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채이]
문이 열렸다.
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
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
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
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
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
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
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
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
"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
"가게 옷 다 뜯는다며."
"……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
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
[재헌]
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
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
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
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
떨렸다. 그녀 손. 내 손. 둘 다.
열두 달 전 그녀가 말했다. 이 사람도 떨리는구나, 그걸 알자 덜 떨렸다고. 이상한 산수라고.
오늘은 산수가 필요 없었다. 둘 다 떨렸고, 둘 다 알았고, 둘 다 그대로 두었다.
[채이]
서약. 우리 홀 사회자님이 식순표를 봤다. 신부 이름에서 억양을 올렸다. 처음으로. 하채이.
서약은 각자 써 오기로 했다. 그가 먼저 읽었다. 종이 한 장. 반듯한 글씨. 떨리는 목소리.
"새벽 두 시에 누룽지를 태우지 않겠습니다. 버팀이 물은 이틀에 한 번 반 컵. 불안해도 한 컵 넘게 주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말 못 하는 게 생기면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이 괜찮아 보이면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가 종이에서 눈을 뗐다. 나를 봤다.
"1년 말고 평생, 어제가 남아 있는 방에서 살겠습니다. 당신이랑."
하객석에서 반장님이 먼저 울었다.
내 차례였다. 나는 종이를 안 가져왔다. 써 봤는데 연습할수록 짧아졌다. 결국 한 줄이 남았다. 연습이 안 되는 말은 원래 짧다.
"청혼 대답이요. 식장에서 하겠다고 했어요."
그가 숨을 멈췄다.
"네."
한 음절. 그가 중요한 질문에 늘 하던 대답. 우산 밑에서, 새벽 강원도에서, 이사회에서.
그리고 한마디가 더 튀어나왔다. 생각보다 먼저. 은비 말대로.
"여보."
연습하지 않은. 식당 직원 부르는 소리도, 결재 서류도 아닌.
그가 웃었다. 양쪽. 반장님이 이십 년 치를 한꺼번에 봤다고 나중에 말했다.
[재헌]
"신랑은 신부의 면사포를 올려 주십시오."
한 겹. 천천히 올렸다. 앞이 환해졌다.
이번엔 웅성거림이 없었다. 신부가 아닌데, 하는 소리도 없었다. 대신 박수. 삼백 명이 동시에.
사회자에게서 마이크를 받았다. 그녀 손은 놓지 않은 채. 하객석을 향해 섰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볼룸이, 아니 그랜드홀이 조용해졌다.
"일 년 늦었습니다. 제 신부, 하채이입니다."
박수가 다시 터졌다. 하얀 빛 속에서 두 번째 줄을 봤다.
형이 천천히 손뼉을 치고 있었다.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안 들렸다. 읽을 수 있었다.
재밌네.
눈까지 웃고 있었다.
그날 저녁, 폐백까지 다 끝나고 신랑 대기실로 돌아와 형이 준 상자를 열었다. 식순표 한 장을 챙겨 둔 참이었다. 빨간 크레파스. 식순표를 펼쳤다. 신부 이름. 하채이. 그 이름에 동그라미를 쳤다. 빨간색으로. 옆에 적었다. 내꺼.
형아꺼는 없었다. 오늘은 네 거다, 라고 형이 그랬다.
[채이]
사진 촬영. 도경 씨가 카메라를 들었다. 삼백 명을 찍은 사진사가 오늘은 셔터를 누르다 두 번 멈췄다. 은비 말로는 눈이 흐려서라고 했다.
가족사진 차례. 양가가 무대 계단에 섰다. 할머니가 가운데. 할머니가 손을 저었다. 잠깐. 그리고 아빠를 봤다.
"그거 가져왔느냐."
아빠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액자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흑백. 한복집 앞, 앞치마 두른 여자가 어린 남자아이 둘의 손을 잡고 있는 사진. 가게 달력 귀퉁이에 꽂혀 있던.
"네 어머니도 찍어야지. 이 식은 그 새댁이 꿰맨 식이다."
아빠가 액자를 가슴 앞에 들었다. 큰아버지가 옆에서 한쪽 모서리를 같이 들었다. 형제가 어머니 사진을 같이 들었다. 다듬이 방망이를 같이 두드리던 손으로.
도경 씨가 셔터를 눌렀다. 이번엔 멈추지 않았다. 한 번에.
원본 보관, 이라고 준수가 뒤에서 중얼거렸다.
[재헌]
부케 순서. 그녀가 뒤돌아섰다. 은방울꽃. 서툰 리본.
"누구 줄 거예요?"
은비 씨가 물었다. 매니저로서.
"몰라. 안 보고 던질 거야. 받는 사람이 임자."
그녀가 던졌다. 뒤로. 높이.
부케가 하객석 두 번째 줄로 날아갔다. 형이 앉은 줄. 형이 손을 뻗었다. 반사였다. 호텔 로비에서 떨어지는 물건을 잡는 버릇. 1207호에 놀러 오던 시절부터 형도 같은 로비에서 컸다.
잡았다.
홀이 웃음으로 무너졌다. 반장님이 전무님! 하고 소리쳤다. 작은어머니가 입을 막고 웃었다. 작은아버지가 형 등을 두드렸다. 형은 부케를 든 채 굳어 있었다. 서른다섯 살 미혼 전무의 얼굴.
형이 나를 봤다. 나는 눈으로만 웃었다. 형이 제일 싫어하는 웃음. 형한테 배운 웃음.
"……재밌네."
형이 소리 내서 말했다. 이번엔 들렸다. 그리고 부케를 가슴에 안았다. 버리지 않았다.
[채이]
폐백실. 오늘은 폐백이 있었다. 폐백 이모님이 차린 상. 대추, 밤, 구절판. 그리고 내가 입은 원삼. 아빠가 지은 것. 석 달 동안 가게 불을 새벽까지 켜 놓고 한 땀씩.
할머니가 상석에 앉았다.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폐백 자리가 모자라서 이모님이 방석을 두 개 더 깔았다.
절을 했다. 그가 옆에서 같이. 할머니가 대추를 집었다.
그런데 상 위의 대추가 아니었다. 이모님이 할머니 손에 쥐여 준 대추. 내 파우치 안쪽 주머니에서 은비가 꺼내 온 대추. 열두 달 전 이모님이 골라 준. 다음 폐백 때 쓰라고. 치마 넓게 펴고.
조금 말라 있었다. 괜찮았다. 대추는 말라도 대추다.
할머니가 던졌다. 치마를 넓게 폈다. 받았다. 그가 옆에서 두 손을 모아 받았다. 진우 씨처럼. 몇 개가 그 손바닥에서 튕겨 나갔다. 하객들이 웃었다.
"몇 개냐."
할머니가 물었다. 셌다. 치마에 여섯. 그의 손에 둘. 바닥에 하나.
"여덟 개요. 바닥 거 빼고."
"바닥 거도 세라. 떨어진 것도 내 손주다."
폐백실이 웃음으로 무너졌다. 할머니가 제일 크게 웃었다. 오십구 년 전 폐백실에서 울던 신부가. 그가 바닥의 대추를 주웠다. 소매로 닦았다. 치마에 올렸다. 아홉.
폐백이 끝나고 그가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나무 실패. 누렇게 바랜 흰 실.
"할머니가 주셨습니다. 당신 할머니가 오십구 년 전 폐백실에서 쓰고 남은 실이랍니다. 파우치에 넣어 두라고."
실패를 받았다. 가벼웠다. 파우치를 열었다. 안쪽 주머니. 안전핀 여섯 개가 남은 자리. 그 옆에 실패를 넣었다. 우리 할머니 실이 도원가 할머니 손을 거쳐 돌아왔다. 오십구 년 만에. 실밥처럼.
[채이]
저녁 여섯 시. 원장실. 원장님이 장부를 펼쳤다. 내년 권의 첫 장. 오늘 칸. 볼펜.
원장님이 한참 생각하다 적었다. 둥글고 큰 글씨.
[신랑 강재헌, 신부 하채이. 두 번째 식. 첫 번째는 일 년 전 이 홀. 가봉 없이, 안전핀 일곱 개로. 오늘은 가봉 세 번, 안전핀 하나. 신부가 서약 중 여보라고 부름. 연습 안 한 목소리. 하객 삼백. 원삼 하가네, 갈비찜 탁 실장. 폐백 대추 아홉. 떨어진 것도 셈. 입구에 올리브나무. 이름 버팀이.]
원장님이 볼펜을 내려놓았다. 할머니처럼. 결론.
"이 장부에서 제일 긴 줄이다. 우리 시어머니가 보셨으면 너무 길다고 하셨을 거다. 그래도 안 지운다."
[재헌]
새벽 두 시. 31층.
부엌에 불을 켰다. 누룽지 네 조각. 장모님이 싸 주신 것. 팬에 기름 없이. 뚜껑. 약불. 버팀이는 오늘 밤 봄빛 입구에서 잔다. 원장님이 하룻밤 맡아 주겠다고 했다. 내일 준수 씨 트럭으로 돌아온다.
뚜껑을 열었다.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뒤집었다. 노릇해졌다. 태우지 않았다. 서약한 첫날이다.
그녀가 방에서 나왔다. 잠옷. 머리가 한쪽으로 눌린. 목에 은줄. 흰 실 반지. 약지에 새 반지. 손목 시곗줄에 안전핀 하나.
식탁 대신 거실 바닥. 버팀이 없는 통유리 앞. 장모님 조청 종지.
누룽지를 하나 찍어 그녀 접시에 올렸다. 그녀가 하나를 찍어 내 입 앞에 내밀었다. 받아먹었다. 달았다. 딱 맞았다.
"여보."
그녀가 불렀다. 오늘 두 번째. 식장 밖에서는 처음.
대답이 먼저 나갔다. 생각보다 먼저.
"응."
급할 때 튀어나와야 진짜라고 은비 씨가 그랬다. 급하지 않은데 튀어나왔다. 그럼 더 진짜다.
의자 등받이에 그녀 카디건. 탁자 위에 봄빛 수첩과 은방울꽃 부케. 바닥에 폐백 대추 아홉 개가 든 주머니. 식탁 위에 누룽지 접시 두 개.
아무도 치우지 않았다.
새벽 두 시. 누룽지는 네 조각, 접시는 두 개. 어제가 남아 있는 집이었다.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