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쳐! 네 변명 따위 듣고 싶지도 않아!”배서준은 전화기 너머로 이렇게 소리치고는 남설아에게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그의 가슴은 거칠게 들숨 날숨을 내뱉었고 몸 전체가 분노로 불타오를 듯한 기세였다.‘남설아, 끝까지 발뺌하네? 이런 식으로 죄를 피하려는 건가?’배서준은 곧바로 천기준에게 전화를 걸어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지금 당장 경호팀 전원 동원해서 유라의 행방을 추적해. 그리고 남설아, 그 여자도 감시해. 지금 어딨는지, 뭘 하고 있는지 전부 보고하고 납치와 관련된 증거를 반드시 찾아.”“네, 대표님. 바로 처리하겠습니다.”전화기 너머 천기준의 목소리엔 다소 머뭇거림이 느껴졌지만 곧장 복종하는 듯했다.배서준은 전화를 끊고 어두운 얼굴로 분노를 삼켰다.‘절대 남설아를 그냥 두지 않을 거야.’그 시각, 카페 한켠.남설아는 끊긴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며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혼잣말을 했다.“납치? 서유라가 납치됐다고? 배서준 저 인간, 진짜 정신 나간 거 아냐?”송우민도 의아한 표정으로 남설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배서준이 또 무슨 헛소리를 한 거야?”남설아는 고개를 저으며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서유라가 납치됐대. 그게 우리가 한 짓이라는데 도무지 말이 안 돼.”그 순간, 강연찬이 남설아 옆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물었다.“설아야, 무슨 일이야? 배서준이 뭐라고 했어?”남설아는 조금 전 배서준과의 통화 내용을 빠짐없이 강연찬과 송우민에게 전했다.이야기를 들은 송우민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터뜨렸다.“와 젠장, 서유라가 납치됐다고? 근데 그게 우리가 한 짓이라고? 배서준 그 인간 진짜 돌았네! 서유라 딱 봐도 수상한 여잔데 아직도 믿고 있는 거 보면 멍청하기도 하지.”강연찬 역시 표정이 굳어졌고 눈빛도 날카롭게 변했다.“설아야, 이건 단순한 일이 아닐 수도 있어. 서유라가 갑자기 납치됐고 배서준이 제일 먼저 우리를 의심했다는 건... 서유라 남매가 또 무슨 계략을 짠 걸 수도 있어
배서준은 서유라를 방 앞까지 데려다주고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푹 쉬어. 잘 자.”“잘 자, 서준아.”서유라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투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하지만 배서준은 그녀의 이상한 기운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대로 돌아서서 아래층 서재로 내려가 업무를 처리했다.밤은 점점 깊어갔고 어둠은 짙게 내려앉았다.배서준은 모든 일을 마치고 시계를 봤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하여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그러나 침실에 도착해 보니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침대는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누군가가 잠들었던 흔적조차 없었다.순간 배서준의 가슴에는 싸한 불안함이 밀려왔다.곧장 욕실과 드레스룸까지 확인했지만 서유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서유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냉정한 기계음만 들릴 뿐이었다.“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어...”배서준의 심장은 바닥까지 내려앉았다.그는 다급히 아래층으로 달려가 도우미들을 불러세우며 물었다.“유라 못 봤어요? 어디 간 거예요?”도우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유라 씨는 저녁 드신 뒤 방에 들어가셨고 그 이후엔 본 적 없습니다.”집사는 조심스럽게 그렇게 대답했다.배서준은 갈수록 불안감에 휩싸였다.바로 그때, 서도현이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들었다.급박해 보이는 표정에 눈빛도 세게 떨리고 있었다.“매형! 큰일 났어요! 큰일 났어요!”숨을 헐떡이며 외치는 서도현에 배서준은 그의 팔을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생긴 거야?”서도현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배서준에게 건넸다.“저... 저한테 방금 익명 문자 하나가 왔어요... 누나가, 누나가 납치됐다고요!”배서준은 핸드폰을 낚아채듯 받아들었고 화면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당신 여자가 무사하길 바란다면 몸값을 준비해. 경찰에 신고하면 그땐 후회해도 늦을 거야.]문자 말미엔 낯선 은행 계좌번호도 함께 있었다.배서준의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다.‘납치.
“만에 하나란 없어!”서유라는 단호하게 서도현의 말을 끊으며 한 치의 의심도 허용하지 않는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큰돈을 벌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해. 남설아를 완전히 없애려면 이번 위험은 감수해야 해. 우리가 제대로만 연기하면 배서준 그 멍청이는 백 퍼센트 속을 거야.”서도현은 누나의 눈에서 번뜩이는 독기를 보며 그녀가 이미 마음을 굳혔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여 한숨을 내쉰 뒤 더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누나. 다 누나 말대로 할게. 내가 뭘 하면 되는지 말만 해.”서유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도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그래야지. 이번엔 남설아를 완전히 끝장내는 거야.”며칠 뒤, 서도현은 서유라의 지시에 따라 가짜 납치 현장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버려진 폐공장은 을씨년스럽고 허름했으며 곳곳에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했다.서도현은 몇 사람을 데려와 대충 청소한 뒤, 일부러 어질러진 흔적들을 남겨두어 실제 범행 장소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또한 몇 명의 사람들을 따로 준비시켜 연기에 협조하게끔 조율해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게 완벽한 장면을 연출하려 했다.한편 서유라는 다시 연기에 돌입했다.배서준 앞에서 의도적으로 혹은 무심하게 불안과 초조한 모습을 내비치기 시작했다.“서준아, 요즘 이상하게 계속 불안해. 밤에도 잠이 잘 안 와. 자꾸 악몽을 꿔.”서유라는 배서준 품에 기대 힘없이 말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이었다.그러자 배서준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감싸 안으며 다정하게 물었다.“회사 일 때문에 너무 지친 거 아니야? 며칠은 그냥 집에서 푹 쉬자.”이에 서유라는 고개를 저었으나 눈동자 속엔 날카로운 빛이 살짝 스쳤다.“회사 때문이 아니야. 그냥... 누가 날 지켜보는 느낌이 계속 들어. 그게 너무 꺼림칙하고 기분 나빠.”배서준은 이마를 찌푸리며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누가 널 지켜봐? 누가 그런 짓을 해?”서유라는 입술을 꼭 깨물고 말할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그
그 후 며칠 동안, 서유라와 서도현은 가짜 납치극의 세부 사항을 비밀리에 준비하기 시작했다.계획을 더욱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서유라는 배서준 앞에서 연기를 시작했다.“서준아, 요즘 괜히 불안해. 누가 계속 날 지켜보는 것 같고 설아 씨 쪽에서 또 뭔가 꾸미는 건 아닐까?”저녁 식사 후, 서유라는 배서준 품에 안겨 나직하게 말했다.그러자 배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서유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왜 그래? 요즘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런 거 아닐까?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아무 일도 안 생길 거야.”서유라는 고개를 저으며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마음이 자꾸 불안해.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이렇게까지 겁에 질려 있는 서유라의 모습을 보자 배서준은 더 안쓰러워져 다정하게 달랬다.“걱정하지 마. 내가 별장 경비 더 강화해둘게. 누구도 너한테 손 못 대게 할 거야.”서유라는 얼굴을 붉히며 목이 살짝 멘 듯 말했다.“서준아, 나 진짜 무서워. 저 사람들이 나한테 무슨 짓 할까 봐... 난 정말...”배서준은 그녀를 더 꼭 끌어안고 부드럽게 위로했다.“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네가 어떤 해도 입지 않게, 내가 꼭 곁에 있을 거야.”그 틈을 타 서유라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배서준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당연하지. 한 개가 뭐야, 백 개라도 말만 해.”서유라는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배서준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서준아, 당분간 나 혼자 두지 말아 줄 수 있어? 나 혼자 있으면 너무 무서워. 네가 계속 옆에 있어 줬으면 해.”그녀의 간절한 눈빛에 마음이 약해졌기에 배서준은 거절할 리 없었다.“알겠어. 이번엔 어디도 안 갈게. 그냥 집에만 있을게. 회사 일은 좀 미뤄도 돼.”이 말을 듣고 서유라는 감동한 듯 그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서준아... 고마워.”배서준은 서유라의 등을 다정히 쓰다듬으며 그녀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 품에 안긴 서
서유라는 소파로 걸어가 앉더니 천천히 물 한 잔을 따라 마신 뒤에야 입을 열었다.“그 여자가 수작을 부리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있어야지. 이명수는 이미 떠났고 증거도 없어. 그 여자 혼자서 뭘 어쩌겠어?”“말은 맞는데 그래도 난 좀 불안해. 남설아 쪽을 계속 감시하는 게 어때? 요즘 무슨 수작 부리는지 지켜보자고.”서도현은 조심스럽게 제안했지만, 여전히 조심해야 한다는 태도였다.서유라는 물잔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저었다.“감시해서 뭐 해? 지금쯤이면 남설아는 이명수 찾느라 정신없을 거야. 감시해봤자 소득도 없고 인력 낭비야.”“그럼 어떡해? 아무 대책도 없이 남설아가 들이닥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라고?”서도현은 조급한 듯 목소리가 높아졌다.서유라는 고개를 들어 서도현을 한번 째려보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렇게 흥분해? 나도 지금 생각하고 있잖아.”서도현은 그 눈빛에 움찔해 입을 닫았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서유라는 문득 입을 열었다.“도현아, 만약 우리가 남설아한테 더 큰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면? 그럼 걔가 이명수 쪽 신경 쓸 겨를이 없지 않을까?”“더 큰 문제?”서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누나, 무슨 말이야?”서유라의 눈빛에 음산한 기운이 스쳤고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그 여자가 이명수를 붙잡겠다고 저리도 애쓰는데 우리가 다른 문제를 하나 만들어주면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잖아.”“다른 문제라니? 누나, 빙빙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해봐. 궁금해서 못 견디겠단 말이야.”서도현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재촉했다.서유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서도현 앞에 섰고 목소리를 낮췄다.“도현아, 내가 만약 납치당하면 배서준은 어떻게 나올 것 같아?”“납, 납치?”서도현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제 귀를 의심했다.“누나, 미쳤어? 납치라니, 납치가 장난이야?”그러나 서유라는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미
“멍청한 놈!”서유라는 이를 악물며 서도현을 향해 쏘아붙였다.“10억이 뭐 대단한 줄 알아? 배씨 가문의 재산에 비하면 그깟 10억은 새 발의 피야. 이명수가 정말 우리를 뜯어먹을 생각이면 이건 시작일 뿐이야.”서도현은 서유라의 호통에 말문이 막혀 얼굴이 새하얘졌다.그제야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그럼 이제 어떡하지?”서도현은 당황해 목소리마저 떨렸다.“누나, 우리 이제 어떡해? 이명수가 배신해서 우릴 밀고라도 하면...”“닥쳐!”서유라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 말을 끊었다.“지금 와서 허둥대서 뭐가 달라져? 아직 최악의 상황까지 간 건 아니야.”그녀는 마음속으로 계속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남설아가 그렇게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하지만 요즘 배서준이 자신에게 점점 더 의지하고 더욱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을 느낄수록 서유라는 마음이 조금씩 놓이기도 했다.그 시각, 배서준은 사무실에서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남설아, 또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그는 보고서에 나온 내용을 확인하며 얼굴을 굳혔다.보고서에는 남설아, 강연찬, 그리고 송우민이 ‘이명수’라는 정신과 의사를 수소문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배서준은 물론 이명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그리고 남설아가 그를 찾는 이유도 짐작하고 있었다.“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별짓을 다 하네.”배서준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의사를 괴롭히고 헛소문까지 퍼뜨리고. 남설아, 넌 갈수록 역겨워진다.”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오르며 가슴까지 답답해져 왔다.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서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곧바로 연결되었고 서유라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준아, 무슨 일이야?”“유라야, 지금 어디야?”배서준은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며 화가 났다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조심했다.“집이야. 왜 그래?”서유라의 목소리에는 살짝 의아함이 섞여 있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닌가 해서.”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