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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돌아온 한 장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6-25 20:04:57
정오가 가까울 무렵, 없던 한 장이 돌아왔다.

아무도 들고 오지 않았다.

청아가 뒤집어 놓은 흡지 사이에, 처음엔 없던 종이가 끼어 있었다. 가장자리가 조금 더 눅었고, 접혔다 펴진 자국이 대각선으로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청아가 발견하자마자 숨을 멈췄다. 서윤은 맞은편에서 마른 천을 접고 있었다.

고개를 들지 않았으나, 귀 끝이 희게 질려 있었다. 월령은 돌아온 흡지를 집지 않았다.

손끝이 닿으면 아이의 마음이 또 굳을 것 같았다.

"청아. 이 종이는 아직 덜 마른 것 같구나. 그늘 쪽에 따로 두자."

그리고 서윤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젖은 종이가 제 자리를 찾아와 다행이야."

서윤의 손이 멈췄다.

얇은 천이 손가락 사이에서 구겨졌다. 월령은 그 소리를 들었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어떤 고백은 얼굴을 마주 보지 않을 때 더 쉽게 숨을 쉬었다. 서윤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대청을 떠나기 전, 흡지가 놓인 그늘 쪽을 한 번 보았다. 그 눈빛에는 두려움이 있었고,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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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78. 마르지 않은 것

    겨눈 자가 다시 손을 뻗은 것은, 살구가 열매를 굵히던 무렵이었다.이번에는, 마른 꽃이 아니었다.심가의 약방에 새 약재 한 봉지가 들었다. 어머니가 봄마다 달여 먹던 보약의 재료였다. 늘 드나들던 약재상의 이름으로 온 봉지였다.다만, 그 봉지를 받은 것은 강 서방이 붙여 둔 아는 약재상이었다.지난 열흘, 심가의 약방에는 아는 얼굴 하나가 늘 앉아 있었다. 강무진이 붙여 둔 약재상이었다. 오는 약재를 받고, 가는 약을 살피는 자리였다.늘 앉아 있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아무 일 없던 날들이, 오늘 하루를 위한 것이었다.*아는 약재상은, 그 봉지를 바로 달이지 않았다.늘 오던 약재상의 이름이었으나, 봉지를 가져온 아이가 낯설었다. 그 약방의 심부름 아이는 왼 뺨에 점이 있는 아이였는데, 이 봉지를 가져온 아이에게는 그 점이 없었다.이름은 같았으나, 심부름 온 얼굴이 달랐다.아는 사람만이 알아볼 다름이었다. 약재상은 그 봉지를 달이는 대신, 강무진에게 보냈다.작은 다름이었다. 이름은 같고, 봉지도 같았다. 겨눈 자는 아는 약방의 이름까지 훔쳐 올 만큼 촘촘했다. 그러나 심부름 아이의 얼굴 하나까지는, 훔쳐 오지 못했다.큰 것을 다 갖춘 함정이, 작은 얼굴 하나에서 어긋났다. 아는 사람을 심어 둔 값이, 거기 있었다.*강무진이 그 봉지를 왕부로 가져왔다.월령이 봉지를 열었다. 보약의 재료 사이에, 낯선 잎 몇이 섞여 있었다. 마르지 않은, 붉은 기가 도는 잎.적련초였다.마른 채로 경고를 보낸 자가, 이번에는 마르지 않은 것을 보냈다. 어머니의 약사발에, 그 잎이 들 뻔했다.전생과 같은 길이었다. 전생에 어머니는, 이런 잎이 든 약을 먹고 죽었다. 이번 생에는 그 잎이 약사발에 들기 전에, 아는 손에 걸렸다.월령은 그 붉은 잎을 오래 보았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전생에는, 이 잎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 어머니가 이미 없었다. 이번 생에는, 이 잎이 약사발에 들기 전에 그녀의 손에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77. 벽에 기댄 것들

    경화제가 '오래 기댄 벽'이라 부른 자리는, 봄이 깊어질수록 조금씩 얇아졌다.순검이 섭정왕에게 온전히 돌아가고, 채운 상궁이 물러나고, 방준이 변방으로 옮겨 간 뒤였다. 자녕궁에 기대어 있던 것들이, 하나씩 벽에서 떨어져 나갔다.숙비는 그 떨어져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옥반지 없는 손으로 식은 차를 만졌다.자녕궁의 봄은, 여느 처소보다 조용했다. 드나드는 발이 줄었고, 향도 예전처럼 사르지 않았다. 오래 권세를 두르던 처소가, 권세를 하나씩 벗고 있었다. 식은 차에서는 향이 오르지 않았다. 향을 사르지 않는 처소의 차는, 오래 두어도 향이 없었다.그러나 벗은 자리마다, 숙비는 무엇을 남길지 골랐다. 다 벗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녀에게는 하나의 옷이었다.*숙비는 무너지지 않았다.떨어져 나가는 것들을 붙잡지도 않았다. 붙잡으면, 붙잡는 손까지 함께 떨어졌다. 대신, 남은 것을 더 깊이 감췄다."고모님."설련이 오랜만에 자녕궁에 들었다. 제 발로 든 걸음이었다.숙비는 그 조카를 오래 보았다."넘어졌느냐.""아니요."설련이 낮게 답했다."넘어지지 않아서 왔습니다. 고모님이 넘어지실까 봐."숙비의 손이, 찻잔 위에서 잠깐 멎었다.지난겨울 손을 놓겠다던 조카였다. 붙잡지 않고 놓아주었더니, 제 발로 서서 도로 걸어 들어왔다. 놓아준 것이 잃은 것이 아니었다. 숙비는 그것을, 뒤늦게 알았다.*월령은 그 무렵, 한 가지를 다시 헤아렸다.'연'은 자녕궁에 기대어 있었으나, 자녕궁이 곧 '연'은 아니었다.숙비의 손이 하는 일은 눈에 보였다. 내명부의 문, 옥반지, 향. 그러나 '연'의 손은 보이지 않았다. 성 밖 절터에서 향을 대고, 북의 흑령에게 셈을 쥐여 주고, 남쪽 약밭에서 독을 길렀다.숙비가 벽이라면, '연'은 그 벽 뒤에 숨은 무엇이었다.벽을 무너뜨려도, 그 뒤의 무엇은 다른 벽을 찾아 옮겨 갈 것이었다.월령이 '연'을 처음 장부에 적을 때는, 그것이 자녕궁의 다른 이름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실을 따라갈수록, 자녕궁은 '연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76. 아는 손으로

    봄비가 그친 이튿날부터, 월령은 심가의 손을 하나씩 바꾸기 시작했다.어머니 곁의 손이었다. 부엌에 드는 손, 약을 달이는 손, 대문을 여닫는 손.내치는 것이 아니었다. 오래 심가를 지킨 사람들은 그대로 두고, 그 곁에 아는 사람을 하나씩 더 붙였다. 낯선 손이 끼어들 자리를, 미리 채워 두는 것이었다.*이번에는, 위지헌도 함께 움직였다.순검이 온전히 돌아온 뒤였다. 지난겨울처럼 그림자로만 지킬 필요가 없었다. 그는 심가가 드나드는 약방과 곡식전을, 순검의 이름으로 조용히 살피게 했다."밭을 덮치지 않고도, 길을 지킬 수 있다."위지헌이 말했다."네가 남에서 홀로 세던 것을, 이제 순검이 함께 센다."월령은 그 말에 잠깐, 지난겨울을 떠올렸다.지난겨울, 그녀는 순검 없는 왕부에서 홀로 길을 지켰다. 이번 봄에는, 순검이 그 길을 함께 지켰다. 같은 길인데, 지키는 사람이 늘어 있었다.지난겨울에는, 그녀가 세는 것을 아무도 함께 세지 않았다. 강무진이 그림자로 도왔으나, 결정은 늘 그녀 혼자의 몫이었다. 이번 봄에는, 그 결정 곁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혼자 지던 무게가,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월령은 어머니에게, 이번에도 다는 말하지 않았다.다만, 심가에 새로 든 사람들을 어머니께 인사시켰다."어머니, 이 아이는 청아의 사촌이에요. 부엌 일을 도울 거예요.""이 사람은, 강 서방이 아는 약재상이고요."유씨는 딸이 왜 사람을 이렇게 붙이는지, 이제 어렴풋이 알았다. 무언가로부터 딸이 저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네가 애쓴다."유씨가 낮게 말했다."애쓰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가 계셔야, 제가 봄을 세니까요."유씨는 그 말끝을 다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딸의 손을 한 번 잡았다. 두 생을 건너 살아 있는, 어머니의 손이었다.유씨는 새로 든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물었다. 이름을 알면, 낯선 사람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월령은 그 물음을 막지 않았다. 어머니가 곁의 사람들 이름을 다 알수록, 낯선 얼굴 하나가 더 도드라질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75. 오래된 봄

    위지헌은 오래 말을 골랐다.그녀가 두 생의 이야기를 꺼내는 데 용기가 필요했듯, 그에게도 오래 묻어 둔 이야기 하나를 꺼내는 데 숨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빗소리가, 조금 잦아들어 있었다.*"경화 칠년의 봄이었다."위지헌이 낮게 말했다."나는 그때, 진북 관문에서 첫 전장을 치르고 있었다. 어렸고, 이겼으나 외로웠다. 이긴 자리에서도, 곁에 아무도 없는 사람이었다."월령은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경화 칠년. 밀서에 그녀의 이름과 그의 이름이 함께 적힌, 그해였다.그해 봄을, 월령도 어렴풋이 알았다. 지난가을 국청에서 밀서가 열리던 날, 예부 상서가 '경화 칠년 내봉'이라 읽었다. 그때 월령은 제 이름이 왜 그렇게 어린 해에 함 안에 들었는지 알지 못했다.이제, 그 까닭을 듣고 있었다.*"전장 근방의 작은 마을을 지날 때였다. 말발굽에 짓이겨진 살구꽃잎 하나가 내 소매에 붙어 있었다. 아무도 그것을 떼어 주지 않았다. 다들, 나를 무서워했으니까."위지헌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그런데 아주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겁도 없이 다가와 그 꽃잎을 떼어 주었다. 그러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저씨는, 외로운 사람이네.'"월령의 숨이 멎었다."…그 아이가.""너였다."그 말을 하는 위지헌의 목소리에, 오래된 것이 실려 있었다. 여러 해를 홀로 품어 온 봄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저 혼자 꺼내 보던 봄.월령은 두 생을 혼자 삼켰고, 위지헌은 한 생을 혼자 품었다. 두 사람 다, 오래 혼자였던 사람이었다.*월령은 그 봄을 기억하지 못했다.너무 어렸다. 전장 근방의 마을과 일찍 진 살구꽃, 아버지의 말안장에 붙은 진흙만 드문드문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 검은 갑주의 젊은 장수가 있었다는 것은, 기억에 없었다.그러나 위지헌은, 그 봄을 한 번도 잊지 않았다."나는 그 뒤로, 오래 너를 지켰다. 네가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밀서에 네 이름이 적힌 것도, 내가 청한 일이었다. 외로운 사람이라고 불러 준 아이를,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74. 말하지 못한 것

    봄비가 오는 밤이었다.월령은 그 비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빗소리는, 전생의 어떤 밤을 자꾸 불러왔다.형장의 밤도, 비가 왔다. 붉은 옷을 입고 끌려가던 길에, 빗물이 옷을 적셨다. 그 붉은 옷은, 비에 젖어 더 붉었다.이번 생의 봄비는 그저 봄비였다. 그런데도 그 소리를 들으면, 월령은 자꾸 붉은 옷의 무게를 떠올렸다.전생의 그 밤을, 월령은 오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두 생을 살았다는 것은 입 밖에 내는 순간, 미친 사람의 말이 되었다.그래서 그녀는 늘, 무서운 밤이면 혼자 삼켰다. 삼킨 것이 몸 어딘가에 쌓여, 봄비 오는 밤마다 무겁게 가라앉았다.*위지헌이 그 곁에서 깨어 있었다."비가, 무섭느냐.""…비가 아니라, 비 오는 밤이요."월령이 낮게 말했다.위지헌은 그녀를 제 쪽으로 조금 당겼다. 다친 왼팔이 아니라, 성한 오른팔로."말하지 않아도 된다."그가 낮게 말했다."그러나 말하고 싶으면, 말해도 된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너를 다르게 보지 않는다."월령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대었다.빗소리가, 창밖에서 계속 내렸다. 그 소리 아래에서, 오래 삼켜 온 이야기가 목 끝까지 올라왔다.위지헌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넉 달을 북에 있다 돌아온 사람의 팔에서는, 아직 찬 바람 냄새가 옅게 났다. 그 냄새가 이상하게, 월령의 마음을 가라앉혔다.무서운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그 팔이 충분히 단단했다.*"…왕야.""말해라.""제가,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 해도 될까요.""들으마."월령은 한참 숨을 골랐다. 목 안이 말라, 첫 소리가 바로 나오지 않았다.이 이야기를 하면, 위지헌이 그녀를 미친 사람으로 여길지도 몰랐다. 두 생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많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다르게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월령은 그 말을 믿기로 했다.믿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믿었다가 아니면, 남는 것은 더 큰 외로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73. 순검이 돌아오다

    북의 승전이 조정에 오른 지 며칠 뒤, 경화제가 섭정왕의 순검을 온전히 돌려주었다.봄 한 철 반쯤 나누어 두었던 도성 순검이, 이제 다시 섭정왕의 것이 되었다. 이번에는 지나가듯 가볍게 돌려주는 말이 아니었다. 어전에서, 백관이 보는 앞에서였다.위지헌은 그 순검패를 두 손으로 받았다.*정무가 끝난 뒤, 경화제가 위지헌을 사석으로 불렀다.황제와 섭정왕이 아니라, 형과 아우가 마주 앉는 자리였다."북은, 걷었느냐.""창은 걷었습니다. 그러나 그 창을 쥐여 준 손은, 남에 있습니다."경화제는 차를 한 모금 들었다."안다."짧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한마디에, 지난봄 어전이 비워 둔 결재 칸의 뜻이 다 들어 있었다."짐이 순검을 나누어 둔 것도, 결재를 미룬 것도, 그 손을 낚으려는 미끼였다. 네가 없는 동안, 그 손이 어디까지 뻗는지 보았다."위지헌은 형의 얼굴을 보았다.보고도 움직이지 않던 침묵이, 게으름이 아니라 낚싯대였다. 형은 오래, 그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그 손의 이름을, 폐하께서는 아십니까."위지헌이 물었다.경화제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찻잔을 내려놓고, 창밖의 봄을 잠깐 보았다."이름은, 아직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다만, 그 손이 오래 기댄 벽은 안다."자녕궁이었다.경화제는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다만 '오래 기댄 벽'이라는 말로, 그 자리를 가리켰다. 황제조차 그 벽을 함부로 무너뜨리지 못했다. 벽을 무너뜨리면, 벽에 기댄 다른 것들도 함께 무너졌다."서두르지 마라."경화제가 말했다."벽은 한 번에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기댄 것을 하나씩 떼어 내는 것이다. 네 부인이, 그 떼어 내는 일을 잘하더구나."위지헌의 눈이 잠깐 움직였다.형은, 월령이 남에서 한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같은 무렵, 삼황자부의 등잔은 여전히 늦도록 켜져 있었다.위명서는 자녕궁의 셈에서 반걸음 물러선 뒤로, 어느 쪽에도 서지 않았다. 고모의 그늘을 벗었으나, 아직 스스로 무엇을 쥘지 정하지 못했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0. 붓끝

    심서윤은 그 밤 잠들지 못했다.자녕궁에서 받은 작은 붓은 베개맡에 놓여 있었다. 흰 붓대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떠 보였고, 끝에 매인 금실은 등잔불이 사라진 뒤에도 혼자 빛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다.서윤은 옆으로 누웠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방 안은 조용했다. 창밖에서는 밤새 젖은 살구꽃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멀리 행랑채 쪽에서는 늦게 돌아온 하인이 물동이를 내려놓는 낮은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그런 소리들이 집의 숨처럼 느껴졌을 것이다.오늘은 모든 소리가 자신을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았다. 마마께서 다시 부르실까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9. 잔

    태후의 초대장은 향이 없었다.그 사실이 먼저 심가를 조용하게 만들었다.아침 부엌에서는 멥쌀 씻는 물소리가 나고, 무쇠솥 가장자리에는 지난밤 끓여 둔 닭죽의 기름이 얇게 굳어 있었다. 행랑 쪽에서는 하인들이 장작을 패며 낮은 농담을 주고받았고, 마구간에서는 젖은 짚을 갈아내는 냄새가 느리게 흘러왔다.어제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그런데 검은 칠을 한 죽간 하나가 대문을 넘자, 집 안의 모든 소리가 반 박자씩 늦어졌다.칼을 갈던 호위가 손을 멈췄고, 죽을 푸던 계집종은 국자의 끝을 솥 가장자리에 대고 오래 움직이지 못했다. 살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2. 틈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새벽녘에는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실을 감는 소리처럼 가늘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한 방울씩, 곧이어 두 방울씩, 나중에는 어느 것이 먼저 떨어졌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잦아졌다.심가의 아침은 젖은 냄새로 열렸다.행랑채 아이들은 짚신 밑창에 진흙을 묻힌 채 창고 앞을 오갔고, 부엌에서는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느라 연기가 낮게 깔렸다. 말린 생강은 다시 대청 안으로 들여졌고, 약방의 작은 종은 창포 묶음을 처마 아래에 걸며 연신 코를 훌쩍였다.비가 오는 날에는 집안의 틈이 먼저 보였다.기와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1. 실

    자녕궁에서는 아무 말도 오지 않았다.칭찬도 없었고, 꾸짖음도 없었다.완성본을 거두어 간 뒤 사흘이 지났으나 문상궁의 먹빛 소매는 다시 심가 문턱을 넘지 않았다. 동쪽 대문을 드나드는 것은 장작을 실은 수레와 포목점 심부름꾼, 약방의 어린 종뿐이었다.그런데도 심서윤은 매번 대문 쪽 소리가 날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처음에는 아주 작게였다.찻잔을 내려놓다가, 바느질하던 바늘끝을 멈추다가, 어머니 한씨가 부르는 말에 대답하려다 말고. 시간이 갈수록 그 작은 움직임은 몸에 남은 버릇처럼 굳어 갔다.기다림은 소리가 없었다.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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