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채이]
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
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
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
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
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
"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
"네."
"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
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
"……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
"네."
"청혼은 제가 정합니다."
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
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
내일이 일요일이었다.
[채이]
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
"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
"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
"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
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
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
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
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나를 로비 소파에 앉혀 놓고 우산꽂이 닦는 걸 시켰다. 세 개를 다 닦았는데 은비가 한 개를 더 가져왔다. 아까 닦은 거였다.
"은비야."
"응."
"나 알아."
"……뭘."
"오늘 뭐 하는지. 목요일부터 숨긴 거."
은비가 우산꽂이를 떨어뜨렸다. 그러다 주웠다. 그러다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알아도 모르는 척해. 사십 일 동안 나도 그랬어. 모르는 척하는 게 예의야. 청혼하는 사람한테."
은비 눈이 빨개졌다. 청혼을 받는 건 나인데 은비가 먼저 울었다.
[재헌]
일요일 저녁 일곱 시 반. 봄빛 그랜드홀.
불이 꺼져 있었다. 조명 하나만. 버진로드 끝. 준수 씨가 음향실에서 그것 하나를 켰다. 은비 씨가 청혼받던 조명. 우리 결혼식 날 면사포가 올라가던 자리. 형이 편지를 받던 자리.
이 홀의 조명 하나는 예순한 해 동안 사람들이 뭔가를 건네는 자리를 비췄다.
안주머니를 확인했다. 왼쪽. 심장 위.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하채이. 다섯 달.
나무 상자. 뚜껑에 은방울꽃. 바닥에 두 번째. 서진우 씨 작품.
그리고 수첩 한 장 사이에 끼운 꽃 한 대. 팔월 첫 주 강원도에서 가져온 여섯 대 중 하나. 그녀 몰래 한 대를 빼서 내 수첩에 말려 뒀다. 그녀가 두 대를 자기 수첩에 끼우던 날 밤에. 둘이 같은 날 같은 꽃을 따로 말렸다. 그녀는 모른다.
탁 실장님이 주방에서 나왔다. 접시에 누룽지 네 조각. 장모님 조청 종지.
"끝나면 먹어요. 둘이."
폐백 이모님이 폐백실에서 나왔다. 대추 한 줌.
"이건 식장 날 쓸 거. 오늘은 보기만 해."
원장님이 원장실 문을 열어 놓았다. 장부를 펼쳐 놓고. 볼펜을 쥐고.
"떨었는지 안 떨었는지 적을 거예요."
떨고 있었다. 손을 봤다. 결혼식 날 길 끝에서처럼. 그때는 이유를 몰랐다. 오늘은 안다.
[채이]
여덟 시. 은비가 말했다.
"채이야. 그랜드홀 불 좀 꺼 줘. 준수가 켜 놓고 갔나 봐."
모르는 척했다. 예의라고 했으니까.
그랜드홀 문을 열었다. 어두웠다. 버진로드 끝에 조명 하나.
그리고 음악이 흘렀다. 신부 입장 음악. 하루에 세 번씩 트는, 은비가 지겹다던 곡. 내가 오 년 동안 수천 번 들은 곡.
조명 아래 그가 서 있었다. 버진로드 끝. 신랑 자리.
그런데 그가 걸어왔다. 버진로드를 거꾸로. 신랑 자리에서 신부 쪽 문으로. 열두 걸음씩 두 번.
식장에서 신랑은 걷지 않는다. 길 끝에서 기다린다. 신부가 걸어온다. 그런데 그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한테.
다섯 달 전 이 길을 나는 떨면서 걸었다. 아빠 팔을 잡고. 오늘은 그가 떨면서 걸어왔다. 아무 팔도 안 잡고.
내 앞에 섰다. 문간. 신부가 입장 신호를 기다리는 자리. 삼, 이, 일을 세는 자리.
그가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플라스틱.
"봄빛웨딩홀 매니저 하채이."
명찰이었다. 다섯 달 전 드레스로 갈아입으며 그에게 맡긴. 식 끝나면 돌려준다던.
"식 끝나면 돌려준다고 했습니다. 다섯 달 늦었습니다."
명찰을 받았다. 플라스틱이 따뜻했다. 다섯 달 동안 심장 위에 있던 온도였다.
[재헌]
무릎을 꿇었다. 은비 씨 말대로. 도경 씨처럼.
나무 상자를 열었다. 은방울꽃 뚜껑. 안에 반지. 장식 없는. 흰 실을 감을 필요 없는. 안쪽 각인 J&C.
상자 옆에 말린 꽃 한 대를 올렸다. 팔월 강원도.
그녀가 그 꽃을 보고 숨을 멈췄다.
"당신이 서요, 는 부탁이었습니다. 식 사십 분 전의. 급한 부탁."
목소리가 떨렸다. 괜찮았다. 그녀는 떠는 걸 좋아한다고 탁 실장님이 그랬다.
"일 년 약속, 오늘 깨겠습니다."
그녀 눈이 커졌다.
"1년 말고. 평생."
그리고 말했다. 반 박자 낮게. 씨 없이. 존댓말 없이.
"채이야. 나랑 결혼해 줄래."
[채이]
대답 대신 왼손을 들었다. 약지. 흰 실 열 바퀴. 빗속에서 그가 감아 준 매듭.
반지를 뺐다. 이번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빼려고 뺐으니까.
그가 주머니에서 가는 은줄을 꺼냈다. 준비해 온 얼굴이었다. 옛 반지를 줄에 꿰었다. 내 목에 걸어 줬다. 흰 실 반지가 쇄골 사이에 내려앉았다. 언니 반지. 아니, 1년짜리 내 반지. 아니, 오늘부터 처음 반지.
그리고 새 반지를 약지에 끼웠다. 헐겁지 않았다. 흰 실이 필요 없었다. 딱 맞았다.
그가 무릎을 꿇은 채 나를 올려다봤다. 떨면서. 대답을 기다리면서. 찻잔을 든 사람처럼. 이 사람은 할머니한테서 기다리는 법을 배웠고, 나한테서 떠는 법을 배웠다.
대답은 짧게. 이 사람한테는 그게 규칙이었다. 오늘은 규칙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대답은 식장에서 할게요."
그의 눈이 흔들렸다.
"내년 오월 셋째 토요일. 이 홀에서. 제가 걸어갈게요. 이번엔 가봉하고."
원장실 쪽에서 볼펜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음향실에서 준수가 음악 볼륨을 두 칸 올렸다. 로비에서 은비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웃었다. 양쪽. 무릎을 꿇은 채. 떨면서.
[재헌]
그날 밤 그랜드홀 버진로드 한가운데 신문지를 깔았다. 탁 실장님이. 창고 소풍 때처럼.
누룽지 네 조각. 조청 종지. 그리고 봄빛 사람들이 하나씩 앉았다. 원장님, 은비 씨, 준수 씨, 탁 실장님, 폐백 이모님. 누룽지가 모자라서 탁 실장님이 주방에 두 번 더 다녀왔다.
원장님이 장부를 무릎에 펼쳤다. 예순한 번째 권. 오늘 날짜 칸. 볼펜.
[신랑 강재헌 청혼. 버진로드를 거꾸로 걸어옴. 봄빛 예순한 해 처음. 신랑 많이 떨었음. 신부 대답 보류. 내년 오월 셋째 토요일 식장에서 하겠다고 함. 하객 다섯, 전원 울음. 누룽지 하가네, 탁 실장이 구움.]
"많이, 는 빼 주시면 안 됩니까."
"안 돼요. 사람은 우리가 적어야 해요. 정확하게. 우리 시어머니가 그랬어요."
그녀가 옆에서 웃었다. 누룽지를 조청에 찍어 내 입 앞에 내밀었다. 받아먹었다. 달았다. 오늘은 조청이 딱 맞았다.
[채이]
수요일 오후. 봄빛 원장실. 은비가 인쇄소 견본을 들고 왔다. 흰 카드. 은비 청첩장과 같은 인쇄소.
"문구 정해. 오늘 넘겨야 오월 전에 넉넉하게 나와."
넉넉하게. 다섯 달 전 내 결혼식엔 청첩장이 없었다. 하객 이백 명은 언니 이름이 적힌 청첩장을 들고 왔다. 식장에서 면사포가 올라가고 나서야 신부 이름을 알았다.
볼펜을 들었다. 원장님이 옆에서 봤다. 그가 맞은편에서 봤다. 아빠와 엄마도 가게 문을 닫고 일부러 왔다.
신랑 강재헌. 신부 하채이.
그리고 혼주. 강태성 · 한서경의 장남. 하정호 · 오순영의 장녀.
아빠가 그 줄을 봤다. 하정호. 자기 이름. 인쇄될 이름.
"……내 이름이 청첩장에 들어가네."
"응. 이번엔 아빠 이름이야. 큰아버지 이름 아니고."
다섯 달 전 식장의 청첩장엔 혼주가 하정석이었다. 아빠는 그날 혼주가 아니라 폐백실에 한복을 대던 한복집 사장이었다. 실밥 붙은 작업복으로 딸 손을 잡고 걸었다.
아빠가 한참 그 줄을 보다가 일어섰다. 원장실 창가로 갔다. 등을 보이고 섰다. 어깨가 떨렸다. 우리 집 남자들은 딸 청첩장 앞에서 운다. 유전이다.
엄마가 아빠 등을 한 번 쳤다. 짝. 채훈한테 하던 것처럼. 그리고 자기도 울었다.
그가 옆에서 청첩장 견본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뭔가를 적었다. 거꾸로 읽혔다. 두 번째 청첩장. 이번엔 신부 이름이 맞음. 그리고 그 밑에 한 줄. 입장 전 도망 금지. 신랑 포함.
식장 칸에 적었다. 봄빛웨딩홀 그랜드홀. 날짜. 내년 오월 셋째 토요일 오후 한 시. 다섯 달 전과 같은 시간. 같은 홀.
은비가 견본을 들고 인쇄소로 갔다. 원장님이 장부를 폈다. 내년 권. 아직 한 줄도 없는 새 공책. 첫 장, 오월 셋째 토요일 칸에 첫 예약을 적었다. 둥글고 큰 글씨.
신랑 강재헌, 신부 하채이. 담당 매니저.
원장님 볼펜이 거기서 멈췄다. 나를 봤다.
그날 봄빛에서 제일 큰 식의 담당은 늘 나였다. 오 년 동안. 그런데 그날 나는 매니저가 아니었다.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