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래? 그럼 다행인데……. 혹시라도 누나가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준 거라면, 나한테라도 털어놨으면 좋겠어.”“……왜 내가 억지로 줬다고 생각해?”해인이 방어적으로 되묻자, 서우는 소파에 기대었던 상체를 천천히 앞으로 숙이며 정곡을 찔렀다.“누나, 형한테 부담 주기 싫다면서 그동안 그 카드 한 번도 안 썼잖아. 자기도 안 썼던 걸 갑자기 어머니한테 턱 하니 내줬다는 게 이상하잖아.”“…….”서우의 예리한 지적에 해인은 말문이 막혔다.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만 깨물고 있는 해인을 보며, 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해인의 곁으로 다가와, 늘 철없이 굴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진중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혼자 끙끙 앓지 마. 힘들면 같이 해결해 나가면 되니까.”완벽한 타이밍이었다.기댈 곳 없는 해인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는, 가장 완벽하고 안전한 형태의 위로.해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서우는, 이내 평소의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아, 배고프다. 얼른 밥 먹으러 넘어가자. 오랜만에 다 같이 저녁 먹네.”무겁게 짓눌려 있던 공기가 서우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일순간 환기되었다.해인은 멍했던 정신을 다잡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저녁 공기는 적당히 선선해서 쾌적했지만, 해인의 머릿속은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묵묵히 앞서 걷던 서우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해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서우야. 아까 그 이야기 말이야.”걸음을 멈춘 서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해인은 애써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오빠한테는 당분간 말하지 말아 줄래? 알면…… 기분 나빠할 것 같아서 그래.”서우는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비밀로 해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어차피 명세서 날아오면 형도 다 알게 될 텐데? 누가 봐도 누나가 살 만한 물건들이 아니었잖아.”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해인은 자신이 처한 이 비참하고 무력한 상황을 그에게
H 백화점 명품관 VVIP 라운지.선글라스를 낀 채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아 있던 서우는, 맞은편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목소리에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렸다.“아니, 내가 돈이 없어서 그래? 신상품이 들어왔으면 나한테 먼저 연락을 줘야지, 사람 번거롭게 매장까지 발걸음하게 만들어!”머리부터 발끝까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명품으로 휘감은 중년 여자.직원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는 여자를 불쾌하게 응시하던 서우의 눈매가 일순간 가늘어졌다.‘분명 처음 보는 여자인데…… 엄청 낯이 익단 말이지.’서우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고단한 세월 탓에 사나운 주름이 깊게 패어 억세 보일 뿐, 가만히 살펴보니 이목구비 자체는 꽤 선이 고왔다. 살짝 아래로 처진 큼직한 눈매와 유난히 도톰한 입술까지.누구랑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머릿속을 빠르게 헤집던 서우의 눈동자가 한순간 크게 흔들렸다.그의 시선을 느낀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뭐예요, 젊은 사람이, 아까부터 남을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여자가 앙칼지게 쏘아붙이며 서우의 앞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서우는 당황하기는커녕,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윤해인!”“……뭐? 당신 누군데 내 딸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려?”순간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딸이라는 단어에 서우의 입가에 짙은 호선이 그려졌다.‘아하, 그래서 닮았구나. 윤해인의 엄마라.’퍼즐이 완벽하게 맞춰진 서우는 특유의 서글서글하고 나른한 미소를 장착하며 명희를 향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아, 어쩐지. 눈매가 너무 고우셔서 제가 아는 분이랑 헷갈렸나 했는데, 해인 누나 어머님이셨구나. 어머님, 안녕하세요. 저 이그니스 전속 모델 강서우라고 합니다.”“모, 모델?”“네. 일 때문에 누나랑 회사에서 몇 번 뵀거든요. 누나가 워낙 미인이셔서 어머니도 한 미모 하시겠다 생각했는데, 실제로 뵈니까 자매라고 해도 믿겠습니다.”명품관 직원을 잡도리하던 명희의 험악했던 기세가
오후 3시.숨 막히는 적막이 감도는 임원 회의실 안, 도윤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무시하려던 도윤의 시선이 스마트폰 화면에 닿은 순간, 미간이 얕게 좁혀졌다.[해인]‘이 시간에 해인이가 먼저?’한낮의 연락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찰나의 반가움은 이내 서늘한 예감에 먹혀버렸다. 이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불길한 가정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무슨 일이지? 회사에서 곤란한 상황이라도 생긴 건가. 아니면…… 설마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야?’그는 보고를 이어가던 팀장의 말을 손짓으로 끊고는 양해를 구하며 회의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복도 끝 창가에 서서 전화를 받는 도윤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해인아. 무슨 일 있어?”— 오빠. 지금 통화 괜찮아?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해인의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차분했지만, 도윤은 그 끝에 매달린 미세한 떨림을 단번에 잡아냈다.— 미안해. 방금 회사 로비로…… 엄마가 찾아왔어.“뭐?”도윤의 눈빛이 매섭게 돌변했다.김명희.각서에 지장을 찍고 돈을 챙겨 떠났던 여자가 기어코 해인의 회사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에 짙은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우리 관계……, 이미 다 알고 있었어. 한 여사님께 들었다던데, 다행히 아저씨는 아직 모르시는 것 같고.“한 여사가?”도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김명희가 찾아왔다는 사실보다, 한 여사가 김명희를 쑤셔놓았다는 사실이 도윤의 신경을 더 날카롭게 긁었다.한 여사가 알았다면, 그 깐깐한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다.아니, 이미 모든 걸 꿰뚫어 보고 계실 터였다.그런데도 그 불같은 양반이 여태 잠잠하시다?이유는 하나뿐이었다.아버지는 도윤과 해인의 관계를 한낱 가벼운 ‘불장난’쯤으로 치부하고 계신 거다.정해진 혼처로 장가를 가기 전, 잠시 거쳐 가는 젊은 날의 일탈.‘그래…… 오히려 잘됐어. 차라리 그렇게 오해하시는 편이 나아. 지금은 그런 눈속임이 필요해. 해인이가 내 옆에서 온전히 제 발로 설 수 있을 때까지만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정적을 갈랐다.한태준이었다.손에 서류철을 든 태준이 두 사람의 테이블로 다가와 해인의 앞을 살짝 가로막듯 섰다.“제가 딱 15분만 시간 준다고 했었는데.”해인의 파리한 안색과 노골적으로 지갑을 향해 뻗은 명희의 손을 번갈아 살핀 태준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죄송합니다. 그게…… 막 일어서려던 참입니다.”태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지갑과 명희의 뻗은 손, 그리고 하얗게 질린 해인의 얼굴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상황을 단번에 파악한 태준은 대수롭지 않은 척, 테이블 위에 놓인 해인의 지갑을 집어 들어 그녀의 손에 단단히 쥐여주었다.눈앞에서 현금을 놓친 명희의 얇은 눈썹이 불쾌하게 꿈틀거렸다.“지금 뭐하는 거예요? 누군데 대화 중에 불쑥 끼어들어요?”“이그니스 마케팅팀 한태준 팀장입니다. 해인 씨 직속 상사고요.”태준이 명희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팀장이고 뭐고, 딸이랑 차 한잔도 못 마셔요?”“아, 안녕하세요.”태준이 명희를 향해 깍듯하게 목례를 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가족분이신 줄은 몰랐습니다만, 지금 해인 씨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런칭 시안에 긴급한 수정 사항이 생겨서 당장 전체 회의에 들어가야 합니다.”“아니,
만족스러운 듯 입술을 축인 명희가 그제야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해인을 빤히 쳐다보았다.“자, 이제 목도 축였으니 본론을 좀 얘기해 볼까?”“무슨 본론, 나 돈 없어. 아직 인턴이라서 첫 달 월급도 제대로 못 받아.”해인의 필사적인 대답에 명희가 마키아토를 소리 나게 들이키더니, 푸하, 하고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주변 직원들의 시선이 다시금 카페 구석으로 쏠렸다.“야, 내가 네 그 쥐꼬리만 한 인턴 월급이나 뺏으러 여기까지 온 줄 아니? 사람을 뭘로 보고.”명희가 컵 벽면에 묻은 카라멜 시럽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으며 몸을 앞으로 바짝 당겼다. 지독하게 달고 끈적한 향이 해인의 코끝을 찔렀다.“너, 도윤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 됐다면서?”명희가 테이블 위로 몸을 바짝 당기며 목소리를 낮췄다. 확신에 찬 비릿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매달려 있었다.해인의 얼굴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무릎 위에 올려둔 두 손에 왈칵 식은땀이 배어났다.“계집애, 그런 일이 있었으면 엄마한테 말을 먼저 했었어야지. 서운하게 남의 입을 통해서 듣게 하니?”“남의 입? 대체 그게 누군데……. 하 참… 누구길래 그런 말도 안 되는…….”해인은 시선을 피하며 황급히 핸드폰을 매만졌다.감추려고 했지만, 파르르 떨리는 입술과 갈 곳 잃은 눈동자가 이미 권도윤과의 관계를 낱낱이 인정하고 있었다.그 얄팍한 방어를 비웃듯 명희가 가볍게 혀를 찼다.“한 여사.”명희의 입에서 튀어나온 세 글자에 해인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지금 네가 사는 그 집의 안주인이 직접 말하던데, 그럼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한 거니?”‘알고 있었다고? 언제부터지? 집에서는 티 안 나게 조심했는데...’숨이 턱 막혀오는 기분에 해인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사색이 된 해인의 얼굴을 감상하듯, 명희가 여유롭게 빨대를 휘저으며 덧붙였다.“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니? 남녀 관계는 다 그렇다. 비밀 연애하면 본인들만 모르지, 남들은 다 안다고.”“아저씨…… 그러니까 회장님도 아신
회전문 안으로 들어선 명희는 기세등등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번쩍이는 대리석 바닥과 높은 층고, 사원증을 목에 걸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명희가 한 여사에게 받은 명함을 쥐고 게이트 쪽으로 무작정 걸음을 옮기던 찰나였다.“잠시만요, 아주머니. 방문증 없이는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어디 오셨습니까?”로비를 지키던 덩치 큰 보안 요원이 명희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순간, 명희의 얇은 눈썹이 불쾌하게 꿈틀거렸다.“아주머니? 참 나, 내가 어딜 봐서 아주머니라는 거야? 사람 참 볼 줄 모르네.”명희가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는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명함을 보안 요원의 눈앞에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툭 말을 던졌다.“여기, 마케팅팀 윤해인. 내가 걔 엄마 되는 사람인데, 딸내미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 왔거든? 그러니까 귀찮게 굴지 말고 그냥 좀 들여보내 주지?”“규정상 데스크에 신분증을 맡기시고 방문 부서에 확인 전화를 먼저……”“아, 진짜. 융통성 없게 무슨 전화야? 내 딸이라니까. 빨리 열어주기나…… 어머.”짜증을 내며 로비 안쪽을 훑어보던 명희의 시선이 한곳에 멈춰 섰다.그 시각, 로비 한구석에 위치한 개방형 사내 카페에서 남은 커피를 입에 털어 넣고 막 자리에서 일어서던 참인 해인의 뒷모습이었다.명희의 입술 끝이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녀는 보안 요원을 향해 손을 휘휘 저으며 여유롭게 웃었다.“거봐, 전화할 필요 없다니까. 저기 있네, 내 딸. 엄마 온다고 마중까지 나와 있는 거 봐.”당황한 보안 요원을 뒤로한 채, 명희가 구두 굽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카페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어머, 우리 딸!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니?”등 뒤에서 들려오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끔찍하고 익숙한 목소리.빈 컵을 든 해인의 손이 그대로 굳어버렸다.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웃고 있는 김명희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엄마가 여길 어떻게.”“어떻게긴. 다 아는 수가 있지.”사색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갑자기. 오빠는 그냥 오빠지.”겨우 내뱉은 목소리에서 의지와 상관없는 떨림이 느껴졌다.아니라고 딱 잘라 말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혀끝이 마비된 듯 굳어버렸다.조금 전 자신을 외면하고 돌아서던 도윤의 넓은 어깨와, 차갑게 식어있던 눈동자가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그건 서운함일까, 아니면 서우가 말한 그 지독한 감정의 편린일까.해인은 제 안의 금기된 상자가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한 번도 남자라는 프레임으로 가둬본 적 없는 도윤이, 서우의 질문 하나에 낯선 열기를 띠며 심장 속으로 침투해 왔다.
칠흑 같은 한강의 물결 위로 서울의 네온사인이 깨진 보석처럼 흩뿌려졌다.기부라는 숭고한 명분은 차갑게 식은 샴페인 기포 속에 녹아 사라지고, 한강의 밤바다 위에는 오직 서로의 계급을 확인하려는 은밀한 탐욕만이 번들거렸다.“표정 좀 풀어. 사람들이 우리 싸운 줄 알겠어.”채영이 도윤의 팔에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도윤은 대답 대신 정중하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 너머, 아직 굳게 닫힌 연회장 입구를 응시했다.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으나, 초점은 불안하게 흔들렸다.“곧 올 거야. 당신이 아주 깜짝 놀랄 모습으로.”채영의
정적은 독이었다.의식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도윤은 제 전신을 감싸고 있는 낯선 감각들에 마비될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팔 안에 가득 들어찬 말랑하고 가녀린 곡선, 콧끝을 집요하게 간질이는 보드라운 머리카락, 그리고 얇은 잠옷 너머로 여과 없이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하지만 곧 그것이 무엇인지 자각하자마자 , 도윤의 등골로 서늘한 소름이 돋아 올랐다.‘……!’제 품에서 고른 숨을 내뱉고 있는 건, 세상에서 유일하게 건드려서는 안 될 존재였다.심장이 늑골을 뚫고 나올 듯 요동쳤다. 다행히 해인은 깊은 잠에 빠진 듯 미
“엄마, 나 이 약혼 안 해. 못 하겠어.”찻잔을 매만지던 엄마의 손길이 멈췄다. 하지만 기대했던 걱정이나 당혹감 따위는 없었다. 엄마는 그저 안경 너머로 채영을 차갑게 훑었을 뿐이었다.“권도윤이 에이펙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나기라도 했니?”“그게 아니라…….”담담한 물음에 채영의 입술이 굳었다가 다시 움직였다.“그 인간, 나 사랑 안 해. 아니, 사랑 안 하는 건 상관없는데, 딴 여자가 있다고!”채영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하지만 엄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그래서?”“그래서라니?”엄마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