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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 막실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4 22:52:50

막실이, 월령 앞에 꿇렸다.

늙은 반빗아치였다. 삼십 년을 왕부의 반찬거리를 대 온 손이, 잘게 떨렸다.

월령은, 그 떠는 손을 오래 보았다. 그 손이 삼십 년간 이 집의 밥을 지었다. 그 손이, 이제 이 집을 판 종이를 날랐다.

월령은, 그 손을 벌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 손이 왜 떨리는지를, 먼저 알고 싶었다.

*

"…누가, 시켰지."

월령이 낮게 물었다.

막실은, 오래 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제 손자가, 그 사람들 손에 있습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작은 종이 하나 날라 주면, 손자를 살려 준다 했습니다. 큰일도 아니라고… 그저, 왕부 안의 소식 몇 줄이라고요."

막실의 목소리가, 잘게 부서졌다.

"손자밖에… 없습니다. 그 아이 하나 살리자고, 제가 밥 먹인 집을 팔았어요. 죽어 마땅한 년입니다."

막실이, 제 손으로 제 뺨을 한 번 쳤다.

늙은 손이 늙은 뺨을 치는 소리가, 방 안에 낮게 울렸다. 월령은 그 손을 말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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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39. 후사라는 말의 뒤

    이튿날, 월령은 그 '후사'라는 말을 다시 들여다보았다.*저들의 명분은, 후사가 없어 왕가가 위태롭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왕가의 후사를 정말로 끊으려 한 손은, 따로 있었다. 두 생에 걸쳐 어머니를 죽이고, 월령을 죽이고, 봄이 태어나던 밤 산실에 독향을 들인 손. 자녕궁의, 그 손이었다.숙비가 병을 칭해 닫아건 그 처소에서, 두 생에 걸쳐 같은 명부가 나왔다. 이번 생에도 그 손은, 같은 끝을 그리려 했다.월령은 이번엔, 그 손이 붓을 놀리기 전에 종이를 빼앗을 셈이었다."…저들은, 후사가 없다고 걱정하는 척하면서."월령이 낮게 말했다."정작 그 후사를 지우려는 손과, 한 줄로 이어져 있어요."*위지헌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한쪽은 아들이 없다 흔들고, 한쪽은 그 아들이 오기도 전에 지우려 했다. 겉으로는 정반대의 말이었으나, 두 손이 노리는 것은 하나였다. 섭정왕가의 대를, 끊는 것.월령은 그 두 손을, 한 자리에 놓고 보았다. 측실을 들이라는 말과, 아이를 지우려는 향. 따로 보면 남남이었으나, 함께 보면 한 몸이었다."…노예원과, 자녕궁이.""같은 자리에서 나온 손이에요. 하나는 측실로 안을 흔들고, 하나는 향으로 대를 끊고."*월령은, 막실이 나르는 종이에 한 줄을 얹었다.'섭정왕비가, 측실 말을 받아들이려 한다. 아들을 못 낳은 것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거짓이었다. 그러나 그 거짓을, 저쪽이 참으로 믿으면.월령은, 제가 흔들린다는 그림을 스스로 그렸다. 아들을 못 낳아 자리를 위협받는, 흔한 정비의 그림. 저쪽이 오래 봐 온 익숙한 그림이었다. 익숙한 그림일수록, 의심 없이 믿었다.월령은, 저쪽이 오래 봐 온 그 그림을 도로 그려 저쪽에게 돌려주었다. 참처럼 보이는 거짓 한 장을.그 한 장이 자녕궁까지 가 닿으면, 저쪽은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저쪽이 그 말을 믿으면, 무슨 일이 생기오."위지헌이 물었다."방심해요."월령이 낮게 말했다."제가 흔들린다 믿으면, 노예원은 서둘러 제 조카를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38. 너 하나다

    위지헌이, 그녀의 곁에 앉았다.잠든 봄을, 그가 조심스레 받아 유모에게 넘겼다. 방문이 닫히고, 방 안에 두 사람만 남았다.측실이라는 말이 온 조정을 채운 밤에, 그 방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위지헌은 그 둘뿐인 자리에서 저들의 말에 답할 셈이었다. 말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이 아이가 딸이라서 저들이 그러는 거라면, 제가 부군께—""령아."위지헌이 그 말을 끊었다.그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말을 더 잇지 못하게."나는, 대를 이으려고 너를 안는 게 아니다."*그 말과 함께, 그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깊었다. 그녀의 입에서 '못 드려서' 같은 말이 다시 나오지 못하게, 오래. 월령의 말이, 그 입맞춤 안에서 흩어졌다."…부군.""아들이든 딸이든."그가 숨 사이로 낮게 말했다."나는 너를 안는다. 후사가 아니라, 네가 너라서."그 말이, 월령의 안에서 오래 얼어 있던 것을 녹였다. 딸을 낳아 죄스럽던 마음이, 그 한마디에 조금씩 풀렸다.*그의 손이, 그녀의 옷고름으로 갔다. 급하지 않았다. 다만, 물러설 기색도 없었다.월령의 등이, 등불 아래로 천천히 눕혀졌다. 그 위로, 위지헌이 몸을 기울였다. 그의 무게가 닿을 때마다, 월령의 숨이 한 번씩 얕아졌다.무섭지 않았다. 두 생을 건너 처음으로, 무게 하나가 이렇게 든든한 밤이었다."저들이 뭐라 하든."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낮게 말했다. 이름을 부르는 자리마다, 열이 번졌다."이 자리에, 다른 사람은 안 들인다. 두 생을 통틀어, 너 하나다."*월령의 눈시울이, 열기 속에서 옅게 젖었다.그 젖음을, 위지헌이 입술로 지웠다. 눈가에서, 관자놀이로. 관자놀이에서, 다시 입술로. 지우는 손길이, 뜨거우면서도 다정했다.월령은 그 손길 아래, 오래 굳어 있던 어깨의 힘을 풀었다. 죄스럽다는 마음도, 못 낳았다는 마음도. 그 밤 그의 품 안에서 하나씩 녹아 없어졌다.남은 것은, 그를 향한 뜨거움 하나뿐이었다.월령은 그 밤, '못 드려서'라는 말을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37. 들이지 않는다

    그날 밤, 위지헌도 그 말을 들었다.강무진이 조심스레 아뢰었다. 조정에 도는 말과, 측실 후보로 오르내리는 이름들을. 노예원의 조카가 그 가운데 있다는 것까지.위지헌의 눈썹이, 그 이름에서 한 번 굳었다. 노예원의 조카라면, 그 규수의 뒤에 무엇이 서 있는지는 물을 것도 없었다.*위지헌은, 오래 듣지 않았다."들이지 않는다."한마디였다."…왕야. 후사가 걱정된다는 명분이라, 조정에서 자꾸 밀어붙이면—""들이지 않는다. 두 번은, 없다."위지헌의 목소리가 낮았다. 그러나 그 낮음이, 강무진의 다음 말을 막았다.강무진은, 더 아뢰지 못했다. 왕야가 저 목소리를 낼 때는 무슨 말도 소용없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다만 물러나면서, 그 마다함이 조정에서 어떤 말이 되어 돌아올지를 걱정했다.*그러나 위지헌도, 그 마다함의 값을 알았다.섭정왕이 후사를 위한 측실마저 마다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트집이 되었다. 산실 문을 넘은 일이 그러했듯이. 저들은, 그의 모든 마다함을 주워 칼로 벼렸다.그러나 위지헌은, 그 트집이 무서워 측실을 들일 사람이 아니었다. 트집은 견디면 됐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이 자리에 월령 아닌 다른 사람이 앉는 것이었다.들여도 덫이고, 안 들여도 트집이었다. 노예원은, 그 두 갈래를 다 재 놓고 이 말을 흘린 것이었다.한쪽 문으로 들어오면 안을 흔들고, 그 문을 닫으면 밖에서 트집을 잡고. 어느 쪽이든, 노예원은 잃을 것이 없는 수를 두었다.*위지헌이, 안채로 들었다.월령은 봄을 재우고 있었다. 등불 아래, 작은 것이 그녀의 팔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어린 숨이 오르내리는 결이, 방 안에서 가장 고요한 것이었다.그 고요한 숨 하나를 지키자고, 밖에서는 온 조정이 시끄러웠다. 위지헌은 문가에서, 그 대비를 오래 보았다.위지헌은 그 모습을 문가에서 잠깐 보았다. 그리고 낮게 불렀다."…령아.""…들으셨어요."월령이, 고개를 들지 않고 물었다."들었다.""어찌하실 거예요.""이미 말했다. 들이지 않는다고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36. 대를 잇는다는 말

    봄이 태어난 지 두 달이 지났을 무렵, 조정에 한 가지 말이 돌기 시작했다.섭정왕가에, 아직 아들이 없다는 말이었다.*말은, 곱게 시작되었다.섭정왕이 나라의 큰 기둥이니, 그 대를 이을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 정비가 딸을 낳았으니, 이제 측실을 하나 들여 아들을 보아야 한다는 것. 종친의 도리이자, 나라의 안정이라는 것.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더 위험한 말이었다. 옳은 말의 탈을 쓴 것일수록, 물리치기가 어려웠다.곱게 시작된 말일수록, 뒤가 사나웠다. 그 말의 뒤에는, 노예원이 있었다.노예원은, 산실에서 한 판을 지고도 물러서지 않은 여인이었다. 힘으로 밀고, 법도로 흔들고, 이번에는 후사라는 이름으로 안을 파고들었다. 지는 자리마다, 그 여인은 새 명분을 하나씩 갈아 끼웠다.이번 명분은, 앞의 것들보다 질겼다. 후사라는 말은, 왕가 스스로도 함부로 물리치기 어려운 말이었으니까.*노예원은, 제 사람들을 움직였다.몇몇 종친 부인이, 황후에게 넌지시 아뢰었다. 섭정왕가의 후사가 걱정된다고. 마침, 참하고 문벌 좋은 규수가 여럿 있다고.측실 후보의 이름까지, 이미 입에 오르내렸다. 그 가운데, 노예원의 먼 조카 하나가 있었다. 곱고 어린 규수라 했다.아직 열예닐곱이나 되었을까 싶은 규수였다. 그 어린 규수가 노예원의 손에서 어떤 패로 쓰일지, 규수 자신은 아직 모르는 얼굴이었다.*황후가, 그 말을 월령에게 전했다."…네 귀에도 들어가는 게 낫겠다 싶어, 부른다."황후가 낮게 말했다."섭정왕가에 측실을 들이자는 말이, 돌고 있다."월령은,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놀라지 않았다. 노예원이 딸의 소식을 듣던 그 밤부터, 올 것이 온 것뿐이었다.'딸이라, 대를 이을 아들 자리는 비었구나.' 노예원이 그날 밤 흘렸다는 그 말이, 이제 조정 한복판에 측실이라는 이름으로 서 있었다.*"…마마께서는, 어찌 보십니까."월령이 낮게 물었다."나는, 이 일에 손대지 않으마."황후가 말했다."측실을 들이고 안 들이고는, 그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35. 거꾸로 흐르는 소식

    그날부터, 막실이 나르는 종이는 월령의 손에서 나갔다.거짓과 참을, 월령이 반반씩 섞었다. 저쪽이 이미 아는 것 몇 줄에, 월령이 흘리고 싶은 것 한 줄을 얹었다. 참에 섞인 거짓은, 참처럼 읽혔다.월령이 흘린 한 줄은, 이런 것이었다. 왕부의 눈이 여전히 설련에게 쏠려 있다는 것. 정작 안주인은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것을, 저쪽은 알지 못했다.저쪽이 설련을 보는 동안, 월령은 저쪽을 보았다. 종이가 나가는 길을, 거꾸로 되짚으며.*그리고 월령은, 그 종이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았다.국밥집에서, 다른 손으로. 그 손에서, 또 다른 손으로. 종이는 몇 번 손을 바꾸어, 마침내 한 곳으로 모였다.궁의, 자녕궁이었다.월령의 손끝이, 그 이름 앞에서 잠깐 멎었다. 숙비의 처소였다. 근래 숙비가 병을 칭하고 오래 문을 닫아건, 인적 끊긴 자리.오래 잊혔다는 것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무언가를 숨기기에, 그만한 자리가 없었다.병을 칭한 처소라, 산 사람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귀신이 산다는 소문까지 돌던 곳이었다. 그 소문이, 도리어 좋은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자녕궁. 오래 비어 있다던, 대비의 옛 처소.설련이 그 이름을 듣고, 낮게 말했다."…거기예요. 제가 자란 곳. '연'의 명부가, 거기서 나와요."월령의 손끝이 식었다. 늙은 후궁도, 초야도, 막실도. 다 그 한 곳으로 이어지는 실이었다.늙은 후궁이 숨은 산실도, 초야가 든 산실도, 막실이 나른 종이도. 겉으로는 다른 손이었으나, 실을 거슬러 오르면 한 손이었다.그 한 손을, 월령은 아직 보지 못했다. 다만 그 손이 어느 방 안에 있는지는, 이제 알았다.두 생에 걸쳐 어머니를 죽이고 월령을 죽인 손이, 그 닫힌 처소 안에 있었다. 병을 칭해 잠근, 그곳에.비어 있어야 할 곳이 비어 있지 않다면, 그것부터가 적의 첫 거짓말이었다.*"마마님."설련이 낮게 말했다."저를, 안 묶어 주셔서.""…음.""그 덕에, 여기까지 왔어요. 저를 잘라 냈으면, 이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34. 막실

    막실이, 월령 앞에 꿇렸다.늙은 반빗아치였다. 삼십 년을 왕부의 반찬거리를 대 온 손이, 잘게 떨렸다.월령은, 그 떠는 손을 오래 보았다. 그 손이 삼십 년간 이 집의 밥을 지었다. 그 손이, 이제 이 집을 판 종이를 날랐다.월령은, 그 손을 벌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 손이 왜 떨리는지를, 먼저 알고 싶었다.*"…누가, 시켰지."월령이 낮게 물었다.막실은, 오래 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제 손자가, 그 사람들 손에 있습니다."방 안이, 조용해졌다."작은 종이 하나 날라 주면, 손자를 살려 준다 했습니다. 큰일도 아니라고… 그저, 왕부 안의 소식 몇 줄이라고요."막실의 목소리가, 잘게 부서졌다."손자밖에… 없습니다. 그 아이 하나 살리자고, 제가 밥 먹인 집을 팔았어요. 죽어 마땅한 년입니다."막실이, 제 손으로 제 뺨을 한 번 쳤다.늙은 손이 늙은 뺨을 치는 소리가, 방 안에 낮게 울렸다. 월령은 그 손을 말리지 않았다. 다만, 오래 보았다.그 오래 봄이, 문초보다 무거웠다.*월령은, 그 늙은 여인을 오래 보았다.벌하기는 쉬웠다. 문초하고, 내치고, 죄를 물으면 됐다. 그러나 그러면, 저쪽은 막실이 잡힌 것을 알고 다른 입을 세울 것이었다. 잡을 수 있는 실 하나가, 끊어지는 셈이었다.무엇보다, 이 늙은 여인은 적이 아니었다. 손자 하나에 겁먹은, 삼십 년 이 집의 사람이었다. 적이 겨눈 것은 이 여인이 아니라, 이 여인의 겁이었다.벌하는 것보다, 살리는 것이 더 무섭게 쓰였다. 삼십 년을 밥 지은 손을 죄인으로 내치는 대신 사람으로 되돌리면, 그 손은 무엇이든 했다."막실."월령이 낮게 말했다."네 손자를, 내가 찾아 주마."막실이, 고개를 들었다.월령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빈말이 아니었다. 강무진이 이미, 그 아이가 어디 잡혀 있는지 실을 잡기 시작한 참이었다.아이를 잡아 둔 자들은 곧, 저희가 쥔 패가 도리어 덫이 된 것을 알게 될 것이었다.월령은, 적이 쥐여 준 겁을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4. 자리

    아침 햇살은 젖은 종이를 가장 먼저 찾아왔다.비가 그친 다음날의 빛은 맑았으나 따뜻하지는 않았다. 서원당 대청 앞마당에 길게 비껴든 볕은 아직 물기를 품은 돌바닥 위에서 희게 부서졌고, 처마 끝에 남은 마지막 물방울들은 가끔씩 떨어져 마른 소리를 냈다.청아는 낮은 평상 셋을 대청 아래에 나란히 놓았다.그 위에 흰 천을 깔고, 다시 그 위에 등초본을 베껴 쓸 때 받쳤던 흡지를 한 장씩 펼쳤다. 종이는 밤사이 눅어 가장자리가 아주 조금 말려 있었고, 먹이 스친 곳에는 흐릿한 그림자가 남았다."젖은 종이는 그냥 두면 곰팡이가 습니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3. 매듭

    비가 그친 뒤의 새벽은 지나치게 맑았다.밤새 지붕을 두드리던 물소리가 멎자, 심가는 잠시 숨을 잃은 집처럼 조용해졌다. 처마 끝에는 아직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고, 뜰 가운데 고인 얕은 물에는 회색 하늘이 얇게 비쳤다. 행랑채 쪽에서는 젖은 짚을 뒤집는 소리가 늦게 깨어났고, 부엌에서는 불씨를 살리려 부싯돌을 치는 소리가 두어 번 낮게 울렸다.비가 지나간 자리는 늘 사람보다 먼저 말을 했다.기와 밑에 떨어진 진흙, 담장 아래로 밀려온 풀씨, 회랑 끝에 비스듬히 남은 발자국. 맑은 날에는 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아도 될 흔적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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