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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작가: 운명의결
나리는 문을 닫고 귀에 이어폰을 끼웠다.

밖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미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이곳 일도 정리해야겠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깔끔히 마무리하고, 누구에게도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 쓰는 것이 나리의 마지막 목표였다.

그녀는 거실 한쪽에 있는 큰 창가에 앉아, 남아 있는 업무를 홀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창밖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주황빛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나리는 잠시 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네.’

나리는 이어폰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 시간 앉아 있었던 탓에 나리의 몸이 뻐근했지만, 그래도 이제 모든 일이 끝났다는 생각에 안도의 숨이 나왔다.

‘이제 정말 다 끝났어.’

아래층은 어느새 고요해져 있었다.

나리는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잠깐 쉬기로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호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언니, 왜 제 게시물에 ‘좋아요’ 안 눌렀어요?]

나리는 순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좋아요? 갑자기 웬...? 나는 어차피 항상 누르지도 않잖아.’

그런데 메시지를 보낸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 죄송해요, 언니. 제가 실수로 보냈어요. 화내지 마세요!]

‘무슨 의도지?’

나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호연의 메시지를 보고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는 호연의 SNS를 열어보기로 했다.

‘대체 뭘 올렸길래 ‘좋아요’를 눌러달라고 한 거지?’

SNS를 열자마자, 화면에 보이는 것은 화려한 사진 아홉 장이었다.

모두 석진과 은후가 호연에게 선물한 것들이었다.

가장 먼저 나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핑크빛 공주 드레스였다.

정교한 디자인의 드레스는 마치 핑크 구름처럼 펼쳐져 있었고, 옆에는 석진이 보낸 커스텀 메이드 크리스털 힐이 놓여 있었다.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빛을 반사하며 사치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사진 속에 있었다.

누가 봐도 은후가 선물한 것임이 분명했다.

많은 선물이 진열된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호연의 사진에서는 석진과 은후가 양옆에 서 있었다.

두 남자의 팔을 각각 양팔로 꼭 팔짱을 낀 채, 호연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짧은 캡션이 적혀 있었다.

[예!! 오늘은 나도 공주가 된 날!!]

나리는 화면을 응시하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축하한다. 네가 공주님이 되었구나.’

그녀는 핸드폰을 조용히 내려놓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은 이미 검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 정말 그 셋만의 세상이네. 나도 이젠 상관없어.’

나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호연이 일부러 이런 걸 올리는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을 자극하고 화를 돋우기 위해서라는 걸.

‘예전 같았으면 분명히 참지 못했겠지. 저런 가식적인 모습도, 석진이랑 은후가 나만을 위해 준비하던 것들을 이제는 알게 된 지 고작 한 달도 안 된 애한테 다 주는 것도.’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나는 곧 떠날 사람이야. 이젠 이런 거에 신경 쓸 필요도 없어.’

나리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손가락으로 화면을 툭 눌렀다.

호연의 게시물 아래 빨간 하트가 번쩍이며 ‘좋아요’가 눌러졌다.

‘앞으로 나는 석진이랑 은후랑 그냥 친구일 뿐이야. 그 어려운 선택은 이제 네가 알아서 해.’

...

다음 날, 나리는 회사에 가서 조용히 사직서를 제출했다.

모든 정리가 끝난 뒤 집에 돌아온 그녀는 방 한쪽에 있던 앨범들을 꺼냈다.

나리는 석진과 은후가 함께 찍은 사진들이 담긴 두꺼운 앨범은 무려 열 개가 넘었다.

앨범을 펼치자 어릴 적 기억이 쏟아졌다.

어린 시절, 석진과 은후가 나리와 소꿉놀이 하던 사진들.

중학교 시절, 세 사람이 함께 받은 상장을 들고 환히 웃고 있는 사진들.

대학교 때, 셋이 함께 여행을 다니며 남긴 사진들까지...

모든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땐 정말 즐거웠는데.’

나리는 천천히 사진들을 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진 한 장 한 장을 불길 속으로 던졌다.

사진이 타들어 가는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사진 위로 번지는 불길이 빠르게 나리의 모든 추억을 집어삼켰고, 마침내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다.

그때, 석진과 은후가 차례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나리가 하는 일을 목격한 두 사람은 순간 얼어붙었다.

석진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재빠르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남자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리는 석진을 흘긋 쳐다보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거 아니야. 사진에 곰팡이가 피었길래, 그냥 태워버리는 중이야.”

은후는 남아 있는 사진들을 빼앗으려고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손목을 살짝 흔들어 사진들을 모두 불 속에 던져버렸다.

불길이 순식간에 사진들을 집어삼키며, 두 사람에게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은후는 불길 속에서 아직 다 타지 않은 사진들을 구하려 손을 뻗었지만, 뜨거운 열기에 놀라 손을 금세 움츠렸다.

“곰팡이가 폈어도 그렇지, 이건 다 추억이잖아! 왜 태우는 건데!”

은후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눈가에는 붉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석진 역시 불길을 바라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으며 눈빛에서도 깊은 안타까움과 아픔이 느껴졌다.

그 말을 들은 나리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이렇게 눈 뜨고 살아 있는데, 그동안 서호연 때문에 나에게 몇 번이나 상처 줬으면서.’

‘이제 와서 고작 사진 몇 장에 이렇게 마음이 아프다니, 참 우습네.’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내가 결혼하겠다고 하면, 이 두 사람은 또 어떤 반응일까?’

나리의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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