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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아이만 중요해?

Author: 침서면
약을 받아 집으로 돌아온 송아진은 씻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피로에 눌려 금세 잠들었지만 새벽 다섯 시쯤 인기척에 눈을 떴다.

신주현이 돌아온 것이었다. 몸에선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진하게 풍겼고 그 냄새만으로도 그가 밤새 송지연 곁을 지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송아진은 못마땅하게 몸을 돌려 눈을 다시 감으려 했으나, 곧 신주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자. 여덟 시쯤 깨워서 병원 가서 전신 검사 받자.”

그 말에 남아 있던 졸음이 단숨에 날아가고 가슴속에서는 억눌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송아진은 몸을 반쯤 일으켜 싸늘한 눈빛으로 물었다.

“검사받으라는 게 내가 다친 게 혹시 임신에 문제라도 될까 봐 그런 거야?”

“지금은 임신 준비가 제일 중요한 때야. 그거보다 중요한 건 없어.”

신주현은 외투를 벗어 걸고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넓은 어깨와 자신감이 묻어나는 손동작, 단순히 단추를 푸는 행동조차 사람을 압도할 만큼 기묘하게 멋스러웠다. 그 손을 바라보던 송아진의 눈가가 저릿하게 시큰거렸다.

“아이 낳는 게 제일 중요하다니... 정작 중요한 건 송지연 아니야? 오늘 있었던 일은 설명할 생각도 없는 거야?”

목소리가 떨렸지만 분노와 서러움이 뒤섞여 더 단단했다. 신주현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짜증스러운 눈빛을 던졌다.

“지연이가 투석 거부하다가 응급실로 실려 갔어. 내가 안 갈 수는 없잖아.”

송아진은 물 한 모금 삼킨 뒤 비웃듯 고개를 들었다.

“걔는 부모도 있고 남자 친구도 있어. 네가 굳이 가야 했어?”

“아진아, 넌 결혼하고 나서 점점 더 날카로워졌어.”

신주현은 넥타이를 벗어 던지며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날카로워졌다고? 내가 정말 날카로웠으면 네가 무릎 꿇고 부탁했을 때 신장 안 줬겠지. 내 몸 떼어준 건 나고 내 인생 걸린 것도 나야. 그런데도 걔는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날 죽이려고 했잖아!”

쾅!

송아진은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벽으로 내던졌다. 그러자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며 긴장감이 방 안 가득 번졌다.

“신주현, 나 납치당했어! 병원에서도 다 들었잖아. 지연이가 사람 시켜 내 신장 빼가려 했다고! 나 이제 신장 하나뿐이야. 그 말은 날 죽이겠다는 거잖아!”

격앙된 목소리에 신주현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신주현의 품에서는 소독약 냄새와 함께 송지연이 즐겨 쓰던 향수 향까지 섞여 나왔고 그 역겨운 조합이 송아진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신주현은 송아진의 머리칼을 쓸며 낮게 말했다.

“그냥 살고 싶었던 거야. 순간적으로 정신이 나갔던 거지.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송아진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난 죽을 뻔했는데 그게 네 입에서는 그냥 한마디로 끝낼 일이야?”

“널 위험하게 두진 않아.”

신주현은 송아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붉어진 눈을 내려다봤다.

송아진은 눈물이 차오르는 시야 너머로 그를 노려보며 무너져 내리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널 보고 있으면 가끔은 내가 사랑받는 것 같아 착각하다가도, 또 어떤 때는 날 죽이려는 악마처럼 보여. 너,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제발... 말 좀 해.”

신주현은 대답 대신 송아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거친 손끝으로 눈가의 눈물을 훑으며 낮게 속삭였다.

“난 널 해치지 않아. 이젠 자.”

...

그날 밤, 송아진은 끝내 잠들지 못했다. 겨우 아침 일곱 시가 넘어 꾸벅꾸벅 졸다 눈을 뜨자, 초인종 소리가 울렸고 마 집사가 1층으로 내려가 문을 열었다.

옷을 챙겨 입고 내려가려던 순간, 막 잠에서 깬 신주현이 그녀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너 경찰에 신고했어?”

송아진은 고개를 들어, 졸린 기운이 가시지 않은 신주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겨우 두 시간밖에 못 잤네. 고생 많았겠다.”

“장난하지 말고 대답해.”

신주현의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가 팔이 으스러질 만큼 아팠다.

송아진은 억눌린 숨을 몰아쉬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어제 난 죽을 뻔했어. 그런 상황에서 신고도 못 해?”

“무슨 일이든 집안에서 해결하면 되잖아. 너희는 자매잖아.”

신주현의 말투에는 질책이 묻어 있었고 그 태도가 더욱 불쾌하게 다가왔다.

송아진은 팔을 세게 뿌리치며 차갑게 웃었다.

“분명히 해둘게. 우린 이부자매일 뿐이야. 난 걔랑 아무런 피도 섞이지 않은 남이야.”

송아진은 단호하게 말하고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

경찰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다행히 송아진의 스마트워치에는 녹음 기능이 있어, 어제 위기를 느낀 순간부터 모든 대화가 기록돼 있었다.

송아진은 시계를 경찰에게 넘기고 간단히 진술한 뒤, 경찰은 곧 돌아갔다.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던 중, 신주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피커폰은 아니었지만 전화기 너머로 물건 부서지는 소리와 날카로운 울음이 어렴풋하게 흘러나왔다. 아마 경찰이 병원에서 송지연을 찾아간 모양이었다.

“조금만 참아. 넌 안 죽어.”

신주현은 그렇게 송지연을 달래고 있었다.

송아진은 고개를 돌려 애써 무시한 채 집 안 화실로 향했다.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등줄기에 차가운 소름이 돋았다.

이젤 위의 그림은 그대로였으나, 정면 벽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유화 물감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방은 말끔하게 정리된 듯 보였지만 분명 누군가 마구 뒤집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분노가 치밀어 고개를 홱 돌리는 순간, 눈앞에 신주현이 서 있었다. 송아진의 콧등이 그의 가슴에 부딪히며 코끝이 시큰해졌다.

송아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신주현을 노려봤다.

“내 물감 어디 있어?”

“마 집사한테 다 치우라고 했어.”

“네가 무슨 권리로 내 물건을 함부로 버려?”

송아진의 가슴속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신주현은 여전히 태연했다.

신주현은 피곤함에 젖은 얼굴로 무심하게 마치 대수롭지 않은 얘기를 꺼내듯 가볍게 말했다.

“물감은 냄새가 강하잖아. 임신 준비하는 네 몸에도 안 좋고 나중에 임신하면 더 해로워. 너도 아이가 건강하길 바라잖아.”

송아진의 머릿속이 쿵 하고 울리며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송아진은 참지 못하고 낮게 울부짖었다.

“또 애, 또 애! 대체 왜 그렇게 애를 낳으라 하는 거야? 신주현, 너 지금 내가 너랑 애를 가져야 한다는 말을 할 때 얼마나 차갑고 기계처럼 들리는지 알아? 거기에는 따뜻함도 없고 다정함도 없어. 그냥 의무처럼, 로봇처럼 말하는 거라고!”

정말 사랑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마치 아이를 갖는 게 그저 계획에 맞춰진 ‘해야 할 일’인 것처럼 들렸다.

그 순간 신주현이 손을 뻗어 송아진의 손목을 꽉 움켜쥐며 되받았다.

“그럼 넌? 넌 나랑 할 때 진심이었어? 넌 늘 시큰둥하고 무심하게 날 대했잖아.”

송아진은 얼굴이 굳어졌다.

“뭐라는 거야, 지금?”

“어젯밤 병원에서 네 상처 치료해 준 건 고지훈이었잖아.”

송아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맞받았다.

“지훈이는 응급의학과 의사야. 치료해 준 게 당연하지, 내가 의사까지 골라야 돼?”

“남성에는 병원이 그렇게 많은데 왜 하필 세광대학병원이야? 그날 마침 고지훈이 근무 중이었고?”

송아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고 입술만 달싹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거야?”

고지훈은 송아진이 보육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였다. 엄마가 뛰어내려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가 송지연의 엄마와 재혼했을 때, 겨우 여덟 살이던 송아진은 보육원에 버려졌다.

그곳에서 7년을 보냈고 네 살 위였던 고지훈이 곁에 없었다면 아마 견디기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넌 내 아내야. 고지훈이랑은 선 그어.”

신주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송아진도 지지 않았다.

“좋아, 그럼 너도 내 남편이잖아. 그러니까 송지연이랑은 선 그어.”

순간 신주현의 눈빛이 매섭게 흔들렸다. 그 안에는 도저히 눌러 담을 수 없는 분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건 달라.”

신주현은 한 단어씩 힘주어 내뱉었다.

“뭐가 달라? 난 고지훈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깨끗하다고.”

신주현의 눈은 벌겋게 충혈됐고 잘생긴 얼굴에는 억누를 수 없는 고통이 번졌다.

“아직도 고지훈을 좋아한다면... 애초에 신장 떼주고 나랑 결혼할 필요도 없었잖아.”

송아진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고지훈을 좋아했다고? 내가 미쳐서 멀쩡한 몸에 칼 댔을까? 난 송지연을 구하려고 그랬던 게 아니야. 널 위해서였다고! 네가 그때 무너져가는 거 보고 차마 외면 못 했던 거야.”

송지연이 병에 걸린 뒤, 신주현은 완전히 무너져 술과 절망에 빠져 있었다. 송아진은 그런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어 결국 자신의 신장을 내주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주현은 비웃듯 낮게 말했다.

“넌 정말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지.”

신주현은 손을 뻗어 송아진의 목과 얼굴의 상처를 천천히 훑었다.

손끝은 거칠었고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젯밤 상처 치료 말고... 고지훈이랑 또 뭐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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