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익선에게 먼저 써보라고 했다고?”이영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고 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주익선이 먼저 써봤는데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이영은 꽤 많이 놀라웠지만 일단 이진에게 책자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새 양식으로 제작된 옷들이 이 책자에 그려져 있다. 한번 보고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고르거라. 내일 네 저택으로 보내주마.”이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르기 시작했다. 옷들이 모두 너무 예뻤다.그녀는 연한 녹색과 연한 노란색 그리고 분홍색 옷 등등 열 벌이 넘는 옷을 골랐다.“출정할 때 챙겨 가기도 어려울 것 같아서 이 정도만 고르겠습니다.”고개를 끄덕이던 이영이 갑자기 이진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이에 화들짝 놀란 이진은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누이, 갑자기 왜…”“널 월성국에 보낸 이 누이를 원망하지는 않는 게냐?”“그럴 리가요! 전 누이께서 절 염두에 두고 계셔서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누이 덕분에 저도 제 능력을 보여줄 기회가 생긴 것 아니겠습니까?”이영은 겨우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를 보며 너무 흐뭇하고 자랑스러웠다.“상태주 그자에 관한 일은 진이 네가 선한 마음에 그랬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반드시 신중해야 한다. 왕야로써 본보기를 잘 보여주어야 백성들이 널 믿고 따를 것이야.”이영의 말에 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자신의 행동이 누이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사람 시켜 다른 사형수로 대체하였습니다.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전 정말 단순히 그자의 어머니 때문에, 그리고 그자가 여인들은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했던 말 때문에 그자를 살려준 것입니다.”“그래, 나도 알고 있다.”이영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상태주의 부친은 여황제의 정치를 반대하는데 상태주는 되레 여인들의 입학과 입사 그리고 입상 정책을 지지하고 응원할 줄은 몰랐다.이영은 이진을 한참동안 품에 꼭 안고 있었다. “이번에
“이번 한번만이야.”이영도 이진의 체면을 심하게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상태주 그자는 이제 내시 신세가 되었고 큰 문제는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네.”“그럼 그자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충복이 규칙을 확실하게 가르치면 마을로 보낼 생각입니다.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으면 바로 목을 베어야죠!”이진이 진지하게 말했다.“그래, 식사를 시작하자.”이영의 말에 송이와 당안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고는 밖으로 물러났다. 황제 일가는 평소에도 식사 때 다른 사람이 옆에서 시중을 드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이때, 이진이 재빨리 이영에게 음식을 덜어주었다.“누이, 많이 드십시오.”이영은 그런 이진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래도 친동생이기 때문에 미워할 수가 없어서 이영도 이진에게 반찬을 덜어주었다.고맙다고 한 이진은 바로 일어서서 이천에게도 음식을 덜어주었다.“오라버니도 많이 드세요.”한편, 이천은 의기양양한 이진의 모습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진의 설명은 대단하지 않았지만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울먹임과 애교 연기는 너무도 완벽했다.이영뿐만 아니라 이천도 마음이 약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이천은 이진이 덜어준 음식을 입에 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맛이 좋구나.”이진은 지금 자신의 성공을 이천에게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한편, 헤헤 웃으며 자리에 앉은 이진은 곧바로 주익선에게도 음식을 덜어주었다.식사 내내 이영과 심초운, 그리고 주익선과 이진은 더할 나위 없이 화기애애했고 그들과 반대로 이천은 매우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요 며칠 동안 모기가 유난히 많았기에 매일 밤 향초를 켜고 잠을 청했다.이천은 자신이 세속적인 눈으로 정사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지켜보아서 그런지 요즘 들어 점점 가슴이 답답하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오라버니, 혹 걱정거리라도 있는 것입니까?”식사를 마친 뒤, 이영은 가족들과 함께 과일을 먹으며 이천에게 물었다.이에 사과를 먹고 있던 이진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누이, 누이는 오라버니께서 걱정거리
“나한테 설명할 것 없다. 황제 폐하께서 네 말을 들어주기를 바라야지.”이천이 담담하게 말했다.이에 이진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제가 이따가 누이께 잘 말씀드릴 겁니다.”이천은 그런 이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렇게 큰 사고를 치고 이진이 이따가 이영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기도 했다.한편, 이천이 웃음을 보이자 이진이 곧바로 가까이 다가갔다.“오라버니, 절 도와주실 거죠?”“남매의 체면을 봐서 널 나무라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니냐?”이천의 말에 이진이 미간을 확 찌푸리더니 주익선의 팔짱을 끼며 큰소리로 말했다.“오라버니 나빠요!”이천은 말문이 턱 막혔다.한편, 팔짱을 잡힌 주익선을 뻣뻣하게 굳은 채 감히 꿈쩍도 하지 못했다. 궐에서 이토록 다정한 행동을 해도 된단 말인가!주익선은 너무 조심스럽고 걱정됐지만 이천은 그런 두 사람을 그저 힐끗 쳐다볼 뿐, 바로 고개를 돌려 못 본 척했다.‘저하께서는 우리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건가?’조금 뒤, 당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주상전하 납시오! 심 대감님 납시오!”이천과 이진 그리고 주익선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바로 나타난 이영이 손을 내저었다.“다들 앉으시게. 가족들끼리 식사 자리에서 이런 예를 차릴 건 없지.”하지만 이진이 자리에 앉으려던 순간, 이영이 싸늘하고 날카로운 표정으로 이진을 쳐다보았다.“네가 옥에서 상태주 그자를 데리고 간 것이냐?”화들짝 놀란 이진은 바로 꼿꼿하게 자세를 바로 고쳤고 주익선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러고는 이진 곁으로 슬쩍 다가가 그녀에게 힘을 복받아주었다.한편, 이천은 찻잔을 들어 심초운과 차를 한 잔 마셨고 두 사람은 이 상황을 전혀 모른 척했다.“누이…”이진이 어느새 눈시울을 붉혔다.이에 이영은 흠칫 놀란 표정으로 이진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눈물을 흘리다니.“제대로 말해 보거라.”이영은 심초운 곁에 자리잡고 앉으며 말을 이어갔다.“상태주 그자는 큰 죄를 저지
이진의 물음에 주익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만 조금 걱정이 될 뿐이다.“폐하께 상태주에 관한 일은 어떻게 얘기할 생각이야?”“나도 잘 모르겠어.”“이 일은 심각한 일이야.”주익선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진주에서 심초운과 이천을 만났을 때, 두 사람에게 허튼짓을 했다고 꾸중을 들었던 일이 떠올랐다.“잘 생각해봐야 해.”“설마 누이와 오라버니께서 때리지는 않겠지?”이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꾸중 몇 마디를 들으면 끝나겠지 뭐.”꾸중을 들으면 끝난다고? 이렇게 말을 했지만 이진도 조금 걱정이 되었다.“두려워할 것 없어. 내가 곁에 있을게. 벌을 받아도 나랑 함께 받자.”말을 하던 주익선은 이진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이에 이진이 고개를 들어 주익선을 쳐다보았다.“왜 그랬냐고 물어보지도 않아?”“네가 그자를 살리고 싶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그러다가 잠시 멈칫하던 주익선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네가 그랬잖아. 그자들은 사실 그리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고.”“아니, 상씨 가문 그리고 용씨 가문에 죄 없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아.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된 자는 상태주 그 사람뿐만은 아니야.”“그럼 왜?”주익선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이진이 말을 이어갔다.“그자가 했던 말 때문이야.”“어떤 말?”“그자가 그랬거든. 언젠가 여인들에게도 공평하고 공정한 세상이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란 상태주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솔직히 놀라웠어. 물론 그자가 그런 말을 한 게 그자의 어머니가 상인호에게 아무렇지 않게 버려졌기 때문일 수도 있지. 그래서 그 한이 마음속에 깊이 남아서 그런 얘기를 한 거야. 난 상태주 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아남아서 누이의 통치하에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여인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길 바라는 거야.”이진의 말에 주익선이 입을 떡 벌렸다.“진아, 넌 참 좋은 사람이야.”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상태주는 바로 머리를 조아렸다.‘그래, 왕야께서 내 목숨은 살려 주셨지만 왕야와 주 장군께서 날 절대 믿지는 못할 서야.’한편, 은장도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그도 상태주와 같은 생각이었다. 마음속으로 왕야와 주 장군께 고마움이 컸지만 이런 상황에서 두 분이 자신들에게 경계심이 생기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앞으로 내가 어떻게든 일자리를 찾아서 열심히 일하면 나와 도련님이 먹고 살 정도는 충분할 거야.’이때, 이진이 주익선을 보며 물었다.“내가 걱정돼?”주익선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당연히 걱정되는 것 아니겠는가?“그럼 주 장군이 앞으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날 지키면 되잖아. 그럼 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리가 없겠지.”솔직히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주익선은 그러고 싶지만 월성국에 가서 전쟁이 시작되면 절대 그럴 수가 없다. 주익선이 전장에서 싸우고 있을 때 이진은 후방 군사 기지에 남아있을 것이니까.이진은 고개를 돌려 상태주와 은장을 쳐다보았다.“너희들 일단 이름부터 바꿔야 한다.”“왕야께서 소인들의 이름을 하사하여 주시옵소서.”“앞으로 네 이름은 금이로 하여라.”이진이 상태주를 가리키며 말하고는 이내 고개를 살짝 돌려 은장을 쳐다보며 말을 보탰다.“그리고 네 이름은 은이. 오늘부로 상태주와 은장 이 두 이름은 절대 다시 써서는 안 된다.”“네, 왕야, 명심하겠습니다.”이진은 이내 충복을 불렀다.“이자들을 데리고 가서 저택의 규칙들을 자세하게 알려주거라.”“네, 왕야.”충복이 상태주와 은장을 데리고 방을 나선 뒤, 염이도 밖으로 물러났다.그리고 난 뒤, 이진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주익선을 쳐다보았다.“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아?”“정말 무섭지도 않아? 왜 그렇게 겁이 없어?”주익선은 솔직히 화가 조금 나기도 했다. 그는 전장에서 적들과 싸우는 건 조금도 두렵지 않지만 전장에서 싸우는 동안 이진의 안위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게 두려웠다.“내가 널 걱정
“소인이 돌보지 않으면 도련님께서는 고생을 많이 하시게 될 겁니다.”은장의 말에 상태주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아니, 넌, 넌…”“소인은 그런 적 없습니다. 도련님을 모욕하는 그런 거짓말을 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어차피 죽을 운명인데 왕야의 말에 반박이라도 해보고 싶었다.“왕야께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신 겁니다.”“말 조심하여라!”곁에 서있던 검구가 호통을 쳤다.이에 은장이 입술을 살짝 오므리며 상태주에게 말했다.“도련님, 많이 마르셨습니다.”상태주 손목에 묶인 쇠사슬은 매우 무거웠다. 상태주는 온몸에 핏자국이 잔뜩 묻은 은장을 보며 그가 고생을 많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은장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이때, 옥졸이 옥 안으로 걸어 들어왔고 뒤에는 부하 몇 명이 뒤따랐다. 그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상태주와 은장을 쳐다보았다.형부에서 사형을 받은 죄인이 옥을 살아서 나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며 눈앞에 있는 상태주와 은장이 처음일 것이다.옥졸이 검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대감님, 그럼 이 두 사람은…”이제 데리고 가는 건가?어차피 조금 전 왕야의 뜻은 이 두 사람을 검구에게 맡기라고 했으니 말이다.이에 검구가 손으로 코를 쓱 막았다. 신세가 처량하고 처참한 상태주와 은장의 몸에서 한참 전부터 썩은 내가 진동했다.“일단 데리고 가서 씻기거라.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히고 사람 시켜서 왕부로 압송하거라.”“네, 알겠습니다.”말을 마친 검구는 이내 이진과 주익선을 쫓아갔다. 주인이 직접 마차를 끌게 할 수는 없으니까.한편, 남은 상태주와 은장은 서로를 쳐다보았다.“이, 이게 무슨 뜻이지?”이에 옥졸이 피식 웃으며 전과 확연하게 다른 태도를 보였다.“아이고, 참 운도 좋습니다. 왕야께서 그쪽을 옥에서 꺼내 주시려는 겁니다.”“저를 옥에서 꺼내 준다고요?”상태주는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그래요.”상태주와 은장은 다시 한번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오늘 왕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