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회춘당 앞에는 이날도 줄이 서 있었다.은매가 그 줄 끝에 섰다. 손에 약봉지를 들고. 앞에 선 아낙이 돌아보며 말했다."아가, 너도 애 있는 집이냐? 그 봉지.""소, 소인이 사는 집에요. 아기씨가 계셔서.""그럼 미리 지어 둬, 미리. 동쪽에 열병이 돈다잖니.""동쪽… 동쪽 어디요?"아낙이 잠깐 말을 못 했다."어디더라. 그게, 약방 주인이 그러던데, 어디라 했더라."은매는 그 대답을 가슴에 넣어 두었다. 그러고는 줄이 제 차례가 되었을 때, 약방 주인 앞에 물표 석 장을 놓았다."소인이 이거… 이걸 주우러 왔는데요."*강무진이 약방 뒷문에서 나왔다.주인은 도망가지 않았다. 도망갈 데가 없다는 것을, 은매가 물표를 놓는 순간 알았다."열병이 어디서 돕니까. 어디서."강무진이 물었다."그, 동쪽에—""동쪽 어느 마을이요. 마을 이름을 대십시오. 제가 직접 가 봐야 하니까."주인이 답하지 못했다. 강무진은 답을 기다렸다. 오래 기다렸다. 답이 없다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그도 이제는 알았다.은매가 그 곁에 서 있었다. 손에 약봉지를 그대로 들고. 강무진이 그 봉지를 보았다."…그건 또 뭐냐. 손에 든 거.""약이요. 소인이 진짜로 지은 거예요. 아기씨 감기약인데, 온 김에.""약방을 잡으러 와서, 약을 지었다고. 네가.""잡으러 왔다고 안 지으면요, 아기씨가… 아기씨 감기는 누가 봐요."강무진이 그 말을 곱씹었다. 곱씹다가, 아주 낮게 헛기침을 했다. 은매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 목에 뭔가 걸린 채로.*왕부로 돌아오는 길에 은매가 물었다."나리. 저기, 소인이… 잘한 거예요? 오늘.""잘한 건 잘한 건데, 어느 정도로 잘했는지, 그건 마마님이 정하신다.""그럼 나리는요. 나리 생각은."강무진이 걸음을 늦췄다."나는… 약. 약 지은 게 좋았다."은매의 걸음이 잠깐 빨라졌다. 앞서 걷느라 얼굴을 안 보였다.*종친부 앞마당에, 그 약방 주인이 세워졌다.배중곤이 원로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삼황자부 문 앞에 서 있던 자리가, 비어 있었다.위명서는 북영에서 돌아와 그 자리를 보았다. 열두 살 때부터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다. 이름을 물은 적이 없었다. 호위, 라고만 불렀다."…호위는.""이틀째 안 보입니다. 이틀째요."내관이 답했다."어디 갔느냐.""…모, 모릅니다. 삼전하께서 북영에 계신 동안 상단 사람이 몇 번 들었는데, 그 뒤로는 그만."위명서는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가, 이 집에서 처음으로 저를 보았다.*처소 창고 문 앞에서, 그는 멈췄다.어릴 적부터 열어 본 적 없는 문이었다. 어머니가 채워 둔 것이라고만 들었다. 삼전하가 손댈 것 없는 살림살이라고. 그는 그 말을 곧이들었다. 곧이듣는 것이 편했으니까.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놋쇠에 다섯 잎.매화. 제 문양이었다.위명서는 그 자물쇠를 만지지 않았다. 만지지 않고, 돌아섰다.돌아서다가, 다시 멈췄다. 창고 앞 흙에 발자국이 있었다. 제 것이 아니었다. 상단 사람의 신발 자국. 그리고 그 옆에, 가마꾼의 것. 북영에 있는 동안 이 문 앞에 가마가 섰다."내관.""예, 삼전하.""내가 없는 동안 가마가 왔느냐. 이 문 앞에.""…자녕궁에서, 예. 마마께서 삼전하 살림을 살피신다 하시고요.""병중이신 분이.""…예."내관이 답을 늦게 했다. 늦은 답을, 위명서는 처음으로 놓치지 않았다.*주란이 회랑에서 그를 보았다."삼전하. 창고 앞에 계셨지요?""지나는 길이다.""지나는 길에 서 계셨어요. 오래요."위명서는 답하지 않았다. 주란도 더 묻지 않았다. 다만 스치면서, 아주 낮게 말했다."…물어보세요. 누구한테든."*말은, 그 길로 왕부로 갔다.이번에는 대문을 두드렸다. 청아가 문틈으로 내다보다가, 그 얼굴을 보고 굳었다. 방어멈이 뒤에서 소리쳤다."밖에서 오는 사람은 마당에서 돌려보내라 했지! 누구야, 또.""어멈, 삼전하세요. 삼전하."방어멈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마당에 세워라
"…삼황자부."위지헌이 그 물표를 등불에 비췄다. 도장이 선명했다. 위조가 아니었다."이 사람, 두목이 아니다.""아니면요? 그럼 뭔데요.""두목 손도 아니고. 상단 사람이 삼황자부 물표를 소매에 넣고 다니겠느냐. 삼황자부에서 상단으로 가는 손이다. 거꾸로가 아니라."월령이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젖은 옷 그대로 앉아, 아무 데도 보지 않았다.*허도겸이 궤짝의 장부를 밤새 읽었다.새벽에 그가 붓을 놓고 말했다."…명부와 값이, 한 손에서 나옵니다.""어떻게 알아요? 글씨가 같아요?""글씨는 아니고요, 셈법입니다. 끝자리를 늘 올림으로 처리하거든요, 값 매길 때. 명부지기 자백 조서에 적힌 값들이… 같은 버릇입니다. 열에 아홉이요. 사람이 바뀌어도 셈법은 안 바뀝니다. 가르친 사람이 같으면.""…누가 가르쳤어요."허도겸이 독고진겸을 보았다. 독고진겸이 창가에서 낮게 말했다."나요. 나를 가르친 건, 누이고."방 안이 조용해졌다. 독고진겸이 창밖을 보며 말을 이었다."누이는 열여섯에 셈을 다 뗐소. 상단 서녀가 셈방에 드는 법은 없는데, 밤에 들어와 장부를 읽더군. 나는 그때 스물이었고… 누이가 읽는 걸 보고서야 알았소. 내가 뭘 셈하고 있었는지.""…뭘 셈하셨는데요.""사람 값이오. 그땐 이름이 안 붙어 있었으니, 물건 값인 줄만 알았지, 뭐."설련이 문가에서 그 말을 들었다. 아비의 등을 보았다. 아비가 딸을 돌아보지 않아서, 딸이 아비의 등을 볼 수 있었다.*노경이 왕부에 온 것은 그날 낮이었다.가마도 없이, 종 하나만 데리고. 노가의 가주가 대문 앞에서 통기를 넣었다. 방어멈이 대문 안에서 그 얼굴을 보고 혀를 찼다."아이고, 저 어른이 제 발로 오는 날도 다 있네. 가마도 없이."월령이 마루로 나갔다. 노경은 늙어 있었다. 딸이 유배 간 뒤 더 늙었다."섭정왕비.""대감.""긴말은 않겠소. 청릉 장부에 내 집 물표가 있다지. 알고 왔소.""압니다.""…내가 판 게 아니오. 산 거요. 자녕궁이 파는 물건
청릉 강가에 배가 한 척 매여 있었다.새벽 안개 속에서, 사람 넷이 창고에서 궤짝을 날랐다. 급한 손이었다. 궤짝 하나가 미끄러져 강물에 반쯤 잠겼다. 욕설이 낮게 났다.지붕 위에서 기윤이 그것을 보고 있었다. 자물쇠를 떼어 온 지 사흘째였다. 저쪽이 움직였다.강무진이 지붕 아래에서 낮게 물었다."…지금이냐.""뜰 때.""뜨면 늦지. 안 늦느냐?""지금 치면 창고로 도로 듭니다. 강 위엔 숨을 데 없고."강무진이 그 말을 곱씹었다. 곱씹는 동안, 배가 떴다.*배는 멀리 못 갔다.강 아래쪽에 윤백이 있었다. 윤백은 배를 막지 않았다. 대신 강을 가로질러 밧줄 하나를 걸어 두었다. 새벽 안개 속에서 그 밧줄이 보이지 않았고, 뱃머리가 그것을 받았다. 배가 옆으로 돌았다."밧줄. 언제 걸었어."강무진이 강가를 달리며 물었다."어젯밤에요. 기윤이 말해 줘서.""기윤은 대체 언제 말을—"강무진이 말을 끝내지 못했다. 배에서 사람 하나가 물로 뛰어들었다. 궤짝을 안고. 강무진이 뒤따라 뛰어들었다. 안개 속에서 물소리가 두 번 났다.*궤짝을 안은 사내는 늙지 않았다.마흔쯤. 상단 사람의 옷에, 상단 사람이 아닌 손이었다. 굳은살이 칼 쥐는 자리에 있었다. 강무진이 그 허리띠를 잡았다. 뒷덜미가 아니라, 허리띠."이거 놓으시오. 놓으라니까. 나는 심부름꾼이오, 심부름꾼.""심부름꾼이 궤짝을 안고 강에 뜁니까? 그건 처음 봅니다.""…어디까지 잡을 셈이오, 이거.""제가 물 밖으로 나갈 정도로."강무진이 진지하게 답했다. 사내는 그 진지함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라, 저항을 멈췄다.*기윤이 배 위에서 나머지 셋을 눌렀다.셋 다 상단 손이었다. 굳은살이 주판 자리에 있었다. 기윤은 그들을 묶지 않았다. 묶지 않아도 도망갈 사람들이 아니었다. 도망갈 사람은 하나뿐이었고, 그 하나는 지금 강무진의 손에 허리띠를 잡혀 있었다.궤짝은 여섯이었다. 강물에 잠긴 것 하나까지 일곱.윤백이 그것을 하나씩 세었다. 세면서, 이미 보자기를 펴
위명서는 왕부 대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북영으로 돌아가는 길에 말을 세웠을 뿐이었다. 대문 앞에서. 문은 열려 있었고, 마당에서 시비 하나가 빨래를 널다가 그를 보고 굳었다."…삼전하."월령이 마루에서 내려섰다. 청아가 빨래를 든 채 물러났다. 물러나면서, 문 쪽으로 반 발 더 갔다. 기윤이 있을 자리였다."지나는 길이오.""예. 지나시는 길에 잠깐 드세요. 잠깐이면 돼요."월령이 나긋하게 말했다. 한 뼘도 안 내주는 나긋함으로.*마루에 앉은 위명서 앞에, 월령이 장부 두 벌을 놓았다.접지 않았다. 펴 둔 채, 탁자에."이게 뭐요.""청릉 상단 장부요. 두 벌이에요."위명서가 장부를 보았다. 처음엔 숫자만 보았다. 그다음에 이름을 보았다. 그 이름이 제 것이라는 것을 아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그의 얼굴이 변하지 않았다. 감추는 데 능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매화 소맷단을 쥔 손이, 하얬다."…이걸, 왜 내게.""삼전하 이름이니까요.""위조요.""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삼전하께서 직접 보세요. 저는 못 하잖아요, 삼황자부에 제가 들 수는 없으니."*위명서는 월령을 보았다.오래 보았다. 어머니를 말하는 눈보다, 이 여인을 보는 눈이 늘 오래 머물렀다. 지금도 그랬다. 그런데 그 눈에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이 여인이 저를 이용하는지, 저를 살리는지. 그 둘이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처음으로 생각했다."…숙모는.""예.""나를 미워하지 않소?""미워해요."월령이 답했다. 나긋하게."그런데요, 삼전하는 아직 아무것도 안 하셨거든요. 안 한 사람 미워할 만큼 제가 한가하질 못해서."위명서가 일어섰다. 장부는 들지 않았다. 들지 않고, 대문을 나섰다. 말에 오르기 전에 한 번 돌아보았다. 월령은 마루에 그대로 서 있었다.*자녕궁의 발소리는 낮았다.위명서는 그 낮은 발소리를 어릴 적부터 알았다. 어머니가 아플 때 더 낮아지는 발소리. 그러나 오늘은, 그 발소리가 무엇을 감추는지를 생각하며 걸었다.
고 내관이 왕부에 든 것은, 아침 죽이 채 식기 전이었다.늙은 내관은 마루에 오르지 않았다. 마당에 선 채로, 봉함된 종이 한 장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폐하께서 보시라 하셨습니다. 결재는, 아직입니다."위지헌이 그것을 받았다. 펴서 읽었다. 읽는 동안 얼굴이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암위들이 먼저 숨을 낮췄다.*"…종친부 상소예요?"월령이 물었다."자녕궁이 냈다. 종친부가 올리고."위지헌이 종이를 탁자에 놓았다. 월령의 손에 쥐여 주지 않고, 탁자에.월령이 읽었다.도성에 열병이 돈다. 섭정왕부는 사람의 출입이 잦아 병이 들기 쉽다. 정비의 여아는 황실의 피이니, 병이 걷힐 때까지 궁 안 별당에 들여 태의로 하여금 돌보게 함이 마땅하다. 병중의 숙비가 황실 어른으로서 이를 청한다.곱게 쓴 글씨였다. 어디에도 칼이 없었다. 그래서 칼이었다.*"궁 안 별당이면.""자녕궁 옆이다."월령의 손끝이 접혔다. 접히다가, 멈췄다. 접히는 것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전생이 그 종이 위에 있었다. 병을 핑계로 별궁에 든 날. 별궁에서 혼자 앓다가, 그 별궁이 형장으로 가는 첫 계단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안 날. 이번엔 저가 아니라 봄이었다."…폐하께서, 보류하신 거예요?""보류다. 결재도 아니고, 각하도 아니고.""왜요.""종친부가 올린 걸 각하하면 종친부가 등을 돌려. 안 하면 자녕궁이 이기고. …그래서 보류다."*방어멈이 방에 들었다.봄을 안고 있었다. 젖을 먹이고 온 얼굴이었다. 방어멈은 상소를 보지 않았다. 볼 줄 몰라서가 아니라, 보지 않아서였다."아씨. 아씨, 애 데려간답니까? 누가.""…아직.""아직이라니, 그럼 안 데려간다는 소리네요. 예?"방어멈이 봄을 고쳐 안았다. 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봄이 칭얼거렸다."아이고, 제가 이 집 밥을 삼십 년을 지었어요, 삼십 년을. 병 돈다고 애를 궁에 들이는 집은 못 봤습니다. 병이 돌면 문을 닫지, 어느 집이 애를 내보냅니까? 그것도 젖먹이를.""어멈.""이 애는
비가 그친 뒤의 새벽은 지나치게 맑았다.밤새 지붕을 두드리던 물소리가 멎자, 심가는 잠시 숨을 잃은 집처럼 조용해졌다. 처마 끝에는 아직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고, 뜰 가운데 고인 얕은 물에는 회색 하늘이 얇게 비쳤다. 행랑채 쪽에서는 젖은 짚을 뒤집는 소리가 늦게 깨어났고, 부엌에서는 불씨를 살리려 부싯돌을 치는 소리가 두어 번 낮게 울렸다.비가 지나간 자리는 늘 사람보다 먼저 말을 했다.기와 밑에 떨어진 진흙, 담장 아래로 밀려온 풀씨, 회랑 끝에 비스듬히 남은 발자국. 맑은 날에는 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아도 될 흔적들이,
아침 햇살은 젖은 종이를 가장 먼저 찾아왔다.비가 그친 다음날의 빛은 맑았으나 따뜻하지는 않았다. 서원당 대청 앞마당에 길게 비껴든 볕은 아직 물기를 품은 돌바닥 위에서 희게 부서졌고, 처마 끝에 남은 마지막 물방울들은 가끔씩 떨어져 마른 소리를 냈다.청아는 낮은 평상 셋을 대청 아래에 나란히 놓았다.그 위에 흰 천을 깔고, 다시 그 위에 등초본을 베껴 쓸 때 받쳤던 흡지를 한 장씩 펼쳤다. 종이는 밤사이 눅어 가장자리가 아주 조금 말려 있었고, 먹이 스친 곳에는 흐릿한 그림자가 남았다."젖은 종이는 그냥 두면 곰팡이가 습니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새벽녘에는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실을 감는 소리처럼 가늘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한 방울씩, 곧이어 두 방울씩, 나중에는 어느 것이 먼저 떨어졌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잦아졌다.심가의 아침은 젖은 냄새로 열렸다.행랑채 아이들은 짚신 밑창에 진흙을 묻힌 채 창고 앞을 오갔고, 부엌에서는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느라 연기가 낮게 깔렸다. 말린 생강은 다시 대청 안으로 들여졌고, 약방의 작은 종은 창포 묶음을 처마 아래에 걸며 연신 코를 훌쩍였다.비가 오는 날에는 집안의 틈이 먼저 보였다.기와가
자녕궁에서는 아무 말도 오지 않았다.칭찬도 없었고, 꾸짖음도 없었다.완성본을 거두어 간 뒤 사흘이 지났으나 문상궁의 먹빛 소매는 다시 심가 문턱을 넘지 않았다. 동쪽 대문을 드나드는 것은 장작을 실은 수레와 포목점 심부름꾼, 약방의 어린 종뿐이었다.그런데도 심서윤은 매번 대문 쪽 소리가 날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처음에는 아주 작게였다.찻잔을 내려놓다가, 바느질하던 바늘끝을 멈추다가, 어머니 한씨가 부르는 말에 대답하려다 말고. 시간이 갈수록 그 작은 움직임은 몸에 남은 버릇처럼 굳어 갔다.기다림은 소리가 없었다.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