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함께 살려고 마련했던 신혼집 계약을 해지하자 부동산 중개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계약금까지 다 냈잖아요. 예비 신랑분 돌아오시면 같이 서명하시지 그래요?” 나는 웃으며 열쇠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안 기다릴래요. 그 사람은 첫사랑이랑 스키 타러 가야 하거든요.” 연애한 지 5년. 강도현은 해마다 겨울이면 일본에 갔다. 출장이라고 했지만, SNS에 올라오는 건 후지산의 눈 덮인 봉우리뿐이었다. 신혼여행은 언제 가느냐고 물을 때마다 도현은 ‘다음에’라고 했다. 그러다 어제, 집에 두고 간 도현의 낡은 카메라에서 사진 수백 장을 발견했다. 같은 여자, 같은 구도, 같은 배경... 벚꽃과 흰 눈, 그리고 후지산... 내가 강도현과 함께 멀리 나가 본 건 옆 도시로 신혼집을 보러 갔을 때가 전부였다. 그날 강도현은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우리는 그런 겉치레 하지 말고, 착실하게 살자.” 내 손으로 직접 꾸민 신혼집을 바라보다가, 나는 끝내 무너져 소리 내 울고 말았다. 중개인이 조심스럽게 펜을 내밀었다. “그래도 계약 해지하실 건가요?” “네, 해지할게요.” 나는 웃으며 눈물을 닦았다. 퇴사 신청도 이미 승인됐다. 오늘이 이 도시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후지산이 내게 올 일은 없지만, 나는 멀리 떠날 수 있었다.
View More나는 문 앞에 선 채 돌아보지 않았다.바람이 불어와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울지는 않았다.“강도현, 네 말이 맞아. 난 사랑받아야 해.”“그래서 날 사랑해 줄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어.”“네 옆은 아니야.”“서인아 씨, 택배 왔어요.”새 직장 접수대 직원이 종이 상자를 안고 다가왔다.보낸 주소는 내가 떠나온 도시였다.보낸 사람은 강도현.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상자를 열었다.맨 위에는 서류 봉투가 있었다. 안에는 약혼 해제 합의서가 들어 있었다.마지막 장 오른쪽에 강도현의 서명이 있었다.펜을 세게 눌렀는지 글씨가 유난히 짙었다.날짜는 사흘 전이었다.서류 봉투 밑에는 물건 몇 가지가 깔려 있었다.뽁뽁이로 감싼 내 인테리어 일기장이었다. 카드도 한 장 끼워져 있었다.[네가 4개월 동안 공들인 기록이니까 돌려줄게. 내가 가지고 있을 자격은 없어.]일기장 아래에는 마그넷 5개가 있었다.버리지 않고 내게 부쳐 보낸 것이었다.옆에는 쪽지가 한 장 더 놓여 있었다.[5년 동안 네가 받은 선물이 이 마그넷 5개뿐이었지. 내가 버릴 자격은 없으니까 돌려줄게.]상자 맨 밑에 물건이 하나 더 있었다.새 마그넷이었지만 후지산 모양은 아니었다.한 번도 본 적 없는 산이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지금 내가 사는 도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네가 사는 도시의 명소야. 공항에서 샀어. 채린이가 골라 준 거 아니고, 처음으로 내가 직접 골랐어.]나는 마그넷을 들고 한참 들여다봤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엄마였다.“인아야, 도현이가 집에 왔다 갔어.”“엄마 집에는 왜요?”“아빠한테 물건 좀 드리더라. 전에 못 챙긴 게 미안하다면서. 문 앞에 한참 서 있었는데 아빠가 안 들여보냈어.”“갔어요?”“응. 가기 전에 나한테 한마디 했어.”“뭐라고요?”“‘어머님, 죄송합니다. 제가 인아한테 잘해 주지 못했어요.’ 그러더라.”엄마의 목소리가 조금 잠겼다.“인아야, 정말 도현이랑 끝낼 거니?”“엄마, 제가 먼저
강도현의 팔이 축 늘어졌다. 손가락 사이에서 목걸이가 미끄러져 바닥에 땡그랑 떨어졌다.나는 돌아보지 않았다.“목걸이 가져가. 내 물건 아니니까.”“그 남자, 밤새 아래층에 있었대요.”다음 날 아침, 동료가 알려 줬다.“경비 말로는 로비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날 밝아서야 갔다네요.”창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건물 앞은 텅 비어 있었다.오전 10시, 강도현에게 메시지가 왔다.[나는 포기 안 할 거야. 네가 얘기할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릴게.]점심때 도은비에게서 전화가 왔다.“강도현이 너한테 전해 달라는 말이 있어.”“무슨 말?”“유채린 연락처 다 지웠대. 위치 공유도 끊고, 채팅 기록도 삭제했대.”“그래서?”“전에 너희가 자주 가던 국숫집에도 다녀왔대.”순간 손이 멈췄다.그 국숫집은 연애 첫해, 강도현이 내게 고백했던 곳이었다.해마다 기념일이면 오자고 해 놓고는 그 뒤로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곳이기도 했다.“거기서 국수 한 그릇 먹고 사장님한테 뭐라고 했대.”“뭐라고?”“‘사장님, 자리 하나 남겨 주세요. 앞으로 매년 올게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은비가 한숨을 쉬었다.“인아야, 너 그동안 많이 서러웠던 거 알아. 그래도 강도현이 진짜 달라지긴 하나 봐.”“이제 달라지든 말든 상관없어.”“왜?”“난 더는 5년 전처럼 걔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니까.”오후 3시, 강도현이 또 회사 건물 앞에 나타났다.이번에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맞은편 카페 앞에 서 있었다.나는 커피를 사러 내려갔다가 강도현을 봤다.“아직도 여기 있어?”“기다린다고 했잖아.”“난 더할 얘기 없어.”“난 있어.”도현은 가방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냈다.“한번 봐 줘.”봉투를 열자 손글씨로 빼곡히 적힌 종이 뭉치가 나왔다.첫 장의 제목은 [서인아에게 진 빚]이었다.그 밑에 항목들이 하나씩 적혀 있었다.[첫 번째. 첫해 기념일에 국수를 먹으러 가기로 약속하고 지키지 않았다.][두 번째. 첫해 겨울에 일본에 데려가겠다고 약속해
나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유리문 너머의 강도현을 바라봤다.얼굴은 수척해졌고 수염도 깎지 않았으며, 눈 밑에는 그늘이 졌다.손에는 종이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접수대 직원이 나를 쳐다보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서인아 씨는 오늘 출근 안 하셨어요.”“출근 안 했다고요? 그럼 언제 오죠?”“저도 잘 모르겠네요. 전해 드릴 물건 있으세요?”강도현은 잠시 서 있다가 종이봉투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접수대에 놓았다.“이것 좀 전해 주세요.”강도현이 돌아가자 직원이 물건을 가져다주었다.아무 글자도 새겨지지 않은 짙은 파란색 캐시미어 목도리였다.상자 안에는 쪽지가 한 장 끼워져 있었다.[작년 겨울에 네가 캐시미어 목도리 갖고 싶다고 했을 때, 난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 미안해. 1년이나 늦었어.]1년이나 늦었다.작년에 내가 갖고 싶다고 했을 때는 필요 없다더니, 올해는 다른 도시까지 와서 내밀었다.하지만 그 1년 사이에 유채린은 이미 짙은 붉은색 목도리를 받았다.나는 목도리를 서랍에 넣었다.오후 5시, 동료가 다가왔다.“인아 씨, 아래 로비에 어떤 남자가 계속 서 있대요. 경비가 누구 기다리냐고 물었더니 사람 기다린다고만 했대요.”창가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봤다.강도현이 건물 현관 앞에 서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휴대전화만 보고 있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문을 열자 강도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인아야.”“여긴 어떻게 찾았어?”“도은비한테 물어봤어.”강도현은 나를 바라보며 입술만 달싹였다. 준비한 말은 많은데 정작 하나도 꺼내지 못하는 듯했다.“살 빠졌네?”“너도.”“내가 어떻게 왔는지 알아? 새벽 비행기 타고 왔어. 공항에 아무도 마중 안 나와서 차를 불렀지.”강도현은 잠깐 말을 멈췄다.“기사가 어디로 가냐고 묻길래 ‘호텔이요’라고 했어. 이렇게 늦게 혼자 왔냐고 하더라. 그렇다고 했지.”“40분 동안 차가 달리는데 길에는 다른 차도 별로 없었어. 뒷좌석에 앉아서 창밖을 보다가 문득 생각났어.”“무슨 생각?”
[도현이한테 물어봐요.][물어봤는데 아무 말도 안 해요. 인아 씨, 혹시 현이랑 싸웠어요?][싸운 게 아니라 내가 떠난 거예요.][떠났다고요? 어디로요?][도현이 곁을 떠났다고요.]유채린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잠시 뒤 긴 메시지가 도착했다.[인아 씨, 이런 말 하면 안 되겠지만 현이는 인아 씨한테 정말 잘해 줬어요. 원래 마음이 약해서 누구한테나 잘해 주는 애예요. 나한테 잘해 준다고 질투하지 마세요. 우린 진짜 친구 사이예요. 그런 이유로 떠나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유채린은 내가 질투 때문에 떠났다고 생각했다.별것 아닌 일을 과장한다고 생각했다.[유채린 씨, 도현이가 나한테 뭘 잘해 줬는데요?]3분이 지나서야 답이 왔다.[5년이나 사귀고 신혼집도 사 줬고, 결혼도 준비하잖아요. 인아 씨 얘기할 때마다 독립적이고 능력 있다면서 대단하다고 해요.]‘대단하다고...’걱정한다는 말도, 보고 싶다는 말도, 놓치기 싫다는 말도 아니었다.물을 주지 않아도 혼자 잘 자라는 선인장이라도 보는 것처럼.[유채린 씨, 도현이가 해마다 데리고 일본 갈 때 내가 집에서 혼자 기다린 건 알아요?][그건 출장이었어요...][유채린 씨한테 맞춤 벚꽃 목걸이 만들어 줄 때, 내 약혼반지는 인터넷에서 대충 산 거라는 건 알아요?][유채린 씨 생일 챙겨 줄 때는 내 생일에 돈 보내 주는 것도 잊은 건요?][유채린 씨는 어머님 댁에 한 달에 서너 번씩 가면서, 나한텐 자주 갈 필요 없다고 했던 건요?][유채린 씨네 장롱 옮겨 줄 때, 내 책 상자 옮겨 달라는 부탁은 허리 아프다고 거절한 건요?]유채린은 또 한동안 말이 없었다.끝내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인아 씨, 그런 줄 정말 몰랐어요. 현이가 인아 씨가 힘들다는 말은 한 적이 없거든요. 두 분은 잘 지내시는 줄 알았어요.”몇 초 뒤 음성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그런데 인아 씨... 그럼 앞으로 일본에는 누가 현이랑 같이 가요? 혼자 보내긴 걱정되는데.”첫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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