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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식은 차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31 19:35:46

아이의 경사가 반포된 뒤로, 황후 하문정은 내명부의 눈을 조용히 조였다.

섭정왕비의 산실이 될 자리, 드나들 손, 올라올 음식. 그 모든 것에 황후의 눈이 닿았다. 며느리가 청한 방패를, 황후는 말없이 함께 들고 있었다.

황후가 그 방패를 함께 든 데에는, 며느리의 곧음을 본 것 말고도 다른 까닭이 있었다. 그 까닭은, 곤원전의 오래된 어둠 속에 있었다.

*

밤에, 경화제가 곤원전에 들었다.

오랜만의 걸음이었다. 요즘 황제의 밤은 청화각의 젊은 후궁 쪽으로 자주 기울었고, 곤원전의 등은 자주 홀로 꺼졌다.

젊은 후궁의 웃음은 가볍고 밝았고, 곤원전의 침묵은 오래되고 무거웠다. 황제는 가벼운 쪽으로 자주 기울었으나, 무거운 쪽을 아주 버리지는 못했다.

황후는 그 걸음을 반기지도, 내치지도 않았다. 식은 차를 새로 우리려 하자, 경화제가 손을 저었다.

"식은 대로 두어라. 오래 앉을 것은 아니다."

*

"지헌의 아이를, 지켜 주어 고맙소."

경화제가 낮게 말했다.

"고마울 것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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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19. 마주 앉다

    옛 산실이 열리자, '연'은 궁 안에서 자취를 감췄다.그러나 이번에는, 자취를 감출 자리가 없었다.월령은 옛 산실을 열기 전에, 이미 궁의 문마다 사람을 세워 두었다. 강무진이 성문 밖을, 설련이 내명부의 안쪽을 살폈다. '연'이 옛 산실에서 몰려 나오면, 그 발이 어디로 가는지 보려는 것이었다.*설련이, 그 늙은 후궁의 자취를 곤원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옛 별당에서 찾았다.버려진 별당이었다. '연'은 옛 산실을 떠나, 또 다른 잊힌 자리로 옮겨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자리의 문마다 월령의 사람이 서 있었다.숨을 자리가 없어진 '연'은, 도망치지 않았다.도리어, 그 별당의 문을 스스로 열었다.*월령이 그 별당으로 향할 때, 위지헌은 내명부의 경계 앞에 섰다.거기까지가, 그의 걸음이 닿는 자리였다. 사내의 걸음은 그 안으로 들지 못했다. 두 생에 걸쳐 '연'이 숨어 온 자리가, 바로 그 사내의 손이 닿지 않는 자리였다."…혼자, 괜찮겠느냐."위지헌이 낮게 물었다. 아내를 그 안으로 홀로 들여보내는 것이, 그의 얼굴에 오래된 아픔으로 스쳤다.전생에, 그는 그 경계 밖에서 늦었다. 이번 생에도, 그는 그 경계 앞에 서 있었다."괜찮아요."월령이 낮게 답했다."이번에는, 제가 걸어 들어가는 거예요. 끌려가는 게 아니라."*별당 안에, 늙은 후궁이 앉아 있었다.주름진 얼굴이었다. 종묘에서 위지헌과 눈을 마주친 그 얼굴. 붉은 꽃을 들고 형장을 지켜보던, 그 얼굴.월령이 그 앞에 섰다.두 생 만에, 처음으로 마주 보는 얼굴이었다. 전생에 월령은, 이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죽었다. 이번 생에, 그 얼굴을 살아서 마주 보고 있었다."…앉으시지요."늙은 후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 별당에 든 손님을 맞듯, 고요한 목소리였다.*월령은 앉지 않았다."당신이, '연'이군요.""'연'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하지 않았소."늙은 후궁이 옅게 웃었다."다만 지금은, 내가 그 이름을 쓰고 있소."월령의 손끝이 식었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18. 곤원전으로

    월령이 곤원전에 든 것은, 이튿날 낮이었다.회임한 몸으로 궁에 드는 걸음이라, 황실의 호위가 앞뒤로 섰다. 그러나 그 걸음의 진짜 무게는, 호위가 아니라 월령이 품은 셈에 있었다.황후 하문정이, 그 걸음을 맞았다.곤원전에는 약 달인 냄새가 옅게 배어 있었다. 오래전 이 처소에서, 한 아이가 앓다 갔다. 그 냄새가 아직 벽에 남아 있는 듯했다.*"산실을, 곤원전 곁에 두고 싶다고?"황후가 물었다."예, 마마."월령이 낮게 아뢰었다."법도가 정비의 산실을 궁 안에 두라 하니, 저는 그 법도를 따르겠습니다. 다만, 그 산실을 마마의 눈이 닿는 자리에 두기를 청합니다."황후는 그 청을 오래 들었다.이 영리한 며느리가, 왜 제 산실을 굳이 곤원전 곁에 두려 하는지. 황후는 그 뜻을 어렴풋이 읽었다. 이 아이를 지우려는 손이, 궁 안에 있다는 것을.황후는 그것을 소리 내어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것이, 며느리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었다.*"…네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나는 다 묻지 않으마."황후가 낮게 말했다."다만, 이 자리에서 아이를 낳겠다면, 이 자리가 그 아이를 지키마."월령은 그 말에, 고개를 깊이 숙였다.황후에게는, 오래전 지키지 못한 아이가 하나 있었다. 그 아이를 잃은 자리에서, 다른 아이를 지키겠다는 말이었다. 부질없는 마음인 줄 안다던 그 마음을, 황후는 이제 부질없지 않게 쓰고 있었다.며느리의 산실을 곤원전 곁에 두는 것은, 황후에게도 하나의 회수였다. 지키지 못한 아이의 자리 곁에서, 이번에는 한 아이를 지켜 내는 것.*며칠 뒤, 어전에서 명이 내렸다.정비의 산실을 정하는 데, 오래 비운 자리의 부정을 먼저 씻으라는 명이었다. 궁 안의 옛 산실들이 하나씩 열려, 정갈히 닦였다.그 가운데, 오래 잊힌 옛 산실 하나가 있었다.늙은 후궁이 숨어든, 바로 그 자리였다.월령이 그 자리를 산실 후보에 넣은 것은, 아이를 거기서 낳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자리를 열어, 숨은 얼굴을 끌어내려는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17. 세 번째 길

    "거절하면 흠이 되고, 순종하면 덫이라면."월령이 낮게 말했다."그 산실을, 저들의 것이 아니라 우리 것으로 만들면 돼요."위지헌이 그녀를 보았다."…어떻게.""법도는, 정비가 궁 안에서 몸을 푼다는 데까지만 정해요. 그런데 어느 처소를 산실로 쓸지, 누가 어의와 산파를 대고 누가 지킬지는—법도가 정하지 않았어요. 저들은 제가 그걸 모른 채, 저들이 정한 자리로 들 거라고 여기고 있어요.""…네가 그 자리를 고른다는 말이냐.""네."*월령은 그 밤, 두 가지를 그렸다.하나는, 제가 들 산실을 '연'이 숨은 옛 산실이 아니라 황후의 곤원전 곁으로 삼는 것. 아이를 낳는 자리를 황후의 눈이 밤낮으로 닿는 자리에 두면, '연'의 손이 함부로 들지 못했다.하나는, 오래 쓰지 않은 옛 산실을 여는 것이었다."정비의 산실을 정할 때는, 오래 비운 자리의 부정부터 씻는 게 법도예요. 옛 산실은 오래 비어 있었으니, 산실 후보로 올리면 반드시 열어 씻어야 해요. 그 자리를 열면—""…그 안에 숨은 자가, 드러난다."위지헌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막지 말고 세라던 말이, 여기까지 자랐다. 지난겨울 위지헌이 '연'의 눈을 뽑지 않고 돌려 쓴 것처럼, 이번에는 월령이 저들의 법도를 뽑지 않고 돌려 쓰려 했다. 저들이 그녀를 가두려 세운 법도가, 저들의 숨은 얼굴을 끌어내는 손이 되는 것이었다.*월령은 그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았다.전생에 '연'은, 궁의 법도를 써서 월령을 고립시켰다. 이번 생에 월령은, 같은 법도를 써서 '연'을 몰아내려 했다.같은 도구였다. 다만, 쥔 손이 달랐다."전생에 저는, 저를 가둔 그 법도가 뭔지도 몰랐어요."월령이 낮게 말했다."이번 생에는, 그 법도를 제가 쥐어요. 저를 가두려던 자리에서, 저 사람을 끌어내는 거예요."위지헌은 그녀를 오래 보았다.회임한 몸으로, 두 생을 건너온 여인이 다시 셈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셈이 그녀를 가두는 셈이 아니라 그녀가 쥔 셈이었다.위지헌은 그 셈이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16. 산실

    "…그 후궁이 숨은 곳은, 궁의 가장 깊은 곳입니다."강무진이 낮게 말했다."오래 쓰지 않아 잊힌, 옛 산실 자리입니다."월령의 손끝이 더 차게 식었다.산실. 아이를 낳는 자리였다. 그 여인이, 궁의 옛 산실에 숨어 있었다.*같은 날, 왕부에 조정의 기별 하나가 닿았다.내명부의 오랜 법도라 했다. 황실의 경사를 밴 정비는, 산실을 궁 안에 차려 몸을 푸는 것이 예라는 것이었다. 배중곤 같은 원로들이, 그 법도를 앞세워 상소를 올렸다.말은 그럴듯했다. 귀한 몸을 궁의 어의와 산파가 곁에서 돌본다는 것이었다. 거절하면, 황실의 법도를 어긴다는 흠이 되었다.*월령은 그 두 소식을, 나란히 놓았다.'연'이 옛 산실에 숨었다는 것. 그리고 조정이, 정비의 산실을 궁 안에 차리라 청한다는 것.두 소식이 겹치는 자리에서, 서늘한 그림이 하나 떠올랐다.만약 월령이 그 법도를 따라 궁 안 산실로 든다면, 그것은 '연'이 숨은 그 깊은 곳으로 제 발로 걸어드는 것이었다. 순검도, 왕부의 눈도, 위지헌의 손도 닿지 않는 자리로. 아이를 낳느라 가장 무력해지는 그 순간에.*전생의 그림과, 똑같았다.전생에도, 월령은 궁 안 깊은 곳에 고립되어 있었다. 곁에 아무도 없었고, 위지헌은 늦었다. '연'은 그 고립을 만들어, 어머니를 죽이고 월령을 죽였다.그때 월령은, 제가 어떤 그림 안에 갇혔는지도 모른 채 갇혔다. 이번 생에는, 그 그림이 다 그려지기 전에 보았다.이번 생에 '연'은, 같은 고립을 다시 짓고 있었다. 산실이라는 이름으로.이름만 바뀌었을 뿐, 짜임은 같았다. 고립을 만들고, 곁을 비우고, 가장 무력한 순간을 노리는 것. '연'은 두 생에 걸쳐, 같은 명부에 같은 방식을 적어 온 손이었다.'또, 늦으셨습니다.'종묘에서 그 여인이 지은 입 모양이, 이제야 온전히 읽혔다. 그 여인은, 이번 생에도 위지헌을 늦게 만들 셈이었다. 월령을 그의 손이 닿지 않는 자리로 빼내어.*밤에, 월령은 위지헌에게 그 그림을 옮겼다."저를 궁 산실로 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15. 배 위의 손

    밤마다, 위지헌은 잠들기 전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아직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두 달 남짓한 몸이라, 배도 겨우 옅게 부풀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매일 밤 그 자리에 손을 얹었다."…아직 아무것도 없다면서요."월령이 옅게 웃었다."없어도, 얹어 두면 안다.""뭘요.""내가 여기 있다는 걸."월령은 그 말에,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그의 손은 따뜻했다. 전장의 굳은살이 박인 손인데도, 그 자리에서는 늘 따뜻했다. 그 온기가 아직 오지 않은 아이에게도 닿기를, 월령은 가만히 바랐다. 아직 오지 않은 아이에게, 아비가 매일 밤 제가 여기 있다고 이르고 있었다.전생에, 위지헌은 이 배 위에 손을 얹어 본 적이 없었다. 두 생을 통틀어, 이런 밤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밤, 그 처음을 반복했다. 잃을까 두려운 사람일수록, 있는 동안을 더 오래 만졌다.*"부군은, 아들이 좋아요, 딸이 좋아요.""…모르겠다.""두 생을 사셨는데, 그것도 몰라요?"월령이 지난봄, 단 것을 좋아하는지 물었을 때와 같은 농을 했다. 위지헌의 입가가, 그때처럼 오래 움직였다."…무엇이든."그가 낮게 말했다."무사히 오기만 하면 된다."그 말끝에, 옅은 그늘이 스쳤다. 무사히 오기만 하면. 그 '무사히'가, 이 봄에는 당연한 말이 아니었다.당연한 말이 당연하지 않은 봄이었다. 여느 부부라면 아이가 무사히 오는 것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그 무사함을 두 생을 건너온 손에서 지켜 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여느 부부가 그냥 흘려보내는 밤들을 하나하나 눌러 담았다.*'연'은, 그 무사함을 노리고 있었다.전생에 어머니를 죽이고 월령을 죽인 그 여인이, 이번 생에는 이 아이의 무사함을 노렸다. 두 사람이 매일 밤 배에 손을 얹고 이르는 그 작은 안부를, 어둠 속에서 지우려 하고 있었다.위지헌은 그 어둠을 향해, 낮게 되뇌었다."두 번은, 늦지 않는다."월령은 그 말을, 어둠 속에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14. 식은 차

    아이의 경사가 반포된 뒤로, 황후 하문정은 내명부의 눈을 조용히 조였다.섭정왕비의 산실이 될 자리, 드나들 손, 올라올 음식. 그 모든 것에 황후의 눈이 닿았다. 며느리가 청한 방패를, 황후는 말없이 함께 들고 있었다.황후가 그 방패를 함께 든 데에는, 며느리의 곧음을 본 것 말고도 다른 까닭이 있었다. 그 까닭은, 곤원전의 오래된 어둠 속에 있었다.*밤에, 경화제가 곤원전에 들었다.오랜만의 걸음이었다. 요즘 황제의 밤은 청화각의 젊은 후궁 쪽으로 자주 기울었고, 곤원전의 등은 자주 홀로 꺼졌다.젊은 후궁의 웃음은 가볍고 밝았고, 곤원전의 침묵은 오래되고 무거웠다. 황제는 가벼운 쪽으로 자주 기울었으나, 무거운 쪽을 아주 버리지는 못했다.황후는 그 걸음을 반기지도, 내치지도 않았다. 식은 차를 새로 우리려 하자, 경화제가 손을 저었다."식은 대로 두어라. 오래 앉을 것은 아니다."*"지헌의 아이를, 지켜 주어 고맙소."경화제가 낮게 말했다."고마울 것 없습니다. 지킬 만한 것을 지키는 것뿐이니."황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담담한 목소리 아래로, 오래된 것이 지나갔다.경화제도, 그것을 알았다.두 사람에게는, 지키지 못한 아이가 하나 있었다. 오래전, 첫아이였던 대황자. 그 아이를 잃은 뒤로, 두 사람 사이에는 메우지 못한 자리가 하나 생겼다.그 자리를,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견뎠다. 황제는 아름다운 것을 넓게 사랑하는 것으로, 황후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척하는 것으로. 사랑과 원망이, 한 자리에 오래 함께 살았다.*"…그 아이를 지키는 것이."황후가 낮게 말했다."제가 못 지킨 아이를, 뒤늦게 지키는 것 같아서요. 부질없는 마음인 줄 압니다."경화제는 그 말에, 오래 답하지 못했다.젊은 후궁의 웃음을 좋아하는 황제였다. 아름다운 것을 넓게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곤원전에, 그가 오래 갚지 못한 빚 하나가 있다는 것도 그는 알았다.그가 식은 찻잔을 들었다. 차게 식은 차를, 그대로 한 모금 넘겼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0. 붓끝

    심서윤은 그 밤 잠들지 못했다.자녕궁에서 받은 작은 붓은 베개맡에 놓여 있었다. 흰 붓대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떠 보였고, 끝에 매인 금실은 등잔불이 사라진 뒤에도 혼자 빛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다.서윤은 옆으로 누웠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방 안은 조용했다. 창밖에서는 밤새 젖은 살구꽃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멀리 행랑채 쪽에서는 늦게 돌아온 하인이 물동이를 내려놓는 낮은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그런 소리들이 집의 숨처럼 느껴졌을 것이다.오늘은 모든 소리가 자신을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았다. 마마께서 다시 부르실까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9. 잔

    태후의 초대장은 향이 없었다.그 사실이 먼저 심가를 조용하게 만들었다.아침 부엌에서는 멥쌀 씻는 물소리가 나고, 무쇠솥 가장자리에는 지난밤 끓여 둔 닭죽의 기름이 얇게 굳어 있었다. 행랑 쪽에서는 하인들이 장작을 패며 낮은 농담을 주고받았고, 마구간에서는 젖은 짚을 갈아내는 냄새가 느리게 흘러왔다.어제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그런데 검은 칠을 한 죽간 하나가 대문을 넘자, 집 안의 모든 소리가 반 박자씩 늦어졌다.칼을 갈던 호위가 손을 멈췄고, 죽을 푸던 계집종은 국자의 끝을 솥 가장자리에 대고 오래 움직이지 못했다. 살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8. 문턱

    아침빛은 얇았다.밤새 창을 열어 두었기 때문인지 방 안에는 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연꽃 향도, 난향도, 사람의 판단을 늦추던 희미한 쓴내도 모두 빠져나가고 없었다.대신 창가에는 말린 살구꽃 한 줌이 놓여 있었다.누가 두고 갔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청아는 그것을 보자마자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웃음을 참는 얼굴과 울음을 참는 얼굴이 이상하게 닮을 수 있다는 것을, 월령은 그때 처음 알았다."왕부에서 보낸 거예요."청아는 아주 작게 말했다.왕부.그 두 글자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다시 낮아지는 듯했다. 월령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7. 숨

    심가의 아침은 낮은 소리들로 가득했다.지하 창고가 비었다는 말은 아직 누구의 입에서도 크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물동이가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내려앉고, 회랑을 쓸던 하인의 빗자루가 같은 자리에서 두 번 멈추고, 부엌의 계집종들이 죽 솥을 젓다 말고 서로의 눈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큰 집의 소문은 늘 사람보다 먼저 일어난다.쌀을 씻는 물소리,말에게 여물을 붓는 소리,행랑채 문고리가 바람도 없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그 작은 것들이 밤사이 심가에 무엇이 지나갔는지 먼저 알렸다.안에서 잠긴 문.끊어지지 않은 밧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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