정재 하나면 충분했다.또 다른 오빠까지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여동생과 아내도 구별하지 못하는 이런 오빠는 사양이었다.그제야 표정을 가다듬고 진후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한참 뒤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 일은 잘 기억 안 나. 당신을 만난 기억도 없어.”진후의 얼굴에 실망이 드러났다.주예가 바로 덧붙였다. “만난 적이 있다고 해도 당신도 나를 못 알아봤잖아. 아니면 왜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았겠어?”맞는 말이었다. 그 말이 진후의 가슴 한가운데를 바로 찔렀다.주예는 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서 바로 물었다. “내 친부모가 누군지 말해 줄래?”이번에는 진후가 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주예야, 우리 방은 다 정리해 뒀어. 너 없는 동안 이모님하고 다른 분들이 매일 청소했어.” “시트도 새로 갈았고, 네가 좋아하는 색이야. 오늘 밤은 여기 있어 주면 안 돼?”“거절하지 마. 오늘 밤 여기 있으면 친부모가 누군지 말해 줄게.”진후의 말투가 강해졌다. 그러다 한발 뒤로 물러섰다. “나는 손님방에서 자도 돼. 너만 안 가면 돼.”주예는 어이가 없었다.“내 친부모 소식을 알 수 있으면 물론 좋겠지. 하지만 몰라도 괜찮아. 지난 20년 동안 모르고도 잘 살았어.”“그걸로 날 협박할 거면 더 얘기할 필요 없어. 누가 날 낳았든 고경란하고 임필수는 영원히 내 엄마 아빠야. 그건 달라지지 않아.”주예는 곧바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가지 마! 못 가!”진후가 미친 사람처럼 거칠게 붙잡았다. 다쳤어도 주예가 이길 수 있는 힘은 아니었다. 겨우 ‘진짜 규나’를 되찾았는데 다시 떠나게 둘 수는 없었다.“놔!”임신한 걸 아는 주예는 온 힘을 다해 몸부림칠 수가 없었다. 진후는
진후의 눈에 아쉬움이 스쳤다. 먼저 내려서 주예 쪽 문을 열었다.혹시라도 머리를 부딪칠까 봐 문 위쪽에 손을 가볍게 댔다.전협의 차도 뒤따라 들어왔다. 지난번 일을 겪은 뒤로는 밖에 주차해서 주예에게서 멀어질 수 없었다. 입구의 경비가 막으려고 하자, 진후가 손짓으로 들여보내라고 했다.전협의 의도는 진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먹고 주예를 붙잡아 두려고 한다면 전협 한 명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하늘빌 입구에 선 주예의 표정은 복잡했다.주예가 멈춰 서자 진후가 다정하게 물었다. “왜 안 들어가?”주예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늘빌까지 왔잖아. 이제 말해.”“네 집이잖아. 들어가서 좀 앉아. 돌아온 지 오래됐잖아. 이모님하고 다른 분들도 많이 보고 싶어해.”진후는 답을 피하며 다른 말을 했다.지금의 진후는 주예에게 낯설었다. 조금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희미하게 피 냄새가 났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어젯밤에 칼을 맞았는데, 급소는 아니었다고 해도 오늘 바로 퇴원해서 주예를 찾아다닐 기운까지 있다니.주예는 조금 떨어진 곳에 전협이 있는 걸 돌아보고 확인했다. 마음을 다잡고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서 진후가 몸을 숙이며 말했다. “신발 갈아 신어.” 직접 실내화를 신겨 주려고 했다. 주예가 전에 신던 바로 그 실내화였다. 주예는 발을 뒤로 당겼다. “됐어. 내가 할게.”진후의 눈에 실망이 드러났다. 그래도 더 말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자기 실내화를 꺼내 신었다. 주예 것과 모양은 같고 색만 다른 커플 실내화였다.주예는 그걸 보고 눈길이 살짝 흔들렸지만 말하지 않았다. 전에 주예가 샀을 때는 진후가 한 번도 신지 않았다. 이제야 그걸 사용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집 안을 둘러봤다. 가구와 물건은 거의 그대로였다. 주예가 떠날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이제 말해 줄 수 있지?” 주예가 진후를 봤다. 쓸데없는 안부를 주고받기 싫어서 바로 본론을 꺼냈다.진후는 코트를 정리
그 말을 듣자 주예의 동공이 움츠러들었다.진후가 이어서 말했다. “하늘빌에 오면 차근차근 설명할게. 너한테 한마디도 거짓말하지 않을게.”“나는 고씨 집안 사람이야. 내 부모님은 고경란하고 임필수야.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주예가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그 모습을 본 진후의 입가에 애틋하면서도 쓰린 웃음이 번졌다.어릴 때 규나는 거짓말을 하면 꼭 입술을 다물고 진후를 보지 않았다. 그 버릇은 여전히 그대로였다.가슴이 다시 욱신거리며 아팠다.주예에게는 곳곳에 어린 규나의 흔적이 있었다. ‘나는 대체 얼마나 눈이 멀어 있었던 거야. 이렇게 오랫동안 알아보지도 못하고.’진후가 목소리를 낮추고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5살 때 두 분한테 입양됐다는 거 알아. 맞지?”주예의 눈동자가 다시 수축되었다.원래는 진후에게 이야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받을 치료 기회를 빼앗은 뒤로 진후를 완전히 믿지 못하게 됐다. 그 일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진후가 정말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한동안 말이 없던 주예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가겠다는 뜻이었다.순순히 받아들이는 주예를 보자 진후의 마음이 흔들렸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뻗었다.하지만 손이 채 닿기도 전에 주예가 한 걸음 물러났다. 경계하는 눈으로 진후를 봤다. 진후는 씁쓸하게 손을 거뒀다. 눈에는 실망하는 기색이 가득했다.진후는 고집스럽게 주예를 자신의 마이바흐에 태웠다. 주예는 조금 떨어져 있던 전협에게 손짓했다. 전협이 차를 몰고 적당한 간격으로 뒤따랐다. 진후는 보고도 모르는 척했다. ‘그래야 안심이 된다면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자.’차 안에서 두 사람은 내내 말이 없었다. 깊은 정적만 흘렀다.진후는 애초에 상처가 낫지 않은 상태였다. 차에 앉고 나니 긴장이 조금 풀렸다.등받이에 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많은 피를 흘린 탓에 자꾸 어지러웠지만, 마음만은 가득한 기분이었다.
진후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마치 어디까지나 주예를 배려하는 사람처럼 들렸다.하지만 주예는 진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말들은 결국 진후 자신이 품고 있는 보잘것없는 죄책감을 덜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 진후는 주예가 늘 그랬듯 알아서 사양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그래.” 주예가 받아들였다.“응? 뭐라고 했어?” 진후가 멈칫했다. 뜻밖이라는 기색이 스쳤다.“좋다고. 이제 몸도 거의 다 나았고, 당신 친구들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주예는 가볍게 웃었다.‘어차피 앞으로는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다음
“사모님?”여주댁이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아직 안 주무셨어요?”“응...”주예는 대답하려 했지만 목이 잔뜩 잠겨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겨우 숨 섞인 소리만 흘러나왔다.여주댁은 급히 안으로 들어와 주예의 이마에 손을 대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어머, 이게 무슨 일이에요? 열이 너무 심하잖아요.”“비를 좀 맞아서 그런가 봐요.”주예는 힘겹게 웃어 보였다.“약은 먹었어요.”“이렇게 있으면 안 되죠.”여주댁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이대로 열이 더 오르면 큰일 나요.”여주댁은 곧장 핸드폰을
빈소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진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흘렀다.규나는 목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가에 눈물만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억울함이 가득 밴 모습이었다.결국 국화 한 송이를 집어 든 진후는 앞으로 나가 임필수의 영정 앞에 내려놓았다.영정 앞에 선 진후의 등은 곧게 펴져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데도 가슴 한쪽이 묘하게 조여 들었다.주예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후를 다
장례식장은 온기가 완전히 걷힌 듯 차가웠다.빈소에는 정적만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영정 사진 앞에는 하얀 국화들만 가득 놓여 있었다.임주예는 아버지의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무릎은 이미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손바닥 안을 파고들 정도로 손가락을 세게 쥐고 있었다.'지금 손을 놓아 버리면, 나까지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아.'옆에서는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한 대표는 어디 갔대? 아직도 안 왔어?""아직도 몰라? 공항에 마중 나갔다더라. 기사도 떴잖아.""공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