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강지연은 이 일은 우선 강희라가 홍순자와 충분히 상의한 뒤 자신이 다시 설득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하여 그녀는 다시 강시우에게 메일을 보냈다.이번에도 답장은 놀라울 만큼 빨랐다.걱정하지 말라고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는 단호한 문장이었다.강지연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이건 그녀가 이 시공간에서 처음으로 강시우에게 보낸 메일이었다.하지만 고작 메일 한 통으로 그가 망설임 없이 자신을 믿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그가 왜 자신을 믿는 것인지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녀는 무조건 강시우를 믿으면 된다고 생각했다.그가 강지연과 홍순자의 인생에 조금이라도 더 일찍 나타난다면 분명 모든 것은 달라질 것이다.다음 날, 그녀는 학교 연습실로 가야 했다.집을 나서기 전 강지연은 몇 번이나 당부했다.“할머니, 문 꼭 잠그고 계셔야 해요. 누가 오든 절대 열어주면 안 돼요.”홍순자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두려울 거 없어. 천벌이 무섭지 않다면 또 와 보라지.”강성호는 정말로 천벌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강지연의 발걸음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그녀는 겨우 홍순자의 약속을 받아낸 뒤 이웃집을 찾아가 할머니를 조금만 살펴봐 달라고 부탁했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자신에게 연락해 달라며 신신당부했다.강지연과 홍순자는 이 동네에 산 지도 몇 년이 되었고 이웃들과의 관계도 늘 좋았다.이때만 해도 이웃은 아직 시내로 이사 가기 전이었고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승낙했다.강지연은 그제서야 조금이나마 시름이 놓인 듯 연습실로 향했고 차유준은 농구를 하러 갔다.두 사람은 동시에 학교에 도착했다.운동장을 지나가던 순간 농구공 하나가 갑자기 두 사람을 향해 날아왔다.“조심해!”차유준은 재빨리 그녀를 밀어내며 날려오던 공을 자신의 어깨로 받아냈다.둔탁한 소리와 함께 공이 튕겨 나갔다.강지연은 그의 어깨 위에 번져 가는 붉은 자국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그때 한 소년이 공을 가지러 두 사람을 향
차유준은 홍순자가 정성껏 만들어준 향긋한 제육 덮밥을 두 그릇이나 깨끗이 비웠다.그는 밥알 하나 남기지 않은 그릇을 내려놓고는 의자에 몸을 기대앉아 배를 쓸어내리며 감탄했다.“할머니가 해 주신 요리는 진짜 너무 맛있어요. 제가 식비 낼 테니까 여기 자주 와서 먹어도 될까요?”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지연은 문득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어디선가 많이 본 듯 낯설지 않은 장면이었다.홍순자는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밥 한 끼 먹으러 오는데 무슨 식비를 낸다고 그래. 맛있으면 언제든지 와서 먹어.”“정말이에요, 할머니.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차유준은 좀처럼 보기 드문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어차피 식당에 돈 내고 먹어야 하는 건데. 식당 음식은 이제 너무 먹어서 질렸어요. 할머니가 해 주신 음식이랑은 비교도 안 돼요.”그 말에는 강지연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유준이 부모님은 사업 때문에 늘 해외로 출장 가시거든요. 그래서 평일엔 급식 먹고 주말엔 밖에서 대충 먹는대요.”“그럼 안 되지!”홍순자는 단호하게 말했다.“앞으로 시간 날 때마다 우리 집에 와서 먹어. 맨날 밖에서 사 먹으면 몸에 안 좋아.”“네, 할머니. 그럼 저 진짜로 사양 안 할게요.”차유준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강지연은 다시 한번 그를 바라보았다.홍순자 앞에 서 있는 차유준의 모습은 정말 이상하리만큼 익숙하게 느껴졌다.식사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밤이 깊어 있었다.늦은 시간이라 그대로 돌려보낼 수도 없었기에 그녀는 결국 차유준에게 하룻밤 묵어가라고 했다.밤이 깊어 홍순자와 차유준이 모두 잠든 뒤 강지연은 조용히 메일함을 열었다.그리고 이 시점의 강희라와 강시우가 몇 살일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지 계산해 보았다.지금의 강시우는 아직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로시 가문의 모든 것을 이어받기 전이었다.강희라는 한 패션 브랜드의 디자인 디렉터로 일하고 있었고 아직 자신의 브랜드를 세상에 내놓기 전이었다.로시 가문에는 머지않아 피비린내 나는
온하준은 한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어 영상을 찍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강지연을 등 뒤로 감쌌다.노란 머리가 달려들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주먹을 날려 거칠게 그를 때려눕혔다.그때의 그녀는 두려움에 몸이 굳어 있었지만 휴대전화 녹음 버튼만은 놓치지 않았다.저녁 식사 자리에서 강지연의 부모는 태연한 얼굴로 그 노란 머리 집안과 약혼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강지연은 분노가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부모의 위압을 이겨낼 용기가 없었다.하여 휴대전화 녹음 버튼을 눌러 그들이 나눈 모든 대화, 그리고 노란 머리가 그녀를 덮치려 했던 그 순간의 거친 숨소리까지 전부 빠짐없이 녹음했다.휴대전화는 강지연의 바지 주머니 안에 숨겨져 있었다.그 녹음 파일은 훗날 노란 머리 가족과 맞섰을 때, 그리고 이 일을 제대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하지만 그날 밤, 노란 머리가 온하준에게 얻어맞고 달아난 뒤에도 강지연은 이 모든 일이 자신의 부모가 꾸민 일이었다는 걸 차마 말할 수 없었다.어쩌면 그녀의 가정은 온하준의 집안보다도 더 추악했다.하여 그는 강지연에게 이렇게 역겨운 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끝내 알지 못했다.결혼할 때도 그녀는 자신의 부모가 탐욕스러운 사람들이라고 말했었지만 온하준은 늘 강지연에게 목숨값이라며 부모에게 예의를 다했고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하곤 했다.그들은 심지어 강지연의 동의도 거치지 않은 채 직접 온하준을 찾아가 일을 처리하기도 했었다.그리고 오늘 차유준은 그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강지연과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어쩌면 온하준과의 관계보다도 더 어색했다.그녀는 자신이 가장 숨기고 싶었던 일이 그리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고스란히 보였다는 사실이 그저 난처하기만 했고 어떻게 그를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미안해.”그때 곁에서 갑자기 차유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난 몰랐어. 그런 사람들일 줄은. 어떻게 너한
그러나 홍순자는 멈추지 않고 괭이를 다시 움켜쥔 채 바닥에 넘어져 허둥대는 강성호를 향해 거듭 내리쳤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그는 겁에 질려 바닥을 기어나가며 울부짖었다.유서원도 등에 남은 통증조차 잊은 채 강성호를 붙들고 허겁지겁 밖으로 도망쳤다.괭이를 짚은 채 정원 문 앞에 선 홍순자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향해 목이 터지라 외쳤다.“앞으로 또다시 우리 지연이한테 몹쓸 짓이라도 한다면 내가 낳은 자식이라도 내가 직접 저승까지 데려가 버릴 줄 알아!”혹시라도 홍순자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뒤따라 나온 강지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비록 꿈속이라 해도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바로 뛰어가 홍순자의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어깨에 묻었다.“할머니, 저 사람들 이제 갔어요.”홍순자는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괭이를 내려놓고 눈물을 머금은 채 강지연을 꼭 안아주며 말했다.“지연아, 네 아버지는 이 할머니가 잘못 가르쳐서 저렇게 된 거야. 다 내 잘못이야.”강지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아니에요, 할머니. 절대 할머니 잘못 아니에요. 같은 할머니 자식이라도 고모는 얼마나 훌륭하세요.”홍순자는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걱정은 하지 마. 할머니가 널 지켜줄 테니까.”그 한마디에 강지연은 참았던 눈물이 그대로 왈칵 쏟아져 나왔다.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 온기마저 너무도 선명했다.이 순간만큼은 꿈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아니면 정말로 다시 돌아온 걸까?’차유준은 한쪽에 서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볼 뿐 아무 기척도 없이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짙은 어둠이 그의 검은 눈동자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어 잔잔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은 채 서 있다가 서서히 감정을 가라앉혔다.홍순자는 강지연의 손을 잡고 온화하게 웃으며 차유준 앞으로 다가서더니 말했다.“참으로 착한 아이로구나. 오늘 고마웠어. 아
애초에 강지연의 태도부터가 못마땅했던 김형식은 강씨 가문에 대해서도 내심 불만스러운 구석이 많았다.하여 혹시라도 이 일로 어느 대단한 집안과 얽히기라도 할까 봐 망설여지기 시작했다.하지만 김선재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그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곧장 박정연에게 매달려 떼를 쓰기 시작했다.그녀는 아들의 손을 꼭 잡은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김형식을 노려보았다.결국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강씨,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다시 얘기한다고?’차유준이 휴대전화를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오늘 있었던 일은 전부 이 안에 녹화되어 있어요. 또 이런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면 이 영상을 바로 인터넷에 올릴 겁니다. 그럼 다들 유명해지시겠죠? 경찰에도 곧 연락이 갈 테고요.”그 말에 김형식은 표정이 확 굳어졌다.그가 진짜로 두려운 건 단순히 영상 문제만은 아니었다.김형식이 막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망설이던 순간 강지연이 차유준의 등 뒤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김선재가 마약을 하는 것도 같이 올려.”그녀의 한마디에 모두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김형식의 가족들은 갑자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너... 네가 그걸 어떻게...”박정연은 너무 놀라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렸다.어떻게 알게 된 건지 강지연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김형식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사실 그는 처음부터 강씨 가문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강성호는 나이만 먹었지 여전히 건달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고 사돈이 될 자격조차 없다고 여겼다.그럼에도 이 자리에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김선재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강지연에게 빠져버렸기 때문이다.그는 그녀와 함께라면 공부도 제대로 하고 나중에 대학도 같이 가겠다고 했다.심지어 몇 년 뒤에는 꼭 결혼까지 하겠다고 장담했다.아들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그 한마디를 믿고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강성호를 찾아온 것이었다.하지만
유서원도 맞장구를 치며 김선재의 팔을 끌어 자기 앞에 세우더니 말했다.“이 봐! 이렇게 착한 애가 또 어디 있어? 잘생겼지, 세련됐지, 얼마나 반듯해.”‘잘생겼다고? 세련됐다고? 착하다고?강지연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냉정하게 받아쳤다.“그렇게 좋으면 어머니가 시집가시든가요!”“너...”그녀의 말에 유서원은 말문이 막혀 입술만 파르르 떨고 있었다.김선재의 표정도 서서히 굳어갔고 김형식 부부 역시 어두운 표정이었다.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험악해질까 두려워진 강성호는 급히 김형식 쪽으로 다가가더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김 사장님, 제 딸이 아직 공부를 너무 중요하게 생각해서요. 괜히 학교에서 소문이라도 나면 학업에 지장이 생길까 봐 저러는 겁니다. 제가 잘 타이르고 설득해 볼게요.”그때 김선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공부에 방해 안 될 거야. 나도 너랑 같이 공부할게.”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그 시선에는 여전히 소유욕이 묻어 있었다.김형식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냉정하게 말했다.“그럼 오늘은 이쯤 하죠.”그들이 몸을 돌려 나가려 하자 강성호가 황급히 불러 세웠다.“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여기서..”그는 문득 집에는 변변한 반찬도 없었고 그마저도 이미 치워버린 것이 떠올랐다.“아니면 밖에 나가서 식사라도 함께하시죠. 제가 한턱 내겠습니다.”“그래요. 그게 좋겠네요. 앞으로 한 식구 될 분들인데.”유서원은 이내 고개를 돌려 강지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지연아, 얼른 와. 같이 나가서 밥 먹자.”강지연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이 사람들이 아무 일 없다는 듯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꼴을 보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오늘 이 일은 반드시 끝장을 봐야 했고 지금 막지 못하면 앞으로 끝없는 족쇄가 되어 그녀의 발목을 붙잡을 게 분명했다.그녀에게도 나름대로 방법이 있었지만 뜻밖에도 차유준이 한발 앞서 먼저 입을 열었다.“지금 뭐 하시려는 거죠?”분명 아직 어리고 앳된 얼굴이었지만 말투에는 묘하게 사람을 압도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