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예진을 쳐다봤다. 친구와 하예정은 결혼을 한 사이고, 이 뚱뚱한 여자는 친구의 처형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 이동명은 하예진에게 수리비를 요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이번에도 그녀는 고의가 아니었다.그에게도 과속한 책임이 있었다.이동명의 주시에 하예진은 속으로 잔뜩 겁을 먹어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막 입을 열려는데 이동명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렇게 많이 샀는데 당신 남편은 도와주러 오지도 않는 겁니까? 아니면 좀 적게 사든지요.""집과 조금 거리가 있을 뿐이라, 다 가져갈 생각이었어요. 제 남편에게 전화해 봤는데 바빠서 데리러 올 새가 없다기에 하는 수 없이 혼자 가져가는 길이었고요. 그러다가 방금 전에 벽돌이 튀어나온 걸 보지 못해 부딪치는 바람에 유모차가 쓰러지고 분유통이 굴러떨어졌어요. 이동명 씨가 그걸 칠 줄은 몰랐어요."하예진은 작은 목소리로 해명했다."애가 울고 있으니 당연히 애부터 달래야 해, 길에 떨어진 걸 주울 틈이 없었어요.""이동명 씨, 저 이번에는 진짜 고의가 아니에요."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정말로 수리비를 요구할 거라면 저 반만 내면 안 돼요? 제가 한 눈 팔아서 실수를 했다만 이동명 씨도 너무 빠른 속도로 운전을 했으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잖아요. 이동명 씨에게도 책임이 있어요."그 말을 다 들은 이동명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지난번에는 전태윤이 그에게 전화를 했던 탓에 전태윤의 얼굴을 봐서 고작 180만 원의 수리비를 요구했던 것이다. 사실 그가 냈던 돈이 하예정보다 훨씬 많았다.그때 전태윤은 하예정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만약 했었다면 아마 하예진에게 배상하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동명은 손을 뻗어 기저귀를 들었다.하예진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기저귀를 전부 차에 실은 뒤 다시 돌아와 유모차를 미는 그를 쳐다봤다.이동명은 하예정을 보며 말했다."타요, 바래다줄게요."'이 뚱뚱한 여자 남편은 이 여자한테 잘해
하예진은 본능적으로 대꾸했다.그녀는 정말로 다른 생각은 없었다.첫째로, 그녀는 이미 망상을 할 나이가 지났고, 둘째로는 이미 결혼을 한 남편도 아이도 있는 사람인 데다 셋째로는 이미 결혼 전의 그 예쁜 미녀가 아니라 그저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이기 때문이었다.이동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럼 배상금에 대해 이야기해보죠."하예진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하예진은 지금 적금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의 파손 정도는 딱 봐도 전보다 훨씬 심각해 보여, 수리비가 더 나올게 분명했다. 그녀에게 배상하라고 하면 아마 전재산을 다 내놔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면 또 주형인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질책당할 게 분명했다.지난번에 유모차로 실수로 차를 긁었을 때도 조금 크게 긁혔다고 180만 원이나 들었다."집 어디예요?""광명 아파트요.""거긴 학군이 좋은 데잖아요. 안목이 좋네요, 행동력도 빠르고."지금 광명 아파트의 집은 다 팔리고 없었다."제 남편이 결혼 전에 산 집이에요. 지금은 매달 대출 갚고 있고요. 이동명 씨, 이번에는 얼마를 배상해야 할까요? 그… 제가 정말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도 아니고, 배상을 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다만 전 가정주부인 데다 수입도 없고, 모아둔 돈도 얼마 없어서 아마, 배상금이 모자랄지도 몰라요.""혹시 다달이 나눠서 드려도 돼요?"하예진은 떠보듯 물었다."저 지금 열심히 일자리 찾고 있어요. 나중에 제가 일자리도 찾고 수입도 생기면, 무조건 전부 배상할게요."이동명은 운전하며 물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이번에는 배상하지 않아도 돼요. 지난번에 수리비를 배상하라고 한 건, 그저 앞으로 다닐 때 조심하라고 교훈을 주려던 것뿐이에요. 저런 유모차는 부딪치면 손해는 당신이 보는 거잖아요. 잊지마요, 저 차에는 당신 아들이 타고 있어요."어쩌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을 떠오른 하예진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제가 보기엔 수리비를 배상하라고 해도 소용없을 것 같네요. 이것 봐요, 이제 겨우 한 달 만에 제 차가 또
하예진은 그를 쳐다봤다.이동명은 하예진이 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챗다. 정말 경계심도 참 많은 여자였다.그는 해명하며 말했다."제 뜻은, 집에 다른 사람이 없는데 아들을 혼자 집에 두고 내려온다는 건 위험하다는 말이었어요."그녀의 아들은 이제 고작 두세 살쯤 되어 보였다. 그 나이대의 아이는 한창 장난기가 많고 짓궂을 때라 세상만사에 호기심을 가지고 이리저리 만지고 장난을 칠 나이였다.만약 위험한 거라도 만졌다가 사고라도 벌어지면 그때는 후회해도 늦었다."일깨워 줘서 고마워요, 이동명 씨. 저 지금 바로 올라갈게요."기저귀들을 손에 쥔 하예진은 이동명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황급히 엘리베이터를 탔다.그러면서 속으로, 이동명은 비록 키도 크고 험상궂은 얼굴에 얼굴에 긴 흉터도 있어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세심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정말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됐다.이동명은 하예진이 올라가고 난 뒤에야 차에 올 타 시동을 걸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는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곧장 본론을 꺼냈다."전태윤 내 차 네 처형과 원수를 진 게 분명해. 그거 알아? 네 처형 때문에 내 포르쉐 앞 유리창이 다 박살 났어.""어떻게 된 거야? 네가 친 거야? 아니면 또 처형이 널 친 거야?"자신의 처형 이야기가 나오자 전태윤은 그래도 조금 관심을 줬다.처형은 그에게 늘 잘해줬었다."그건 아니고."이동명은 일의 경과를 전부 친구에게 설명했다.설명을 마친 그는 말을 이어갔다."전태윤, 내 차 혹시 네 처형이랑 전생에 원수였던 게 아닐까? 나 내일 당장 새로 천만 원 대의 차 한 대를 뽑을 거야. 네 처형이 또 내 외제차를 망가트리지 않게 앞으로 내가 운전하는 날이면 그 차 몰고 다닐 거야. 외제차가 망가지면 나도 마음 아프다고."이번이 벌써 두 번째였다.첫 번째는 그래도 기스가 살짝 난 정도라 심각하지 않아 수리비도 얼마 들지 않았었다.그런데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심각
전씨 가문 할머니의 눈에 들 수 있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었다.전태윤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볼 게 뭐가 있다고. 다 똑같이 눈 두 개에 코 하나, 입 하나지.""하하."이동명은 폭소를 터트렸다.그는 자신의 친구가 하예정을 소개해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소정남은 어쩌면 이미 만났을지도 몰랐다. 심지어 하예정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소정남은 가십에 관심이 많은 데다 정보망도 있어 하예정의 조상의 뿌리까지 다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이동명은 이 화제를 더 이어 나가지 않았고, 친구의 일이 바쁘다는 것을 아는 그는 이내 통화를 마쳤다.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짝할 새에 또다시 깊은 밤이 되었다.전태윤은 롤스로이스 안에 앉아 미간을 어루만졌다. 조금 피곤했다.아마 요 며칠, 정말 뭐에 홀린 건지도 몰랐다. 하루에 이틀, 심지어는 사흘 치의 일을 했으니 힘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도련님, 오늘도 로열 팰리스로 모실까요?"기사가 물었다.전태윤은 뒤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은 채 기사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2분쯤 지나고 나서야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발렌시아로 가.""네."도련님의 대답을 들은 강일구는 온 신경이 다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도련님이 드디어 사모님의 곁으로 돌아갔으니 그들도 이제는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비록 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 뭘 어쩌지는 않았지만 요 며칠 기분이 안 좋은 티가 너무 나 경호원들도 혹시라도 작은 실수를 저질러 전태윤에게 쫓겨날까, 따라서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전태윤은 회사에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접대를 하러 갔던 터라, 집으로 오는 길이 조금 멀었다.그렇게 20분이 지나서야 겨우 발렌시아 아파트에 도착했다.전태윤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집 안은 어두컴컴했다.'아직 안 돌아 온 건가?'불을 키고 시계를 확인하니 11시였다. 곧 하예정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빨리 올라와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전태윤이 다시 마네키네코를 들어 올리는데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거 제가 성소현 씨에게 만들어줬던 것보다 조금 더 커요. 열심히도 만들었고요. 어때요, 진짜 같죠?"자신의 것이 성소현 것보다 더 크다는 이야기를 듣자 전태윤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하게 대답했다."진짜 같네."하예정은 웃으며 대답했다."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그녀는 차 키를 티 테이블 위에 올린 뒤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야식으로 국수해 먹을 건데, 당신도 먹을래요?"전태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스스로 답을 내렸다."아, 참. 깜빡했네요. 당신은 살찐다고 야식 안 먹죠."전태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다 대답까지 했는데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을까?하지만 전태윤은 확실히 배가 고프지 않았다.하예정은 주방에서 면을 삶기 시작했다.잠깐 제자리에 멈춰서있던 전태윤은 이내 주방 입구로 향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문 앞에 서서는 하예정이 고명까지 준비하는 것을 지켜봤다. 그녀는 국수를 먹을 때면 고명을 올린 뒤 계란에 겨자까지 올리는 것을 좋아했다.겨자를 올리면 독특한 맛이 있어 더 맛있다고 했다."따르릉…"하예정의 휴대폰이 울렸다.하던 것을 멈춘 하예정은 작게 구시렁거리며 휴대폰을 확인했다."이렇게 늦었는데, 누가 전화를 하는 거지?"그러다 발신인이 김진우인 것을 확인한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전화를 받았다. 전태윤의 귓가에 하예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응, 진우야. 무슨 일이야?"김진우의 전화라니!전씨 가문 도련님의 귀는 순식간에 토끼 귀마냥 쫑끗 세워졌다."예정 누나, 누나 형부 이름 주형인이지 않아?"김진우는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주형인의 이름이 왜 익숙한지를 떠올렸다. 하예정의 형부 이름이 그 이름이었던 것이 떠오른 그는 곧바로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물론 하예정이 자신에게 고마워하길 바라는 사심도 담겨 있었다."우리 형부 이름이 주형인이 맞긴 한데, 왜? 아는 사
그는 이내 김진우를 떠올렸다. 가장 큰 이유는 김진우는 오늘 재계 모임에 참가하기 위해 관성 호텔로 향했다. 김진우는 김씨 그룹에서는 아직 일개 직원에 불과했지만 김씨 가문에서 내정한 후계자인 데다 김씨 가문 도련님이니 모임에서 물 만난 듯,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고 아부를 받았을 게 뻔했다.전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름의 묵인이었다."아니면, 지금 보내줄까? 너 발렌시아 아파트에 묵고 있지?"소정남은 자신의 친구가 아내가 될 사람의 인품을 시험하기 위해 신분을 속이고 결혼한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특별히 발렌시아 아파트에서 정교하게 인테리어를 마친 집으로 이사까지 했다."됐어, 내일 주면 돼. 시간이 늦었는데 얼른 쉬어. 나도 이제 쉬어야겠어."소정남은 전태윤과 하예정의 일을 전부 다 목격했지만 전태윤은 그래도 소정남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다. 이내 전태윤은 통화를 끊었다.소정남은 구시렁거렸다."오늘 잘 수나 있겠어? 연적이 공로까지 다 빼앗아 가는 마당에."전태윤이 잘 잘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오직 그만이 알 수 있었다.김진우의 말을 다 들은 하예정은 그다지 놀라워하지 않았다. 속에 가득 찬 것은 오로지 분노뿐이었다."진우야, 알려줘서 고마워."하예정은 곧바로 분노를 터트리지 않았다. 그는 김진우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물었다."혹시 두 사람 사진 있어?"어찌 됐건 김진우가 만난 것이 주형인 그 쓰레기가 맞다는 증거가 필요했다."같이 사진은 안 찍었다. 당시에는 그저 이름이 익숙하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누가 얘기했던 건지는 떠오르지 않았었어. 그러다가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누나 매형 이름이 그 이름이었던 것 같아서 전화로 물어보는 거야. 예정 누나, 얼른 누나 언니한테 조심하라고 해. 몰래 증거도 좀 모으고, 혹시 몰래 재산을 빼돌릴 수도 있으니까 그것도 유의하고.""응, 알겠어. 고마워."김진우는 웃으며 말했다."무슨 큰일도 아닌데 뭘, 감사 인사는 필요 없어, 누나.""그럼 방해 안 할 테니까 얼른
하예정은 라면을 먹으며 언니에게 자냐고 문자를 보냈다.키보드 두드릴 시간이면 통화를 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한 하예진은 답장 대신 전화를 걸었다."예정아, 나 아직 안 자. 넌 이제 집에 들어갔어?"하예진은 자신의 동생 생활 패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예전에 그녀의 집에서 함께 지낼 때, 하예정은 제일 늦게 잠들고 제일 빨리 일어나는 사람이었다.하예진은 동생이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차리고 집안일을 했던 것은 다 자신의 남편이 기분 나빠할까 봐 걱정돼서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 다달이 돈도 보태줬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은 그래도 주형인에게 공으로 빌붙어 지낸다고 한 소리를 들었다.침대 옆자리가 비어있지만 이제 하예진도 더는 상관없었다.하예정은 지금 오직 동생만 마음에 두고 있었다."응. 지금 야식 먹고 있어. 언니, 나 언니한테 할 말 있어. 진우가 오늘 관성 호텔에서 모임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형부를 만났대. 예쁜 여자랑 같이 있었다더라. 진우말로는 형부가 그 여자를 엄청 잘 챙겨주는 게 다정한 커플같다고 하더라.""진우는 형부 이름만 알고 만나 본 적은 없잖아. 뒤늦게 생각났다고 나한테 알려줬어. 유진테크 사장이라고 하는 걸 보면 열에 아홉은 형부가 맞는 것 같아. 언니 그 사람 재산 같은 거 빼돌리지 못하게 잘 주시해. 언니 스스로도 꼭 지키고."요즘 세상에, 아내를 죽이는 일은 너무나도 많이 벌어졌다.하예정은 언니에게 자신을 보호하라는 말부터 했다.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혼하면 그만이었다. 남자 하나때문에 목숨까지 잃는 건 너무 무가치한 일이었다.동생의 말을 들은 하예진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사실 그녀는 주형인이 바람을 피웠을지도 모른다고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주형인은 이제 겨우 30이 조금 넘은 나이에 그럭저럭 잘생긴 데다 직장에서도 잘나가고 있었다. 밖은 고사하고 회사 안에만 해도 어리고 예쁜 여자들이 아주 많았다. 매일 회사에서 어리고 예쁜 여자들만 만나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몸매가
눈물을 닦은 하예진은 감정을 추스른 뒤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예상은 하고 있었어. 다만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 몰랐던 거지."주형인은 바람을 피우면서도 아직 그녀에게 숨긴 채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녀의 예상이 맞다면, 주우빈때문일 것이다. 주우빈은 아직 어려 보살핌이 필요한데 시부모는 딸의 아이를 봐줘야 하니 아이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다. 주형인은 늘 팔이 안으로 굽어 자기 가족만 챙기는 사람이었다.그는 자신도 아끼는 누나를 부모님이 챙기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이혼을 하게 된다면 주씨 집안에서는 분명 주우빈의 양육권을 가져가려 하겠지만, 주우빈이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 모를까, 주형인은 자신의 부모가 힘들게 아이 둘을 키우는 것을 마음 아파했다.주형인은 아마 아들이 유치원에 다니고 나서야 이혼 이야기를 할 게 뻔했다.지금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건 무시와 냉대뿐이었다."언니, 아직 증거가 없으니까 아는 티는 내지 마. 나중에 증거 다 모으고 나면 다시 얘기해. 난 그저 언니한테 미리 마음의 준비하라고 알려주는 것뿐이야. 혹시라도 무슨 짓이라고 벌이면 어떡해."하예정은 언니의 울먹이는 듯한 소리를 들었지만 아는 체하지 않았다. 언니에게도 감정을 쏟아낼 시간이 필요했다.울어서 된다면 그녀는 언니가 속 시원하게 울게 내버려 둘 심산이었다.3년의 결혼 생활로 한 남자의 본모습을 알아내는 건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녀의 언니는 이제 막 서른이 넘은 젊은 나이였다. 주형인은 이미 불륜을 저질렀으니 그런 남자는 더는 필요 없었다."그래, 예정아. 언니 노력해 볼게. 너도 이제 저녁 먹어, 언니 괜찮아. 언니가 지금 열심히 일자리를 찾고 있는 것도 다 이혼 준비를 위해서였어."갑작스럽게 부모를 잃고 나서 친척들에게 매정한 취급을 받았을 때도 그녀는 무너지지 않고 동생과 함께 힘겹게 지금까지 살아왔다. 남편이 불륜을 저지른 것뿐, 하늘이 무너진 것도 아니니 하예진은 무너지지 않았다."언니도 빨리 자. 나쁜 생각 하지 말
“할머니께서는 저의 선택을 존중하신다고 하셨지만 후회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이혁은 명해은에게 먼저 국물을 떠드렸고 또 전현민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다시 국물을 한 그릇 떠드리며 말했다.“저는 후회할 일은 절대 하지 않아요.”비록 이전에는 도아영과 꿈속의 여자 ‘여우'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우'와 함께할 때 특별히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는 ‘여우'와의 만남을 간절히 기대했고 만나서 싸운다고 해도 그 순간이 기다려지기만 했다. 이런 기대감은 도아영에게서는 찾을 수 없었다.그가 도아영에게 접근한 건 순전히 전씨 할머니께서 선택해주신 사람이기 때문이다.결국 감정은 억지로 할 수 없는 법, 억지로 따온 열매는 달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명해은이 입을 열었다.“그래. 후회하지나 말고.”명해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어머님이 널 이렇게 쉽게 놔두실 리가 없지. 넌 아직도 진실을 모르고 있구나!'전이혁은 그가 후회할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전씨 할머니께서는 확신 없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시는 분이었다.명해은이 전씨 할머니를 잘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전현민은 아들로서 명해은보다 그의 어머니를 더 잘 알았다.전현민 부부는 서로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웃었다.그리고는 전이혁과 도아영에 관한 화제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식사하면서 명해은은 계속 전이혁에게 반찬을 얹어주었다.“엄마, 제가 방금 돌아오자마자 바비큐를 많이 먹어서 배가 불러요. 이렇게 많이는 못 먹겠어요.”자기 그릇에 산처럼 쌓인 반찬을 보며 전이혁이 말했다.“엄마, 아빠께도 좀 드리세요. 안 그러면 또 제가 아빠의 아내 관심을 뺏었다고 투덜대실 거예요.”말이 떨어지자 전현민도 전이혁의 그릇에 반찬을 얹어주셨다.“평일엔 바쁘게 일하느라 제대로 식사도 못 했겠다. 살도 많이 빠졌네. 많이 먹어.”전이혁은 웃으며 말했다.“아빠, 아까는 밥 한 그릇과 나물 한 접시만 주신다고 하셨잖아요.”“그건 화나서 한 말이지,”전이혁도 부모님께 반찬을
명해은은 선물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저도 이 녀석이 혼자 올 줄은 몰랐어요. 어머님께서 이혁이가 점심 먹으러 온다고 하시길래 아영 씨도 따라서 온줄 알았거든요. 어제 함께 저녁도 먹고 술도 마셨으니 오늘은 데려올 줄 알았는데.”명해은은 전이혁이 준 선물도 이제는 별로 반갑지 않았다. 미래의 며느리인 도아영이 와야 기쁠 것 같았다.전이혁이 입을 열었다.“지금 바로 나갈게요. 회사로 돌아갈게요.”그는 일어서서 떠나는 척했다.전현민이 다시 말했다.“네 엄마가 이미 반찬을 더 준비하라고 했는데 우리 집의 강아지도 다 먹지 못할 텐데 네가 도와서 다 먹고 가.”즉, 집에서 기르는 개가 밥을 다 먹을 수만 있다면 전이혁에게 밥을 주지도 않겠다는 의미였다.여자친구를 데려오지 못하는 아들은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집안이란 말인가.“밥 드세요.”명해은은 남편과 아들을 식탁으로 불렀다.전이혁은 일어나 명해은을 따라가며 중얼거렸다.“정말 밥 안 주실 줄 알았어요... 저는 이제 우리 집 개보다도 못한 존재네요.”“이번은 봐줄게. 다음에 도아영 씨가 오면 꼭 데리고 와서 식사해. 네 아빠와 나도 한번 보게. 길에서 마주쳐도 누군지 모를 텐데 우리도 한 번 좀 만나보자고.”“엄마, 저는 아영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명해은이 눈을 부릅떴다.“할머니께서 골라주셨는데 안 좋아한다고? 안 좋아하면서 지난 몇 달 동안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네 형은 두세 달 만에 운초의 마음을 움직였는데.”여운초는 당시 그녀가 시각장애인이어서 전이혁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계속 거절했지만 사실은 이미 마음이 움직인 상태였다.전이혁은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저랑 형은 달라요. 형도 3개월 만에 형수님을 꼬시지는 못했거든요.”명해은도 앉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가 안 좋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할머니께서 골라주신 사람인데 아무리 못해도 그 정도는 아닐걸. 너무 까다롭게 여자를 고르지는 마. 너도 거울 좀 봐. 넌 너희 형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도 아
명해은의 친정집도 재벌 가문으로 그녀는 어릴 때부터 보석 액세서리들과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었다.전씨 가문에 시집올 때 그녀의 부모님과 형님, 형수님이 준비해 주신 보석들은 보석 가게를 열어도 될 만큼 많았는데 그것이 그녀의 혼수품이었다. 지금도 그 보석들은 그녀의 보석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전이진이 여운초와 결혼한 뒤로 명해은은 수많은 소장품 보석들을 며느리에게 선물했다.전이혁이 대답했다.“저는 아직 아내가 없잖아요. 새로 나온 보석 액세서리들을 보고 너무 예뻐서 한 세트 사 왔어요.”“전씨 할머니께도 사드렸지?”전이혁은 빨간색 선물 상자를 명해은에게 건네며 말했다.“할머니께서 액세서리들을 선물하지 말라고 하셔서 꽃다발만 사드렸어요. 근데 또 산 아래 꽃밭에 꽃이 많은데 왜 돈을 쓰냐면서 꾸지람 하신 거 있죠.”명해은은 상자를 건네받으며 웃었다.“겉으로는 싫다고 하시지만 속으로는 매우 기쁘셨을 거야. 꽃다발을 네게 돌려주지 않으신 건 마음에 드셨다는 뜻일 거고. 오늘 산 아래 모든 사람에게 자랑하지 않고서는 돌아오지 않으실 거다.”수십 년 동안 전씨 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명해은은 시어머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명해은은 다시 아들 뒤를 살피다가 차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차에 아무도 없니? 너 혼자 왔어? 할머니께서 네가 식사하러 온다고 하시길래 엄마는 네가 귀한 손님을 데려올 줄 알았는데.”“제가 혼자 왔어요.”전이혁은 모른 척했지만 속으로는 전씨 할머니가 이미 도아영이 관성에 온 일을 명해은에게 알려주었을 것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말씀대로라면 명해은 부부가 아들들의 인생사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평소 부모님의 결정을 따르지 않았기에 조바심을 내도 소용없었을 뿐이다. 하여 전씨 할머니께서 나서서 형제들의 인생사를 걱정해주실 수밖에 없었다.명해은은 아들을 노려보며 나무랐다.“도아영 씨가 온 거 아니었어? 너희들 어제저녁 함께 식사도 하고 밤도 같이 보냈잖아. 근데 데려오지도 않고 말이야. 엄마는 할머니께서 너에게 골
도아영은 그 선물이 전이혁이 선물인 것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잠시 생각하던 전이혁은 결국 전씨 할머니의 말씀대로 하기로 했다.만약 도아영에게 선물이 자신이 준 것이라고 알려준다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도아영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집착할 수도 있을 테니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할머니, 집에 가서 식사 안 하실 거예요?”전이혁은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전씨 할머니가 대답했다.“너무 많이 먹었더니 배가 불러. 조금 있다가 가서 흰죽 한 그릇 먹을 거야.”고기 요리를 많이 먹으면 간단한 죽에 김치를 곁들이는 게 좋았다.“넌 집에 가서 네 부모님과 식사하렴.”“네.”전씨 할머니가 집에 가길 원하지 않자 전이혁도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다른 어르신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셨고 굶을 염려도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꽃 구경하자고 전화해서 친구들을 불러야겠다.”전씨 할머니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어르신들이 이쪽으로 오는 모습을 확인한 전이혁은 그제야 정자에서 나왔다.곧 차 앞에 도착한 전이혁은 차에 올라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떠난 뒤로 전씨 할머니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으면서 속삭이는 것을.“이 자식아! 너는 할머니를 이길 수 없어. 나중에 네가 할머니에게 매달릴 날이 올 거야.”이렇게 해야 드라마가 재미있어지는 법. 노년의 삶에 약간의 즐거움을 더할 수 있으니 말이다.나이가 들면 할 일이 없어진다. 손자들이 일을 시키지 않는다면 전씨 할머니는 손자들을 놀려먹으며 즐기면 그만이었다.명해은은 별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이혁의 차가 보였고 그가 아직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명해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피어났다.아들이 다 큰 뒤로 집에 오는 횟수가 줄어들자 명해은 부부는 아들들이 집에 와서 식사라도 함께하는 걸 간절히 바랐다. 며칠이라도 집에서 머물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하지만 아들들이 모두 바쁜 사람들인
전씨 할머니는 묵묵히 전이혁을 바라보았다.이미 모든 말을 털어놓은 전이혁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전부 입 밖으로 내뱉었다.오늘 본가에 온 것도 전씨 할머니에게 확실하게 말하러 온 것이다. 그는 형들처럼 전씨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전이혁에게는 그가 원하는 여자가 있었다.그의 말이 끝나자 전씨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의 말도 일리가 있구나. 오래 끌기보다 단칼에 정리하는 게 낫지. 아영 씨도 너에 대한 감정이 아직 깊지 않을 테니 확실히 설명해 주고 마음을 접게 하는 게 좋겠다. 아영 씨의 시간을 더 뺏지 말고.”전씨 할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물었다.“이혁아, 정말 아영 씨를 고려하지 않을 거냐? 할머니의 안목을 전혀 믿지 못하겠어?”전이혁은 진지하게 대답했다.“할머니, 저는 할머니의 안목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여자예요. 그런데 저는 그녀에게 설레는 느낌이 없어요. 아영 씨와 결혼한다 해도 예의만 차리며 형식적으로 살뿐 진정한 부부간의 정은 없을 거예요. 아영 씨도 똑똑한 사람이라 그런 삶을 원하지 않을 거예요. 사랑이라는 건 강제적으로 이어진다고 해서 감정이 생기지는 않는 것 같아요.”전씨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알겠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할머니도 이제는 네 연애사에 간섭하지 않겠어. 원하는 대로 해 봐. 하지만 단 한 가지! 인품이 좋은 여자를 데려와. 아주 뛰어나지 않아도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사람이어야 해. 우리 전씨 가문의 이름을 망치지 말고. 만약 인품이 나쁜데도 네가 고집부린다면 난 억지로 막지는 않겠다. 대신 나와 인연을 끊고 전씨 가문에서 나가.”전씨 할머니는 쥐 한 마리가 천 냥 술을 썩히는 걸 용납하지 않으셨다.전씨 가문의 좋은 명성은 몇 대에 걸쳐, 그리고 전씨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평생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것이다.전이혁 하나 때문에 무너지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약속했다.“전씨 할머니, 걱정하
“할머니는 제 마음속에서 저의 부모님보다도 더 중요하거든요. 백 세까지 오래오래 사셔야 증손녀도 안으실 거 아니에요. 우리 형제가 아홉이나 되는데 앞으로 아홉 며느리가 생기면 그중 한 명이 꼭 증손녀를 낳아드릴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증손녀를 안고 키우시면서 나중에 좋은 신랑을 골라주시기까지 하셔야 하는걸요.”전씨 할머니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나도 하느님께 500년 수명을 더 빌고 싶지만 그게 될 일이니? 현실을 직시해야지. 나는 증손녀가 태어나는 걸 보기만 해도 만족해. 증손녀가 시집갈 때까지 살겠다는 건 너무 큰 욕심이지.”전씨 할머니의 건강은 아직 좋으시지만 이미 여든이 넘으신 데다 증손녀가 언제 태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다.어쩌면 막내인 전이율이 결혼할 때까지 살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어이구, 농담이야. 아까 내가 말했듯이 인품이 좋고 가치관이 바르면 내가 정한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고. 그럼 꿈속의 그녀가 누군지는 아느냐?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네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전이혁은 얼굴이 빨개지며 당황했다.“제가 너무 무능해서 알아낸 정보가 하나도 없어요. 정남 형에게 부탁해 그녀를 조사해보라고 했는데 이런 일은 신경 쓰기 싫다고 하더군요. 만약 태윤 형이 부탁한다면 무슨 일이든 도와주겠지만 제가 부탁하는 건 싫다고 하더라고요.”“정남이가 네 형의 친구이지 네 친구가 아니잖아.”전씨 할머니는 소정남이 전이혁의 부탁을 거부한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정남은 전이혁에게 빚진 것도 없지 않는가.전이혁은 전씨 그룹 본사에서 일하지도 않고 소정남과도 동료 사이도, 친구 사이도 아니었다. 소정남이 원하면 도와주고 원하지 않으면 안 도와줘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그런 일까지 정남에게 부탁하려고?”전씨 할머니가 다시 물었다.전이혁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그는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라 결국은 바베큐만 먹었다.“2, 3개월 정도의 시간을 더 주겠다. 그때 가서도 여전히 도아
그런데도 전이혁은 휴지로 할머니의 자리를 닦았다. 그러나 전이혁 자신은 의자에 앉을 거라서 굳이 의자를 닦지 않았다.“할머니는 정말 수재이신 것 같아요. 수재는 집 밖을 안 나가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잖아요.”할머니는 전이혁을 흘겨보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만 아부하고, 어서 말해봐. 도아영 씨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 건데?”“아영 씨 괜찮은 사람이에요. 전 나쁘다고 한 적 없어요. 저도 좋아해 보려고 노력했어요. 아영 씨와 감정을 쌓아보려고 노력도 했는데 전 안 생기고 아영 씨만 강정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먼 길까지 절 찾아와서 따지더라고요.”“아영 씨는 제가 자기 가지고 논 거 아니냐고 하는데, 저도 억울해요. 저도 아영 씨 좋아해 보려고 진심으로 노력했지만,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는 걸 어떡해요.”전이혁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입은 쉬지 않고 계속 바비큐를 먹고 있었다.“할머니가 점찍은 사람이라 능력도 좋고 조건도 잘 맞고, 여러모로 저랑 잘 어울린다는 거 알아요. 저도 아영 씨를 싫어하지 않고요. 하지만 함께 있으면 뭔가 찌릿한 느낌이 부족해요. 이미 봐온 시간도 꽤 되고, 이제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전 아영 씨를 사랑할 수 없어요.”“물론 제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아영 씨와 결혼해서 평생 서로 존중하며 지낼 수는 있을 거예요.”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그런데?”전이혁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뗐다.“할머니도 아시잖아요. 제 꿈속에 자꾸 어떤 여자가 나타나 저와 얽힌다는 사실을요. 사실, 현실에서 진짜로 그 여자를 만났어요.”“나도 알고 있어.”전이혁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정말 할머니를 속일 수 없다니까. 제가 그 여자의 물건을 가지고 간 것도 아시잖아요.”“네가 그 물건 가져간 거 인정하면서 왜 아직도 안 돌려줘? 그 여자가 회사까지 찾아가서 네 둘째 형에게 물어봤었다며. 너 없다는 거 알고 나서야 돌아갔다고 하더라.”이 일은 할머니뿐만 아니라 전씨 가문 온 가
전날 밤잠을 설쳐 속이 불편했던 전이혁은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비닐봉지에 먹을 것들을 담고 나서야 할머니의 뒤를 따랐다.“할머니, 여기 구운 닭 다리요.”전이혁은 할머니에게 닭 다리 하나를 건넨 뒤, 고개를 돌려 테이블 앞에 앉아 입가가 번지르르할 정도로 맛있게 먹고 있는 그 여자아이를 바라보더니 할머니에게 물었다.“할머니, 그런데 저 여자아이는 누구예요? 엄청 복스럽게 먹고 있네요.”“소령이라고, 그 애 부모가 여기 꽃밭 관리자야. 난 그 애가 참 마음에 들어.”전이혁은 할머니가 구운 생선 꼬치를 먹으면서 말했다.“할머니는 여자아이면 다 좋아하잖아요. 예씨 가문에 갔을 때도 그 집안에 유일한 증손녀를 데려오고 싶어 하셨잖아요.”할머니는 아쉬운 듯 말했다.“우리는 예씨 가문과 조건도 비슷하고 가풍도 똑같이 좋은 집안이라 지연이가 우리 집에서 살더라도 나쁠 게 없을 텐데, 아쉽게도 그 집 식구들이 허락하지 않더구나. 예준성은 내가 정말 딸을 데려가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나를 경계했는지 몰라. 내가 가면 할 일도 없는지, 맨날 집에 붙어서 나를 감시하는 거야.”“그거야 지연이가 예씨 가문의 유일한 증손녀이니 당연히 아까워하죠. 제가 예준성이라도 할머니가 딸 훔쳐 갈까 봐 감시했을 거예요. 하하하.”전이혁은 눈앞에 그려지는 그 장면을 상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손자인 전이혁이 보기에도 할머니는 진심으로 손녀 아니면 증손녀를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그는 가끔 자기 부모에게 시험관 아기라도 시도해서 넷째는 꼭 딸을 낳으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돌아오는 건 부모의 매질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의 부모는 이제 손주 볼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 그들 형제 셋이 각자 노력해서 딸 한 명쯤은 낳아 보라고 독려하곤 했었다.“할머니한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자, 이제 말해 봐.”할머니가 물었다.전이혁은 웃으면서 대답했다.“할머니 보고 싶어서 왔죠. 그냥 할머니 보러 오면 안 돼요? 꼭 할머니한테 무슨 할 얘
전씨 할머니는 한 손에 꽃다발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갓 구운 생선을 집어 전이혁에게 건넸다.“이런 작은 생선은 막 구웠을 때 먹는 게 맛있어. 식으면 맛이 없으니 따뜻할 때 먹어.”“고마워요, 할머니.”전이혁은 할머니가 건넨 생선을 받아 주저 없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먹던 중에 핸드폰을 꺼내 전우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전이혁은 전우와 나이도 비슷하고, 어릴 때부턴 전우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형제 중에서 전우와 가장 친했다. 그러니 그는 자랑하고 싶을 때는 무조건 전우를 찾았다.전이혁의 사진을 보자마자 전우는 가족 단톡방에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할머니, 낚시 가셨어요? 직접 구워 드시기까지 하네요. 많이 잡으셨어요? 저도 먹을래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이혁은 일부러 약 올리듯 답장했다.“이젠 없어. 할머니께서 나 주려고 특별히 남겨둔 거야. 그러니 네 몫은 없어. 그리고 너 진짜 생선 한 조각 먹으러 올 거야? 손해가 클 텐데?”“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할머니표 생선구이는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할머니는 워낙 자유로워서 오전엔 리조트에 있다가도 오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었으니, 큰 손자인 전태윤도 못 말릴 정도였다.부모 세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는 것밖에 없을 뿐, 감히 할머니를 간섭할 수 없었다. 그나마 큰 손자인 전태윤이 할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마저도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할머니는 그야말로 나이 든 개구쟁이였다. 할머니는 지금은 리조트에 있지만 다섯째 손자인 전우가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웃으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많이 잡지 못했어. 넷째한테 줄 몇 꼬치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먹었어. 먹고 싶으면 설 연휴 때 와서 직접 낚시해서 구워 먹어. 그래야 더 맛있지.”전우는 아쉬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