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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의 이름으로.
다시, 나의 이름으로.
Author: 빵울이

1화. 식어버린 모두가 아는 사랑

Author: 빵울이
last update Last Updated: 2026-01-18 00:28:57

주변의 모든 친구들은 알고 있었다.

유진은 은호를 미친 듯이 사랑했다는 걸.

자기 삶도, 자기 공간도 없이 하루 24시간 내내 그의 곁을 맴돌고 싶어 했다.

헤어지자고 해도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늘 먼저 고개를 숙이고 돌아와 재결합을 청했다.

이 세상 누구라도 ‘이별’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었지만, 유진만은 절대 그러지 못했다.

은호가 새 여자친구를 끌어안고 룸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공간은 기묘할 정도로 5초간 정적에 잠겼다.

유진은 귤을 까던 손을 멈췄다.

“다들 갑자기 말이 없어? 왜 나만 보고 있어?”

“유진…”

친구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은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여자를 끌어안은 채 소파로 가 앉았다.

“생일 축하해, 도현.”

너무도 노골적이고, 태연했다.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도현의 생일이었기에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문을 닫는 순간, 안에서는 이미 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형, 유진 누나 있는 거 알았잖아요. 미리 말했는데 왜 사람을 데려온 거예요?”

“맞아, 은호. 이번엔 네가 너무했어.”

“상관없어.”

은호는 여자의 가느다란 허리에서 손을 떼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매캐한 흰 연기 사이로 마치 세상을 놀이처럼 사는 한량 같은 웃음을 머금은 눈매가 보였다.

그 뒤의 말들은 문이 닫히며 들리지 않았다.

유진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쳤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문득 입꼬리를 올렸다.

“진짜 못났네.”

사는 꼴이, 너무 못났다.

유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하지만 다시 룸으로 돌아와 문을 여는 순간, 그 장면은 문손잡이를 움켜쥐고 무너질 뻔할 만큼 잔인했다.

은호는 여자의 부드러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밀착시키고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 끼운 휴지는 침에 흠뻑 젖어 있었다.

주변에서는 웃음과 야유가 터져 나왔다.

“와, 역시 은호는 노는 법을 안다니까!”

“붙었다! 진짜 붙었어!”

“이 정도 분위기면, 한 번 제대로 보여주지 그래?”

유진의 손이 문손잡이 위에서 떨렸다.

이게 바로 그녀가 6년을 사랑한 남자였다.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건 오직 씁쓸한 아이러니뿐이었다.

“야, 그만해…”

누군가 작게 말하며 문 쪽을 가리켰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아, 유… 유진… 돌아왔어? 그냥 장난이야, 오해하지 마…”

그때 은호가 말을 끊고 담담히 그녀를 바라봤다.

“유진, 오늘 마침 있으니까 우리 얘기 좀 확실히 하자.”

“응, 말해.”

“이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솔직히 재미없고, 우리 사이도 이미 진작에 식었잖아.”

유진은 손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 6년의 감정이 결국 ‘식었다’는 한마디로 끝났다.

“수아는 좋은 애야. 난 수아에게 제대로 된 자리를 주고 싶어.”

유진은 무감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헤어져도 친구로 지낼 수 있잖아. 앞으로 서울에서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괜찮아.”

유진은 아주 옅게 웃었다.

“헤어질 거면 깔끔하게 끝내는 게 좋아. 그쪽 여자분한테도 공평하고.”

은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도현.”

유진은 오늘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생일 축하해. 다들 재밌게 놀아. 난 먼저 갈게. 테이블 위에 있는 귤은 내가 깐 거야. 다들 먹어, 버리지 말고.”

은호는 과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귤만 빼고.

그마저도 하얀 실 같은 귤락을 하나하나 다 떼어내야 먹었다.

그동안 유진은 비타민 보충이라도 하라고 늘 귤을 까서, 속껍질까지 깨끗이 벗겨 접시에 예쁘게 담아 그의 앞에 놓아주곤 했다.

기분이 좋을 때면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 여자친구 진짜 최고다. 왜 이렇게 살뜰해?”

“나랑 결혼하고 싶어 그러는 거야?”

그는 그녀가 뭘 원하는지 항상 알고 있었다.

다만, 한 번도 주겠다고 말한 적이 없었을 뿐이었다.

“차 불러줄게.”

“됐어, 택시 불렀어.”

“유진 누나, 내가 입구까지 데려다줄게.”

“괜찮아.”

유진은 손을 들어 사양하고 그대로 돌아섰다.

그녀가 나간 뒤, 방 안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은호 형, 이건 좀 심한 거 아니야? 이번엔 진짜 화난 것 같은데…”

“됐어, 그 정도는 아니야.”

“맞아. 둘이 싸운 게 한두 번이야? 어차피 며칠 지나면 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돌아올 걸?”

“난 이번에 5일!”

“난 6일!”

은호는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을 힐끗 보며 차갑게 웃었다.

“난 3시간. 3시간 안에 다시 나한테 올 거야.”

“하긴, 은호 형은 무조건 이기지. 온 세상이 다 알잖아, 유진 누나가 형을 얼마나 미친 듯이 사랑하는지.”

“근데 왜 나한테는 그런 여자가 없을까?”

“너? 야! 꿈 깨!”

“하하하…”

……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

유진은 30분 만에 짐을 쌌다.

3년을 살았던 집이었지만, 들고 나갈 건 작은 캐리어 하나면 충분했다.

드레스 룸에 가득한, 한 번도 입지 않은 명품 옷들과 착용한 적 없는 보석들엔 손도 대지 않았다.

유일하게 아쉬운 건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전공 서적들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용은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 있었다. 형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화장대를 훑어보던 그녀는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수표 한 장이 있었다. 무려 100억 원.

그 아래에는 또 다른 서류가 깔려 있었다.

〈동교 72호 3-5 구역 토지 양도 계약서〉

외곽이긴 했지만, 보수적으로 잡아도 40억은 넘는 땅이었다.

두 문서 모두 은호의 서명이 있었다.

이전에 크게 다투며 헤어질 뻔했을 때 그가 던져두고 간 채로 계속 서랍에 있던 것들이었다.

그는 유진이 절대 받지 못할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이걸 받는 순간, 관계는 완전히 끝이 나니까.

‘6년을 140억으로 바꾼 셈인가?’

유진은 문득,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청춘값으로 이 정도 받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그녀는 두 가지를 모두 가방에 넣었다.

사람은 이미 줬는데, 왜 돈을 마다해야 하지?

사랑이 사라졌다면, 적어도 돈은 남아야 했다.

그녀는 재벌 로맨스 속 돈을 종이 쪼가리로 여기는 순진한 여주인공이 아니었다.

“여보세요, 청소 업체죠? 급한 건도 되나요?”

“…네, 대청소요. 추가 요금 낼게요.”

유진은 현관에 열쇠를 두고 택시에 올라, 곧장 절친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청소 아주머니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아가씨, 이 물건들 전부 버려도 되나요?”

“네. 알아서 처리하세요.”

전화를 끊었다.

은호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청소는 끝나 있었고, 집엔 아무도 없었다.

몸에 밴 진한 향수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넥타이를 풀고 소파에 앉았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주방에서 익숙한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담요를 걷고 일어나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물컵을 찾았다.

하지만 손에 잡힌 건 공기뿐이었다. 손이 테이블 위 허공에서 멈췄다.

사람은 돌아와 있으면서, 담요까지 덮어주고도 숙취 해소 음료 하나 안 챙겨?

이런 ‘반쪽짜리 반항’을 이제 와서 또 하는 건가.

‘웃기네…’

은호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너 오늘은 정말…”

“도련님, 일어나셨어요?”

“아주머니…?”

“세수부터 하시고요, 2분 정도만 기다리면 아침 됩니다.”

“아, 자는 동안 혹시 추우실까 봐 난방 켜두고, 불안해서 담요도 하나 더 덮어드렸어요.”

“…네.”

그는 주방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곳에 있어야 할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은호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상함이 스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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