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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빈 수레가 나간다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3 20:16:07
동이 트기 전, 남원 별원의 바깥채에 사람이 모였다.

허도겸은 밤새 쓴 조사서를 두 벌로 나누었다. 한 벌에는 군량패의 나무와 인영, 새 못과 젖은 마루까지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다른 한 벌의 첫 줄에는 짧은 문장만 남았다.

검은 소매를 입은 내관이 황궁에서 가져온 답서를 내놓았다. 경화제의 어보 아래에는 한 줄만 적혀 있었다.

정오까지 섭정왕의 처분에 맡긴다.

위지헌은 답서를 허도겸 앞에 펼쳐 두었다. 허도겸이 그제야 굳었던 어깨를 조금 내렸다.

남원 별원에서 심가의 군량패를 발견함.

위지헌이 첫 번째 조사서에 검은 인장을 눌렀다.

"이것은 폐하께 바로 올려라."

허도겸이 두 번째 종이를 보았다.

"이것도 올립니까."

"남문 게시소에 붙인다."

방 안의 붓 소리가 모두 멎었다.

"가짜임을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확인했다."

위지헌이 손을 닦았다.

"저 패를 둔 자는 아직 모른다."

정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투구와 어깨에 새벽이슬이 흥건했다.

"회암에서 세 명을 살려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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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46. 문상궁

    문상궁이 선 자리에는 늘 자녕궁의 냄새가 남았다.향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먹빛 소매에서도 머리에서도 향내가 나지 않았는데, 그가 지나간 마당에는 병풍 뒤 찻방에서 맡던 단내가 한참 머물렀다. 월령은 마루에서 그 사람을 보았다. 먹빛 소매가 먼저 보였고, 아무 기색 없는 얼굴이 보였고, 그 뒤에 선 궁인의 두 팔에 안긴 질그릇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손끝이 찼다. 별궁 마당 한가운데에서 문상궁이 월령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왕비마마. 이 별궁의 살림을 소인이 맡게 되었사옵니다. 자녕궁에서 정한 일이옵니다.""그렇습니까. 오래 몸이 불편하셨다 들었는데 이리 일어나셨군요.""한 달 반 문이 닫혀 있었으니 소인도 문 밖에서 몸이 굳었사옵니다. 풀리고 나니 맡은 일이 늘었고요."문상궁의 얼굴에는 아무 기색이 없었다. 월령은 이 얼굴을 열여섯 살에 처음 보았다. 그때도 이 사람은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고 병풍 곁에서 손님의 잔을 세었다. 그 얼굴이 이 별궁 마당에서 같은 높이로 월령을 마주 보고 있었다. 등 뒤가 서늘했다. 겁이었고, 열여섯의 겁이 두 생을 건너 같은 얼굴 앞에서 났다.방어멈이 마루에서 빗자루를 든 채 끼어들었다."저, 상궁마마님. 이 별궁 부엌이 제 일터라서요. 살림을 맡으시는 건 좋은데 부엌 물건에 손 대시는 건 제게 먼저 일러 주시면 좋겠어요.""어멈의 부엌이니 어멈의 법을 따르겠사옵니다. 다만 소인은 살림을 보러 온 것이니 부엌부터 둘러보게 해 주시옵소서."방어멈이 입술을 삐죽였으나 길을 비켜 주었다.*별궁 부엌은 마당 뒤편의 낮은 흙벽 건물이었다.문상궁은 아궁이도 솥도 건드리지 않고 한쪽 구석의 물 항아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른 허리까지 오는 항아리였고, 뚜껑 위에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었다. 그는 뒤따라온 궁인에게 눈짓했다. 궁인이 새 항아리를 들고 들어왔다. 한 번도 물이 담기지 않은 질그릇이었다."묵은 항아리는 치우고, 이것을 쓰시옵소서.""물을 새로 길어다 채워 주면 그만이지 항아리까지 바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45. 별궁

    조서는 아침 일찍 왕부 대문으로 들어왔다.국상 중 섭정왕비였던 사람은 곤원전 옛 별궁에서 근신한다는 열두 자였다. 숙비가 빈전 앞에서 흘린 말이 열흘을 돌아 종이가 되어 돌아왔다. 월령은 그것을 보았다. 흠 없는 글씨가 먼저 보였고, 별궁이라는 두 자가 보였고, 그 아래 찍힌 새 황제의 붉은 인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등 뒤가 얼었다. 전생에 이 두 자가 적힌 종이를 받던 날의 손이 돌아왔다.위지헌은 조서를 읽고 나서 마루 기둥에 한쪽 어깨를 기댔다. 기대는 사람이 아니었다."내가 폐하께 가서 거두게 하겠다. 못 거두면 네가 문을 나서지 않아도 되게 하마.""안 거두셔도 돼요, 부군."월령은 봄의 저고리 끈을 매 주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가면 폐하께서 부군의 청을 들어주셔야 하는 자리에 서시고, 들어주지 않으시면 부군이 청한 것만 남아요. 저는 이 조서를 받는 쪽이 더 나아요.""별궁이다."위지헌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겹 낮았다.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는 이 이름이 월령에게 어떤 문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문을 어떻게 다룰지는 월령이 정할 일이었고, 그가 막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막지 않는 데 힘이 들었다. 오른손이 기둥을 쥐었다."압니다. 그래서 제가 갈래요. 부르러 오기 전에 제 발로요."방어멈이 짐 꾸러미를 든 채 마루 끝에서 혀를 찼다."아씨, 별궁이면 오래 비워 둔 데 아니에요? 먼지가 한 치는 앉았을 텐데 아기를 거기서 재우자고요.""어멈이 있으니 한 치는 사흘이면 치워.""사흘이 뭐예요. 이틀이에요."청아가 약 봉지를 안고 따라 나오며 눈을 크게 떴다."마마님, 저도 가요. 제가 안 가면 누가 마마님 차를 우려요."월령은 대답 대신 웃었다. 오랜만에 소리가 나는 웃음이었다. 웃는데 가슴 밑바닥은 찼다. 이 사람들을 데리고 그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전생과 다른 유일한 것이었고, 그 다른 것 하나로 가는 길이었다.*궁문 앞의 돌문턱까지 위지헌이 따라왔다.문턱을 넘으면 그는 종실 아우의 몸으로 허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44. 종친부 앞마당

    종친부 앞마당의 돌에는 서리가 녹지 않고 남아 있었다.월령은 흰 상복 차림으로 그 한가운데에 섰다. 눈앞의 것을 차례로 보았다. 닫힌 대청 문이 먼저 보였고, 그 아래 서리가 녹지 않은 돌계단 다섯이 보였고, 문틈으로 새는 배중곤의 흰 두루마기 자락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의가 열리는 대청에는 여인이 들 수 없었으므로, 종실 여인이 청을 올리려면 마당에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했다. 신발 밑창으로 찬 기운이 올라왔고, 대청 안에서는 배중곤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흘러나왔다."황제 생모 마마께 자녕태후의 호를 올리는 일은 선제의 은덕을 잇는 일이옵니다. 또한 황후 자리가 비어 막을 분이 계시지 않으니, 이의를 달 분도 없사옵니다."월령은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마당에 무릎을 꿇지 않고 선 채로 소리를 냈다. 소리를 내기 전에 숨을 하나 삼켰다. 전생에 이 마당에서 한 번도 내 본 적 없는 소리였다."종실 여인 심월령이 청하옵니다."대청 안이 조용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변영달이 문턱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왕비마마, 여인이 의를 막는 것은 법도에……""막는 것이 아닙니다. 청하는 것입니다. 편전에 선제께서 짐의 인으로 봉하신 명부가 있습니다. 책봉에 앞서 그것을 열어 종친부 앞에서 읽게 해 주십시오."변영달이 대청 안과 마당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위명서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 흰 상복의 매화 없는 소매가 계단 위에서 멈췄다. 그가 월령을 내려다보는 높이가 한 단 더 높았다.한 단.그 한 단이 전생의 용상 높이로 느껴졌다. 월령의 손끝이 찼다.*"숙모.""폐하. 신첩이 종친부 앞에서 청을 올린 죄를 물으시면 달게 받겠습니다.""숙모의 청은 법도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말씀하십시오."월령은 숨을 들이쉬었다. 이 사람이 어디까지 듣고 어디서 닫을지 알 수가 없었다. 모르는 것이 두려웠고, 두려운 채로 말했다."선제의 명부 뒤쪽 스무 장이 책봉을 올리시는 분의 글씨입니다. 그 글씨를 보신 뒤에도 같은 호를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43. 사병 삼백

    윤백의 보자기 속에서 쇠패 부딪는 소리가 났다.위지헌은 마루 위에서 마당을 보았다. 열을 맞춘 삼백의 어깨가 먼저 보였고, 그 어깨마다 앉은 서리를 아무도 털지 않는 것이 보였고, 맨 앞줄에 선 늙은 얼굴 몇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북영에서 함께 눈을 맞던 얼굴들이었다. 궁 내관이 셋째 조서를 펴 들었고, 위지헌은 그 곁에 흰 옷으로 서서 듣기만 했다."국상 중 도성 안에 사병을 두는 일을 금한다. 섭정왕부의 사병 삼백은 오늘 해산하고, 삯과 패는 호부가 거두어 셈한다."내관이 조서를 접고 물러서자 강무진이 마루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손에 명단을 쥐고 있었다. 먹이 번질 만큼 여러 번 만진 종이였다. 밤새 만진 손이었다."내가 이름을 부르겠다. 부르면 나와서 패를 윤백에게 내고, 대문으로 나가라. 뒤돌아보면 나갈 때 눈이 시리니 돌아보지 마라.""강 나리는 돌아보셨습니까."맨 앞줄에서 누가 물었다. 강무진이 명단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나는 돌아본다. 그러니 너희는 하지 마라. 해동.""예.""차달.""예.""마보."이름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사병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패를 윤백의 보자기에 놓았다. 쇠가 쇠에 닿는 소리가 점점 두꺼워졌다. 대문 밖으로 나가는 등이 하나 지나가면 바로 그다음 등이 서 있었다.이름 부르는 목소리가 백 번을 넘기자 강무진은 눈을 한 번 닦았다. 서리가 눈에 들어간 것이라고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혼자 말했다. 목소리가 쉬어 가는 것은 혼자 말하지 않았다.위지헌은 마루 위에서 그 소리를 다 들었다. 쇠패 하나가 보자기에 떨어질 때마다 가슴 어딘가에서 같은 소리가 났다. 그는 그것을 얼굴에 올리지 않았다. 삼백이 보는 얼굴이었다.*이백 번을 넘길 무렵 기윤이 지붕에서 내려왔다.그는 대문 안쪽 곁방으로 가지 않고 곧장 위지헌 앞에 섰다. 손에는 뒷문에서 잡아 온 사병 하나의 목덜미가 있었다. 사병은 소매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려다 들킨 얼굴이었다."뒷문 담 곁에서 궁 쪽 서리를 만났습니다. 소매 안에 이것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42. 인 없는 손

    정전 돌바닥에서 겨울 냄새가 올라왔다.위명서가 용상에 앉은 첫 조회였고, 위지헌은 종실 줄의 맨 뒤에서 올려다보았다. 용상 위의 매화 없는 흰 소매가 먼저 보였고, 그 아래 계단에 꿇은 젊은 도위의 등이 보였고, 열 해 동안 제가 섰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열 해 동안 용상 아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섰던 사람이 이제 문 가까운 기둥 곁에 서 있었다. 인도 관도 없는 몸이 이렇게 가벼운 줄은 몰랐다. 가벼운 것이 서운한지 편한지 그는 가르지 않았다. 가르면 어느 쪽이든 조카 앞에 들킬 것 같아서였다.고 내관이 두 번째 조서를 펴 들었다."북경군을 폐하의 직속으로 삼는다. 수령은 북영 도위 한승으로 하고, 북경군 통령의 패와 군적은 사흘 안에 그에게 넘긴다. 북경군에 남는 자는 황제의 군사이고, 왕부를 따르는 자는 군적에서 지운다."조서를 읽는 동안 종친부 쪽에서 헛기침 하나 나오지 않았다. 배중곤이 발을 옮기지도 않았다. 이미 정해진 판이어서 옮길 발이 없었다.북경군.그 세 글자가 남의 입에서 남의 것으로 읊히는 것을 위지헌은 들었다. 턱이 한 번 굳었다가 풀렸다. 열여덟에 받은 것을 스물여덟에 내놓는 데 걸린 시간이 조서 한 줄이었다.위지헌은 용상 아래 한승을 보았다. 북영에서 위명서와 함께 눈 속을 건넌 젊은 도위가 무릎 꿇은 채 어깨를 뻣뻣하게 세우고 있었다. 한승은 위지헌 쪽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어깨였다. 그 어깨를 보는 위지헌의 가슴 어딘가가 조금 풀렸다. 조카가 고른 사람이 적어도 뒤를 보지 않으려고 애쓸 줄은 아는 사람이었다.*해 질 무렵 왕부 대문 앞에 북경군이 모였다.도성 안에 있던 옛 부하의 절반이 군복 그대로 서 있었다. 창은 들지 않았고 투구만 팔에 끼웠다. 창을 두고 온 손들이었다. 한승이 말에서 내려 그 앞에 서더니, 대문 안에서 나온 위지헌을 보고 한 걸음 물러났다가 도로 앞으로 나왔다."왕야. 소장이 이 조서를 들고 이 문 앞에 서는 날이 올 줄 몰랐습니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41. 빈전 둘

    곤원전 회랑에는 흰 천이 두 겹으로 걸려 있었다.바깥 겹은 어제 새로 건 선제의 것이었고, 안쪽 겹은 아직 걷히지 않은 황후의 것이었다. 삼베가 바람에 스칠 때마다 분향 연기가 한쪽으로 쏠렸다가 돌아왔다. 월령은 봄을 오른팔에 안고 그 두 겹 사이를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방어멈과 청아는 회랑 입구의 시녀 줄에서 걸음을 멈췄다. 상주 자리 가까이에는 종실 여인과 비빈만 들 수 있었다.예부 주사 변영달이 서열표를 접어 쥐고 달려왔다. 문턱에 발이 걸려 표가 반쯤 펼쳐졌고, 그는 그것을 가슴에 눌러 붙이고서야 절을 했다."섭정왕비마마, 아니, 왕비마마. 자리를 안내하겠사옵니다.""섭정왕비라 부르는 것이 틀렸습니까.""틀리지는 않사오나 맞지도 않사옵니다. 어제 폐하의 조서로 섭정이 파해졌으니, 섭정왕비 또한 파해진 것이옵니다."변영달이 표를 다시 펴서 손가락으로 짚었다."상주는 폐하이시고, 그 곁이 황제 생모 마마이시옵니다. 이어서 현비 마마, 덕비 마마, 순빈 마마, 의빈 마마, 정빈 마마, 류 귀인 마마, 그다음이 왕비마마이옵니다.""비빈 뒤로군요.""종실 서열에서는 선제의 후궁이 윗자리이옵니다. 왕비께서는 선제의 아우님 부인이시니, 예법이 그리 정하고……""알겠습니다."월령이 말을 끊자 변영달은 입을 다물고 상궁에게 눈짓했다. 상궁이 삼베 방석 하나를 들어 류 귀인의 방석 뒤로 옮겼다. 방석이 놓일 때 먼지가 얇게 올라왔다. 그것이 어제까지 섭정왕비였던 사람의 자리였다.*월령이 그 방석에 앉자 상주 자리가 보였다.위명서가 흰 상복에 매화 없는 소매로 병풍 없는 빈전 앞에 서 있었다. 어제 사위한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어깨가 지나치게 곧았다. 그 곁에서 숙비가 한 걸음 뒤처진 자리를 지켰고, 비빈들이 그 뒤로 줄을 이루었다.위지헌은 이 줄에 없었다. 종실 아우의 자리는 남자들 줄의 맨 뒤쪽이었다. 인도 관도 없는 흰 옷의 사람이 거기 서 있다는 것을 월령은 돌아보지 않고 알았다. 돌아보지 않는 것이 이 자리의 법도였다.봄이 오른팔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 흰

    비가 내렸다.그러나 비는 피 냄새를 씻어 내리지 못했다.젖은 흙은 피를 먹은 뒤 오래된 쇠처럼 비렸다. 낮은 돌계단 틈마다 붉은 물이 고였고, 빗방울은 그 위에 닿을 때마다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형장 둘레에 몰린 백성들은 숨조차 함부로 쉬지 못했다. 누군가의 젖은 소매에서 눅눅한 마 냄새가 났고, 멀리 황궁 쪽 붉은 담은 비안개에 잠겨 마치 아직 마르지 않은 상처처럼 서 있었다.심월령은 그 붉은 담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무릎이 진흙 속에 반쯤 잠겨 있었다.한때 대연에서 가장 고운 비단만 몸에 두르던 황후의 무릎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1. 종이

    조서는 얇았다.얇은 종이가 사람을 가장 깊게 베는 날이 있다.심가 대문에 걸린 등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내관이 돌아간 뒤에도 하인들은 감히 소리를 높이지 못했고, 부엌의 솥뚜껑은 평소보다 조용히 닫혔다. 종이 한 장이 집 안의 숨을 바꾸었다. 누가 지나가도 발끝이 먼저 조심스러워졌고, 아이들은 웃다가도 어른들의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월령은 조서를 다시 펼쳤다.궁중 내지 유출.호부 군량 장부 조작.심가 여식.그 말은 일부러 넓었다.월령일 수도 있고, 서윤일 수도 있었다. 혹은 둘 다일 수도 있었다. 넓은 말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0. 등불

    자녕궁에 가는 날, 경성의 거리에는 낮부터 등틀이 세워지고 있었다.상원절은 이미 지났지만, 대연의 봄에는 작은 등놀이가 자주 열렸다. 남쪽 수해지에서 올라온 장인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종이등을 만들었고, 궁은 그것을 사들여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모양을 갖췄다. 거리의 아이들은 등불을 좋아했고, 어른들은 쌀값을 생각하며 그 빛을 보았다.빛은 늘 아름다웠다.그러나 빛을 밝히는 기름값은 누군가의 장부에 적혔다.마차 안에서 서윤은 말이 없었다.오늘의 서윤은 옅은 연두빛 치마를 입었다. 한씨가 골라 준 옷이었다. 너무 화려하지 않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9. 이름

    허도겸은 약속한 시각보다 이른 때에 왔다.아침 안개가 아직 대문 밖 버드나무 잎에 걸려 있을 때였다. 심가의 하인들은 물을 뿌린 마당을 쓸고 있었고, 부엌에서는 찹쌀을 씻는 소리가 낮게 났다. 심 부인의 약을 달이는 냄새가 서원당 쪽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집은 깨어나고 있었으나, 아직 하루의 얼굴을 완전히 갖추지는 못했다.그 틈에 온 사람은 늘 급한 일을 품고 있다.허도겸은 정청이 아니라 서고 앞 작은 툇마루에서 월령을 보겠다고 했다. 둘째 숙부는 불쾌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으나, 호부 낭중의 말은 예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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