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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위약금 면제

Auteur: Jino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10-18 12:05:54

[채이]

왜 이걸 안 썼습니까.

조명 하나 아래서 그가 물었다. 종이를 두 손으로 덮은 채.

대답은 짧게. 이 사람한테는 그게 규칙이었다. 오늘 밤부터는 모르겠다.

"무기가 아니니까요."

"……창고에서 그렇게 말했죠. 편지라고."

"편지는 받을 사람한테만 가요. 다른 사람이 뜯으면 그건 편지가 아니라 증거가 돼요. 증거는 누굴 이기는 데 쓰고요."

그가 버진로드를 봤다.

"하나 더 있어요."

"뭔데요."

"전무님이 벼랑 끝에 서 있는 거 봤어요. 창고에서. 벼랑 끝에 선 사람을 밀면 누굴 잡고 떨어져요. 전무님이 잡을 사람. 부회장님, 그리고 할머니."

민혁의 손이 종이 위에서 움찔했다.

"할머니는 쉰다섯 해를 기다리셨어요. 전무님이 물어 오길. 그분이 떨어지는 건 싫었어요. 저희 할머니 바늘 몇 땀에 우신 분이니까."

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조명 아래 먼지가 떠다녔다. 예순한 해 된 홀의 먼지.

"……재헌이는 알아요? 이거."

"아뇨. 말 안 했어요."

그가 나를 돌아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남편한테도?"

"전무님 거라서요. 제 거가 아니라서. 재헌 씨는 두 달 동안 한 번도 안 물어봤어요. 말 못 하는 게 하나 생겼다고 했더니, 기다리겠다고 했어요."

민혁이 웃었다. 젖은 얼굴로.

"……그 녀석이 기다린다고요. 1207호에서 룸서비스 삼십 분 늦으면 프런트에 세 번 전화하던 애가."

"지금은 누룽지 데울 때 뚜껑 덮고 오 분 기다려요."

민혁이 이번엔 소리 내서 웃었다. 코끝이 빨갰다. 삼십오 년 동안 안 울었다는 사람의 코였다.

"크레파스요."

그가 말했다.

"빨간 거. 그거 아직 있었어요?"

"메뉴판에 동그라미가 두 개 있었어요. 빨간색으로. 형아꺼, 내꺼."

민혁이 종이를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왼쪽. 심장 위. 이 집 남자들은 중요한 걸 다 거기 넣는다.

[재헌]

밤 열한 시 십 분. 뒷문이 열렸다.

형이 나왔다. 간판 불빛 아래. 눈이 빨갰다. 코도. 넥타이가 풀려 있었다.

나를 봤다. 쓰레기통 옆의 나를.

할머니 말. 아무것도 묻지 마라. 그냥 옆에 서 있어라.

묻지 않았다. 형이 걸어왔다. 쓰레기통 옆. 내 옆에 섰다. 마주 보지 않고. 나란히. 둘이 골목 끝을 봤다. 같은 쪽.

한참 그렇게 서 있었다. 간판이 안 깜빡였다. 골목이 조용했다.

"재헌아."

"네."

"우리 아버지. 돌잔치 했대."

단추를 돌리려다 멈췄다.

"안 한 게 아니라. 몰래 했대. 여기서. 어른들이 안 된다고 한 해에. 할머니가 혼례 치마를 뜯어서 돌복을 입혔대. 둘째도 잔치는 한다고. 울면서."

형 목소리가 다시 갈라졌다.

"스무 해를 우리 집은 예비라고 생각했어. 숫자로 버텼어. 너한테 크레파스 준 그 손으로 너 식장 무너뜨리려고 했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 말. 그녀 방식. 말 대신 옆에 서 있기.

그런데 한 가지는 해야 했다. 말이 아니라.

"형."

"응."

"스테이크 먹으러 갈래요? 1207호."

형이 나를 봤다. 처음으로 오래. 그리고 웃었다. 눈까지. 여덟 살 때 문을 두드리던 얼굴로.

"……룸서비스 지금 돼?"

"부사장입니다. 됩니다."

[재헌]

자정. 1207호. 원상 복구 그대로의 방. 파란 체크 이불. 초록 스탠드.

룸서비스 스테이크 두 개. 창가 책상에 나란히. 형이 책상 앞 의자, 내가 침대 끝. 둘 다 창을 향해.

형이 유리 밑 메뉴판을 봤다. 빨간 동그라미 두 개. 손가락으로 형아꺼, 를 쓸었다.

"이거 반장님이 가지고 계셨다며."

"열네 해 동안."

"……반장님한테 뭐 사 드려야겠다."

"제육 드시러 가면 됩니다. 격주 화요일."

스테이크를 썰었다. 형이 한 점을 내 접시에 옮겼다. 열한 살 때처럼. 그때 형은 스테이크를 절반 나눠 줬다. 자기가 시키자고 해 놓고.

휴대폰을 꺼냈다. 캡처 두 장. 형 번호. 방 과장. 열두 시 십 분. 표는 봉투에.

형 옆에 내밀었다. 마주가 아니라 옆에서.

형이 봤다. 칼을 내려놓았다.

"……세라 씨가 가지고 있었구나."

"네."

"이걸로 날 치면 끝나는 거 알지. 이사회든 기자든."

"압니다."

"근데 왜 지금. 이 방에서. 옆에 앉아서."

그녀가 거기서 막히면 안 된다고 했다. 거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연습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연습하면 거짓말이 된다고.

"형이 스테이크 같이 시킨 형이니까요."

형이 나를 봤다.

"이건 형이 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형한테 보여 주는 겁니다. 다른 사람한테 말고. 공개 안 합니다. 대신 형이 알았으면 합니다. 내가 알고 있다는 거."

형이 휴대폰을 들어 캡처를 한 번 더 봤다. 그리고 내 손에 돌려줬다.

"……위약금이네."

"네?"

"봄빛. 계약 위반한 거. 식장 망치려고 한 거. 세입자한테. 위약금 물어야지. 건물주가."

형이 스테이크를 한 점 먹었다. 천천히 씹었다.

"맛있다. 룸서비스. 이십사 년 만이야."

스테이크를 반쯤 먹었을 때 형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토요일 간담회. 알지."

"압니다."

"그거 우리 아버지가 여는 거야. 나는 자료를 드렸고. 매각 검토 자료. 석 달 동안 만들었어. 숫자로."

형이 창밖을 봤다. 호텔 앞 가로수. 1207호 창에서 보이는 나무. 여덟 살 때도 저기 있었다.

"그건 내가 막을게."

"……어떻게."

"우리 아버지한테 이 종이 보여 드리고."

형이 안주머니를 눌렀다. 왼쪽. 거기 그녀가 배달한 편지가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스무 해 동안 숫자로 버티셨어. 돌 사진 한 장 없는 둘째라서. 이 종이 보면 버틸 이유가 없어져. 팔 이유도 없어지고."

"형."

"응."

"……잘 부탁합니다."

형이 웃었다. 포크를 다시 들었다. 남은 스테이크 한 점을 내 접시에 옮겼다. 또.

[채이]

새벽 한 시 반. 31층. 누룽지를 데워 놓고 기다렸다. 엄마가 싸 준 누룽지. 뚜껑 덮고 약불. 식지 않게.

현관문이 열렸다. 그가 들어왔다. 넥타이가 풀려 있었다. 셔츠 소매에 스테이크 소스가 한 방울.

신발을 벗고 곧장 부엌으로 왔다. 내 앞에 섰다.

"형한테 들었습니다."

숨이 한꺼번에 나갔다. 두 달 동안 들이쉬기만 하고 못 내쉰 숨.

"……다 들었어요?"

"작은아버지 돌잔치. 어른들 모르게. 혼례 치마. 둘째도 잔치는 한다. 돌복 삯 안 받음. 하가네."

그가 파우치를 봤다. 내 허리의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

"무거웠겠습니다. 두 달 동안."

대답 대신 파우치를 풀었다.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안전핀 일곱 개, 대추 한 줌, 흰 실 반짇고리. 그리고 봉투가 있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제 안 무거워요."

그가 나를 안았다. 부엌에서. 누룽지 굽는 냄새 속에서. 오래. 그의 셔츠에서 스테이크 소스 냄새가 났다. 1207호 냄새. 이십사 년 만에 형이랑 나눠 먹은 냄새.

누룽지가 조금 탔다. 뚜껑을 덮어 뒀는데도. 오래 안고 있어서. 탄 누룽지는 버리지 않았다. 아침에 어제가 남아 있도록.

[재헌]

수요일 아침 일곱 시. 형한테 문자가 왔다. 두 줄.

[아버지한테 보여 드렸어. 새벽 네 시에. 아버지가 삼십 분 동안 그 종이만 보셨어.]

[지금 할머니 댁 가셨어. 혼자. 운전도 직접.]

그리고 한 줄 더.

[간담회는 취소 공지 나갈 거야. 오늘 오전 중에.]

그녀한테 화면을 보여 줬다. 그녀가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다 읽었다. 세 번. 이번엔 세 번 읽어도 됐다. 좋은 문자는 세 번 읽어도 된다. 글자가 안 바뀌는 게 다행인 문자도 있다.

"부회장님이 운전을 직접 하셨대요."

"작은아버지는 운전을 안 하십니다. 이십 년 동안 기사님이."

"그럼 이십 년 만에."

"쉰다섯 해 만에 물으러 가시는 겁니다. 할머니한테. 직접."

그녀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할머니처럼. 결론.

"그럼 할머니 찻잔은 오늘 한 번도 안 올라가겠네요."

[채이]

수요일 오전 열 시. 봄빛 원장실.

민혁이 왔다. 방 과장과 함께. 방 과장 귀에 이어폰이 없었다. 목에도 없었다. 아예.

원장실 문 밖에 은비와 준수가 붙어 있었다. 문틈으로. 탁 실장님은 주방 창에서 고개만 내밀었다. 봄빛 사람들은 건물주가 오면 전원 대기한다. 오 년 동안 처음 알았다.

원장님이 차를 두 잔 탔다. 이가 나간 흰 잔. 민혁이 그 잔을 받았다. 두 손으로.

"원장님. 건물주 강민혁입니다."

"압니다."

"임대 종료 통보, 철회하겠습니다."

원장님의 찻잔이 공중에서 멈췄다.

"그리고 이 건물. 제가 산 값 그대로 원장님께 넘기겠습니다. 이자 없이. 할부로. 삼십 년 할부도 됩니다."

원장님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왜요."

민혁이 원장실 벽을 봤다. 액자 하나. 원장님 시어머니 사진. 세로 글씨로 장부를 쓰던 분.

"이 홀에서 우리 아버지가 돌잔치를 했습니다. 쉰다섯 해 전에. 어른들 몰래, 뒤쪽 작은 방에서. 할머니가 우리 아버지를 안고 우셨답니다. 둘째도 잔치는 한다고."

원장님이 입을 막았다. 옆에서 나는 숨을 참았다.

"그 돌잔치 돌복 삯을 하가네가 안 받았다고 장부에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삯을 오늘 갚으러 왔습니다. 봄빛한테."

방 과장이 서류 봉투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두꺼운 봉투.

"그리고 제가 봄빛에 끼친 손해. 예약 일곱 건, 기사, 결혼식 날 비상계단 문. 위약금은 제가 물어야 맞는데, 원장님이 계산해 주시면."

원장님이 봉투를 열지도 않고 밀어냈다. 손바닥으로. 식탁에서 내가 그러듯이. 이 동작은 원장님한테 배운 것이었다. 오늘 알았다.

"위약금은 면제예요."

원장님이 바로 말했다. 볼펜을 쥐듯 또박또박.

"돌잔치 한 집 아들한테 봄빛은 위약금 안 받아요. 우리 시어머니도 그랬을 거예요."

민혁이 고개를 숙였다. 깊이. 이 사람이 누구한테 허리를 굽히는 걸 처음 봤다. 할머니 앞 말고는.

문 밖에서 쿵, 소리가 났다. 문틈에 붙어 있던 은비가 균형을 잃고 문을 밀었다. 문이 활짝 열렸다. 은비와 준수가 원장실 바닥에 나란히 넘어져 있었다. 원장님이 한숨을 쉬었다. 민혁이 그 둘을 보고 웃었다. 오늘은 눈까지.

고개를 든 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제수씨."

"네."

"건물은 되돌리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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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 대타 신부   35화. 예비일 지정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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