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네가 누구였는지가 궁금해졌으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쏟아진 유헌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최근 이어진 집요한 자료 요청과 질문만 놓고 보아도 방향은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익명의 전략가 ZERO의 행방을 쫓던 그의 시선은 어느새, 자신이 알지 못했던 도해림의 과거 자체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다.하지만 해림은 그 거대한 의심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차갑게 방어벽을 쳤다.
"그건 당신이 알아낼 문제가 아니에요.""그럼?""내가 말할 문제죠."해림은 그 한마디로 유헌에게 쥐어질 뻔했던 주도권을 다시 완벽하게 자신에게로 빼앗아 왔다.
"그럼 기다리세요. 내가 내 이름을 직접 말할 때까지."통화는 거기서 끝났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더 이상의 질문이 돌아오지 않았다.적어도 이번만큼은, 그가 해림이 그어놓은 선을 억지로 넘어 정답을 강요하지 않은 채제로파트너스 공식 설명 자리는 예상보다 훨씬 무겁고 팽팽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주요 언론사 기자들과 핵심 거래처 관계자들, 그리고 이 사안의 가장 거대한 이해관계자인 에이온의 강유헌까지. 장내를 채운 수많은 시선이 브리핑 룸의 닫힌 문을 향해 쏠려 있었다. 모두가 숨죽여 기다리는 것은 단 한 명, 그동안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던 익명의 전략가 'ZERO'였다.그러나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단상 위로 걸어 올라온 것은, 도해림 단 한 사람뿐이었다.해림이 마이크 앞에 서자마자 쉴 새 없이 플래시가 터졌다. 장내의 웅성거림이 커지는 가운데, 맨 앞줄에 앉은 기자가 마이크를 쥐고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도해림 대표님! 익명 전략가 ZERO 본인은 언제 참석합니까? 도 대표님 설명이 끝난 뒤에 따로 입장하는 겁니까?"해림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장내를 한 번 훑어 내렸다."따로 들어올 사람은 없습니다."기자들의 웅성거림이 일순간 멈칫했다. 누군가 의아한 얼굴로 되묻기도 전에, 해림의 서늘하고 명징한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ZERO는 이미 이 자리에 와 있으니까요."해림은 천천히 마이크를 제 앞으로 당겼다."과거 에이온의 해외 공급망 사업을 비롯해 수많은 프로젝트에서, ZERO라는 이름으로 전략을 검토하고 사업을 설계해 온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아주 짧은, 그러나 영원 같은 한 박자의 정적. 해림이 쐐기를 박듯 마지막 문장을 내뱉었다."도해림. 제가 ZERO입니다."순간, 브리핑 룸 전체의 시간이 멈춘 듯했다.미친 듯이 터지던 카메라의 플래시조차 2, 3초간 완전히 얼어붙은 듯한 완벽한 정적. 그리고 직후, 장내가 터져나갈 듯한 굉음과 질문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방금 하신 말씀, 과거 에이온의 위기
"네가 누구였는지가 궁금해졌으니까."전화기 너머에서 쏟아진 유헌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최근 이어진 집요한 자료 요청과 질문만 놓고 보아도 방향은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익명의 전략가 ZERO의 행방을 쫓던 그의 시선은 어느새, 자신이 알지 못했던 도해림의 과거 자체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다.하지만 해림은 그 거대한 의심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차갑게 방어벽을 쳤다."그건 당신이 알아낼 문제가 아니에요.""그럼?""내가 말할 문제죠."해림은 그 한마디로 유헌에게 쥐어질 뻔했던 주도권을 다시 완벽하게 자신에게로 빼앗아 왔다."그럼 기다리세요. 내가 내 이름을 직접 말할 때까지."통화는 거기서 끝났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더 이상의 질문이 돌아오지 않았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그가 해림이 그어놓은 선을 억지로 넘어 정답을 강요하지 않은 채 서늘한 침묵으로 물러섰다.통화를 마친 해림은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이온 측의 공격적인 자료 요청은 멈췄지만, 이미 한 번 외부로 흘러나간 'ZERO'라는 익명의 이름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거대한 파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대표님. 언론과 거래처 쪽에서 추가 문의가 폭주하고 있습니다."전략팀 실장이 긴장된 얼굴로 보고서를 내밀었다."ZERO 관련입니다."질문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과거 에이온 자료를 검토했던 익명 전략가 ZERO는 현재도 제로파트너스와 관계를 맺고 있는가. 당시 ZERO가 수정하고 검토했던 그 핵심 전략본들의 최종적인 권리와 책임은 ZERO 개인에게 있는가, 아니면 제로파트너스 내부 권한에 귀속되는가. 그리고 도해림 대표와 ZERO는 정확히 어떤 관계인가.이것은 누군가 악의적으로 조작한 새로운 공격이 아니었다. 제로파트너스가
"이런 우연이 몇 번까지 겹쳐야, 우연이 아니게 되는 걸까."휴대전화 너머로 유헌의 짙은 의심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해림은 그 거대한 추론 앞에서도 섣불리 무너지거나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직접 증명하세요."해림의 목소리는 한 치의 떨림 없이 단호했다."내 입을 통해 억지로 정답을 확인하려 들지 말고요."그녀는 아니라고 정체를 부정하지도, 맞다고 자백하지도 않았다.확인되지 않은 빈칸은 오직 객관적인 증거로만 채우라는 해림의 뼈대 굵은 원칙. 그녀는 그 원칙을 유헌에게도 똑같이 들이밀며 가차 없이 전화를 끊었다.통화가 끊어진 뒤, 에이온 측의 움직임은 한층 더 기민하고 예리해졌다. 제로파트너스 법무팀으로 공식적인 추가 사실 확인 요청서가 날아들었다.해림은 모니터 화면에 차례대로 띄워진 에이온 측의 구체적인 요청 항목들을 말없이, 그러나 아주 예리한 시선으로 훑어내렸다.* 과거 해외 공급망 협상안 관련, 제로파트너스 측 최종 외부 전달 승인권자 확인.* ZERO 피드백 반영본의 실무 관리 주체 및 직전 승인 흐름 대조.앞서 ZERO가 관여했던 과거 프로젝트들을 하나씩 골라 확인하던 것보다도, 이번 요청은 훨씬 더 좁고 구체적이었다. 적어도 이 추가 요청서만 놓고 보면, 확인 범위는 이전보다 더욱 예리하게 좁혀져 있었다. 요청 항목은 도해림과 ZERO, 두 이름이 같은 업무 흐름 안에서 얼마나 가까이 맞물려 있었는지를 핀포인트로 확인하는 쪽으로 정확하게 모이고 있었다."대표님. 에이온 쪽에서 요청한 이 과거 버전들 말입니다."자료를 정리하던 팀원이 모니터를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ZERO 님의 검토 반영본 직전과 직후에, 대표님이 최종 송부를 승인하셨던 결재 로그들이 전부 포함되어 있는데&hellip
"내가 모르는 네 이름이, 또 있어?"전화기 너머로 날아든 강유헌의 서늘한 질문. 그 한마디는 해림이 단단하게 감춰두었던 과거의 문 앞까지 조용히 다가와 있었다.하지만 해림은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잠시 호흡을 고른 뒤,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그걸 당신이 알아야 할 이유가 있나요?"자신이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그것을 강유헌에게 설명해 줄 의무는 없었다. 질문의 권리 자체를 차갑게 되돌려주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유헌은 방금 전처럼 '부부'라는 낡은 소유권의 언어를 다시 꺼내들지 않았다. 대신 그가 새롭게 파고든 것은, 두 사람만이 공유하고 있던 과거의 구체적인 '기억'이었다."3년 전, 해외 공급망 협상."유헌이 툭 던진 한마디에 해림의 귓가로 과거의 서늘한 밤공기가 스쳐 지나갔다.당시 에이온은 무리한 해외 진출로 인해 막대한 페널티를 물어야 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해외 쪽 조건이 안 맞아서 계약을 완전히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내가 집에서 그 얘기를 꺼냈던 날이 있었어."해림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분명 그런 날이 있었다.늦은 밤, 거실 소파에 앉아 피곤한 얼굴로 넥타이를 풀어 헤치던 유헌은 무심코 회사 사업의 벼랑 끝 위기를 입 밖으로 흘렸었다. 그때 해림은 그저 말없이 따뜻한 차를 내어주며 그의 곁에 앉아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유헌은 그녀에게 조언을 구하지도, 해결책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혼잣말을 던지듯 뱉어낸 무거운 투정이었을 뿐이다."그날 밤, 내가 그 문제를 밖으로 꺼낸 사람 중 하나가 너였어."유헌의 목소리가 한층 묵직하게 가라앉았다."그리고 며칠 뒤, 거짓말처럼 ZERO 쪽에서 협상안의 구조를 완전히 뒤
[ZERO는 언제부터 제로파트너스와 일했지?]해림은 진동이 멈춘 휴대전화 화면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화면 위로 떠오른 문자는 단순한 정보 확인이 아니었다. 질문의 방향만 놓고 보면, 강유헌이 ZERO와 도해림 사이의 거리를 본격적으로 재기 시작했다는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해림은 당황해서 가짜 연도를 꾸며내거나,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인물을 급조하여 비겁한 거짓말로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건조하게 자판을 두드렸다.[ZERO의 개인 이력과 협업 시점은 이번 자료 공방에서 증명해야 할 확인 범위가 아닙니다. 제가 당신에게 그 부분까지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어요.]전송 버튼을 누른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짧은 진동과 함께 다시 답장이 날아왔다.[넌 ZERO를 직접 알고 있어?]해림의 손이 잠시 멈췄다. 과거, 강유헌은 자신이 고용한 외부 전략가 ZERO의 얼굴조차 몰랐기에 해림을 향해 'ZERO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동일한 남자가 훨씬 뒤늦게 해림을 향해 ZERO와 얼마나 가까이 맞닿아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그 질문에도 답할 생각 없습니다. 당신이 지금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건 딱 우리 회사가 보내준 시간순서 기록까지예요. 그 빈칸 너머의 진실을, 섣불리 내 대답을 통해 채우려고 하지 마세요.]해림은 불필요한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차갑게 선을 그었다. 확인되지 않은 빈칸을 감정이나 억측으로 채우지 않고 오직 객관적인 증거로만 상대하겠다는 단호한 선언이었다. 해림의 그 뼈대 굵은 경계선이 전송되자마자, 휴대전화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강유헌이었다."왜 말하지 않았어?"전화를 받자마자 유헌의 낮고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무엇을요?""네가 ZERO에 대해 이렇게까지 많은 권한과 업무의 흔적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야."해림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수없이 많은 밤을 새워가며 이름도 없이 에이온의 위기를 넘겨주었을 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전부 다?"전화기 너머 유헌의 그 짧은 질문에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깊은 이질감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해림은 그 질문의 무게를 덜어내듯 차분하게 대답했다."네. 반론 자료의 기획부터 배포까지, 제가 전부 직접 통제했습니다. 왜요?"해림이 질문의 의도를 건조하게 되묻자,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짧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당장 '너 ZERO지?' 하고 몰아세우는 식의 성급한 확정은 돌아오지 않았다."…아니야."유헌이 낮게 중얼거렸다."추가로 확인할 게 생겼어."그는 끝내 질문의 끝을 맺지 않은 채 먼저 통화를 종료했다.통화는 짧게 끝났지만, 그 직후부터 제로파트너스 내부에는 기묘한 파장이 일기 시작했다. 에이온 측에서 과거 프로젝트 관련 자료에 대한 추가 확인 요청이 연달아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대표님. 에이온에서 또 과거 자료 열람 요청이 왔습니다.""또요?"보고를 받은 해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처음 한두 번은 외부로 터진 불법 반출 의혹을 법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정상적인 검증 절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 번째, 네 번째 요청으로 이어지면서 요청되는 자료들의 성격이 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해림은 에이온 측에서 요청한 과거 프로젝트 목록을 화면에 띄웠다.과거 에이온 해외 진출 사업의 리스크 검토 이력.당시 최종 승인 직전, 구조가 완전히 뒤집혔던 전략안.그리고, 치명적인 구조적 문제가 해결된 채 통과되었던 신규 사업안들까지.구체적인 사업의 명칭이나 시기는 모두 달랐지만, 해림의 눈에는 그 복잡한 목록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거대한 뼈대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그것은 전부 과거 에이온이 해결하지 못한 위기에 처했을 때, 익명의 전략가 'ZERO'가 관여하고 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