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382화

Author: 십일
“드디어 끝났네요!”

민지는 노트북을 덮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의 곁에는 빈 깡통 한 무더기가 있었다.

서준이 입을 열었다.

“가요, 내가 밥 살게요.”

정은과 민지는 거절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앞으로 같이 일해야 했기에 서로에게 밥을 사주는 기회가 많았다.

레스토랑 안,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우아한 피아노 소리가 천천히 들려왔다.

“세 분 예약하셨나요?”

“어제 예약했어요.”

서준은 핸드폰을 꺼내 예약한 정보를 보여주었다.

곧 종업원은 세 사람을 데리고 자리로 갔다.

정은이 전에 온 적이 있었기에 그리 낯설지 않았다. 이 레스토랑은 같은 레벨의 레스토랑에서 평가가 가장 좋지만 그 가격도 무척 비쌌다.

민지는 자리에 앉은 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야, 다르긴 정말 다르구나...”

말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주위를 찰칵찰칵 찍기도 했다.

두 사람의 눈빛에 민지는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 아빠한테 보여주려고요. 아직 이렇게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을 본 적이 없으시거든요...”

말을 마치고 또 사진에 전념했다.

민지를 바라보는 서준의 눈빛은 저도 모르게 동정이 묻어났고 이내 부드러워졌다.

‘민지의 집안형편이 그렇게 좋지 않다니...’

그러나 서준은 또 자신이 오해할까 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이시지?”

민지는 멈칫했다.

이 표정을 본 서준과 정은은 그녀가 말하기 뻘쭘한 줄 알았다.

“만약 불편하다면 말하지 않아도 돼.”

“어... 우리 엄마는 가정주부야. 우리 아빠도 그냥 평소에 건물 출입자를 관리하는 경비원이시고. 내 고향은 시골인 데다가 바다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두 분은 한가하실 때 함께 바다로 나가서 물고기를 잡으시곤 했어. 기회가 되면 방금 건져낸 새우와 물고기를 먹으러 우리 집에 와! 아주 싱싱하고 맛있어!”

시골에 살고, 부모님은 직장이 없으며, 아빠는 가끔 대문을 지키는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두 사람 가끔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는다는 민지의 말을 듣고 정은과 서준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83화

    다 많은 다음, 서준은 일어나서 계산하러 갔다.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세 사람은 뜻밖에도 신진호, 서지예, 심경혜, 탁재민 일행과 부딪쳤다.유독 강서정만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그녀가 오지 않은 것도 정상이었다.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어떻게 이런 등급의 레스토랑에 나타나겠는가.“우쭈쭈, 이거 오미선 교수님의 학생들 아니야?!”진호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조롱하는 말투와 눈빛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정은 그들은 진호를 상대하지 않았다.진호는 웃음이 굳어졌지만 계속 입을 열었다.“공교롭게도 여기서 만났네. 그런데 왜 오미선 교수님이 보이지 않는 거지? 이렇게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밥을 사고 싶지 않으신가 봐? 우리는 송지혜 교수님이 모든 비용을 결산해주시는데 말이야. 학교의 중시를 받으니 다르긴 다르구나. 올해 대부분의 연구비용도 우리 과제팀에게 주었잖아. 아이고, 나도 정말 걱정이야. 너희들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대학원에 합격했는데, 발언권도 없는 교수님을 따라다니면 무슨 성과를 거둘 수 있겠어? 정말 아쉽군!”진호는 쉴 새 없이 나불댔고, 지예와 경혜는 옆에 서서 방관했다. 오직 재민만이 어수룩하게 그를 막으려 했지만 오히려 진호에게 밀려났다.“이 촌놈아, 나한테 달라붙지 마! 저리 좀 꺼져!”재민은 멈칫하더니 자존심이 상한 동시에 열등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계속 말렸다.“다들 동창이니까 이렇게 소란을 피울 필요가 없잖아...”“넌 입 좀 다물어! 여기서 말할 자격이 있긴 한 거야?”“난 왜 말을 할 수 없는 건데? 나한테도 입이 있으니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재민은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하지만 그는 다툼을 진짜 잘 하지 못했다.진호가 말했다.“어쭈! 촌놈 주제에 성깔이 있어가지고. 내가 만만해 보여!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거야?”재민은 고개를 숙이며 남진일의 말을 떠올렸다.“우리처럼 가난한 집구석에서 자란 아이는 원래 불공평한 대우를 받게 돼. 될수록 참아. 네가 강대해지면 공평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84화

    진호는 당황하기 시작했다.“뭐, 뭐 하려는 거야?! 이거 초상권 침해야! 고소할 거라고?!”민지가 말했다.“공공장소에서 합리적으로 증거를 수집하고 있는 거니까 어디 한번 고소해 봐. 나는 단지 정의의 화신일 뿐이야.”“너, 너희들...”진호는 화가 나서 말까지 더듬었다.지예는 민지가 정말 찍고 있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신진호, 너 뭐 잘못 먹었어?”진호는 영문을 몰랐다.“모르면 함부로 말하지 마. 우리 각자 계산하기로 해서 이 레스토랑에 온 거잖아. 누가 결산한다는 거야! 야, 들어가는 사람 막지 말고 빨리 네 밥이나 먹어. 다 먹고 학교로 돌아가야 하니까!”진호는 달갑지 않아서 정은 일행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그제야 자리를 비켰다.재민은 움직이지 않았다.‘각자의 비용을 내야 하구나...’“미안, 나, 나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 먼저 돌아갈게. 너희들 천천히 먹어!”말을 마치자 재빨리 밖을 나갔다.진호는 얄밉게 말했다.“촌놈! 돈이 없어서 저러는 게 분명해!”지예가 대답했다.“신경 쓰지 마.”정은 일행이 레스토랑을 나서자, 마침 앞에 택시가 멈춰 섰다.민지와 서준이 먼저 올라탔다.정은은 조수석에 앉으려고 했지만, 갑자기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녀는 생각하다가 여전히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탁재민... 맞지?”모퉁이에서 한 훤칠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하게 웃었다.“맞, 맞아요.”“학교로 돌아가려고? 마침 우리도 차를 불렀으니 같이 갈 수 있는데.“네? 정말 괜찮은 거예요?” 재민은 깜짝 놀란 듯 안절부절못했다.이곳은 학교와 너무 멀어서 방금 왔을 때 진호가 택시를 잡았고, 비용이 만 원이었다.재민은 원래 버스를 타려고 했지만 이 시간에 그 버스는 이미 운행이 중단되었다.그는 카풀앱에서 차를 불렀는데, 학교에 가면 단지 2천 원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줄곧 승객이 없어서 재민은 주문을 취소하려 했고, 고민하고 있을 때 정은이 나타났다.“응. 어차피 우리도 돌아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85화

    차가 골목 어귀에 멈추자, 정은이 차에서 내렸다.서준과 민지는 이미 앞의 골목에서 내렸다.정은은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다.잔잔한 달빛이 떨어지며 밤하늘에 별이 몇 개 걸려 있었다.한여름의 무더위를 띤 바람은 결코 시원하지 않았다.이때 정은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아파트 아래층에서 한 남자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었다. 그녀를 본 순간, 남자는 바로 똑바로 섰다.곧이어 그는 미소를 지었다.“왜? 내가 여기에 나타나서 많이 놀랐어?”심현빈이 정은의 앞으로 다가왔다.정은은 잠시 멈칫했다.“조금요.”“학교 생활은 적응이 잘 되고?”“네.”“수업은 많지 않아?”이 말은 정은의 정곡을 정확하게 찔렀다.‘수업은 정말 꽉 찼지!’현빈은 어깨를 들썩였다.“네 표정을 보니 이미 답을 알겠네.”“그렇게 티가 나나요?” 정은은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아니.”“그럼 어떻게 안 거예요?”“내가 눈치가 빨라서.”정은은 어이가 없었다.“밖이 너무 덥네. 하지만 넌 분명히 날 집으로 초대하지 않을 거야. 그럼 우리 시원한 곳에 가서 좀 앉을까?”현빈은 그래도 정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넌 지금 마음속으로 틀림없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아, 이 남자는 정말 눈치가 빠르고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어.”정은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음, 내가 또 맞혔구나, 맞지?”...두 사람은 전에 갔던 밀크티 가게에 도착했다.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데다가 에어컨이 있어서 무척 시원했다.다만 현빈은 양복을 입고 있었기에 아무리 봐도 밀크티 가게와 어울리지 않았다.그래서 자꾸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정은이 물었다.“뭐 마실래요? 내가 살게요.”“오레오 밀크티, 노 얼음 그리고 설탕 좀 많이 추가해줘.”“네?”“왜 그렇게 쳐다봐?” 현빈은 자신의 턱을 만졌다.정은은 잠시 침묵하더니 카운터에 가서 주문했다.“오레오 밀크티, 얼음 빼주시고요 설탕 많이 넣어주세요. 아, 똑같은 걸로 두 잔이요.”말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86화

    말을 꺼내자마자 정은은 바로 후회했지만 이미 시간을 되돌릴 수 없었다.현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너.”‘난 너에게 관심이 있지.’정은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남자는 입가를 실룩거렸다.“못 들은 척하지 마.”“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하나도 안 들리네, 에헴! 이제 그만해요.”현빈은 딴청 피우는 정은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그래, 언제까지 피할 수 있나 보자. 언젠간...”“어머.” 정은은 그의 말을 끊었다.“휴지를 안 챙겨왔네요. 휴지 있어요?”“응.”“한 장 줘요, 고마워요.”현빈은 웃으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이제 내 말 들리는 거야?”정은은 말문이 막혔다그리고 그녀의 추측도 맞았는데, 현빈은 확실히 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었다.다만 밀크티를 다 마신 후에야 그는 본론으로 들어갔다.“성 교수님 쪽에 진행 중인 과제가 있어. 현재 난관에 부딪혀서 이미 두 달 넘게 진도를 나가지 못했거든. 그래서 교수님은 지금 네 생각을 묻고 싶으셔. 이것은 모든 자료야.”말하면서 USB를 하나 건네주었다.정은은 손을 뻗었는데, 현빈은 이대로 손을 놓지 않았기에 두 사람의 손가락이 닿았다.남자의 체온은 그녀보다 훨씬 높았다.정은은 USB를 받은 다음 즉시 손을 거두었다.현빈은 표정이 바뀌지 않았지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일부러 그런 게 분명해! 이 남자 대체 뭐 하자는 거야!’정은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때 현빈은 주동적으로 휴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좀 닦아, 그런 눈빛으로 날 보지 말고.”정은은 비록 화가 났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현빈이 이렇게 말한 이상, 만약 정은이 계속 따진다면 오히려 속이 좁아 보일 것이다.‘길을 가다가 부주의로 남을 부딪치는 것도 흔한 일이잖아. 굳이 심현빈 씨 때문에 이럴 필요가 있을까? 그럼 오히려 내가 심현빈 씨를 특별 취급하고 있다는 게 아니겠어? 진짜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일을 해도 함정인 것 같아!’밀크티 가게를 떠나자, 현빈은 정은을 집으로 바래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87화

    [뭐야?]성달수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네가 줬다고? 언제? 나한테 말한 적 있어?]“저 오늘 마침 학교에 왔거든요. 오후에 지나가다 그 USB를 정은이에 가져다줘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씀을 들었고요.”[그렇구나. 그런데 왜 나한테 말 한마디도 안 한 거야? 오후 내내 찾았잖아...]현빈은 속으로 생각했다.‘미리 설명하면 교수님이 이것저것 물어보실 게 분명해.’“저도 갑자기 시간이 생겨서 가져간 거라 교수님에게 말씀드리는 것을 깜박했네요.”[그래, 정은이에게 줬으면 됐어.]“네.”통화가 끝나자, 현빈은 핸들을 잡고 즐겁게 휘파람을 불었다....서재에서, 재석은 한창 실험 데이터를 통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저히 집중이 안됐다.지금 재석의 머릿속은 두 시간 전에 베란다에서 본 장면으로 가득했다.현빈이 정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골목 어귀에 나타난 것이었다.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정은은 그 말을 듣고 나서 먼저 눈살을 찌푸렸는데, 어이가 없었는지 눈을 부라리며 도망쳤다.현빈은 제자리에 서서 그렇게 정은을 바라보았다. 마치 장난이 심한 아이를 보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동시에 또 애정이 넘쳐났다.가로등 아래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졌다.심지어 두 손이 겹쳐 마치 다정한 커플과 같았다.‘그래서... 정은이와 약속한 사람이 심현빈이었구나?’재석은 문득 정신을 차리더니 고개를 들어 컴퓨터를 바라보았다.‘내가 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어느 열부터 시작했더라? 어느 줄까지 체크했지?’그렇게 그는 처음부터 다시 계산할 수밖에 없었다.새벽 3시, 서재의 불은 줄곧 꺼지지 않았다.재석은 의기소침하게 노트북을 덮었다. 결국 그는 똑똑히 정리하지 못했다.‘됐어, 내일 다시 하자.’간단히 씻은 재석은 침대에 누웠지만, 몸을 뒤척여도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힘들게 잠들었지만 여전히 편하게 자지 못했다. 왜냐하면 복잡하고 황당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재석은 꿈속의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몰랐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88화

    두 사람은 안쪽의 작업실로 들어갔다.정은은 에두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교수님, 지금 교수님의 연구 방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오미선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정은은 서류 하나를 건네주며 계속 말했다.“주말에 저희 세 사람은 현재 과제의 진도를 정리했어요. 이 외에도 연구 배경, 실험 방법, 구체적인 데이터, 그리고 이전의 결론에 대해 토론을 했고요.”정은은 고개를 들어 오미선을 직시했다.“제3기 실험에 아무런 진도가 없었던 것은 실험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전 과제가 처음부터 빗나갔기 때문이에요.”문제는 세 사람이 발견했지만, 민지와 서준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럼 정은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오미선이 침묵에 빠진 것을 보고도 정은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저도 교수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요. 일을 시작하면 꼭 끝을 봐야 하잖아요. 마지막에 틀렸다는 결론이 나오더라도 꼭 충분한 데이터를 통해 이 점을 증명해야죠. 학자로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맞지만, 사람으로서의 시간과 정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잘못을 일찍 바로잡고, 제때에 손실을 막을 수 있는데, 왜 오히려 많은 시간을 들여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죠? 이건 의미가 없지 않나요? 마치 교통사고처럼, 기사는 이미 차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이때 브레이크만 밟으면 비극을 막을 수 있지만, 굳이 사람을 치어서 그 결과를 검증해 볼 필요가 있겠어요?”오미선은 길게 탄식했다.“전에 난 너희들이 언제 이 안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지 생각해봤어. 한 학기? 1년? 아니면 2년? 그런데 난 너희들이 이렇게 빨리 발견할 줄은 몰랐구나.”오미선은 감개무량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놀라움 그리고 자랑스러움이 담겨 있었다.‘문제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증거까지 정리해냈다니.’그녀는 정은이 건네준 서류를 받았다. 비록 펼치지 않았지만 그 속의 데이터와 결론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오미선은 반박할 방법이 없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89화

    다시 고개를 돌리기엔 너무 어려웠다.“그러나 다행히도 이 안의 문제를 발견했잖아요.”다른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을까?정은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나 이미 시작한 지금, 혼자의 힘으로 되돌릴 수 없다면 그냥 틀린 대로 놔두며 끝까지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대부분의 대학원생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과학 연구에 관심이 없었다. 석사 학위를 받는 것도 단지 장래에 더 좋은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그러므로 논문은 그들에게 있어서 학술 성과가 아니라 졸업지표였다.만약 이때 오미선이 갑자기 전반 과제를 뒤엎는다면, 이미 졸업한 학생들은 당연히 상관이 없겠지만 곧 졸업하게 될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은 이 과제를 바탕으로 이미 각자의 논문을 준비했으니까.오미선이 그만두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고개를 돌리면 안 됐기 때문이다.“이것도 내 탓이야. 몸이 약해서 병원에 그렇게 오래 누워 있었으니까. 문제를 발견했을 때, 그해의 졸업생을 위해 난 뭐라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도 계속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거든.”이제 문제를 바로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었는데, 그들은 너무 멀리 왔기 때문이다.“하지만 난 여전히 너희들이 자랑스럽구나. 이렇게 빨리 문제를 발견하고 관건을 찾았다니.”정은은 침묵에 잠겼다.이때 오미선이 뜬금없이 물었다.“넌 민지와 서준이를 어떡해 생각하니?”“어느 방면을 말씀하시는 거죠?”“사고방식, 연구 재능, 성격.”정은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종합적으로 보면 모두 훌륭한 것 같아요.”두 사람도 모두 똑똑했기에 이 과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문제를 발견한 후, 그들은 도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검증에 나섰다. 이런 성격은 정은과 똑같았다.검증과정에서 두 사람은 또 각기 각자의 우세를 보여주었다.민지는 사유가 활발하고 기억력이 놀라웠다.서준은 냉정하고 침착해서 일정한 각도에 서서 문제를 분석할 수 있었다.오미선은 이 말을 듣고 흐뭇하게 웃었다.“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구나. 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390화

    정은이 말했다.“우리 만의 실험실을 하나 신청하자.”민지와 서준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시작부터 이렇게 강한 거야?!’“교수님께서 무슨 의견이라도...”“우리 교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너그러우신데.”정은은 웃음을 터뜨렸다.“이 건의도 원래 교수님께서 먼저 제기하신 거야.”그렇게 서준은 그날 바로 학교 시스템에 관련 신청을 제출했다.페이지의 제시에 따르면, 학교는 이미 신청을 받아들였고, 3일내로 답장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그러나 3일 후, 그들은 신청 실패했다는 답장밖에 받지 못했다.그 이유는 간단했다. 빈 실험실이 없으니까.정은은 이상하다고 느꼈다.“어제 내가 그 실험실을 지날 때, 전과 마찬가지로 잠겨 있었는데. 그곳을 쓰는 과제팀이 전혀 없었단 말이야.”민지는 감자칩을 먹으면서 눈알을 굴렸다.“학교에서 고의로 우리를 괴롭히는 건 아니겠죠?”서준은 침묵하며 말을 하지 않았다.수업이 끝나자, 서준은 곧장 교무처로 향했다.“제가 가서 확인을 해봤는데, 그 실험실을 사용하는 과제팀은 없었어요. 그런데 왜 빈 실험실이 없다는 거죠?”교무처 선생님은 직접 노트북을 그에게 보여줬다.“여기 봐, 신청할 수 없다고 쓰여 있잖아? 얼마 전에 누군가 이 실험실을 빌려간 것 같은데... 잠깐만, 내가 한번 확인해 볼게.”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여깄네! 3일 전에 금방 신청을 했고, 신청인은... 남진일. 아, 학생과 같은 생물과학원의 학생이야. 그럼 서로 알고 있겠지?”서준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진일은 이미 자신의 실험실이 있었는데, 기계와 경비는 모두 학교에서 특별히 비준한 것으로서 실험실을 하나 더 신청할 필요가 없었다.“C112와 B174, 이 실험실이 아직 비어 있는 것 같은데. 다시 하나 신청하지 그래?”서준은 동의하지 않았다.그들의 실험은 반드시 CPRT 측정기를 써야 했고, 전교에 딱 두 대밖에 없었다. 그중 한 대는 송지혜의 과제팀이 장기간 점용하고 있었는데, 다른 한 대는 마침 그

Latest chapter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2화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1화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0화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9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8화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7화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6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5화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4화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