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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Penulis: 십일
가까이 다가가니, 도겸은 정은의 예쁜 웨이브 머리가 곧게 펴지고, 그토록 좋아했던 그녀의 머리색이 검은색으로 염색된 것을 발견했다. 화장도 하지 않았고, 하이힐 대신 단순한 하얀 티셔츠 하나만 걸친 채 아주 캐주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눈은 예전보다 더 빛나 보였다. 이별의 어두운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만약 이게 연기라면, 도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은이 연기를 정말 잘한다고. 너무 잘해서, 자신을 화나게 한다고. 정은은 도겸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표정은 도겸이 화를 내기 직전의 전조였다.

“히하!”

도겸은 비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네 안목은 별로인 것 같아. 내 옆에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보는 눈이 좀 더 높아야 하지 않겠어? 아무나 데리고 다니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

“체면?”

정은은 슬픔이 살짝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도겸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정은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더욱 화가 났다. 이 감정이 점점 그의 영역 의식으로 다가왔다. 정은은 이미 그의 영역 안에 속한 사람이었고, 지금은 필요 없다 해도, 다른 사람의 침범은 용납할 수 없었다.

“난 할 일이 있어서 가야 해.”

정은은 도겸이 계속 말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가? 어디로 갈 건데? 조수민의 아파트? 그게 네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야. 이번에는 각종 증서들이랑 신분증도 챙겨갔던데. 좋아, 한번 해보자는 거지?”

정은은 마음이 아팠다. 도겸의 성격이 나쁘다는 것, 심지어 폭력적이라는 것을 이미 익숙하게 받아들였지만, 이런 말을 직접 들으면 여전히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다.

도겸은 그녀의 행동을 단순한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은은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추스르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먼저, 저분은 내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만난 것뿐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더러운 관계가 아니야.”

“그리고,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네 문제야.”

이때, 정은이 불러둔 택시가 도착했고 정은은 차 문을 열고 택시에 올라탔다.

“기사님, 출발해 주세요.”

도겸은 정은이 정말로 점점 대담해지고 있다는 것에 비웃었다. 3개월 전 그들의 싸움에서도 정은은 이런 식으로 도겸을 위협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예 외간 남자를 데려와 그 앞에서 시위했다.

‘어떻게 감히 내 앞에서 저럴 수 있지?’

이때 갑자기, 부드러운 손이 도겸의 팔을 감쌌다. 스리슬쩍 방청아는 도겸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도겸 씨, 왜 가려고 해요? 사람을 기다리지도 않고...”

짙은 향수 냄새가 나자, 도겸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여자를 밀어내지 않고, 오히려 허리를 감쌌다.

“왜요? 나랑 같이 가고 싶어요?”

정은이 남자를 찾을 수 있다면, 자신도 여자를 찾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

차 안에서.

정은은 백미러를 통해 남녀가 친밀하게 있는 모습을 보고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서연희 말고도 다른 여자가 있었구나.’

6년 동안 모든 것이 헛된 것 같았다. 택시는 점점 멀어졌고, 도겸은 표정을 바꾸고는 차갑게 청아의 손을 떼어냈다. 청아는 도겸이 왜 그러는지 몰라 다시 붙잡으려 했지만, 도겸은 무정하게 청아를 밀어내고 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

“아니, 도겸 씨! 강도겸! 거기 서!”

청아는 화가 나서 입술을 깨물었다. 한편 도겸은 차에 올라 시동을 걸며 서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오빠 선보는 중 아니었어?]

도겸은 이를 악물었다.

“오늘 르 프리미어에서 내가 선본다는 걸 정은에게 말한 게 너야?”

[오빠 좀 똑똑하게 행동할 수 없어? 아무 말이나 다 타인에게 하냐고?]

“엄마가 나보고 선보라고 한 거 도와주지도 않고, 정은에게 정보를 누설해 고의로 남자 데리고 와서 날 화나게 했어.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서정은 도겸의 갑작스러운 고함에 깜짝 놀랐다.

[아니, 오빠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이해할 수 없는 말에다가 갑자기 전화가 끊기니 당황스러워졌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서정이 화를 내기 전에 주창성 집사가 선물 목록을 들고 왔다.

“아가씨, 이 선물들로 충분한가요?”

강서정은 리스트를 훑어본 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선물들은 오미선 교수님께 드리는 거예요. 그러니 준비할 때 신경 써야 해요.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되고요. 알겠어요?”

“네.”

...

“아가씨, 이 집은 서비대학교 근처에서 가장 좋은 매물이에요. 채광도 좋고 주변 환경도 좋아서 많은 분들이 빨리 계약하려고 하고 있어요. 더 고민하시면 다른 분이 먼저 계약할 수도 있어요.”

부동산 직원이 열정적으로 소개하며, 정은은 집을 둘러보았다. 집은 크지 않았고, 방 두 개와 거실 하나였다. 10년이 넘은 구축에 비교적 올드한 인테리어였다. 오래되어 낡은 데다가 작았다. 더군다나 엘리베이터가 없는 전통적인 계단식 빌라였다.

그러나 장점도 분명했다. 서비대학교와 가까울 뿐만 아니라 도서관도 근처에 있다. 교통도 편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채광과 주변 환경이 확실히 좋다는 것이다.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면, 이집은 정말 좋은 선택이다.

“좋아요, 계약할게요.”

정은은 1년 계약서를 맺었다. 수민이 돌아와 보니, 방바닥에는 캐리어가 펼쳐져 있었다.

“이사 가려고?”

정은은 옷을 정리하며 말했다.

“응, 월세방을 찾았어.”

그러자 수민은 놀란 듯 물었다.

“그 사람이 널 찾으러 왔어? 이번에는 적어도 일주일은 버텼구나. 그 사람 좀 놔둬야 코가 납작해지지. 정말로 자기만 대단한 줄 아나 봐.”

정은은 하던 일을 멈추고 수민과 눈을 마주쳤다.

“수민아, 이번에는 진짜로 강도겸과 끝났어.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수민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6년 동안, 수민은 정은이 점점 도겸을 위해 자신을 숙이고, 빛이 점점 사라지며,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만을 보았다.

아니, 가정주부였고 혼인 신고만 안 했을 뿐 이미 본처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정은은 그저 도겸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강도겸 그 녀석이 정말로 정은을 망쳐 놓았다.

“잘했어! 세상에 좋은 남자가 많아. 강도겸 하나뿐인 건 아니야!”

“응응!”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정말 마음먹고 헤어진 거지? 며칠 뒤에 또 후회하는 건 아니겠지?”

정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웃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은은 시장에 들렀다. 집이 낡아서 벽지가 많이 벗겨져 있었다. 가구들도 세월이 묻어있는 골동품처럼 보였다. 그녀는 우선 친환경 페인트를 사서 집을 다시 칠하기로 했다.

“기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운전기사는 페인트통을 하나씩 트렁크에서 꺼냈고 정은은 감사 인사를 했다.

정은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7층이네. 어쩔 수 없지. 그냥 운동한다고 생각하자.’

벽을 새로 칠하려면, 가구를 모두 옮겨야 했기에 집안을 다시 정리할 좋은 기회였다. 정은은 문을 열어놓고 페인트 통을 하나씩 옮겨왔다. 페인트 통은 무거웠기에, 정은은 두 층을 오르고 쉬고, 두 층을 오르고 또 쉬며, 겨우겨우 모두 옮겼다.

다 옮기고 나자 숨이 가빠져 몇 분간 휴식을 취하고, 화장실에서 얼굴을 씻고 나니, 체력이 서서히 회복되었다. 정은은 페인트 도구를 들고 벽에 대보고는 소매를 걷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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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585화

    “조재석!”만춘미 교수가 갑자기 칼을 꺼내든 순간, 주광빈 교수와 전해산 교수는 본능적으로 정은을 지키기 위해 몸을 날렸다.하지만 그 누구보다 빠른 사람이 있었다.재석이 뛰어드는 순간, 그 모습은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고, 주저함 없는 손이 곧장 칼날을 움켜쥐었다.다음 순간, 문밖에서 사람들이 들이닥치며 만춘미와 이조화를 순식간에 제압했다.그 무리의 선두에 선 사람이 다가와 다급히 물었다.“조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바로 상처 치료받으시지요.”그러나 재석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과 마음은 오직 정은에게만 향해 있었다.“안 다쳤지?”정은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다 교수님이 막아 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다치겠어요?”재석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네...”정은의 시선이 재석의 붉게 물든 손을 붙잡았다. 순간 심장이 찢겨 나가는 듯 아팠다.‘자신을 슈퍼맨이라고 착각하나?’‘맨손으로 칼을 잡다니! 목숨이 그렇게 가벼운 거야?’서민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재석이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응. 나한테는 내 목숨보다 네가 더 소중해.”서민호, 즉 그 무리의 선두에 있던 그는 괜히 헛기침하며 존재를 알렸다.그제야 재석이 서민호를 의식했다.서민호의 표정은 말하지 않아도 분명했다.‘내가 공기냐? 내가 한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린 거냐?’재석의 눈빛이 단번에 날카로워졌다.“제 걱정은 마시고, 우선 범인들을 잡고 증거부터 확보하세요.”서민호는 재석의 피투성이 손을 힐끗 보고, 다시 정은의 걱정 어린 눈빛으로 시선을 옮겼다. 순간 묘한 생각이 스쳤다.‘조 교수님, 지금 이 상황 은근히 즐기시는 것 같은데?’곧 서민호가 데려온 사람들이 방 안 수색을 마쳤다.부하가 건넨 노트북을 받아든 서민호는 정은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그 섬의 다른 세력과 연결된 컴퓨터 맞습니까?”“네.”정은은 형식적으로만 화면을 확인하더니 곧장 재석의 상처를 감쌌다. 재석의 손바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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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이대로 끝내면 된다는 거야?! 소정은이 그동안 날 모욕하고, 괴롭히고, 바닥에 떨어진 밥까지 먹게 하고, 아무 데서나 볼일을 보게 하고... 소정은 같은 것은 당연히 죽어야 마땅하지?!”이조화는 분노와 절망이 뒤엉켜 울부짖었다. 교수들이 정은에게 언제나 쓰던 그 무심한 반말로 퍼부었다.만춘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은이 골칫거리인 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잠깐 고민하더니 말끝을 부드럽게 바꿨다. “다른 방법도 있어.”이조화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이, 만춘미는 성냥갑을 꺼내 불을 붙였다. 손짓 하나로 성냥을 침대 위로 던지자, 이내 불꽃이 확 타올랐다. 두 사람은 재빠르게 돌아서서 그 자리를 떠났다.바로 그때, 정은이 깨어났다.“당신들... 만 교수님?”두 사람은 그대로 얼어붙었다.이조화는 격앙되어 소리쳤다. “깨어났어! 어떡해?!”만춘미는 얼굴에 긴장감을 숨긴 채 침착하게 말했다. “불이 붙었어. 소정은은 우리가 피운 향기에 당해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두 사람은 침대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정은은 온몸의 감각이 돌아오지 않아 아무리 버둥대도 꼼짝할 수 없었고, 불길은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이조화의 입가에선 냉소가 번졌다. “드디어 너도 이런 꼴을 보게 되는구나.”정은은 만춘미를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충격과 불신이 뒤섞여 있었다. “왜요? 제발... 최소한... 제게... 제대로 알게끔...!”만춘미는 입꼬리를 약간 비틀며 차갑게 말했다. “미안하다.”정은의 목소리는 갈라져 거의 나오지 않았다.“왜요? 제발... 적어도 제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만춘미는 무심한 어조로, 그러나 정확하게 선언했다.“오미선 교수는 우리가 죽였다.”정은은 놀람과 분노로 목소리가 떨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만춘미는 냉소를 띤 표정으로 답했다. “임무가 필요했으니까.”“무슨 임무요?” 정은은 간신히 물었다.이조화가 성난 듯 끼어들었다. “당연히 실험 데이터 빼내는 거지.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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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필요할까?”만춘미 교수가 먼저 정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정은은 잠시 생각하다 만춘미에게 열쇠를 건넸다.“이 교수님이 왜 이렇게 기력이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혹시 모르니 안정제나 마취제를 주사해 두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습니다.”만춘미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쇠를 받아들었다.“알겠네.”정은은 자리를 뜨기 전, 짧게 당부했다.“조심하세요. 이 교수님이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까요.”만춘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만춘미가 이조화에게 주사를 놓고 다시 내려왔다.걸린 시간은 고작 2~3분 남짓.그녀는 열쇠를 정은에게 돌려주었다.정은은 그것을 받아들고 곧장 방으로 돌아갔다....다음 날 점심.정은은 어김없이 식판을 들고 이조화의 방을 찾았다.이번엔 전날과 달리 소박한 한 끼였다.하얀 쌀밥 한 공기와 삶은 채소 몇 가닥.바닥엔 여전히 어젯밤 이조화가 엎어버린 음식이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역시. 그 자존심과 오만한 성격이라면, 굶어 죽어도 바닥에 떨어진 밥을 집어 먹지는 않겠지.’정은은 식판을 책상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그러나 예상대로, 이조화는 또다시 손을 내리쳐 밥을 엎질렀다.“이딴 걸로 날 굴복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소정은, 네 속셈 뻔히 안다.”“오? 그럼 말씀 좀 해보시죠. 제가 무슨 속셈인지...”이조화는 비웃음을 터뜨렸다.“네가 날 굶기고, 괴롭히고, 끝내는 무너뜨리려는 거잖아. 하지만 헛수고다. 나는 굶어 죽을지언정, 너한테 한 마디도 안 흘린다. 네가 알고 싶은 진실은 결국 영영 묻힐 거다. 하하하...”그 순간, 정은의 눈빛에서 웃음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이조화의 웃음은 점점 더 방자해졌다.그녀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참지 못하고 비아냥을 흘렸다.“네가 오미선 교수 죽음에 내가 연루됐다고 의심해서 날 잡아다 가둔 거지? 하,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거야말로 바보 천치 같은 짓이야!”정은은 주먹을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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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 조명은 어두웠고, 이조화의 상태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밤새 잠을 자지 못한 듯, 구부정한 자세로 몸을 의자에 걸친 채 앉아 있었다.대체로 관리가 잘 된 얼굴이었건만, 지금 모습은 마치 십 년은 더 늙은 듯 초췌하고 어두워 보였다.방 안에는 지독한 소변 냄새로 가득했다.세면대도, 화장실도 없는 곳. 이조화가 볼일을 보려면...정은은 손에 든 식판을 내려다보았다.‘괜히 잘 차린 밥을 가져온 게 아닐까 했는데...’‘아니지, 아무리 잘 차려도 이런 상황에선 의미 없겠지.’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조화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정은을 보자, 얼굴 근육이 일그러지며 괴이한 웃음을 지어 올렸다.“이렇게까지 날 능욕하고 나니, 이제 속이 시원해?”단 한 마디. 그러나 목소리엔 기력이 빠져 있었고, 그 말을 꺼내는 데조차 엄청난 힘을 소모하는 듯했다.정은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식판을 정성스레 이조화의 앞에 놓았다.“저야 당연히 만족하죠. 제 손으로 스파이를 잡았으니까요.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세요?”“스파이? 네가 스파이라고 하면 다 스파이야? 이런 식으로 허튼 누명이나 씌우면서 너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는구나.”정은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까지 되었는데도 교수님은 여전히 오리발만 내미시네요. 아직도 현실을 못 받아들이시는 건가요?”“소정은! 네가 날 모독해도 정도가 있지!”이조화는 갑자기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소리쳤다.두 손을 뻗어 정은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공에 멈춘 채 곧 힘없이 떨어졌다.정은은 뒷걸음질조차 하지 않았다.그저 그 자리에 서서, 웃는 얼굴로 이조화의 무기력한 몸부림을 감상할 뿐이었다.‘오빠가 준 게 무슨 약상자라더니, 이건 도라에몽 주머니잖아.’거기엔 사람 몸에 기운을 빼는 약까지 들어 있었다.무색무취, 물에 조금만 섞어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지가 풀려 버리는...그렇지 않고서야, 정은이 어찌 만춘미 교수를 내보내고 혼자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게다가 굳이 만춘미 교수에게 마취제를 가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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